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에 이토록 아름다운 성소가 있을 줄이야
단 한마디만을 강요했다. 배교, 신앙의 결별 그것은 생명의 유혹이었다. 혹독한 강요와 달콤한 손길 너머에는 검은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진실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섰다. 지난 105일 동안 태장에 곤장으로 곤죽이 돼 있었다. 죽을죄에 친다는 중곤 곤장은 하루도 피해가지 않았다. 크고 작은 가시나무 회초리가 볼기를 할퀴었다. 핏떡 엉덩이에 섣달 칼바람이 다시 후벼 팠다. 하나 둘 백기를 들었다. 그들은 간절하게 간구했다. 쇳덩이처럼 진중하게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녹음도 비켜서 햇빛 짱짱한, 너른 잔디밭 모서리에 조각상이 보인다. 흙 담과 대나무 밭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 그 끝자락에 서 있었다. 청 잔디에 아무렇게 쇳물을 떨어뜨려 만든 듯한 투박한 작품이다. 떨어져 보면 마치 바위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신자 같다. 등을 약간 구부리고 시선은 땅에 접해있다. 두 손은 맞잡아 가지런히 무릎에 놓았다. 처연하나 비굴하지 않고, 곧으나 배타적이지 않아 보인다. 순교자의 기도상-. 신옥주 作. 조각상은 자연스럽게 건너 건축물로 이끈다.
이 동네, 마한시대 고분 모양새다. 2m 높이의 봉분을 반으로 자른 듯하다. 입구는 나지막한 3단 돌계단 위에 있다. 어른 한사람이 들어설 1m 너비다. 입구 양쪽에 20톤짜리 돌을 세웠다. 들고 나가는 이 자리에 가로 3m, 세로 1m의 돌이 가로 막는다. 네모반듯한 돌덩이로 60톤이란다.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캄캄해졌다. 불빛이 없다. 6월의 신록조차도 제 빛을 잃었다. 벽도 검다. 가로 세로 6m, 높이 2.7m, 사각 암실이다. 천장도 검은 페인트다.
시간이 지났다. 하나 둘 윤곽을 그려낸다. 정면에 제단이 있고, 벽 아래에 기다란 의자가 놓여 있다. 희미하게 벽감 속에 놓여 있는 등잔이 보인다. 서양에서 벽을 움푹하게 파고 거기에 촛대나 꽃병을 장식하는 니치(niche)같다. 말이 줄더니 소란스런 언어들도 사라졌다. 신자, 불자, 성도가 아니라도 정갈해진다. 묵언에 묵상이다. 말로 강요하지 않고, 말 없이 서로 나누게 하소서….
작은 암실 앞쪽은 전통 미닫이창으로 닫혀 있다. 10㎝ 격자 창호에 한지가 빛을 머금는다. 미닫이가 이쪽의 어둠과 저편의 빛을 경계 지었다. 열어 보았다. 다시 사각 공간이다. 한 변이 6m 남짓 11평이란다. 정면과 좌ㆍ우 벽은 검은빛 오석으로 마감했다. 중앙 벽에 작은 십자가가 걸려 있다. 고개를 들었다. 햇빛이 샤워처럼 쏟아진다. 천장이 뻥 뚫려 있다. 싱싱한 공기와 푸른 잎새가 고속으로 빨려 들어온다. 댓잎의 사각거림도 상쾌하다. 비 갠 오후의 청량함이 이에 비할까. 바닥 가장자리에 장방형으로 잔디를 심었다.
입구의 밝음과 내부의 어둠, 다시 미닫이를 경계로 열린 환한 공간이다. 어둠의 죽음과 열린 삶의 공간이 마주 서 있다. 생과 사는 이렇게 짝을 이루는가. 작가 한수산도 이곳을 다녀갔다. 그는 물었다. 도대체 죽음이란 산 자의 것인가, 죽은 자의 것인가.
밖으로 나왔다. 그제 서야 이 건축물이 순교자를 위한 공간임을 알았다. 건축문법이 예사롭지 않다. 역시 건축가 김원의 솜씨다. 기해박해(1839) 때 숨진 공주 출신 이춘화와 병인박해(1872)의 제물이 된 강영원, 유치성, 유문보 등 4명의 순교자를 기리는 기념경당이다. 경당은 나주성당 왼편 언덕에 자리한다. 경내에는 기념경당, 순교자 묘역, 까리따스 수녀원 본원, 헨리 하롤드 대주교 기념관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다. 성당에서 만난 박찬섭씨는 “나주성당은 1935년에 세워졌지만 신앙의 전통은 조선말 병인박해로 거슬러 올라간다.”며 “순교의 역사와 의미가 순교자 경당에 오롯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경당 입구의 거대한 돌은 돌무더기에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석침형(石針刑)을 형상했단다. 전북 무장 출신인 유치성은 1871년 나주 포교에게 붙들려 압송된 뒤 나주 우영 군사 훈련터였던 무학당(현 나주초교)에서 발등을 불로 지지고, 돌무더기를 쏟아 육신을 으깨어버리는 혹독한 형벌을 당했다. 그는 수개월 동안 자행된 가혹한 고문에도 “만 번 죽어도 믿겠다.”며 신앙을 증거했다. 나주 관헌에 붙들린 이들은 1872년 3월 백지(白紙)사형을 당한다. 이 형벌은 태장을 때린 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얼굴에다 물에 적신 창호지를 한 장 한 장 뒤덮어 질식시킨다. 종이 한 장이 얼굴에 붙을 때마다, 턱 턱 숨이 막히는 질식의 한없는 공포와 고통에 몸부림친다.
사방이 막혀 캄캄한 경당 내부는 순교자들의 고난이다. 사면초가의 고립과 극한 상황, 순교자의 비움과 버림, 죽음을 암시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인 미닫이 너머의 공간은 부활을 드러낸다. 열린 천장은 새로운 영생의 통로이다. 순교자의 부활과 영광의 징표이리라. 경당 주변의 대나무는 절개의 상징물이다. 경당은 입구의 환함(생명), 내부의 어둠(순교), 다시 열린 공간의 빛(부활)이라는 3개의 공간을 통해 순교자의 신앙을 조형했다. 신이 그린 설계도랄까.
순교는 자신의 생명으로 참 됨을 증명하는 종교적 행위다. 순교의 언어적 뿌리는 증인, 증거인으로 ‘보여준다’ ‘증거하다’란 의미다. 박해시대에 신앙의 증거는 순교였을 것이다. 순교의 반대는 배교, 믿음을 버리는 것이다. 궁금한 우문이 스친다. 백지사형의 야만이 자행될 때 ‘도대체 신은 어디에 계셨을까’. ‘침묵’의 작가 일본 엔도 슈사크 문학비 글은 더 처연하다. ‘인간은 이리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 파랗습니다.’
우문은 이어진다.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지금, 순교의 의미는 무엇일까. 순교자 묘역 앞 비석에 새겨진 글이다. ‘나주 네 분 순교자는 옥중의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고 석형과 백지사형으로 치명하여 천주신앙을 고백하였다. 이 소중한 신앙의 유산은 ‘오늘’ ‘나를’ 통하여 증거 돼야 한다.’
나주 순교자 기념경당은 오늘, 내가 증거하도록, 보여주도록 주문한다. 이기주의 보다 타인에 대한 관심과 연민을, 소비주의에 맞서 비움과 검소를, 지배와 소유에서 섬김과 나눔을.
연빛깔 녹음이 차양을 친, 편한나무 의자가 비어있는 그곳…. 나주성당 순교자 경당. : 출처 전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