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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3:21-27) 기세가 등등하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중심으로 <기세가 등등하네> 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기세가 등등하네'
이 세상 안에서 오늘 하루를 사는 신앙인들을 볼 때 세상 사람들은 "기세가 등등하네. 도대체 그 기세를 꺾을 수가 없네."라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 싸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주먹다짐을 하기 전에 마음과 마음의 싸움에서, 이미 져버리거나 이미 이겨버리는 것을 기 싸움이라고 합니다. 링 위에서 심판이 권투선수들을 불러서 주의를 줄 때, 심판 말은 듣지 않고 서로 눈을 치켜뜨면서 꼲아보느라고 정신이 없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게 기 싸움으로 주먹을 쓰기 전에 마음에서 승리를 일구어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무리 주먹이 강하고 근력이 강해도 또 몸이 민첩하고 지구력이 강하고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앞서가는 위치에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주눅이 들면 싸움을 이길 수가 없고 끝입니다. 그러나 마음자체가 도대체 기세가 등등해서 눌려지지 않는 마음상태로 임할 때, 아무리 육체적인 조건이 좋아도 그 사람을 이기기가 쉽지 않지요. 신앙인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기 싸움입니다.
평강을 이야기 할 때 잔잔하고 고요한 호수의 백조를 연상하십니까? 아니에요. 우리 마음의 평강은 처절한 싸움 위에서만 가능합니다. 사도바울이 말한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라는 모든 평화스러운 언급들은 그 평화 밑에 처절한 싸움을 승리로 이끈 흔적위에서만 평화의 모습이 가능하고, 내 마음의 행복과 내 마음의 샬롬과 내 마음의 평강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차피 악한 기운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불행하게 만들고 행복대신에 걱정과 근심과 불안을 갖도록 이 세상의 기운이 몰려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강한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기를 이긴 위에서만 우리의 진정한 평강이 유지되어질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아주 극명하게 삶이 기 싸움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 모압이 배반했어요. 조공은 어린 양 십만 마리,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해마다 조공으로 바쳤는데 모압 왕이 거절합니다. 그래서 새로 왕이 된 여호람이 남 왕국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에돔 왕의 힘을 빌어서 지금 모압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고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 동기도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전쟁이 아니었고 자기 소득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반발내지는 외교적 자존심의 문제로 전쟁을 시작했는데, 남 왕국 유다의 왕 여호사밧이 그나마 끼어들어서 물 공급의 문제가 생기면서 전쟁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여호사밧이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찾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친구 따라 강남 본다'고 덩달아 하나님의 은총아래 거하게 된 여호람이 이제 이스라엘의 연합군과 모압을 향해 진격을 하게 됩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모압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어리석게 만들어서, 아침노을 때문에 핏빛으로 물든 물 색깔을 보면서 그것을 피로 받아들이도록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십니다. 아무리 바보라도 아침노을에 비친 그 물 색깔이 진짜 피가 흘러넘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을 놓게 하고 방심하게 하고 섣부른 판단에 근거해서 진격하고 공격해 들어오게 합니다. 들어왔다가는 이스라엘의 연합군에 의해서 완전히 궤멸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모압 왕이 그 포위망을 뚫으려고 700명 특공대를 선출해서 그 포위망을 뚫고 진격해서 빠져 나가려고 하는데 실패합니다. 하다하다 안 되니까 부하들을 다 잃어버리고 몰려서 성위로 올라갔어요. 그런데 보세요. 성위로 올라간 모압 왕이 자기 맏아들, 이웃나라의 태자라서 그런지 이스라엘도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제 자기의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오를 자기의 맏아들 태자를 이스라엘 연합군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성위에서 불 태워 죽입니다. 성경이 이 장면을 간단하게 묘사했지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그 청년의 때에 죽이려고 했을 때, 그 마음속에 아버지의 하나님이 자기의 하나님으로 있는 상태에서 아버지에 대한 신뢰,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번제 단 위에 올라간 것과는 또 다르지 않겠습니까? 인간이면 본능에 의해서 누구나 똑같지요. 아니 태자로 책봉된 맏아들을 성위에서 죽이는데 이 태자가 어땠겠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만히 보니까, 갑자기 한 청년을 올려놓고서 죽이려고 하는데 그 청년이 태자에요. 태자가 어떻게 했겠어요? "아바마마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끔찍해요. 제가 제 아들 무진이를 죽이려고 칼을 들고 찌르려고 합니다. 그러면 무진이가 "아빠! 왜 이래요? 나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라고 난리를 치고 울고불고 공포에 질려서 애가 경악을 하면서 발버둥을 치는 그 모습, 그런데 그 아들을 불태워 죽여 버리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이 모습을 봤습니다. 이 모습을 본문에 보니까 이스라엘에 격노함이 임했다고 합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700명 특공대를 뽑아서 필사의 각오로 그 포위망을 뚫으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다가 실패합니다. 그러니까 모압 왕의 이 분노가 기가 죽는 게 아니고 절망하는 게 아니고 분노가 핵폭탄처럼 폭발해 버린 것입니다.
