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대표적 골목마을로 널리 알려진 동구 송림산(수도국산) 아랫마을인 송림초등학교 주변 이 뉴스테이 사업지구로 선정이 되면서 유명했던 골목도 조만간 사라질 운명에 놓여있다.
송현동에 배수지 생긴 뒤부터 수도국산(水道局山)이라 불려
잘 알려지지 않았던 송림산을 먼저 주목한 것은 일본이었다. 동경제국대학 전염병 연구소 인천출장소인 두묘 제조소를 인천 송림리의 산꼭대기에 자그마한 서양식 건물을 짓고 설치하면서 송림산을 두묘를 추출하는 소목장으로 선택했다.두묘제조소는 일본에도 없고 오직 조선에만 있는 것으로 이곳에서 생산되는 두묘는 품질이 뛰어나 세상에 보기 드물어 일본 전역은 물론 중국 미국에까지 수출하였던 현재의 바이오산업의 원조였다. 일 년 동안의 수출액은 3백만명 분으로서 병원에서 사용하면 350만~360만 사람에게 접종할 수 있는 분량이었다. 두묘제조소는 일본 문부성에서 직접 경영하였으며, 봄, 가을 2회에 걸쳐 일본 문부성에서 기사를 파견하여 관리하였다. 소 한 마리에서 원묘를 약 20g 제작할 수 있는데, 이것을 1천 개의 시험관에 넣으며 시험과 하나의 분량으로 50명에게 접종할 수 있다. 한 번에 취급하는 소의 두수는 3백 마리 쯤이다. 그런데 시험관 하나의 값이 5전이라 하면 1천 개의 값, 즉 소 한마리에서 50원, 3백 마리에서 1만 5천원을 얻을 수 있다. (향토조사자료하p438)(인천학 자료 총서 이마이 이노스케)두묘 - 두창에 걸린 소에서 뽑아낸 유백색의 우장(牛漿). 천연두 백신의 원료두묘제조소는 일본인들이 철수한 후 동명초등학교에서 사용하였다.
일본이 송림산에 눈독을 들인 또 하나의 이유는 수도국 배수지의 필요성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을 치르면서 일본군인들에게 가장 괴로움을 준 것은 러시아 병사들이 아니라 수인성 질병이었다. 수인성 질병의 특효약으로 개발 된 것이 지금도 우리가 배탈이 나면 애용하는 정로환이다. 러시아를 정벌하기 위해 개발된 약으로 현재와 같은 正露丸이 아니라 征露丸이었다고 하는 말들도 있었다. 지금도 일본인들이 해외여행을 할 때 빼놓지 않고 챙기는 것이 배탈이 날 때 비상약처럼 사용하는 우메보시다. 우물물을 식용으로 사용하던 당시의 인천으로서는 수인성 질병을 유발하는 전염병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기에 일본인들이 장기적으로 인천에 터전을 잡기 위한 안정적인 상수도 시설의 도입에 관심을 보인 사람은 당시의 통감 이토 히로부미였다. 송현배수지 제수변실은 1905년 일본인 나까지마 박사에 의해 경인수도 설계를 완성했으나 당시의 대한제국의 자금 사정으로는 상수도 매설공사는 어려웠다.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 정부에 일본 흥업은행의 차관 도입을 강요하여 이 자금으로 당시 경기도에 수도국을 신설했다. 설계가 완성된 이듬해 인천 이사청에 수도관 매설공사 지시가 내려왔고, 1906년 11월 착공해 1908년 준공되었으나 수원지인 노량진 수원지 정수시설이 완공되는 12월부터 인천에 급수를 시작한 것이 인천에 상수도가 보급된 시초다. 송현배수지는 송림산, 또는 만수산이라고 불리던 곳에 야트막한(해발 56.8m) 데 위치하고 있다. 사람들은 배수지 시설이 들어선 후부터 수도국산(水道局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부지면적 3만6천780㎡에 5천㎡급 저수조 3개를 갖추고 있으며, 현재는 제수변실과 23단의 화강석으로 된 장대석 계단, 철제 정문이 있다. 지금 이곳은 인라인스케이트장과 공원과 여름 물놀이, 또랑 등을 조성해 인근지역 시민들의 여가생활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인천항만의 급수 기관인 인천수도(水道)는 펌프식으로 설계되어 있고, 옛 한국정부의 사업으로 1906년 11월, 240만여 엔의 돈으로 공사에 착수하여 1910년 12월에 공사를 준공시켰으며 노량진에 수원지를 설치하였다. 현재의 설비로는 충분히 7만 인구를 상대로 물을 공급할 수 있다. (인천항 상공업 조사 일반정황 4)
