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문 : 느헤미야 3:1-3:32
제 목 : 중수하였느니라
01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02 그 다음은 여리고 사람들이 건축하였고 또 그 다음은 이므리의 아들 삭굴이 건축하였으며
03 어문은 하스나아의 자손들이 건축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04 그 다음은 학고스의 손자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므세사벨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바아나의 아들 사독이 중수하였고
05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하였으며
06 옛 문은 바세아의 아들 요야다와 브소드야의 아들 므술람이 중수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07 그 다음은 기브온 사람 믈라댜와 메로놋 사람 야돈이 강 서쪽 총독의 관할에 속한 기브온 사람들 및 미스바 사람들과 더불어 중수하였고
08 그 다음은 금장색 할해야의 아들 웃시엘 등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향품 장사 하나냐 등이 중수하되 그들이 예루살렘의 넓은 성벽까지 하였고
09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의 절반을 다스리는 후르의 아들 르바야가 중수하였고
10 그 다음은 하루맙의 아들 여다야가 자기 집과 마주 대한 곳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하삽느야의 아들 핫두스가 중수하였고
11 하림의 아들 말기야와 바핫모압의 아들 핫숩이 한 부분과 화덕 망대를 중수하였고
12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의 딸들이 중수하였고
13 골짜기 문은 하눈과 사노아 주민이 중수하여 문을 세우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고 또 분문까지 성벽 천 규빗을 중수하였고
14 분문은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는 레갑의 아들 말기야가 중수하여 문을 세우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15 샘문은 미스바 지방을 다스리는 골호세의 아들 살룬이 중수하여 문을 세우고 덮었으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고 또 왕의 동산 근처 셀라 못 가의 성벽을 중수하여 다윗 성에서 내려오는 층계까지 이르렀고
16 그 다음은 벧술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아스북의 아들 느헤미야가 중수하여 다윗의 묘실과 마주 대한 곳에 이르고 또 파서 만든 못을 지나 용사의 집까지 이르렀고
17 그 다음은 레위 사람 바니의 아들 르훔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그일라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하사뱌가 그 지방을 대표하여 중수하였고
18 그 다음은 그들의 형제들 가운데 그일라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헤나닷의 아들 바왜가 중수하였고
19 그 다음은 미스바를 다스리는 예수아의 아들 에셀이 한 부분을 중수하여 성 굽이에 있는 군기고 맞은편까지 이르렀고
20 그 다음은 삽배의 아들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중수하여 성 굽이에서부터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 문에 이르렀고
21 그 다음은 학고스의 손자 우리야의 아들 므레못이 한 부분을 중수하여 엘리아십의 집 문에서부터 엘리아십의 집 모퉁이에 이르렀고
22 그 다음은 평지에 사는 제사장들이 중수하였고
23 그 다음은 베냐민과 핫숩이 자기 집 맞은편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아나냐의 손자 마아세야의 아들 아사랴가 자기 집에서 가까운 부분을 중수하였고
24 그 다음은 헤나닷의 아들 빈누이가 한 부분을 중수하되 아사랴의 집에서부터 성 굽이를 지나 성 모퉁이에 이르렀고
25 우새의 아들 발랄은 성 굽이 맞은편과 왕의 윗 궁에서 내민 망대 맞은편 곧 시위청에서 가까운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바로스의 아들 브다야가 중수하였고
26 (그 때에 느디님 사람은 오벨에 거주하여 동쪽 수문과 마주 대한 곳에서부터 내민 망대까지 이르렀느니라)
27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한 부분을 중수하여 내민 큰 망대와 마주 대한 곳에서부터 오벨 성벽까지 이르렀느니라
08 마문 위로부터는 제사장들이 각각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29 그 다음은 임멜의 아들 사독이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동문지기 스가냐의 아들 스마야가 중수하였고
30 그 다음은 셀레먀의 아들 하나냐와 살랍의 여섯째 아들 하눈이 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자기의 방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31 그 다음은 금장색 말기야가 함밉갓 문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여 느디님 사람과 상인들의 집에서부터 성 모퉁이 성루에 이르렀고
32 성 모퉁이 성루에서 양문까지는 금장색과 상인들이 중수하였느니라
1. 중수하였느니라
오늘 본문은 [느헤미야 3:1], ‘그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라는 표현으로 시작해서 [느헤미야 3:32], ‘중수하였느니라’라는 내용으로 끝을 맺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둘러본 이후에 ‘다시 수치를 당하자 말자’라고 백성들에게 말했고, 백성들이 이에 호응하자 성벽재건공사를 바로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중간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 자손별로 분업과 협업으로 공사에 참여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대하면 저는 신학교 때 교회행정학 수업 시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행정학은 어떤 방식으로 교회를 유지하고 운영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바람직한지 그 방법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행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효율성을 높이는 일입니다. 즉 최소의 시간, 최소의 경비,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창출하는 것, 그것이 바로 행정의 기본 원리입니다.
