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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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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 스크랩 몽고의 고려침입 - 여몽전쟁 29년 간략사 (9차침입)
혜명 추천 0 조회 82 13.11.15 05: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몽전쟁 29년 간략사 (9차침입) (1231~1259)

 

여몽전쟁 발발의 역사적 배경

 

     고려가 몽골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 것은 1216, 100여년 만에 다시 침략해 온 거란족(契丹族) 때문이었다.

     당시 금나라와 몽골에 쫓기고 있던 거란족은 자신들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고려를 공격해 왔다.

     거란이 개경 근처까지 밀려들어오자 고려는 조충(趙沖)과 김취려(金就礪)를 보내 이들을 물리치게 하고 금나라, 몽골과 연합군을 구성하여 1219년에 거란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 와중에 집권자 최충헌(崔忠獻)이 죽고 그의 아들 최우(崔瑀)가 권력을 잡았다.

     그 후 1225년 몽골의 사신 착고여가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도적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몽골과의 평화적 관계가 깨지고 말았다.

     몽골은 착고여의 원수를 갚는다는 이유로 1231 8월 고려를 칩입했는데, 이것이 제1차 여몽전쟁(麗蒙戰爭)의 시작이었다.

 

여몽전쟁의 특성

 

여몽전쟁(麗蒙戰爭)은 고려가 북방 유목민족인 몽고족의 짐입에 맞서서 1231년부터 1259애 이르기까지 29년에 걸쳐 항쟁을 전개한 전란이었다.

여몽전쟁은 고려시대는 물론 우리 민족의 5000년 역사에서도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장기간 걸쳐서 지속된 전란이었으며, 국지전의 형태가 아니라 내륙 전역에 널리 파급되었다는 점에서 종래의 대외 항쟁과 또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몽고는 고려의 영토를 점령하여 그들 제국의 판도를 확대시키려고 고려를 침공한 것은 아니었다.

세계적인 대제국 건설을 위한 정복사업의 일환으로 중국대륙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대중국전략의 효과적인 달성을 위하여 고려에 대한 침공을 병행하였다. 그들은 명분상으로 고려를 자국의 영향권 아래에 둠으로써 배후의 위협이 될 소지를 해소시켜 대중국전략을 과감하게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고려를 침략하였던 것이다.

여몽전쟁에서 고려는 전 국토를 몽고에게 유린당하고 강화도라는 일개 海島에 의지하여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국왕이 끝까지 出城降伏을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국가적 체통이 손상당하지 않는 선에서 전쟁을 종결 지은 보기 드문 사례이기도 하였다.

일찍이 한반도에는 삼국시대 이후 이민족 빈번한 침략이 있었지만, 여몽전쟁처럼 전 국토가 적에 유린된 사례는 없었다. 고려는 불굴의 항쟁과 능숙한 외교적 수완을 적절히 배합한 양면작전을 구사하여 出城降伏이라는 치욕을 당하지 않고 승자와 패자를 분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전쟁을 종결 지을 수 있었다.  또 하나의 특성은 몽고족의 세계정보사상 유례를 보기 드물게 고려를 멸망시키거나 병합하지 못하고 고려의 국체를 그대로 인정해 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고려 군민의 강렬한 항전 의지와 지도층의 외교적 노력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 얻어진 성과이다.

고려는 몽고와의 장기항전으로 몽고군을 곤경에 빠뜨림으로써 몽고가 고려의 이러한 抗爭樣式을 묵시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 것이었다.

그 결과 몽고군의 공격 앞에 항복하지 않는 국가는 지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는 몽고족의 세계정복사상 초유의 이례적인 현상을 후세에 남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여몽전쟁의 종식과 함께 고려는 몽고와 대등한 형제지국의 관계에서 한층 예속성이 강한 일개 제후국으로 전락하게 되고 말았다. 또한 몽고는 충렬왕 이후부터 역대의 고려 군왕을 몽고제국의 부마로 삼아 몽고와 혈연적인 종속관계를 맺도록 함으로써 고려에 대한 속박을 장기화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는 이후 100여 년간에 걸쳐서 몽고의 간섭과 압제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인은 장기간의 대몽항쟁을 통하여 싹트게 된 몽고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면서 우리민족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지키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29년간의 여몽전쟁을 통하여 힘의 한계를 절감하고 외면상으로 몽고와 타협하여 몽고의 무력 압박을 완화시킴으로써 국력의 회복과 민생의 안정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가 몽고와 평화적인 곡교관계를 회복하였다는 것만으로써 근본적으로 대몽항쟁의식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려가 몽고와 타협한 것은 몽고의 무력 위압을 완화시키기 위한 일시적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다.  고려인들은 양국의 평화적 관계가 회복된 이후에도 정신적으로 여.몽전쟁에서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삼별초의 항쟁을 통하여 자주성 회복을 위한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구국항쟁 의식은 후대에까지 연면히 계승되어 공민왕(1351~1374)대에 반원자주회복운동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고려중기 군사편제