배다리 시장 주변은 기회의 장으로 변모이미 목장으로 조성된 송림산이 있었고 보건위생이 정비되어 하수 시설이 되어있었던 송림리에 민간인들에 의한 산업도 시작되었다. 인천 「햄」 제조는 ㅇㅇㅇ 상회를 비롯하여 공장주 호우리 지로오(母里春次郞)씨가 조선에서 양주개발을 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는 조선 각지를 시찰하고 인천이 제일 적합하다고 여겼다. 1914년 7월에 시내 송림리에 제조업을 시작하였다. 점차 판로를 확장하여 현재 조선은 물론 다렌, 상하이, 사라(斯羅) 등지까지 판매하고 있다. 자본금은 1천500원이고 기술자는 내지인 1명과 직원 21명을 고용하였다. 연간 생산액은 약 1만5천원에 달한다. (향토조사자료p142)인천 ‘햄’제조는 HB상회 공장주 모리지로오(母里春次)가 조선에서 양주(洋酒)개발을 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는 조선 각지를 시찰하고 인천이 제일 적합하다고 여겨 1914년 7월 인천부 송림리에 제조업을 시작하였다. 점차 판로를 확장하여 조선은 물론 다렌, 상하이, 연대 등에 수출하였다. 기술자는 내지인 1명과 직원 21명을 고용하여 연간 생산액은 약 1만5천원에 달했는데 이런 종류의 제작소는 조선에서의 효시라 하겠다. (인천학 연구원)
▲ 뒷쪽의 산이 수도국산이며, 빙판의 위치는 지금의 현대극장이 있는 송림오거리이다.(인천고100년사)
섭도포의 물길이 끝나는 곳 배다리를 매립하기 위해 깎여진 송림산 자락 끝 언덕에 1895년 6월 창립된 관립 외국어학교 인천지교는 1904년 관립 인천일어학교로 개칭하였고, 1909년 관립 인천실업학교를 거쳐 1912년 3월 인천공립상업학교가 신설되었다.
▲이 골목을 중심으로 왼쪽이 뉴스테이 사업지구로 되어있다.
▲ 한 떄는 등하교 길에 붐비었던 헉교 옆 분식집
송림산의 남쪽으로는 송림동 성당이 자리잡았다. 아름다운 이 마을의 기와집들과 어울리는, 마을 공동체와 함께하는 성당을 짓고자 했던 이희태 건축가의 꿈에 부합하도록 송림동 성당은 이 마을과 희노애락의 역사를 함께 해오고 있다.
▲ 송림동 성당 아래 남아있는 한옥마을
현재의 송림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배다리 시장이 형성되어가면서 시장 일대는 기회의 땅이 되었다. 1945년 이전부터 인천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상권의 중심지였던 이 일대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취급하는 품목들이 바뀌어갔다. 수도국산으로 피난민들이 몰리면서 몸을 누일 수 있는 집을 지어야만 했기에 집을 건설하기 위한 자재상들과 집기들을 파는 가게들이 몰려들었다.
가구점 정인방을 운영하는 최 사장도 4대째 이 장소에서 장사를 하면서 살고 있지만 처음 선친이 이곳에 자리 잡았을 때는 유리를 파는 가게로 시작하였다고 한다. 유리 도매상은 경동 싸리재 초입에서 현재의 컨벤션 웨딩홀 사이에 3군데가 있어 판유리에서 생산된 물건을 공급하였다. 경동에는 거울 만드는 공장도 있어 사면으로 수은을 굴리며 만들어지는 신기한 거울은 지나가던 동네 꼬마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건축자재인 유리를 판매하던 가게는 세월이 흐르면서 집을 장식하는 가구를 판매하는 가게로 바뀌며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업종 전환을 하였다.
화도진 대로변을 따라 뚫려있는 두 개의 방공호를 뒤로하고 노점상들이 하루하루의 먹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자리를 폈다. 이들의 삶의 근거가 되었던 2층으로 된 2개의 방공호의 내력을 알 길이 없지만 두 방공호의 사이의 건너편이 금곡동과 송현동 송림동을 가르는 개천을 매립한 길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매립을 위해 송림산을 깎아 내다가 남긴 흔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노점상에 주로 내다 판 것은 헌옷들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들어온 구호물자와 미군부대에서 나온 군복과 담요를 팔었고 헌옷들을 수선하는 옷 수선집들이 배다리 시장 한 켠에 자리 잡았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군용담요도 입을 것이 변변하지 않았던 그 시절, 염색을 하여 의복으로 만들기 위해 재봉틀을 필요하게 되자 재봉틀 가게들이 배다리 시장에 자리 잡았다.