이 행정의 기본 원리의 예로 교수님께서 든 것이 바로 이 장면이었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데 각 자손들이 한 부분씩 맡아 분업과 협업으로 공사를 진행함으로써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완벽하게 성벽을 재건할 수 있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지혜였고, 그 지혜의 원천이 하나님이었다고 설명을 하셨습니다. 즉 성벽 재건은 하나님의 지혜와 사람의 지혜가 어우러진 위대한 작품이었다고 설명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본받아, 믿음의 선진들의 지혜를 본받아 우리도 효율적인 교회행정체계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그때 교수님의 그 설명을 들은 제가 감동을 받았을까요, 받지 않았을까요?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주 진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왜? 그때는 성경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모르니 감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약간의 일리만 있어도 그냥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쉽게 감동을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어리석고 무지한 백성들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었는데, 신학교 시절 저는 바로 그 어리석고 무지한 백성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만 보면 교회행정학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설명한 내용이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데 이스라엘 각 자손들이 일정 부분을 맡아 분업과 협업으로 공사를 진행함으로써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완벽하게 성벽을 재건할 수 있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람의 지혜가 함께 어우러진 위대한 작품이라고 설명하셨던 것, 일견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들리는 설명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동의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드립니다. 그때는 저도 교수님의 그 설명에 큰 감동을 받았지만 오늘은 그 교수님의 설명이 절대로 옳은 설명이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상당히 긴 내용입니다. 아마 읽으시면서 짜증이 나신 분도 계실 수 있습니다. 막상 읽어보니 별 특별한 내용도 없는데 왜 다 읽게 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릴 분도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긴 내용을 오늘 굳이 시간을 들여서 다 읽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앞으로 느헤미야 3장은 읽지 않으셔도 좋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느헤미야 3장은 무시해도 좋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시간이 되시면 다 읽으시는 게 좋습니다. 시간이 철철 넘치는데 일부러 건너뛰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시간 밖에 없는데 일부러 건너뛰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혹 시간이 부족하시면 이 내용은 건너뛰셔도 좋다는 뜻입니다. 단, 단서가 있습니다. 그 단서는 빨간 색 펜으로 느헤미야 3장이 시작되는 부분에 ‘하나님의 지혜 X, 사람의 지혜 X’ 라고 표시를 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느헤미야 3장은 하나님의 지혜도 아니고, 사람의 지혜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지혜와 사람의 지혜가 어우러진 위대한 작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럼 느헤미야 3장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사람의 지혜가 어떤 것이고, 하나님의 지혜가 어떤 것인지, 이것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 사람의 지혜
[로마서 1:22]에 보면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인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내용 중의 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조금 더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사람은 늘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지혜롭게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사람은 어리석은 결과만을 가져오는 존재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사람의 지혜에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오늘 어차피 신학교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신학교의 학습과정을 예로 들어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제가 처음 접한 과목이 전도학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전도를 잘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사람들의 발걸음을 교회로 쉽게 인도할 수 있는지, 그런 방법을 배우는 수업이었습니다. 우선 전도는 사람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는 일이니까 전도하기에 앞서 먼저 간절한 마음,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부터 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도 덮어놓고 다가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굳센 믿음을 가지고 담대한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는 빈손으로 가는 것보다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고 배웠습니다. 또 될 수 있는 대로 깔끔한 정장을 입는 것이 좋다고 배웠습니다. 또 한 번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정해진 요일,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에서 반복적으로 전도를 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전도학에서 가르치는 이런 내용들이 지혜롭습니까, 지혜롭지 않습니까? 지혜롭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주 지혜롭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닌 신학교뿐만 아니라 모든 신학교에서도 이렇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또 대부분의 목사들도 이 가르침대로 열심히 전도를 했고, 또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가 잘 됩니까, 잘 안 됩니까? 