1

중앙 정규군

26

45,000

2

지방군

둔전군

61,000

주현군

48,000

3

예비군

광군

300,000

별무반

170,000

망군정인

120,000

총동원 군사력

 

75만명 수준

 

 

여·몽 전쟁사 (麗·蒙 戰爭史) 39년(1231~1270) 
무신정권 협의개념 여몽전쟁 29년 (1231~1259)

고려

왕조

西

최씨무신

정권

 
고종 18 1231 35 최우妻   ① 1231.8~1232.3 (몽고1차침입) → 몽고감독관 다루가치파견 (고려북계 40여 성)
19 1232 36   ♣고려 강화천도
1232.8~1232.12(몽고2차침입) → 처인성전투(몽고장수 실리타이 김윤후에게 사살 당함)  
    ☆ 대구 부인사 소실(초조 대장경 소실)
20 1233 37   ★ 몽고군에 포로되었다가 탈주한자 들로 구성된 군대 → 신의군 설치 
21 1234 38    
22 1235 39   1235.7~1239.3(몽고3차침입) → "唐古" 주장으로 경북지역까지 유린
     - 경주 황룡사 9층탑 소실,  대장경 재조 시작
     - 1235~1238 4년간 전국토 유린당함
23 1236 40   ▶충렬왕 출생 
24 1237 41    
25 1238 42   □ 1238년 김보정이 적진에서 강화제의 (고려왕의 몽고입조 조건으로 철군)
26 1239 43   ↖ 1239.3 (몽고3차침입 종료) 5년간 전쟁
27 1240 44    
28 1241 45    
29 1242 46    
30 1243 47    
31 1244 48    
32 1245 49    
33 1246 50    
34 1247 51   ④ 1247년(몽고4차침입) → 몽고 장군 아모간이 침입 개경환도 요구
                                       <황제 정종이 죽었다는 소식에 철군> 
35 1248 52    
36 1249 53 최우  
37 1250 54 최항
?~1257
 
38 1251 55    
39 1252 56    
40 1253 57   ⑤ 1253년(몽고5차침입) → 개경환도 계속 요구하면서 아모간, 야굴등이 침입
     <11월 왕이 나와 몽고 사신을 맞이함으로써 약속대로 철군>
41 1254 58  

⑥ 1254.7 ~1255.2 (몽고6차침입) → 고려 조정이 완전히 강화도에서 육지로 나올 것을 요구 

      <가장 심한 패해를 입은 침입>

42 1255 59   ⑦ 1254.7 ~1256.10 (몽고7차침입) 
43 1256 60    
44 1257 61 최항 1257.5 ~1257.10 (몽고8차침입) 
45 1258 62 최의 암살
?~1258
⑨ 1258.6~1259.3 (몽고9차침입)
무오정변: 김준 정권장악( 최씨 막부체제가 붕괴)→ [형식적인 왕정복고]
원종 46 1259 1 ()  
1 1260 2 ?~1268  
2 1261 3    
3 1262 4    
4 1263 5    
5 1264 6 >교정별감  
6 1265 7 >문하시중  
7 1266 8    
8 1267 9    
9 1268 10   무진정변 : 1268년 12월 무신 임연이 원종, 환관 최은,김경 등과 결탁하여 궐내에서 김준을 유인 살해하고 그 가족들과 도당을 제거한 사건.
□ 김준이 영솔하는 戊午功臣團의 [
과두정권]이 붕괴→
임연 휘하의 족벌정권 성립
 
