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에서 사가지고 간 치킨과 오리구이를 점심으로 먹고 샤워를 한 다음 무더위를 피해 휴식을 취한다. 한 시간 쯤 시원한 호텔 방에서 휴식을 마친 난 아내에게 차이나타운 인근을 구경하러 나가자고 한다. 아내는 호텔에서 좀 더 쉬겠다고 해 나 혼자 호텔을 나선다. 먼저 술탄거리(JL. Sultan)를 따라 진씨서원(陳氏書院, Chan See Shu Yuen)으로 향한다. 차이나타운 뒷 길인 술탄거리(JL. Sultan)에는 중국인이 운영하는 약국, 음식점, 식료품 가게 등이 즐비한데 뜨거운 햇빛이 내려쬐는 한낮이라 그런지 거리는 한산하다. 그렇지만, 미진향(美珍香)이란 간판이 붙어 있는 육포와 고기를 다져 가공한 것(이름 모름)을 파는 가게 앞에는 물건을 사기 위한 사람들이 30m는 넘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유명한 맛 집인 것 같은데 가까이 가서 보니 점원들이 물건을 파느라 정신없고 가게 진열대에선 향료 냄새가 난다. 이 가게를 찾은 사람들은 물건을 조금씩 사는 것이 아니라 큰 봉지로 두 세 개씩 사간다. 나도 조금 사서 맛을 보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으나 더운 날씨에 길게 줄을 서서 사기도 그렇고 해서 돌아오는 길에 사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 육포와 다진 고기 가공품을 파는 가게 美珍香
▶ 美珍香에서 물건을 사려고 줄을 선 사람들
호텔에서 남쪽으로 1km정도 걸으니 진씨서원이 나타난다. 진씨서원은 온통 초록색으로 뒤덮혀 있고 벽면에는 중국 신화가 새겨져 있고 지붕엔 용들이 용틀임을 하고 있는 광동풍의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매우 정교한 조각 솜씨가 놀랍다. 우리나라 서원은 주로 유명한 유학자를 모시며 지방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곳인데 비해 이곳은 진씨 일가의 선조를 모시는 사당이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빨간 문 위에는 금빛 조각물, 문에는 스테인드 글라스, 그 위에는 다시 빨간 꽃이 주렁주렁열려 있어 어디 한 곳 빈 데가 없이 빽빽하다. 안으로 들어서니 보수공사 중이라 내부가 어지럽다. 덕성당(德星堂)이란 현판이 걸린 조상을 모시는 제단도 공사로 인한 먼지를 방지하기 위해 비닐로 가려져 있다. 제단 앞을 한 바퀴 돌아 나오니 벽에 德澤流芳(덕택류방, 덕을 택하여 아름다운 명성을 후세에 남기자), 宏揚祖德(굉양조덕, 선조들의 유덕을 더욱 발전시키자) 등등의 자손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글자를 새겨 걸어 놓았다. 좌측 쪽문으로 들어가 보니 이곳은 진씨 종친회 사무실 겸 차를 판매하는 곳으로 子和堂(자화당, 자손들이 화목하게 지내는 집)이란 글이 걸려 있고 우측 쪽문 앞엔 來金堂(래금당, 돈이 들어오는 집)이란 글이 걸려 있어 결국 돈을 많이 벌러 자손들이 화목하게 살자고 이 사당을 지은 것이거나 조상신께 돈을 많이 벌게 해주고 자손들이 화목하게 살 수 있도록 보살펴 달라는 기원이 담긴 것 같다. 진씨 서원을 뒤로 하고 관음사로 가는 중. 뒤돌아 서원을 바라보니 지붕 위로 몇 마리의 용이 헤엄쳐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 진씨서원 전경
▶ 진씨서원 지붕과 벽의 조각
▶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 위의 조각 작품
▶ 선조들을 모신 제단
▶ 누구신지?
▶ 후손들을 위한 경구
▶ 중국산 차를 판매하는 자화당
▶ 관음사로 가다 본 진씨서원
진씨서원을 나오니 길 건너에 하얀색의 중국계사람들의 사교장이나 연회장으로 사용한다는 중국대회당이 보인다. 진씨서원 앞 마하젤라 거리 위 고가로는 KL모노레일이 지나간다. 차가 마구 달리는 길을 건너기가 위험한 것 같아 중국대회당 가는 것은 생략하고 진씨서원 옆에 있는 관음사로 향한다.
관음사는 중국식 불교사원으로 흰색 외벽과 둥근 문이 인상적이다. 눈 가는 곳마다 빈 곳 없이 화려한 조각들로 빽빽한 다른 중국 사원들과는 다르게, 무늬 없이 매끈한 벽과 다만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나뭇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나무들만이 관음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이 사원이 어쩐지 내용이 없이 비어있기보다는 여백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원형 문의 양쪽에 걸려 있는 홍등이 바람에 가만히 흔들리고 있다. 홍등 아래 돌로 깎아 만든 붉은 향로엔 天官賜福(천관사복, 하늘의 관리가 복을 내린다)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天官賜福은 왕조현이 주연으로 열연한 영화였는데, 이곳에서 정성을 들여 기도하면 하늘이 복을 내린다는 뜻일까? 그리 넓지 않은 법당 안 정면엔 석가모니 부처님이, 좌측엔 천수관음보살이, 우측엔 지옥을 관장하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내가 이곳에서 10분가량을 지체하는 동안 단 두 사람만이 법당을 찾았을 뿐 한적하다. 관음사는 다른 말레이시아의 사원들과는 다르게 시민들이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명상하기 좋은 장소처럼 보인다. 열대의 바람답지 않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사원 계단 한 편에 앉아서 바람을 맞으며 숨을 고르고 땀을 식히고 나니 그동안 등짐처럼 지고 내려놓을 수 없었던 삶의 무게가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 관음사 전경
▶ 법당 앞 돌로 만든 향로에 새겨진 天官賜福(천관사복, 하늘의 관리가 복을 내린다)
▶ 법당 중앙에 모셔진 불상
▶ 법당 중앙 좌측에 모셔진 천수관음상
▶ 법당 중앙 우측에 모셔진 불상과 앞의 법사는 현장법사가 아닐까?
