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무렵
삽상한 기류가 서(西)로 흐르고 있다.
사람을 더욱 홀로이게 하던 계절. 울타리 밑에서 피어 올라오고 있는 작은 망울들의 소국(小菊)을 보노라면 포병객(抱病客)이 지병(持病)을 이 아끼듯, 생의 언저리를 쓰다듬고 싶어지는 건 나만의 버릇일까?
언제나 추석 무렵이 되면, 가을의 문을 여는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추석 무렵이다’를 불러 본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무엇에 대한 그리움이자 내게는 말로는 다 풀어낼 수 없는 실꾸리에 서린 아픈 응집과도 같은 것이다. 삼십여 년도 더 지난 일이다. 아버지의 좌절과 돌연한 어머니의 별세로 마치 문짝이 달아난 것 같은 집 안에서 동생들만 데리고 맞이하게 되었던 명절날 아침.
하늘은 저쪽으로 멀리도 달아나 있고, 소슬함마저도 한기나 보탤 뿐. 올망졸망한 동생들의 모습을 투명한 햇살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었다.
처연(凄然)하던 가을날 아침. 상제(喪制)인 우리들에겐 마침 어머니의 사십구재가 되는 무렵이기도 했다. 열다섯 살도 못 되는 어린 세 동생들 앞에서 마음 놓고 울 수도 없었던 그 무렵, 둥지에 제비처럼 날아든 한 통의 편지. 그건 멀리 제주도에서 보내온 K 시인의 긴 편지였다.
“추석 무렵이다. 손을 씻고 돌아와 향을 하나 사루고 이 글을 쓴다.”로 시작된 조문(근조)의 글 슬픔밖에는 아무것도 없던 그 순백의 일상을 헤집고 ‘추석 무렵이다’라는 말이 그때 너무 깊게 들어와 앉은 탓일까. 그 후부터 그건 진공의 울림처럼 내게 하나의 의미 있는 부호가 되어 버렸다. 이따금씩 바람 같은 엽서는 계속되었다.
“관(棺) 같은 일실(一室)에서 나는 지금, 썩고 있다.”라는 글귀와 함께. 이 시구를 지금도 기억하는 건, 머지않아 나 역시 이 글귀의 심정으로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서모집에 가 계신 아버지한테 동생들 셋은 들어갔고, 내 가슴의 절반쯤은 산사태가 되어 내렸으며, 알 수 없는 외톨이로서의 고단한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텅 비어 있음밖에는 생각나지 않는다. 상당한 이유로 집을 떠나야 했던 아버지는 서모네 집으로 안주하시고 주변이 없으신 어머니와 동생들을 위해 나는 가장이 되느라고 어머니 몰래 1년을 앞둔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돌아왔다. 그 후 복학을 권유하는 김옥길 총장의 편지가 두어번 더 우송이 되었다. 그러나 겨우 자리 잡은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스물한 살의 그 소슬하던 가을 하늘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간 가족들을 충실히 부양해 왔음에도 어느 날 그 가족들에게 버림당하여 구석방에 갇혀 버리고 마는 ‘그레고르 잠자’(카프카의 『변신』)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아버지와 서모는 그때 철저히 나를 고립시켰다. 갑자기 가족을 잃고 멍하니 ‘상심벽(傷心碧)’의 그 푸르디 아픈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 후로 나는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는 버릇을 갖게 되었다.
운수지심(雲水之心)으로 극락암의 경봉선사를 찾아뵙기도 하고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방랑기(放浪記)』를 읽으며, 해질녘 일본 전후 세대의 고아가 부모를 그리며 불렀다는 노래 <오가아(母)상 고이(戀)시이>를 자주 웅얼거리기도 했다.
동대 불교철학과에 적을 둔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때 자취를 하던 방에도 만월(滿月)은 쏟아져 들어왔고, 빈 방에 냉수 한 사발처럼 앉았던 그때도 추석 무렵이었다. 남의 눈에 뜨일까 불도 켜지 않은 채, 촛불 아래에서 밤새워 책을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것밖에는 달리 할 것도 없었지만 왠지 허기와 함께 잠에 들질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없이 맑게 깨어나는 정신. 그때 중국 당나라의 승려 시인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의 시를 읽으며 노트에 뽑아 두었는데 찾아보니 ‘1966년 9월 29일’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뱁새도 제 한 몸 편히 쉬기엔 나무 한 가지(一枝)면 족하거늘 그 나무한 가지를 아쉬워하던 때였다.
풀잎 잎마다 이슬에 눈물짓고
소나무 가지마다 바람에 읊조린다
내 여기 이르러 길 잃고 헤매나니
그림자 돌아보며 ‘어디로?’ 물어보네
泣露千磐草
吟風一樣松
此時迷徑處
形問影何從
이것은 한산자가 나를 두고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심경을 잘 대변해 주었다.
풀잎은 잎마다 눈물짓고, 소나무는 가지마다 바람에 한숨이었다. 어둠에 묻히는 신호등 앞에서 “어디로?” 되묻기를 문득문득.
”체머리를 흔드는 것이 어찌타 버릇이랴“던 김삿갓도 그때 온전히 이해되었다.
지금도 길을 걷다가 “어디로?” 하며 자주 걸음을 멈추게 되는 건, 아마 그때의 버릇인지도 모르겠다.
그림자 하나 이끌고, 그저 망연(茫然)할 수밖에 없었던 텅 빈 공간에 그때 달빛만 가득 들어차서 나와 맞닥뜨린 건 서슬 푸르던 밤의 하나의 차가운 실체, 그것 과의 만남이었다.
빈 방, 그리고 달빛. 그래서 이후부터 ‘추석 무렵이다’라는 말은 하나의 ‘실존’을 뜻하는 부호로 남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밤이 환한 지금도 삽상한 추석 무렵이다. 말할 수 없이 그때가 그리워진다.
맹난주 수필집 『나 이대로 좋다』
25.10. 12.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