잘 안 됩니다. 배운 대로 했는데도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간절히 기도도 했고, 정성스럽게 전도용품도 준비했고, 말끔하게 정장도 입었고, 반복적으로 전도를 했는데도 일 년에 성도 한 명 늘리는 일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수년 째, 좀 더 과장하면 십 년 넘게 그 모양 그대로인 교회가 허다하게 많이 있습니다.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도가 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는 우선 대형운동장을 비싼 돈으로 빌립니다. 그리고 유명 연예인을 비싼 돈으로 초청합니다. 비싼 돈을 들여서 자동차, 냉장고, TV, 세탁기 등을 사고 그것을 경품으로 내겁니다. 그리고 교회버스 수십 대를 동원해서 시내를 돌게 하여 사람들을 대형운동장으로 모을 대로 모아옵니다. 그렇게 해서 한바탕 신나는 전도 잔치를 베풀어줍니다. 그러면 성도가 늘어납니까, 늘어나지 않습니까? 늘어납니다. 그렇게 모인 성도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교회에 정착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성도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여러분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전도를 통해서 성도의 숫자를 늘리는데 기도가 더 효과적입니까, 돈이 더 효과적입니까? 돈이 더 효과적입니다. 전도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이 더 발휘됩니까, 연예인의 능력이 더 발휘됩니까? 연예인의 능력이 더 발휘됩니다. 전도에 있어서 전도지의 능력이 더 탁월합니까, 값비싼 경품의 능력이 더 탁월합니까? 값비싼 경품의 능력이 훨씬 더 탁월합니다. 그럼 전도학 시간에 가르친 여러 가지 지혜로운 방법들이 쓸모가 있습니까, 쓸모가 없습니까? 별 쓸모가 없습니다. 예. 사람의 지혜가 헛된 것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제가 신학교 시절 설교학 시간에 배웠던 내용들을 한번 말씀 드려보겠습니다. 우선 설교문을 작성하기 위해서 성경 본문을 정할 때에는 자기 마음대로 하지 말고 먼저 기도를 하라고 배웠습니다. 설교문을 작성할 때에는 수시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설교문을 작성할 때에는 될 수 있는 대로 문장은 두 줄 이상을 넘기지 말라고 배웠습니다. 작성된 설교문을 다 외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일곱 번 이상을 읽어서 내용을 반드시 숙지한 상태로 설교에 임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설교를 할 때에는 성도들이 듣기에 좋은 발음과 확신에 찬 말투로 신뢰를 심어주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설교를 할 때에는 고음과 저음을 적당히 섞어서 수시로 변화를 주어야 성도들이 지겨워하지 않고, 잠들지 않는다고 배웠습니다. 설교를 할 때에는 가급적 불필요한 동작을 취하지 말라고 배웠습니다. 예화를 들 때에는 원고를 보고 할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외워서 하라고 배웠습니다. 또 설교를 할 때에는 성도들이 아멘으로 호응할 수 있는 내용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또 설교를 할 때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성도들과 눈을 마주치라고 배웠습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설교학에서 가르치는 이런 내용들이 지혜롭습니까, 지혜롭지 않습니까? 지혜롭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주 지혜롭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닌 신학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신학교에서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목사들도 신학교 때 배운 이 내용을 자신에게 적용하기 위해 무진장 많은 수고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가 설교를 하는데 조는 성도가 있으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됩니다. 목사들의 설교에 대해 성도들이 호응을 해야 합니까, 하지 않아야 합니까? 해야 합니다. 목사들의 설교를 듣고 성도들의 삶이 변해야 합니까, 변하지 않아야 합니까? 변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일어나지 않습니까?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배운 대로 했는데 왜 성도들로부터 아무런 반응, 아무런 호응, 아무런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도들이 목사의 설교를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주 솔직히 말해서 주일 날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교회로 발걸음을 향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별로 없습니다. 기도를 하기 위해, 찬양을 하기 위해, 헌금을 하기 위해, 봉사를 하기 위해 교회를 오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지난 주에 왔기에 이번 주에도 습관적으로 교회를 오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 교회 오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그럼 설교학 시간에 가르친 여러 가지 지혜로운 방법들이 쓸모가 있습니까, 쓸모가 없습니까? 별 쓸모가 없습니다. 예. 사람의 지혜가 헛된 것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제가 신학교 시절 교회행정학 시간에 배웠던 내용들을 한번 말씀 드려보겠습니다. 우선 교회의 정관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담임목사는 탁월한 리더쉽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살아있는 유기체이기에 각종 위원회, 남녀 전도회, 장로회, 권사회, 집사회 등의 조직이 잘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성도들을 잘 관리할 수 있는 교적부 같은 것이 반드시 구비되어 있어야 하고, 성도들의 헌금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재정장부가 반드시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또 각종 회의를 할 때에는 민주적 절차로 회의를 하되 교회에서 하는 회의는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기에 될 수 있는 대로 만장일치로 결론을 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또 교회 내에서 이런저런 분란이 일어날 수도 있기에 상벌규정도 반드시 구비해 놓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교회행정학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지혜롭습니까, 지혜롭지 않습니까? 지혜롭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주 지혜롭습니다.