그 분노의 표현을 어떻게 하느냐?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자기의 태자, 맏아들을 불에 태워 죽여 버립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모압 왕의 분노 앞에서, 핵폭탄보다 더 강하게 터져가는 사기가 충천했던 이스라엘의 연합군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팍 쭈그러들어 버렸습니다. 그 모압 왕의 분노의 기세 한 방에. 지금 다 이긴 전쟁이었어요. 이제 성위에 올라가서 죽이면 되고 생각하기에 따라서 아니 내가 죽여야 될 적군의 태자를 자기 손으로 죽이니까 "내 수고를 덜어주네. 고맙다."라고 생각할 수가 있지 않습니까? "아이고 잘됐다."라고 올라갈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아들을 죽이는 격노한 모압 왕의 모습을 보고 완전히 찬물을 확 끼얹은 것처럼 이스라엘의 사기가 팍 죽어버렸고 다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다 이긴 전쟁을 마지막 매듭만 지으면 되는데, 모압 왕을 잡아서 매듭만 지으면 되는데 바로 직전에 그 모압 왕의 분기충천함에 눌려서 오금을 펴지 못한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을 하는 이유는 아들을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내 가정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고 또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조공을 바치던 것을 바치지 않는다고 소득이 줄어든 것에 대해서 화가 나서 그 불만을 품고 내 소득을 지키려고 내 재산을 지키려고 전쟁을 일으킨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들을 지키고 재산을 지키려고 전쟁을 일으키는데 그 지키려고 하는 목적자체를 자기 손으로 죽여 버리고 제 손으로 끝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식이 있는 전쟁에 나갔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내가 내 자식을 저렇게 죽인다고 생각하니까, 도저히 끔찍해서 생각도 못하겠는데 모압 왕이 죽여 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 기에 눌려 버리는 것입니다. 격노함이 임했어요. 물론 이 당시에 자식들을 종교적인 분위기 안에서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모압 땅에도 그모스 신에게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는 종교적인 세팅이 아니지 않습니까?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격노함 때문에 아들을 죽이는 것이고, 격노함 때문에 아들을 죽인 그 기세에 눌려서, 이스라엘 전체가 승리를 코앞에 두고 스스로 다 풀이 죽어서(기가 죽어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악한 모압 왕의 행위에서 우리 신앙인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기 싸움에서 이겨야 됩니다. 예를 들어 권투선수가 열심히 주먹을 휘두르는 기 싸움. 여러분! 직장에 나가서 돈을 벌겠다고 이를 악물고 달려드는 그 모습이 기세가 등등한 것 같지요? 이를 악물고 남보다 더 돈을 더 벌겠다고 달려드는 그 모습이 기세가 등등하니 달려드는 것 같고, 일류대학 들어가겠다고 이를 악물고 엄마와 아빠와 아이가 힘을 합쳐서 있는 힘을 다해 공부하고 질주하는 것이 기세가 등등한 것 같지요? 아니에요. 건강을 위해서 새벽에 일어나 뛰고 철저하게 음식을 조절하고 이게 아주 기세가 등등한 사람들의 모습 같지요? 아니에요. 영적으로 보자면 이미 먹힌 것입니다. 이를 악물고 돈을 번다는 얘기는, 이미 돈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고 신앙적인 기세가 등등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기세가 등등한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스데반 집사 같은 모습입니다. 내가 맞서 싸워서 주먹질을 하는데, 더 세게 하고 더 열심히 돈을 벌고 더 열심히 성공하려고 하고 그런 것이 기세가 등등한 것이 아니라, 돌에 맞아 죽는데도 원망이 생기지 않는 것이 영적으로 기세가 등등한 것이고 하늘에 기세가 등등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왜 내가 돈이 없어서 이렇게 어렵게 지내야 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왜 일이 이렇게 잘 안 풀리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데 왜 이렇게 병들고 내 자식들은 이 모양 이 꼴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 질문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고, 이미 세상에 기운의 기 싸움에서 져버린 상태의 질문들이라는 겁니다. 영적으로 기세가 등등한 사람들의 모습은 어떤 것이냐? 내가 비록 돈이 없지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돈이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복할 수 있다. 이게 기세가 등등한 것입니다. 