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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순이도 이제는 결혼을 해야지' 하면서 나를 부르더니 응접실을 향해 앞장을 섰다. 같이 입사한 동기들은 이미 애 엄마가 된 친구들도 한두 명이 아니었기에 새삼스런 일은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멀게만 느껴졌던 결혼이 사장님을 마주 대하고 앉았으니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를 보면서 사장님은
"내 사촌 동생이 있어, 상고를 나와 지금은 상계동 농협에 다니고 있지, 영순이 선 한번 보면 어떨까?"하고 나에게 묻는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고는 하나 그 자리에서 선뜻 네 하고 대답하기는 좀 뭐했다. 차마 말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사장님은 다시 입을 열더니 "홀어머니를 모시고 둘이 살고 있거든, 작은 어머니가 청상으로 평생 아들하나만 키우고 사셨어."라는 말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듯 하면서 나도 모르게 "아니 아버지도 안계시고 형제가 아무도 없어요?"라는 말이 불쑥 튀어 나왔다. 나는 내 자신을 보고 깜작 놀랐다, 아니 그렇게 조심했는데 중간에 이렇게 하다니 하고 금방 후회했다. “영순이도 다른 아가씨들과 같은 마음이네,” 뭐가요 “다른 아가씨들이 평생 아들만 바라본 시어머니를 모시지 않으려 했기에, 내 사촌은 지금까지 30이 넘도록 장가를 못가고 있어” 하는 것이다. 나는 사장님에게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다. “사장님 저는 지금까지 동생들 뒷바라지 하느라 너무 고생을 많이 했어요. 이제는 좀 편하게 살고 싶어요. 그런 시어머니 모실 자신이 없어요.”라고 했다. 사장님은 “아니야, 영순이를 쭉 봐왔기에 말이지만, 영순이 성품이면 그보다 더한 시어머니라도 잘 받들고 무리 없이 잘 살 것 아닌가 싶어, 아마 둘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거야” 하면서 꼭 선을 보라는 것이다.
나는 사장님 말씀을 거역하지 못하고 나갔지만, 언뜻 마음은 내키지는 안했다. 물론 저쪽은 키나 인물이나 말하는 인품을 보아서는 더없이 좋았지만, 평생 아들만 쳐다보고 살았던 어머니를 어떻게 모실 것인가를 생각하니 험난한 산이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아 선뜻 내키지를 않았다.
저쪽은 나를 보자마자 실은 기색은 아니었다. 나는 새 옷은 돈 때문에 못 사 입었지만, 몸매는 늘씬했고 주위 사람들 말에 "얼굴은 인정미가 넘친다"고 들 했다. 운동을 해서 몸매를 가꾼 것은 아니다. 회사에서 군것질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먹는 세끼 밥으로, 하도 고되게 밤낮 일을 하다 보니 살찔 여가가 없었다. 저쪽은 사촌형인 사장님이 미리 언질을 주어서 인지 나에게 호감이 가는 듯한 눈치로, 상당히 다정다감했다. 망설였지만, 나도 30이 가까우니 아무리 시어머니가 힘들게 하더라도 내가 잘만 하면 되겠지 싶어 이만한 자리도 없겠다는 생각에 선본 두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지금이야 40이 가까운 처녀들도 있지만, 그때만 해도 여자나이 30이 되면, 시집갈 곳도 없을 줄 알았던 때였다. 시집간 며칠을 빼고는 주위에서 말했던 대로 시어머니는 언제나 나를 주눅 들게 했다.
시어머니는 마치 아들 빼앗아간 년, 하는 듯 나를 노려보면 나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접시를 떨어뜨려 깰때도 있었다. 말씀이 곱지 못하고 시어머니 얼굴만 봐도 나는 뒷다리에 오금이 저렸다. 큰애 입덧 할 때였다.
어찌나 닭이 먹고 싶었던지 눈만 뜨면 닭이 보였고 닭털만 빼고 생으로라도 통째로 뜯어 먹어도 직성이 안 풀릴 정도였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머니는 “나는 입덧 날 때 신 과일 한번 안 먹고 열 달 내내 일만 하다 애 낳았다. 요새 것들은 호강에 빠져 서방 등골 녹여 먹으면서 이것저것 다 쳐 먹더라” 미리 쐬기를 박았다.
하필 그때 벨이 울리고, 경숙이 전화를 받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 흘러내린다.
“영순아! 너 울고 있구나. 나하고 만나자”
경숙은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늘씬하여 대학 졸업하자마자 결혼하여 귀한 것 없이 살고 있었다.
우리 집에 올 때마다 과일을 박스로 사오고, 시어머니 호주머니에 돈도 슬쩍 찔러 준다.
시어머니는 방을 나가면서 참견을 한다.