그런데 교회행정학에서 배운 내용들이 유용한 것이냐?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 그런지 질문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우리 교회에 정관이 있는지 없는지 그동안 궁금하셨던 분이 계십니까? 아마 안 계실 것입니다. 만약 정관이 있다면 그 정관에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지 궁금하신 분이 계십니까? 역시 안 계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각종 위원회, 남녀 전도회, 장로회, 권사회, 집사회 등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을 수 없습니다.
또 우리 교회에 교적부 같은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까,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까?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또 우리 교회에 재정장부가 반드시 필요합니까,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까?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또 우리 교회에 이런 저런 회의가 필요합니까,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까?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니, 사람이 있어야, 성도가 있어야 이런 것들이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교회행정학 시간에 가르친 여러 가지 지혜로운 방법들이 쓸모가 있습니까, 쓸모가 없습니까? 별 쓸모가 없습니다. 예. 사람의 지혜가 헛된 것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신학교 때 배운 전도학, 설교학, 교회행정학을 예로 들면서 사람들의 지혜를 살펴보았습니다. 가르친 내용들이 사람들의 지혜가 총 망라된 좋은 방법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이 방법들이 별로 유용하지가 않았습니다. 아예 쓸모없는 경우까지도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사람의 지혜가 사실은 지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아니라 술수, 임기응변, 처세술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의 지혜는 순수한 의미의 지혜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유익과 이익만을 위한 지혜이기에 결국은 어리석은 결과, 헛된 결과만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지혜
그럼 하나님의 지혜는 어떤 것일까요? 사람의 지혜는 자신의 유익과 이익만을 위한 술수, 임기응변, 처세술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지혜는 과연 어떤 의미의 지혜일까요?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원리에서는 어떻게 전도와 설교와 행정이 이루어지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전도학, 설교학, 교회행정학의 내용과 얼마나 다른지 한번 비교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설교와 전도를 하나로 묶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가 나오고, 사도행전 3장에는 솔로몬 행각에서 행하는 베드로의 설교가 나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두 설교가 정말로 기가 막힙니다. 정말로 훌륭합니다. 막히는 곳 한 군데 없이 구약의 예화를 인용하면서 설교를 술술 풀어나갑니다.
논점에서 벗어나는 일이 전혀 없이 예수님께서 왜 오셨는지, 예수님께서 왜 죽으셨는지, 예수님께서 왜 부활하셨는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어떤 결과가 임했는지를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도저히 고기 잡던 어부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베드로의 설교는 정확했고, 베드로의 설교는 감동적이었습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신학교를 다닌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학 수업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 특별히 과외 수업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베드로가 원래 똑똑했던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은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은 사람입니다. 베드로란 이름의 뜻이 돌이라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베드로가 갑자기 이렇게 탁월한 설교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해서 베드로가 이렇게 감동을 주는 설교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내용들이 베드로의 머릿속에 기억으로 떠올랐고, 성령의 말씀하게 하심을 따라 베드로는 설교를 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탁월한 설교자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도행전 2:40-41], ‘또 (베드로가)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사도행전 4:4], ‘(베드로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 두 방으로 믿는 자의 수가 팔천 명 이상이 된 것입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대형 운동장을 빌린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베드로가 유명 연예인을 초청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베드로가 경품을 내건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베드로가 버스를 돌린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베드로가 파전을 부치거나 커피를 타준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예. 베드로는 이런 일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설교 두 방으로 신도 팔천 명 이상을 모을 수 있었습니까? 이미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을 주셨고, 베드로는 그 말씀을 전했고,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감동을 받아 죄인에서 성도로 변화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누구를 위하여 이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베드로를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위해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위해 하나님의 지혜를 발휘하신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들의 머릿속에 또 다른 궁금증이 떠오를 것입니다. ‘왜 우리교회에는 이런 일이 안 생기지?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고,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전해서 설교 두 방으로 신도의 수가 팔천이 된 것이라며! 그런데 우리 교회는 왜 맨 날 이 모양 이 꼴이지? 벌써 4년째 접어들었고, 주일 설교만도 이백 번 가까이 했고, 일 년에 두 번씩 성경의 초점도 꼬박꼬박 하는데 왜 아무 열매가 없지? 