10 1269 11 임연
?~1270
 
11 1270 12 임유무
?~1270
경오정변 : 1270년 5월  임유무(林惟茂) 살해 제거 [무신정권종식]
♣ 고려 개경 환도
□ 이 사건으로
100년간  무신정권이 소멸 →[완전한 왕정복고]가 실행됨.
1 삼별초난
(대몽항쟁)
□ 1270.6.1 배중손(裵仲孫), 노영희 → 개경환도 거부하는 삼별초 무인
    현종8대손 승화후 왕온을 새왕으로 옹립 →   (
진도에 대몽항쟁 신정부 설립
)
① 1270.9 추밀부사 김방경+몽고원수 아해 → 전라도추토사
② 1270.11 삼별초 신정부 → 남방 제해권 장악 (탐라포함)
12 1271 2 진도 정복당함
옹립왕+배중손
전사 
③ 1271.5 김방경+흔도+홍다구 연합군 진도 공격 → 승화후 왕온, 배중손장군 사망, 진도의 신정부 정복 [남녀포로 1만여명]
13 1272 3 제주도로
삼별초
본거지이동
④ 김통정(金通精)을 수령으로 삼별초 재정비 (제주도로 본거지 이동)
14 1273 4 삼별초난 진압 ⑤ 1273.2 김방경+흔도+홍다구 연합군 탐라공격 →  (삼별초신정부 평정 진압 )
15 1274       □ 6월(원종사망)   ☆여.몽연합군 제1차 일본원정 :중군장(김방경)  

 

 

 

여몽전쟁 29년 간략사 (1231~1259)

1

 

시기 : 고종18   1231.8 ~ 1232.3

몽고군 총사령관   살리타이(撤禮塔)

고려군   서북면병마사 박서(朴犀)

삭주분도장군 김중온(金仲溫)

정주분도장군 김경손(金慶孫)

 

몽고군은 1231 89일 압록강을 넘어 고려에 대한 침공개시 철주를 함락시킨 몽고군은 93일 새벽을 기하여 귀주성에 대한 공격을 개시,새벽 안개로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가운데 몽고군을 귀주성을 에워싸고 나팔과 북을 울리면서 성벽에 접근한 다음 그들 총병력 2/3 6000명으로 성벽을 기어 오르게 하고 1/3 3000명으로는 말을 타고 성벽 주위를 쉴 사이없이 맴돌면서 궁시사격을 가하여 공격부대 엄호하는 전략을 가하며 대병력이 귀주성으로 밀어닥치자, 성내의 고려군 진영에서는 사기가 위축되어 전의를 상실했으나, 남문 수비를 맡고 있던 정주 분도장군 김경손은 몽고군을 기습하여 그 전열을 교란시켜야 한다고 판단하여,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들 가운데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칠 용기를 가진 자는 오른쪽으로 나서라!” 김경손의 비장한 호소에 격동되어 지원한 용사 12명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몽고군 부대를 기습하여 흑기를 들고 있던 몽고군 지휘관 1명을 사살하고, 적진에 뛰어들어 몽고군을 닥치는대로 무찔렀다.  전투도중 김경손은 팔에 유시를 맞았으나, 전투지휘를 계속하였다.

 

몽고군이 혼란이 일어났으며, 이때를 놓치지 않고 성내의 고려군이 일제히 성문을 열고 달려나가 몽고군을 공격하자 몽고군은 퇴각하였다. 그후 박서는 수성에 대한 전권을 김경손에게 일임하였다.

총사령관 살리타이는 누차, 대포차, 운제 등 갖가지 공성무기로 귀주(龜州)를 공격했으나, 서북면병마사 박서(朴犀)와 삭주분도장군 김중온(金仲溫), 정주분도장군 김경손(金慶孫) 등이 한 달여에 걸친 공방전(攻防戰) 끝에 물리쳤다. 그러나 살리타이는 진격을 계속하여 그 해 12월 개성을 포위하고 고려 조정의 항복을 요구하였다.