관음사를 뒤로하고 좁은 숲길 언덕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메르데카(Merdeka) 국립경기장이 나타난다. 내가 어릴 적 메르데카 배 축구경기가 열릴 때마다 만화방에서 TV를 보며 우리나라 선수들을 응원했던 기억이 새로운 바로 그 경기장이다. 1957년 건축된 이곳은 446년의 오랜 식민지 역사를 청산하고 말레이시아의 독립을 선언한 장소로 초대 총리인 퉁쿠 압둘 라만 총리가 1957년 8월 31일 이곳에서 메르데카(독립이란 말레이어)를 7번 외친 말레이시아 현대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이다. 4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메르데카 경기장은 1991년 아시아 육상대회를 비롯 국가의 중요행사와 연주회, 음악회 등이 열렸던 곳으로 한 때 폐쇄의 위기를 맞았으나 지금은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경기가 없어 경기장의 문은 모두 닫혀 있고 경기장 사무실로 통하는 문 옆에는 경비 아저씨가 할 일없이 파리를 잡고 있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 봐도 되냐고 하니 운동장에는 내려가지 말고 들어가 보란다. 경기장 관람시설은 많이 낡았지만 그라운드엔 푸른 잔디가 잘 가꾸어져 있다.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 나와 경비 아저씨께 고맙다는 인사를 하니 만면의 미소로 화답한다.
▶ 메르데카 국립경기장의 외관(위)과 내부(아래)
메르데카경기장에서 10분 쯤 걸어 스리 마하바리아만 사원(Sri Mahamariaman Temple)으로 간다. 차이나타운 한복판에 1873년에 지어진 쿠알라룸푸르에서 가장 큰 힌두교 사원으로 1999년 보수공사를 거쳐 아주 짙고 치밀한 색채의 탑이 더욱 아름다워졌다고 한다. 쿠알라룸푸르 최대 규모라서인지 사원 앞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힌두교 신자들뿐만아니라 쿠알라룸푸르를 찾은 관광객들도 다수 보인다. 입구에 있는 높은 조각 탑엔 각종 힌두 신들이 섬세하고 정교하게 조각되고 화려하게 채색되어 시선을 확 잡아끈다. 대부분의 힌두교 사원들이 그렇듯, 이곳 역시 문 앞에 신발을 벗어두고 사원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수도에서 발을 씻어야 하고, 사람들이 하도 디뎌서 반들반들 해진 돌바닥을 그들과 함께 맨발로 걸어 다녀야 한다. 관광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어느 누구도 그곳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굳이 신발을 벗고 사원 안으로 들어가기에, 나 역시 그냥 지나가면 후회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그들의 뒤를 따라 사원 입구 좌측에 있는 신발보관소에 20센을 주고 신발을 맡긴 후 벗은 발로 사원으로 들어간다. 입장료는 무료이다. 넓지 않은 사원 안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제물을 받치고 향을 피우며 기도를 하고 있다. 사원 안에는 지붕과 기둥으로만 되어있는 사방이 뚫려 있는 본당이 있다. 본당에는 여러 가지 무늬와 그림으로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는데 바닥엔 연꽃처럼 보이는 무늬가 새겨진 대리석을 깔아 매우 아름답다. 본당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작은 조각상들에는 옷이 입혀져 있고 꽃과 각종 무늬들로 치장되어 있다. 조각상 뒤 작은 방에선 힌두교 사제가 의식을 행하고 있다. 본당 천장에는 화려한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찬란하게 빛을 내뿜고 있다. 힌두교 사원은 출입구와 지붕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조각도 신상(神像)도 없이 전반적으로 밋밋한 평면으로 되어 있는데, 대신에 그 평면들에 하나하나 공을 들여 무늬를 그려 예술성을 높였다. 사원에 그려진 벽화. 역시 힌두교 신화에 관한 내용.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벽화 속 신은 어머니의 면모와 파괴자의 면모를 함께 지니고 있는 힌두교 여신 두르가라고 한다. 힌두교 신도들은 두르가 여신에게 현세에선 물질적 이익을, 내세에선 정신적인 안정을 기원한다고 하는데, 어딜 가나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축복받길 기원하는 것은 똑같은 걸 보면 그만큼 세상살이가 어렵고 고단한가 보다.
▶ 스리 마하바리아만 사원(Sri Mahamariaman Temple) 정문의 탑
▶ 사원 본당 전경
▶ 붉은 장막으로 가려진 방안에서 힌두 사제가 기도를 하고 있다
▶ 화려한 옷과 장식을 한 힌두신상
▶ 본당 외벽을 장식한 힌두신상
▶ 본당 내벽을 장식한 힌두신 그림(우측)
▶ 본당 내벽을 장식한 힌두신 그림(좌측)
▶ 본당 벽면 구석구석의 각종 힌두신상
▶ 여유로운 한 때를 즐기는 힌두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