“그 친구냐? 한번 놀러오라고 해라”
“밖에서 만나자고 하네요.”
말 한마디 붙이기 어렵게 쌀쌀한 시어머니도 영숙이만은 예외다.
남편 월급날이면 총각 때 그랬듯 어김없이 어머니께로 봉투째 들어가기에 맘을 고쳐먹어도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위치를 알 수가 없었다.
설움이 북바쳐도 맘을 억제하고 경숙이를 만나로 갔더니
경숙이가 나를 멕시칸 통닭집으로 데리고 간다.
정신없이 닭다리를 뜯다 너무 서러워 아까보다 더 어깨까지 들썩거려진다.
“울지 마 영순아!”
경숙아 고마워!
너는 매번 나를 살리는 구나 나는 언제나 사람노릇 해보고 살지!
“영순아! 걱정마라 이미 사람노릇 하고 있어.
막말로 네 시어머니 같은 사람 누가 모시고 살겠니, 다른 사람 같으면 진즉 도망갔다. 너만한 사람도 없다. 며느리 잘 본다고 소문 나 있지 않니?”
경숙이는 또 말을 계속한다.“내가 중 이학년 때 너와 같이 짝꿍이었잖아 너는 수학을 잘했지.
나는 수학이 너무 싫었거든 인수분해나 방정식을 이해 못하고 수학시간만 되면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너는 “경숙아! 수학은 공식만 알면 안 어려워” 하고 이해 할 때까지 차분하게 반복해서 가르쳐 주었지.”
“기억력도 좋구나. 그때가 언제라고”
“왜 잊어 수학을 못 풀 때마다 너는 나를 도와주었고 답답하고 잠만 오던 시간이였는데, 재미를 붙이면서 서서히 그 시간이 기다려졌고 고등학교 가서는 미적분을 나만큼은 잘 하는 친구가 없을 정도였다.
그때마다 영순이 네가 가슴속에서 떠나본 적이 없었어, 같이 진학해서 공부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이야.”
“경숙아! 중학교 때 우정을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간직해 주니 고맙구나.”
“별말 다 한다.”
사실말이지 내가 공장에서 일하면서 부터 몇 년간은 경숙이를 볼 수 없었다. 언제나 이 못난 친구를 많이 배려해 주고 경숙이가 찾아 주어 이렇게나마 우정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경숙은 언제나 변함없는 나의 다정한 친구였다.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이달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월급봉투를 받아 내리라. 하지만 청상으로 아들하나 바라보고 살면서 월급날 만 기다리는 재미로 사신 시어머니에게 차마 못 할 짓이었다. 남편은 그런 나를 보고 “여보, 조금만 참아, 전쟁터에서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린 나를 키우면서 어머니는 이른 아침 일찍 도매시장에 나가 채소를 떼어다 가계도 없는 노천에 쭈그리고 앉아 그걸 파시면서 나를 공부 시켰어. 내가 농협에 취직 하던 날 얼마나 기쁘셨던지 눈물까지 흘리신 분이야, 당신 고생한 거 다 알아 내가 잘해줄게” 하는 남편의 말을 듣고 더 이상 말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답답함 속에 아이들을 둘이나 낳았고 이젠 학부형이 되었다.
그런데, 아이들 불만도 만만치 않았다.
“다른 애들은 엄마가 옷, 장난감 다 사주고 용돈도 주는데 엄마는 뭐야 날마다 돈 없다고 해?”
나는 이런 소리를 들을 때면 가슴이 미여졌다.
시어머니는 본인이 직접 손자 손녀에게 옷, 학용품까지 사주고 군것질까지도 챙겼다.
나는 봉투도 부치고 인형도 꿰매고 닥치는 대로 부업을 하기 시작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약간의 푼돈이 들어왔다.
딸 미림이가 초등학교 삼학년이 되고 아들 미석이까지 입학 하고 부터는 무슨 일이든 하고 싶었다. 길에서 일일공부 돌리는 여자분을 만났다.
“나도 하고 싶은데 할 수 있어요?”
“마침 한사람이 그만두려고 후보자를 찾고 있는데 내일 아침에 나와 보세요.”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가서 그 여자분을 따라갔다.
그만둔다는 여자는 오십 여부를 겨드랑에 끼고 다니면서 일일이 집을 가르쳐 주어 앞으로 내가 하면서 잘 못 찾을 것 같은 집은 메모를 했다.
이를 테면 대추나무 집 건너 몇 번째 집, 지하실 방, 문 찌그러진 집 그런식으로 다음에 찾기 쉽게 표시를 하고 따라다녔다. 그 여자는 “부수를 차근차근 늘려야 돈이 많아지고 일 할 맛이 나지만 줄어들면 욕을 먹게 되어 나중에는 그만 두어야 된다.”고 귀띔 해주었다. 회사에 도움이 안되면 짤린다는 것이다.