 

고려는 1225 1월 몽고사신 자꾸예(착고여)를 죽인 것은 고려가 아니고 금나라의 소행이라는 주장과 함께 황금 등을 주며 몽골군을 달랬고, 고려왕이 출성항복을 하지 않는 대신, 몽고에 다량의 예물과 군마 및 인질을 보내는 조건으로 12 23일 결국 화의가 이루어 졌다. (강화내용:..의복 말 1~2만필에 실어 보낼 것, 군사 1백만명분 의복. 대마.소마 각 1만필, 고관대작 어린 자제 1000명 보낼 것)

 

이때 몽골은 5000여명의 병력을 분산배치,고려의 40여 개의 성에 다루가치를 남겨두고 철군했는데, 이것은 계속해서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겠다는 것을 뜻했다. 이후 몽골은 막대한 물품과 사람들을 조공으로 바칠 것을 요구하며 고려를 괴롭혔다. 그러자 집권자 최우는 몽골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결심하고 철군시 남기고 간 다루가치 72, 잔류군사를 살해하거나 국경 밖으로 축출하고 수도를 강화(江華)로 천도하여 몽고와 장기적 항쟁을 다짐함으로써 몽고의 재침을 촉발하게 되었다.

 

2

시기 : 고종19   1232.8 ~1232.12

몽고군 총사령관   살리타이(撤禮塔)

고려군   승병 김윤후 

 

몽고 태종(오고타이)는 당초 고려에 대하여 조공을 받고 군신관계를 수립하는 선에서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적인 국교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이는 고려를 무력으로 위압하여 복속시킴으로써, 고려가 배후 위협세력으로 작용할 소지를 사전에 제거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몽고군 철병한 뒤 반년이 못되어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고, 몽고가 제시한 인적.물적 지원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몽고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의식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몽고가 서북변 제읍에 잔류시킨 다루가치와 잔류병을 축출하거나 살해하는 적극적인 공격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에 몽고의 태종은 마침내 1232 8월에 다시 살리타이를 총사령관 하는 기병 1만여기 규모로 고려를 재침했는데 이것이 제2차 여몽전쟁이었다.

몽고 측은 "너희는 교묘한 말로 우리를 설득하여 돌려보낸 뒤에 문득 마음이 변해 해중(海中)으로 들어갔으며, 불충한 송입장과 허공재 두 사람이 와서 황당한 말을 하였는데, 너희는 그런 사람의 말을 믿은 것이니 어서 해중에서 나오라."며 개경으로 돌아올 것을 요구했다.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고군은 이미 고려 조정에 압력을 가해 박서를 비롯해 제1차 여몽전쟁 때 몽고군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무장들을 제거한 뒤였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군사를 거느리고 개경과 남경을 지나 수원 쪽으로 진군하던 살례탑은 흙으로 쌓은 성을 하나 발견했다. 그 성은 처인성(處仁城)으로 주변의 백성들이 몽골군을 피해 들어가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살리타이는 즉시 공격을 명했다. 백현원의 승려로 당시 처인성으로 피난 와 있던 김윤후는 백성들을 독려하며 몽골군에게 화살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때 김윤후가 쏘아 날린 화살에 맞아 살리타이가 전사하고 말았다. 총사령관을 잃은 몽고군이 철수함으로써 몽고의 두 번째 고려 침략은 일단락되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고종(高宗)은 김윤후의 전공(戰功)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상장군(上將軍)을 제수했다. 승려에서 일약 무반 최고 품계인 정3품을 제수한 이러한 조치는 기존의 절차를 뛰어넘은 파격적인 조치였다.

하지만 김윤후는 "한창 싸울 때에 나는 활과 화살조차 없었는데 어찌 감히 이 같은 상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라며 사양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공로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기까지 했다. 고종은 할 수 없이 그를 섭랑장(攝郞將)으로 임명했다.

 

3

시기 : 고종22~고종25   1235.7~ 1239.3 (5년간) 

몽고군 총사령관   탕쿠, 고려의 반장 홍복원

고려군   죽주성 방호별감 송문주  

 

몽고군은 원수 살리타이가 처인성 전투에서 전사하자 반전된 전세를 계기로 재빨리 고려와 강화를 성립시키고 철수를 단행하였다. 고려와의 관계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몽고는 동진국, 금제국을 공략하는데 전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235년 남송 정복을 앞두고 고려의 배후를 제거할 목적으로 몽고군은 3차로 1235(고종 22) 7월에 몽고군 총사령관 탕꾸와 몽고에 투항한 고려의 반장 홍복원을 향도로 고려를 침공했다.