혹시 오 목사가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아닌 것 아니야? 혹시 오 목사는 하나님의 지혜를 못 받은 것 아니야?’ 이런 궁금증, 이런 의아심이 드시기도 할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제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글쎄요, 저도 그게 궁금하네요.’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저는 기다리자고 대답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다 때가 있으니 그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때를 기다리지 못하면 우리도 운동장을 빌리고, 연예인을 초청하고, 버스를 돌리고, 경품을 내걸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의 방식이 아니라 사람의 지혜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왕 하나님 믿기로 작정했으면 끝까지 하나님 믿으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 강직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방식으로 설교와 전도가 이루어지는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방식으로 행해지는 교회행정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사도들이 일곱 일꾼을 택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제의 일을 둘러싸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자 사도들이 일곱 일꾼을 세우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일곱 일꾼을 세우는 일이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사람들의 갈등을 해소하려는 단순한 목적으로 일어나는 일일까요? 정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앞서 잠깐 살펴보았듯이 믿는 자의 수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믿는 자들의 모임, 즉 교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도들은 성도와 교회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즉 원활한 조직 관리를 위해 행정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행정체제를 정비해서 봉사와 구제는 일곱 일꾼이, 기도와 말씀 사역은 사도들이 맡는 분업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쭈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만들어 가시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심으로 성도의 수와 교회의 수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그럼 관리는 누가 할까요? 사람이 할까요, 하나님께서 하실까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책임은 누가 질까요? 사람이 질까요, 하나님께서 지실까요? 하나님께서 지십니다. 하나님께서 관리하시고,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텐데 사도들은 하나님보다 앞서 걱정하고, 하나님보다 앞서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일꾼을 세우며 행정체제를 정비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도들의 행동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실까요, 탐탁지 않게 여기실까요? 탐탁지 않게 여기십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 증거가 스데반과 빌립입니다. 사도들이 구제와 봉사를 위해 뽑은 일꾼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자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은혜와 권능을 충만하게 더하셔서 일곱 일꾼을 통해 예루살렘을 넘어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찾아내셔야 합니다.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지혜를 발휘하시는 하나님을 찾아내셔야 합니다.
4. 하나님의 지혜인가?
지금까지 사람의 지혜를 살펴보았고, 하나님의 지혜를 살펴보았습니다. 사람의 지혜는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위한 술책일 뿐이고, 계책일 뿐이고, 음모일 뿐이고, 술수일 뿐이고, 임기응변일 뿐이고, 체세술일 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께 대적하는 죄를 물리치고, 죄에 사로잡힌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내는 지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이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시고 오늘 본문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설교 초반에 말씀드린 대로 교회행정학 교수님은 오늘 본문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람의 지혜가 어우러진 위대한 작품이라고 설명하셨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왜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가에 대해 먼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에스라를 설교할 때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바벨론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칠십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타국에서 포로생활을 할 것이고, 그 기한이 차면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귀환은 이 칠십 년 밖에서 일어난 일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에스라도 느헤미야도 자신들의 독자적인 계획에 따라 본토로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또 본토로 돌아온 후에 그들이 벌이는 일 역시 자신들의 독자적인 계획에 따른 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 공사에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 있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따라 효율적으로 공사가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또 성경 그 어디에도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대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원리가 아닌 죄의 원리로 등장한 죄의 부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원리는 성을 쌓는 원리가 아니라 성을 허무는 원리입니다. 실제로 여호수아에 보면 하나님께서 성을 허무시는 장면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뜻을 오해해서 여호수아는 물리력으로, 힘으로, 강제로 여러 성을 허물었지만 하나님의 원래의 뜻은 죄의 원리로 굳게 닫힌 성을 허물고 그 성 안에 하나님의 원리를 충만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성을 쌓는 일을 절대로 기쁘게 여기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하나님의 지혜를 동원하셨다는 주장은 결코 성립이 될 수가 없습니다.