말이 쉽지 오층까지 걸어서 일일공부 문답지를 문에 꽂아두고 단숨에 내려오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한두 집도 아니고 삼층 오층 집이 절반이다. 따라 다닌 첫 날, 한여름 무더위에 5층까지 올라가면서 땀을 흘리니 갈증이나 견딜 수가 없었지만 물 한 컵 주는 사람이 없었다. 세상은 냉정하구나 싶었다.
집에서 일찍 일어나 아침식사를 해 남편을 출근 시키고 애들을 학교 보내고 나서 일일공부 문답지를 돌리면 한나절은 금방 간다.
어머니에게는 돈 때문에 나간다는 말을 일체 하지 안했다. 그냥 볼일이 좀 있어서 나갔다 온다고만 했을 뿐이다.
일일공부 시켜서 성적이 올랐다고 자랑하면 같은 또래 엄마들은 너도나도 일일공부 문답지를 찾았다. 나는 부수를 늘려가며 기를 쓰면서 이년정도 하고 그만 두고 또 다른 일거리를 찾아서 하고 있었다.
미림이는 벌써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미석이는 중학생이 되었다.
남편은 강화군 화도면 화도농협 지점장으로 발령이 났다.
틀림없이 ‘에미야 아범 따라가야겠다.’ 할 것 같아, 짐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아니야 에미가 가야지, 나는 집에서 학교다닌 손주들 밥이나 해주며 여기 있겠다.”라고 하시면서 월급봉투도 이제는 네가 받아라 하시는 시어머니 말씀을 듣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고 정말인 줄 알때도 이게 꿈인가 생신가 믿어지지 안했다 그러나 “어머님이 아범 따라 가세요”라고 했다. 시어머니는 “아니야 당연히 네가 가야지.”
처음에는 홀가분하고 너무 기뻐 어쩔 줄을 몰랐으나 따로 산다고 놀고 있을 수는 없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살 때보다 더 바빴다. 밑반찬이며 김치를 담아 상계동 집에 다녀야하고 동네 바쁜 일을 거들어주었다.
“농협 지점장 사모님이라 세련되고 농촌일은 전혀 모를 줄 알았는데 농사일을 잘 하시네요” 동네사람들의 말이다.
이웃집 할머니는 딸처럼 “오늘 우리 고구마 좀 캐주게”하여
거들어주면 고구마도 얻어올 수 있었다. 채소도 이집 저집에서 가져와 농사지은 사람처럼 풍성하다. 시골에서 먹고 살기는 오히려 도시보다 돈이 훨씬 덜 들고 절약 되었다.
가을에는 도토리를 주어다 묵 가루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통닭집에서 폐기된 가름을 얻어다 빨래 비누를 만들어 나눠주었는데 떼가 잘진 비누를 어떻게 그냥 가져가겠느냐고 사가기 시작해 수입의 원천이 되었다. 그렇게 발버둥치고 살았던 시절이 어제 같기만 하다. 지난 날 들을 돌이켜 보니 한 순간에 불과 했다.
나는 결혼 전에 결혼해도 교회 다닐 것을 약속했지만 시어머니가 무서워서 말도 못 꺼내다가 애를 둘을 낳고 부터는 서서히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시어머니를 조심하고 살아서인지 교회 다닌 것을 막지는 안했다. 애들도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
“할머니! 우리는 다 천국에 가서 예수님과 같이 사는데 할머니 혼자 지옥에 갈 거야? 빨리 교회가자.” 응 할머니! 주일이면 애들이 졸라댄다.
아니 너희들은 다 함께모여 천국에서 사는데 나 혼자만 따로 떨어진단 말이냐?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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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래도 지나고나면 그 인고의 시절이 그리워지지요?...
네, 목사님 그런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와~~~다음호가 기대됩니다.~~
읽어 주시어 고맙습니다. 자작글이지만 시작 했으니 한번 써 보갰습니다.
계속해 주세요. 많은 팬이 생기겠습니다. 소설 축하합니다.
장로님! 감사합니다. 장로님 덕택에 한번 용기 냈으니 기왕 쓴것 마무리까지 하겠습니다.
멋진 소설 늘 써 주시길 바랍니다. 자꾸 쓰시면 소설이 깊어지고 맛도 새로와 질 것입니다.
처음으로 한번 시도해 본 것이라....그리고, 역사문학에서 늘 뵈었던 기억 있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샬롬! 존 축 무자게 해유 자서전의 기막힌 대서사시 같은 꽁트 소설 베리 굳 입니다요.
감사합니다. 각하님은 왜 안보이시나, 늘 궁금했지요, 그런데 이렇게 은혜로운 닉네임으로 뵐 줄은...
다음호 기다리고 있어요 . ^ ^
네 읽어주시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