 

몽고의 제 3차 침입은 1239년까지 약 5년간 이루어 졌는데,몽고의 1~2차 여몽전쟁에서 고려 정복을실패함으로써 실추된 그들의 위신을 만회하기 위하여 대규모적이며 장기적인 무력공세였다. 고려에 가장 피해를 준 침입이었다.

 

경주의 황룡사 9층탑과 대구 부인사 대장경판이 이 때 소실되었다.

그 중 가장 격렬하였던 항쟁의 현장은 죽주성 전투였다. 1236 9 24,000명의 몽고군을 죽주성을 포위하였다.

당시 죽주성안에는 1000여 명의 군사밖에 없었으나, 방호별감인 송문주는 1차 침입시 구주성 전투에 참여한 용장이었다. 이 죽주성 전투는 여러모로 구주성 전투의 재판이라 할 수 있었다.

 

고종 23(1236) 고려 조정은 몽고에 항복하는 대신 집권자 최우는 불력(佛力)으로 몽골의 침략을 막기 위해 1236,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대장경을 조판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해인사(海印寺)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다. 고려는 이전에도 대장경을 조판한 적이 있는데, 현종(顯宗) 때 요여전쟁(遼麗戰爭) 당시 만들었던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과 선종(宣宗) 때 의천(義天)이 만든 속장경(續藏經)이 몽골의 침략으로 모두 불에 타 버려 다시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강화로 들어가 대몽항쟁을 벌이고 있는 고려에 항복을 기다리는 것에 지친 몽고는 1239년 화친하여 왕의 태자가 몽고에 입조하게 하였으나 왕족을 태자로 속여 보냈다.

 

당시 소려 지방 수비군의 전투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집단은 삼별초군이었다.

이 삼별초는 원래 고려 무신정권 집정자인 최우가 도적을 단속하기 위한 야간 순찰부대에서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야별초 1개 부대에서 그 조직이 분화되어 좌별초, 우별초로 규모가 커졌다.

 

그러던 중  1~2차 여몽전쟁중 몽고에 포로가 되었던 고려군이 대거 탈출 귀국, 몽고에 대한 적개심과 용맹한 자가 많아 특수 편성한 부대가 신의별초가 되어 삼별초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이때부터 삼별초는 대몽항쟁이 장기회됨에 다라 고려 최강의 정예부대로 성장하여 내륙 각지에서 항상 전쟁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1235년 남송 정복을 앞둔 몽골군은 3차로 고려를 침공하였다. 몽골의 제3차 침입은 1235년부터 1239년까지 5년동안 이루어졌는데, 그 중 격렬하였던 항쟁의 현장은 죽주성 전투였다. 1236 9 2 4000여 명의 몽골군은 죽주(竹州)성을 포위하였다. 당시 죽주성 안에는 1000여 명의 군사밖에 없었으나, 방호별감인 송문주(宋文?) 1차 침입시 구주성 전투에 참여한 용장이었다. 이미 몽골군의 전술을 훤히 꿰고 있던 그는 15일 동안의 치열한 공방전을 모두 물리쳤다. 이 죽주성 전투는 여러모로 구주성 전투의 재판이라고 할 수 있다.

 

4

시기 : 고종33   1247.7  

몽고군 총사령관   아무간, 고려의 반장 홍복원

 

1247 (고종 34)에 원수 아무간과 고려의 반장 홍복원으로 하여금 원정군을 이끌고 고려 침공을 단행, 이에 앞서 1246 10월에 선발대인 정찰기병대 400기를 수달 사냥이라는 구실로 고려의 방비상태 정찰(가장 취약한 곳을 공격한다는 칭기즈칸의 주요전략)

 

이러한 몽고군 작전기도로 단시일내 고려의 심장부인 강화도 부근 염주까지 진출, 은밀한 산악지대로 피신한 백성들까지도 철저히 추적하여 약탈과 살육을 자행함으로써 전쟁의 피해가 더욱 확대

그러나 고려측에서는 몽고군의 급속한 남진에 대응하여 내륙 각 지역의 전야를 초토화시키는 청야작전을 전개하여 몽고군은 극심한 곤경에 빠졌다. 