5. 사람의 지혜인가?
이번에는 성벽 재건이 사람의 지혜인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각 자손들이 한 부분씩 맡아 일사분란하게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분업과 협업으로 성벽을 재건한 일이 과연 사람의 지혜인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여쭈어 보겠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손이기에 1번)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2번) 그렇지 않다. 몇 번이 정답입니까? 2번)이 정답입니다.
하나만 더 여쭈어 보겠습니다. 성도는 1번)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2번) 그렇지 않다. 몇 번이 정답입니까? 2번)이 정답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기준 삼아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으로, 하나님의 가치와 원리로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당연히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일사분란하게 살아가야 할 것 같은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마음속에 여전히 죄의 찌꺼기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습관, 죄의 습성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로지 자신의 유익과 이익만을 추구하기 위해 남을 스스럼없이 짓밟는 죄인이란 존재가 의견의 일치를 보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죄인이 일사분란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주 일사분란하게 분업과 협업을 통하여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주 지혜로운 방식으로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이럴 수 있는 경우는 단 한 가지입니다. 철저한 관리, 철저한 통제, 철저한 감시가 있으면 이런 일이 가능해집니다. 마스게임을 예로 들어 간단히 설명해보겠습니다. 먼저 여러분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집단 중에서 가장 마스게임을 잘 하는 집단 두 곳을 들어보라면 여러분은 어느 집단을 고르시겠습니까? 저는 주저하지 않고 북한과 신천지를 고르겠습니다. 두 집단의 마스게임은 정말로 상상초월입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마스게임을 그 두 집단은 해내고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일차적으로 엄청난 연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연습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 연습을 위해 사람을 강제로 동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동원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철저하게 통제하고, 철저하게 감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당근을 주고, 때로는 채찍을 주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무조건적으로 따라오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에게서 통일된 행동을 뽑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느헤미야 3장이 보여주는 게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자서전 형태의 회고록을 통해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분업과 협업으로, 일사분란의 정신으로 성벽을 재건했다고 자랑하지만 우리는 느헤미야가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는 가운데 공사를 추진하고 있는지를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는지를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3장을 보고 사람의 지혜가 돋보이는 위대한 재건 사업이었다는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내리면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오늘 본문 3장에는 하나님의 지혜도 들어있지 않고, 사람의 지혜도 들어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딱 한 사람의 지혜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이 바로 느헤미야입니다. [느헤미야 2:17],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라고 백성들을 선동했던 느헤미야의 지혜가 들어가 있습니다. [느헤미야 3:1]에 기록된 것처럼 성벽재건 공사에 대사장들과 제사장들을 앞장세우는 지혜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그 지혜는 본질적인 의미의 지혜가 절대로 아닙니다. 어리석고 무지한 백성들을 선동하고 착취하는 지혜입니다. 철저한 관리, 철저한 통제, 철저한 감시 체제를 구축하는 지혜입니다. 즉 느헤미야의 지혜는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위해 타인의 유익과 이익을 짓밟는 술책일 뿐이고, 계책일 뿐이고, 음모일 뿐이고, 술수일 뿐이고, 임기응변일 뿐이고, 체세술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런 느헤미야의 행위에 대해 부작용이 일어날까요, 일어나지 않을까요? 당연히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그 부작용에 관한 이야기가 느헤미야 4장과 5장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느헤미야 본문 3장은 결코 하나님의 지혜로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또 사람의 지혜로 이루어진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께 대적하는 죄를 물리치고 죄에 사로잡힌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일에만 사용된다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지혜 역시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죄의 유혹을 물리치는 일에 사용될 때 온전한 지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그 지혜를 오로지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추구하는 일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가 결코 아닙니다. 몇 번을 말씀드렸다시피 그것은 술책일 뿐이고, 계책일 뿐이고, 음모일 뿐이고, 술수일 뿐이고, 임기응변일 뿐이고, 체세술일 뿐입니다. 즉 사람의 지혜, 죄인의 지혜는 세상을 오히려 불행하게 만드는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참 지혜를 소유한 하나님의 성도들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하나님의 참 지혜를 가지고 빛 된 삶, 소금 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행복전도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지혜로 우리를 시시때때로 유혹하는 죄를 거뜬히 물리치셔서 기쁘고, 즐겁고, 신나고, 행복한 하루하루를 살아가시는 우리 다누림의 성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