▲ 두개의 방공호 중 부산비닐에서 창고로 사용하는 방공호
송림동의 3대 부자는 독장사, 목욕탕 그리고 떡방앗간
송림동의 3대 부자인 독장사와 목욕탕, 떡방앗간이 마을의 중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그 주위로 노점상들이 자리 잡았다. 인천 어느 곳에서든 항아리를 사러 이곳의 독집을 찾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송림동의 3대 부자에 들었던 독집 사장은 당시 서곶에 있던 항아리 굽는 가마를 운영하기 위한 재료를 모두 공급해 주면서 가마에서 생산된 항아리를 독점하여 팔았다.
▲길이 나면서 없어진 독집의 흔적이 토기상회로 남아있다.
▲ 송림동 3대 갑부에 들었던 떡집은 아직도 영업을 하고 있다.
▲ 목욕탕이 송림관이라는 음식점을 하다가 문을 닫았다.
인천교를 건너 서곶 가마에서 배다리까지 트럭으로 물건을 수송해 이곳에서 팔았다. 부평옥도 이 마을과 역사를 함께해 온 가게 중의 하나다. 오류동에서 왔지만 본관이 부평이씨라 부평옥으로 상호를 지었다. 송림관 옆의 해장국 집 오류동에서 먹고 살 거리를 찾아 인천으로 온 초대 사장이 길거리에 솥을 걸고 배다리 시장에서 장사하는 노점상과 행인들에게 국밥을 판 것을 시작으로 3대를 이어오면서 송림동 일대 뿐만이 아니라 인천, 서울까지도 숨은 맛집으로 명성을 떨쳤다. 현재는 사장이 다리를 다치면서 영업을 쉬고 있어 이곳을 찾던 단골손님들에게 아쉬움을 주고 있다.
이미 송현동에서 노천극장인 평화극장을 하다가 미림극장을 지으면서 이 일대의 유지로 부각된 고씨 집안도 이곳에 자리를 잡고 집을 지었을 정도로 해방 이전부터 이 일대는 멋진 기와집들이 많아 산꼭대기에서 살던 우리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영화여중고교 6년을 다니면서 특별히 친했던 6명의 친구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지금은 미국에 살고 있지만 수도국산 꼭대기에 살던 친구 어머니는 전쟁 중 남편을 잃고 자식들과 장사를 하면서 살다가, 북에 가족을 두고 혼자 나오신 친구 아버지를 만나 함께 살면서 송림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셨다. 두 분 사이의 자식은 내 친구 하나였고 어머니 쪽에서 난 형제들은 이미 장성하여 결혼하여 집에는 아무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목수 일을 하였던 아버지나 생선 장사를 하였던 어머니가 항상 늦게 들어와서 마음 놓고 놀 수가 있어서 자주 갔다. 부침개를 부쳐 먹거나 수제비를 만들어 먹으면서 수다를 떨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면 송림초등학교 동창생과 일찍부터 연애를 하던 그 친구는 송림초교 근처에 살던 남자친구의 집까지 같이 가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수도국산 빨간 언덕을 타고 내려오다 보면 골목 사이에 번듯한 기와집들이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미로 같던 골목길은 도로가 넓어지면서 사라졌지만 옆으로 한발자국만 들어가도 그 당시의 거미줄 같은 골목길들을 아직은 찾아볼 수 있다. 집 주인들은 거의 떠났고 돌보지 않는 집들은 허물어져간다.
유난히 이재에 밝았던 이 친구는 서울 내자호텔 경리과에 근무하면서 미군 장교들이 교환한 달러를 양키시장 암달러상에게 팔았다. 벌집 같은 가게들 사이를 누비면서 보았던 양키시장은 지금과 달랐다.
▲ 미림극장 사장집과 도로가 개설된 그 일대
대량생산 시대에 맞춰 미싱, 전자제품 판매점 늘어
전쟁 전후 시대에 태어난 우리 세대에게는 문명의 이기라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간신히 전기가 들어왔을 때도 신기했지만 이후 전자제품의 보급은 생활 그 자체를 변화시켰다. 전화가 놓였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기를 반짝반짝하도록 닦아놓고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렸다.