 

몽고의 이런 약점을 이용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교섭과  

몽고 3대 정종(?유크)의 돌발적인 사망으로 제위 계승문제로 몽고제국 내부의 정국이 또다시 불안해짐에 따라 곧 바로 철군을 개시하였다.

 

5

시기 : 고종40   1253.7 ~ 1254.1 

몽고군 총사령관   예꾸

고려군   충주산성 방호별감 김윤후

 

고종 40(1253)7, 몽고의 헌종(칭기즈칸장자-몽케)은 예꾸를 총사령관으로 한 원정군으로 고려를 침공하였다.

이때 고려는 강화도와 내륙 각지의 방어태세를 강화하여 몽고군과 장기항전을 전개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1253, 해전에 익숙하지 못해 강화도를 공략할 수 없었던 몽고군은 대대적인 내륙 공략에 나섰다.

국토를 짓밟고 백성들을 유린하며 남진을 계속하던 몽고군은 삼남 지방으로 통하는 길목인 충주성에 이르렀다. 이때 김윤후는 충주성 방호별감으로 있었는데, 성 안의 모든 사람들과 힘을 합쳐 몽고군에게 저항했다. 몽고군은 충주성을 포위한 지 70여일이 지나도록 이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몽고군에게 포위당해 있다 보니 군량이 보급되지 않아 식량이 바닥나고 말았다. 격렬하게 항전하던 사람들의 사기는 저하되었고 성이 함락되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다급한 상황에 놓이자 김윤후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독려했다.

 

"힘을 다해 싸운다면 훗날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벼슬을 내릴 것이다."

 

또한 김윤후는 관청에 보관된 노비 문서를 끄집어내어 불사르고, 노획한 소와 말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말에만 그치지 않고 직접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에 용기를 얻은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있는 힘을 다해 싸우자 몽고군의 사기는 차츰 저하되었고, 마침내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 전공(戰功)으로 김윤후는 이듬해 1254 2, 감문위 상장군에 올랐고 그와 함께 끝까지 충주성을 지켜낸 사람들은 관노와 백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벼슬을 제수 받았다.

 

이와 같은 고려군의 끈질긴 저항으로 말미암아 전쟁이 장기화 될 추세를 보이면서 전황도 몽고군에게 점차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따라서 예꾸는 고려 국왕의 출륙환도와 강화도 성곽철거, 인질의 파송 등을 조건으로 하는 화의조건에 합의를 보고 1254.1월 철군단행 하였다.  이는 전세가 이미 기울어져 호전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일단 퇴각하였다가 전열을 재정비한 후 고려를 재 침공하려는 몽고군의 책략이었을 뿐, 진정한 평화를 의미하는 강화는 아니었다.

 

☞ 몽고제국은 칭기즈칸이 세계 정복사업을 시작한 이래 헌종 몽케에 이르기까지 50여 년동안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 및 유럽 일대의 수많은 국가들을 멸망시켰다. 이와 같이 수많은 국가들이 멸망의 비운을 겪는 가운데, 국체를 유지한 것은 오직 고려와 남송(南宋) 뿐이었다. 따라서 몽고는 고려가 스스로 굴복하지 않는 그 자체를 몽고 제국의 체면이 손상되는 수치스러운 사실로 인식하게 되었다.

몽고제국의 전통적인 대외정책 목표는 상대국과 평화적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몽전쟁은 장기전의 양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항상 재발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다만 침략국가인 몽고와 고려가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양국의 이해관계가 합치되는 선상에서 일시적인 휴전을 성립시켰을 뿐이다.

 

고려는 1254 1월 예꾸가 철군한 직후, 110일에 강화도에 계엄을 해제하면서, 예꾸군에게 항복한 천룡산성 방호별감 조방언, 황려현령 정신단을 유배하고,반역행위한 전 추밀원부사 이현을 극형에 처하고, 유사한 실책을 범한 기타 제읍(諸邑)의 수령들에게도 중벌을 내리고 해당 군.현을 하급 행정단위 강등, 폐지하는 등 강력히 조치를 취하였다.