돈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죽어버린 것이고 먹혀버린 것이고 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기 싸움에서 이기는 길은, 이 악한 모압 왕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우린 자꾸 아들을 지키는데 있어서 강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내 마음으로 밀고 들어오는 이 세상의 악한 기운, 나를 불행하게 하는 기운, 기회만 있으면 근심과 걱정에 빠뜨리고 스트레스를 싸이게 하고 불평불만하게 하고 기회만 있으면 높아지게 만들어서 다른 사람을 아래로 보고 평가하고 비판하게 하는 이 모든 악한 기운을 이겨내는 방법은 내 것을 지키려 하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 모압 왕처럼 오히려 죽이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깡패들도 싸움을 할 때 깡패들끼리의 기 싸움에서도 누가 기선을 제압합니까? 그 뒷골목의 깡패들 싸움에서도 기선을 제압하는 자가 누군가 하면, 자기 목숨을 이미 마음에서 버린 자 죽기로 각오한 자가 이기는 겁니다. 자기의 목숨을 지키려고 하는 자는 절대 기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어요. 이상한 겁니다. 돈을 지키려고 하는 자는 기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어요. 이 세상과의 기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어요. 반드시 걱정과 불만과 불안과 두려움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불행에 빠져버리고 말아요. 돈을 지키려고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모든 세상 사람들이 돈을 벌려하고 돈은 지키려고 하고 있는데 돈을 아예 마음에서 버려버립니다. 이 사람을 당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버리는데서 기 싸움의 승리의 기선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지, 지키려고 하는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 이 세상을 이기는 자입니까? 주님이 이기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어떻게 세상을 이기셨습니까? 당신의 몸을 버리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버릴 수도 있고 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버리는 것이다. 빌라도가 나를 죽이는 게 아니다. 내가 버리는 것이다." 그 기에 이 세상이 2,000년이 흘러가도록 눌려 사는 겁니다. 주님이 이기신 것입니다. 버리는 데서 기세가 등등한 것이고, 이 세상의 기운이 물리쳐져야 마음의 행복과 평강과 감사가 생길 수가 있고 버리는 자가 이기는 것입니다.
왜 기 싸움에서 졌는가를 보세요. 선택받은 백성들이 기 싸움에서 진 이유를 봅니다. 조공이 들어오다가 조공이 멈추어졌어요. 조공을 지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싸움에 참여한 모든 사람의 모든 이유가 뭐냐?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모압으로부터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싸움이 일어난 겁니다. 지키려고 하는 자들은 아들을 죽이는 모압 왕 앞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지키려고 하는 자들의 기세는 버리는 자의 기세를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의 십자가가 왜 승리의 상징입니까? 일견 보기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실패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승리의 상징이요. 승리의 능력이고 권능이라고 얘기하고 사도바울은 복음의 능력이라고 자꾸 얘기를 하는 겁니까? 가장 처절한 실패인데. 주님이 목숨을 지키려 하시다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면 그건 실패예요. 그것 자체로 참담한 실패일 뿐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당신 스스로 당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내 거십니다. 지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버리려고 하는 이 기세를 세상이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에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승리하면 승리의 결과가 반드시 마음의 평강으로 옵니다. 내가 이겼나? 졌나? 이 세상과의 기 싸움에서 이겼나? 졌나를 보면서 내 마음에 평강이 있으면 이긴 것이고, 내 마음에 감사가 있으면 이긴 것이고, 모든 사람이 귀하게 보이면 이긴 것이고. 내 마음에서 내 머릿속에서 이 사람은 이게 모자라고 저 사람은 저게 모자라고 다 속속들이 분별이 되고 평가가 되면 이게 진겁니다. 그저 사람은 귀해 보여야 됩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 돈이 있건 없건 병이 들었건 말았건 내 마음에는 감사가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이긴 자, 승자의 결과입니다. 