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몽전쟁 29년 간략사 (9차침입) (1231~1259)
여몽전쟁 발발의 역사적 배경
① 고려가 몽골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 것은 1216년, 100여년 만에 다시 침략해 온 거란족(契丹族) 때문이었다. ② 당시 금나라와 몽골에 쫓기고 있던 거란족은 자신들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고려를 공격해 왔다. ③ 거란이 개경 근처까지 밀려들어오자 고려는 조충(趙沖)과 김취려(金就礪)를 보내 이들을 물리치게 하고 금나라, 몽골과 연합군을 구성하여 1219년에 거란의 항복을 받아냈다. ④ 이 와중에 집권자 최충헌(崔忠獻)이 죽고 그의 아들 최우(崔瑀)가 권력을 잡았다. ⑤ 그 후 1225년 몽골의 사신 착고여가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도적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몽골과의 평화적 관계가 깨지고 말았다. ⑥ 몽골은 착고여의 원수를 갚는다는 이유로 1231년 8월 고려를 칩입했는데, 이것이 제1차 여몽전쟁(麗蒙戰爭)의 시작이었다.
여몽전쟁의 특성
여몽전쟁(麗蒙戰爭)은 고려가 북방 유목민족인 몽고족의 짐입에 맞서서 1231년부터 1259애 이르기까지 29년에 걸쳐 항쟁을 전개한 전란이었다. 여몽전쟁은 고려시대는 물론 우리 민족의 5000년 역사에서도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장기간 걸쳐서 지속된 전란이었으며, 국지전의 형태가 아니라 내륙 전역에 널리 파급되었다는 점에서 종래의 대외 항쟁과 또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몽고는 고려의 영토를 점령하여 그들 제국의 판도를 확대시키려고 고려를 침공한 것은 아니었다. 세계적인 대제국 건설을 위한 정복사업의 일환으로 중국대륙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대중국전략의 효과적인 달성을 위하여 고려에 대한 침공을 병행하였다. 그들은 명분상으로 고려를 자국의 영향권 아래에 둠으로써 배후의 위협이 될 소지를 해소시켜 대중국전략을 과감하게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고려를 침략하였던 것이다. 여몽전쟁에서 고려는 전 국토를 몽고에게 유린당하고 강화도라는 일개 海島에 의지하여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국왕이 끝까지 出城降伏을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국가적 체통이 손상당하지 않는 선에서 전쟁을 종결 지은 보기 드문 사례이기도 하였다. 일찍이 한반도에는 삼국시대 이후 이민족 빈번한 침략이 있었지만, 여몽전쟁처럼 전 국토가 적에 유린된 사례는 없었다. 고려는 불굴의 항쟁과 능숙한 외교적 수완을 적절히 배합한 양면작전을 구사하여 出城降伏이라는 치욕을 당하지 않고 승자와 패자를 분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전쟁을 종결 지을 수 있었다. 또 하나의 특성은 몽고족의 세계정보사상 유례를 보기 드물게 고려를 멸망시키거나 병합하지 못하고 고려의 국체를 그대로 인정해 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고려 군민의 강렬한 항전 의지와 지도층의 외교적 노력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 얻어진 성과이다. 고려는 몽고와의 장기항전으로 몽고군을 곤경에 빠뜨림으로써 몽고가 고려의 이러한 抗爭樣式을 묵시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 것이었다. 그 결과 “몽고군의 공격 앞에 항복하지 않는 국가는 지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는 몽고족의 세계정복사상 초유의 이례적인 현상을 후세에 남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여몽전쟁의 종식과 함께 고려는 몽고와 대등한 형제지국의 관계에서 한층 예속성이 강한 일개 제후국으로 전락하게 되고 말았다. 또한 몽고는 충렬왕 이후부터 역대의 고려 군왕을 몽고제국의 부마로 삼아 몽고와 혈연적인 종속관계를 맺도록 함으로써 고려에 대한 속박을 장기화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는 이후 100여 년간에 걸쳐서 몽고의 간섭과 압제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인은 장기간의 대몽항쟁을 통하여 싹트게 된 몽고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면서 우리민족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지키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29년간의 여몽전쟁을 통하여 힘의 한계를 절감하고 외면상으로 몽고와 타협하여 몽고의 무력 압박을 완화시킴으로써 국력의 회복과 민생의 안정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가 몽고와 평화적인 곡교관계를 회복하였다는 것만으로써 근본적으로 대몽항쟁의식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려가 몽고와 타협한 것은 몽고의 무력 위압을 완화시키기 위한 일시적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다. 고려인들은 양국의 평화적 관계가 회복된 이후에도 정신적으로 여.몽전쟁에서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삼별초의 항쟁을 통하여 자주성 회복을 위한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구국항쟁 의식은 후대에까지 연면히 계승되어 공민왕(1351~1374)대에 반원자주회복운동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고려중기 군사편제
여몽전쟁 29년 간략사 (1231~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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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NAISSUS 나이수스 원문보기 글쓴이: 나이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