 

6

~

9

시기 : 고종41   1254.7 ~ 1259.3

몽고군 총사령관   지랄타이(1-6) 1254.7 ~ 1255.2

                     지라타이(2-7) 1255.8 ~ 1256.10

                     지랄타이(3-8) 1257.5 ~ 1257.10

                     지랄타이(4-9) 1258.6 ~ 1259.3 

 

[지랄타이 1차 침입]   6차 침입

1254(고종41) 7 22, 몽고의 정동원수로 임명된 지랄타이는 예쑤타이, 보포타이, 홍복원 등의 부장들과 함께 기병 5000기를 거느리고 고려로 진격, 압록강으로 도하함으로써 침공.

몽고군은 고려 국경 진입에 앞서, 서해도-경기도-충청도 일대에 척후기병대를 진출시켜 고려 중부 이남의 내륙지역에 대한 교란작전을 전개하여 본대 작전행동을 제한할 가능성이 있는 요소들을 제거.

몽고군 척후기병대는 86일 광주로 진출, 이천-장호원-음성을 거쳐 820일 충청도 괴산까지 진출하여 고려 내륙 일대에 대한 철저하고 무자비한 약탈과 살육을 감행하였다. 산원 장자방이 별초군을 거느리고 이를 기습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몽고군 척후기병대 격멸됨.

(장자방은 1253 11월에 교동의 별초군 교위로서 평주에 주둔하고 있던 몽고군 본진에 대한 야간기습을 감행하여 몽고군의 위세를 크게 실추시키고 퇴세에 몰린 고려군의 사기를 드높인 유능한 지휘관임)

 

지랄타이 본군을 822일 개경을 거쳐 고려 임시수도 강화도 공격태세에 들어갔으며. 다시 이동하여 914일에는 충주에 도착하여 1253년 예꾸군이 함락시키지 못한 충주성 포위공격 개시, 충주성은 4면에 발석차.운제.당차 등 고성능 공성 장비를 배열하고 대대적으로 공성전을 개시했으나 갑자기 휘몰아 친 폭풍우로 인하여 큰 혼란에 빠지자, 고려군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져 갔다.

 

고려군이 돌연한 기상의 변화를 틈타 맹렬한 공세를 취하자 몽고군을 더 이상 그 대오를 유지하지 못하고 충주이남 문경,점촌,상주로 남하하였다.

10 19, 몽고군은 상주산성으로 진출하여 성에 대한 포위, 공성준비가 거의 끝날 무렵, 함창 서쪽 30여리에 위치한 황령사의 승장 홍지가 수백 명의 승군을 거느리고 상주산성으로 오던 중, 몽고군의 배후를 기습공격하여 큰 혼란에 빠지자 상주산성 전병력을 일제히 출진시켜 몽고군은 전후 양면의 협공으로 막대한 병력 손실당한 채 대구를 거쳐 합천 방면으로 서둘러 남진, 그리하여 12월 초순부터 경상도 내륙 산간벽지에 대한 철저한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기 시작하였다. 

 

지랄타이의 요구 ? 고려국왕 출륙환도, 몽고식 두발을 하지 않으면 국왕을 몽고로 압송할 것임

 

경상도 남부지역 내륙 깊숙히 진출하여 이 지역 일대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일념으로 고려 전국을 유린, 포로 20만명 (살해된 고려인은 더 많았음)

고려는 몽고와 적극적인 교섭에 의하여 국왕인 고종과 집정자 최항의 동시 출륙을 조건으로 하여 강화를 성립시키고 몽고군 주력부대를 일단 경기 이북지역까지 철수하였으나 강화 실행 여부를 놓고 여.몽 양측사이 마찰로 결렬, 그러나 몽고군 자체내 사정으로 철군  

 

 

[지랄타이 2차 침입] 7차 침입

1255(고종 32) 8월 초순 2차 침입하여 8 24일 개경부근 당도, 주력부대는 충주를 통과하여 10 2일 영남.호서 주요 통로임 대원령 점령하였으나 충주성 정예병의 매복 기습하여 경상도 방면 패주하여 문경-상주-김천-성주를 거쳐 1256 4월 초순 현풍까지 진출하여 이 일대를 유린한 다음 4월 하순경으로 충주성으로 북상,  몽고군의 본군은 평택-공주-전주를 거쳐 1256년 초에 전라도 방면을 집중 공격 4월 초순 지랄타이는 담양으로 진툴 3개월 주둔하고 있다가 7월 광주 무등산으로 주둔지 이동(전라도 서남해안 지역 약탈과 살육 자행)