승자의 어떤 표징이고 기세가 등등한 것입니다. 기세가 등등한 것은 고집을 말하는 게 아니고,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고 오기를 부리는 게 아닙니다. 기세가 등등하다는 것이 콧대가 높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또 호전성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도대체 이 세상 사람들이 갖고 싶어 하고 지키고 싶어 하는 그 모든 것이 없는데도 행복한 것, 기쁜 것, 있거나 없거나 상관이 없는 것이 선민의 기세가 등등한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승리의 이유가 되는 이유는, 주님께서 스스로 당신의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이고,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내 죽음이 된다는 것은 거꾸로 말해서 내가 갖고 있고 내가 지키고 싶어 하는 모든 것들을 다 버린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죽음으로서 버리는 것 아닙니까? 모든 연이 다 끊어지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면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지키기 위해 싸우고 강화하기 위해서 싸우고 더 벌기 위해서 싸우고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십자가를 마음에 지고 직장에 나가서도 직장을 버리면 그 기세를 이길 수가 없다는 겁니다. 증권시장에 가서도 증권자체를 마음에서 버리면 그 기세를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누리는 평강, 시장 한 복판에 나가서 그 시장에서 돈 버는 이윤을 마음에서 십자가를 쥐고 버리고, 아들을 키우는 상황에서 아들을 마음에서 버리면 그 기세를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틈타서 내 마음에 세상의 기운이 들어오고 불행과 불만과 두려움과 걱정과 염려와 짜증과 온갖 기운이 다 들어오는데 아들을 버립니다. 그 기세를 세상이 이길 수가 없지요. 그것이 바로 세상을 이겼다고 하는 주님의 말씀이 내 말씀이 되는 것이지요.
기 싸움에서 이겨야 되고, 기세가 등등해야 됩니다. 등등한 것은 남이 나를 미워해도 하나님으로 채우면서 하늘의 평강을 유지하고 그에 대해서 하나도 미움이 생기지 않는 것이 기세가 등등한 겁니다. 누구나 다 비난하고 욕하고 무시해도 좋을 만한 사람들을, 그저 귀하게 여길 수 있는 그런 풍요로운 마음,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이 기세가 등등한 것입니다. 이렇게 풍부한 은혜가운데서 살아가시기 위해서 오늘 이 출발점을 잘 보셔야 됩니다. 조공이 줄어들므로 전쟁을 시작합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압 왕의 아들을 죽이는 이 모습을 거꾸로 배우는 겁니다. 이 세상의 기운을 이겨내야 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버리는 겁니다. 십자가가 모든 것을 버리게 합니다. 버리게 하고 그리고 십자가를 붙잡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오늘 조공이 줄어드는 것을 이유로 전쟁을 출발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행동은 여기서 출발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다 죽어버리고 나면 어디서부터 출발합니까? 전쟁을 해도 하나님께서 시켜서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일을 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일을 할 때는 거기에는 굽힘이 없습니다. 이 선민들의 전쟁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출발했더라면, 하나님이 모압을 혼내주고 심판의 대행자로 참여해서 이렇게 중도에 머물거나 포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지키려하고 내 것을 보존하려하고 내가 벌려하고 나에게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세상의 기운 앞에서도 다 막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버리는 자가 기세가 등등할 수 있다. 십자가로 버릴 때 우리의 모든 행동과 생각의 출발점이 하나님일 수 있다. 하나님일 때 우리는 끝까지 이 세상을 밀고 나가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붙잡고 기세가 등등한 사람들로 오늘 하루를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지키려하고 보존하려하고 더 많게 하려는 동안에 우리는 세상에 완전히 먹히고 세상의 기운에 정복당해서 비굴하게도 돈 좀 더 있으면, 좀 더 건강하면 좀 더 아름다우면 좀 더 높아지면 하고 살았습니다. 결코 그 상태로는 하늘의 평강을 누릴 수가 없음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십자가에서 죽고 세상과의 기 싸움에서 이기게 하심을 감사 찬양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