TV, 냉장고, 세탁기 삼종 세트, 냉장고의 보급으로 항아리 장사는 사양길에 들어섰지만 주부들이 정성스럽게 가꾸어야 했던 임무중의 하나인 장독대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왔고, 세탁기의 보급은 빨래판으로부터 주부들을 자유롭게 했다.
배다리 시장도 시대에 맞추어 변화하였다. 항아리가게나 집안에서 사용되는 소품을 취급하던 가게들이 미싱가게나 전자제품 등을 파는 도매상가로 바뀌어갔다. 전자제품 가게의 시작은 현재의 배다리 전자 자리에서였다. 기회를 찾아 인천 배다리 시장으로 온 사람이 이 가게를 얻어 전자제품을 팔았다.
TV, 냉장고, 세탁기를 생산하는 대회사 제품을 취급하기는 어려웠지만 중소기업에서 생산하는 전자제품들을 팔았다.
한일, 신일 등 중소기업의 가전제품들이 직원들 월급을 주는 날이 다가오면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거의 덤핑가격으로 배다리 시장에 납품되었다. 현찰을 주고 물건을 한꺼번에 들여놓고 제값을 받고 전자제품의 구매를 원하는 소비자에게 팔았다. 2층에서 당구장을 하던 건물주인은 전자제품을 파는 것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세입자를 내보내고 자신이 직접 전자제품 가게를 하였고 형제들도 차례로 배다리 일대에서 전자제품을 취급하는 가게를 운영하였다. 현재의 젠트리피케이션이다.
예전엔 누구나 난로로 겨울철 난방을 했다. 함석을 접어 난방에 필요한 부속을 만들던 이웃 가게 주인도 별로 돈이 안 되는 함석 보다는 난로를 팔다가 전자제품까지 취급하게 되었다.
대기업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쓰던 당시의 중소기업들이 살아남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거래를 했던 배다리 전자제품 도매상가는 또 하나의 기회가 아니었을까?
배다리 전자도 뉴스테이 사업으로 사업장을 배다리 삼거리 지성소아과 옆 우리약국 건물로 이전한다. 뉴스테이 사업이 끝나면 다시 배다리 가게로 다시 와서 장사를 계속하실 생각이 있는지 물었는데 그럴 생각은 없다고 하신다. 현재는 인터넷으로 전자제품을 거래하기 때문에 그다지 재미가 없다고 한다. 저소득층들은 겨울철이면 난방을 위해 전기장판과 전기난로를 필요로 하기에 그런 분들이 주로 이용한다.
조선인들도 모진 바람에도 배다리 시장 굳굳이 지켜
현재의 배다리 상가의 구성은 비닐가게가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천막과 비닐은 아직 사양산업은 아닌 것 같다. 비닐의 사용처도 마트에서 사용하는 검정비닐에서 농업용, 산업용, 건축용 등 안 쓰이는 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요즘은 겨울철 보온비닐까지, 새로운 제품이 개발되는 것으로 보아 당분간 도태될 위험은 없는 것 같다.
뉴스테이 사업으로 사업장을 옮겨야 하는 인천비닐도 배다리 삼거리 솥가게 옆 옛 명성그릇 건물 1층을 반으로 나누어 세를 얻어 이사했다. 나머지 절반의 가게를 인천 천막에서 세를 얻어 간판은 인천비닐, 인천천막이 되어 서로가 시너지 효과를 얻을 것 같다고 기대가 크다. 인천비닐은 가족 경영이다. 자제분들도 함께 장사를 돕고 있어 배다리에서 대를 잇는 기업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배다리는 개항 초기부터 기회의 땅이었다. 먼저 눈독을 들인 것은 일본인들이었고, 대 자본으로 일본 정부의 비호아래 기업을 경영하였지만,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조선인들은 모진 바람에도 뽑히지 않는 잡초처럼 배다리 시장을 중심으로 근거지를 확보하였다.
해방 이후, 전쟁 전후를 거쳐 산업화시기에 이르기까지 기회를 찾아 인천을 찾은 사람들은 배다리에서 변화하는 사회를 보았고, 앞선 정보로 새로운 자신의 길을 개척하여 인천 전역으로 또 전국으로 흩어져갔다.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던 세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확신하던 시기, 무언가 용광로처럼 들끓었던 호기심은 이미 사라졌다.
이제 배다리는 새로운 변화를 위한 진통을 하고 있다.
뉴스테이 사업으로 기회의 땅 배다리가 활기를 잃고 노쇠한 원도심에 또 다시 활력을 불어 넣어 줄지, 아니면 베드타운으로의 전락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실험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지금까지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주는 기회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글, 사진 장회숙 ‘도시자원연구소’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