 

다시 북상하여 8 23일 강화도 대안 일대 집결, 충주지역의 선봉부대도 서둘러 집결하여 강화도에 위기가 고조되는 시점 9월 하순 몽고 헌종(몽케)의 갑작스런 철군명령

 

지랄타이 몽고군은 막대한 병력과 장비의 손실만 입었을 뿐, 고려의 출륙환도,고려국왕 입조 어느 한가지도 목표도 달성하지 못하고 철군

1256 6월 몽고 사신으로 파견된 김수강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이 주효한 결과였다.

김수강은 몽고군이 철군하면 출륙과 입조를 실행하겠다고 몽고 황제 헌종을 설득하였으며, 그에 따라 철군하였다.

 

[지랄타이 3차 침입] 8차 침입

1256 (고종 43) 10월 지랄타이의 몽고군 철수 이후에도 고려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1257년 몽고에 하정사 마저 파견하지 않자 몽고의 감정을 크게 자극하여 재침을 유발.

 

1257년 고려는 몽고군이 침공을 재개하자, 5 20일 전국의 제성에 방호별감을 급파하여 몽고군과 항전대비,529일 강화도 일원에 계엄을 선포. 몽고군은 7월하순 강화도 대안 일대 진입, 강화도 고립시키고 내륙일대의 인적.물적 자원을 완전히 고갈시키려고 하였다.

몽고군도 수상작전을 수행 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함으로써 고려를 위협하여 조속한 항복을 유도해 내려는 무역시위의 성격을 띤 군사행동 이었다.  이와 같이 몽고군의 전략이 변화하던 시기에 고려 조정 내부에서도 점차 그 여론에 변화의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고려 고위 관료들은 몽고와의 평화가 보장된다면 태자는 몽고에 입조하도록 하자는 의견을 내세우면서 몽고와의 강화에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와 아울러 개경으로의 출륙환도와 몽고에의 항복 문제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 논의를 제기하여 이를 수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더욱이 1257(고종 44)에 최씨 무인정권의 제3대 집정자 최항을 이어 제4대 최의가 집권하였으나, 내외적인 압박으로 말미암아 그 기초가 흔들리게 되었다.

문인 관료집단이 무인정권의 대몽 강경노선이 심각한 도전을 받게되고 화평론자들의 주장대로 태자의 입조를 조건으로 항화 성립시키고 몽고군 철수하였다.

일단 몽고군 철수하자, 고려 조정은 태자의 입조에 대신하는 절충책으로서 고종의 2왕자인 안경공 왕창을 몽고에 파견하여 입조를 이행하기로 결정하였다 .

 

[지랄타이 4차 침입] 9차 침입

고려는 1258(고종 45) 3, 최씨 무신정권 63(1196~1258)간의 체제가 대사성 유경, 별장 김인준에 의해 타도되고 국왕의 친정체제가 복구되는 정치적 변혁 맞이함.

무장 김인준(김준)을 중심으로 한 대몽 강경주의자들 태자 입조를 반대하고, 대몽무력항쟁 계속할 것을 주장하여 또 한차례 몽고의 침입을 유발하게 되었다.

1258(고종45) 4월 자랄타이 군사행동 시작하여 11월 하순경 개경 이남지역까지 남진한 다음, 이듬해(1259) 봄에 이르기 까지 강화도 연안일대, 경기도 및 서해도 지역 일원을 철저히 유린하게 되었다.

강화도 고려 조정은 몽고군의 강화도 연안 내륙지역에 대한 초토화 전술로 말미암아 내륙으로부터의 지원이 완전히 봉쇄되자, 강화도를 거점으로 한 대몽항쟁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259(고종 46) 3월에 대장군 박회실을 몽고군 본진에 파견하여 몽고 원수 자랄타이와 회견하고 강화교섭을 벌이게 하였다.

 

38일 산원 박천식의 안내로 강화도에 도착한 몽고 원수 자랄타이의 사자가 태자의 입조만의 조건으로 몽고군 강화하여 몽고군 철수하여 여몽전쟁이 완전히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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