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하고 미묘한 분위기의 음악 시작]
(경수) 처음 뵙는데 낯설지가 않네요… 꼭 언젠 한 번 뵌 것 같아요.
(경수의 엄마) 아니요. 그럴 리가요.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학교를 휴학하고 다닌 첫 직장에서 내가 했던 일은 이런 자막을 다는 일이었다. 기본적인 대사와 함께 소리와 음악 설명을 추가하는 일이었다. 주어진 대본을 토대로 자막을 오타 없이 입력하고, 화자가 말하는 타이밍에 맞게 대사가 송출되는 지 확인하면 됐다. 베리어프리 자막이 통용되던 시절은 아니어서, 간혹 위에 자막처럼 누군가는 영화 초반부에 결말을 스포일러 당하기도 했지만, 나는 주어진 업무를 벗어나 ‘경수 엄마’ 역을 임의로 ‘순자’로 바꿔서 입력할 수는 없었다. 또 오타가 없는 지 반복적으로 영화와 드라마를 들여다보다 보면, 맥락이 엎치락뒤치락 되어 이런 상황을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갈 때도 많았다. 하루 종일 모니터와 대본을 번갈아 가며 들여다보느라 온몸이 찌뿌둥하고 눈이 뻑뻑했지만, 간혹 스스로가 무용하다는 생각을 했다. 꼼꼼한 성격 탓에 실수 없이 일을 해낸 덕분에 매번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게 문제였다. 편집과 검수를 마친 작품의 대사를 다는 일이었기 때문에 갑자기 대사가 바뀔 일도 없었고, 등장인물이 말하는 타이밍에 등장인물의 이름과 대사가 제대로 적혀 있는 건 너무 당연했다. 무용하게만 느껴지는 일이지만, 자그마한 실수라도 하면 확 티가 나 열심히는 해야 하는 일. 스스로의 쓸모를 발견할 수 없는 하루하루가 지루했다.
그런 내가 스스로의 쓸모를 느꼈던 유일한 시간은 점심시간. 여기 저기 돌아다니길 좋아했던 나는 학교 근처였던 회사 근방의 맛집을 모조리 꿰고 있었다. 나의 맛집을 공유하고, 대학생의 데이터로는 따라갈 수 없는 직장인 선배의 숨은 맛집들을 전수받으며 차오름을 느꼈다. 그 중 나와 유독 입맛취향이 잘 맞았던 희진 선배는 밥도 잘 사주지만 조언도 잘 해주었다. 좋은 의도로 건넨 조언도 때에 따라 상대방에게 가시를 남기기 마련인데, 희진 선배의 조언은 원래의 의도가 왜곡되는 법이 없었다. 전하고 싶은 말을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게 전했다. 나의 답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가령 “이번에 새로 들어온 작품은 나도 처음 맡아 보는 장르인데, 총격 씬이 많은 영화니까 총성 소리가 몇 번 울렸는지 그런 디테일한 부분을 챙겨야겠더라고”라고 말하거나 “오늘처럼 음악을 설명하는 마땅한 단어를 찾기 어려울 땐 여기서 레퍼런스를 참고하면 착 붙는 단어를 찾기가 수월하더라고. 다 익었겠다 한 술 뜨자!”라는 말들이었다. 부족한 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화제를 돌리던 선배였다. 돌이켜 보니 내가 아무런 사고도 치지 않고 단 번에 검수를 통과했던 건 다 선배 덕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성이 두 번 울렸으니 [두 번의 총성소리가 울리며] 라고 아무렇지 않게 적었지만, 선배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주인공이 3명을 모두 다 쏴 죽였는지 한 발은 자신을 위해 남겨두었는지 누군가는 미묘한 긴장감을 못 느낄 수도 있었던 거다.
그 회사에서의 마지막 날, 희진 선배와 갔던 골목 끄트머리에 자리한 노포를 잊을 수 없는데. 그곳은 소꼬리 찜을 맛있게 하기로 소문난 회식 단골 맛집이었다. 숯불 닭갈비나 훈제 오리 같은 메뉴도 없는데 가스레인지가 아닌 숯불로 달구는 것이 특이했다. 가스레인지를 쓰면 편할 일인데 땀을 뻘뻘 흘리며 숯불을 태우는 일인가 싶기도 했다. 은근히 ‘어쩌면 이것도 무용한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아무튼 희진 선배는 잘 맞는 맛집 메이트를 잃게 되어 너무 아쉽다며 꼭 자주 놀러 오라며 잔을 맞댔다. 그리고 마지막 국물 한 숟가락을 뜨며 말했다. “난 이것 때문에 여기가 좋더라. 나도 처음엔 고깃집도 아닌데 왜 숯불을 쓰나 했는데, 마지막까지 따.뜻.한. 이 국물이 너-무 좋더라고. 그렇지 않니?!” 좀처럼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던 선배는 발그레한 얼굴로 숯불이 좋다는 것엔 동의하기를 바라는 모습이었다.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언뜻 보기엔 무용해 보이는 것들이 꼭 그렇지만은 않구나.’ 나는 희진 선배에게 무언가의 쓸모를 발견하는 법을 배웠다.
“우리 베리어프리 자막을 구성해보는 거 어떨까?” 희진 선배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일을 마치고 무사히 복학한 후 나는 대동제 준비위원회로 베리어프리 자막을 추진했다. “그게 뭔데?” “근데 진짜 냉정하게 축제를 보러 오는 청각장애인 학우들이 많을까?” 그것의 쓸모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다행히 일단은 좋은 의도니 한 번쯤은 시도해보자는 의견으로 좁혀졌다. ‘최초로 이것 도입해, 모두의 축제 만든 00 대학’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베리어프리 존에서 축제를 즐긴 학우들의 호평은 물론, 무대에 오른 가수들도 실시간 자막을 보며 흥미로워 했다. “오 이거 지금 누가 쳐주고 계신 건가요? 맞으면 당근을 흔들어주세요!” [당근을 흔들었습니다] 실시간으로 자막을 타이핑하던 내가 진땀을 뺐던 순간들은 각종 SNS에서 화제가 되었다. 희진 선배가 마지막 한 숟갈을 뜨며 따뜻함과 쓸모를 느꼈던 것처럼. 무언가의 쓸모를 알아주는 사람이 되어 가는 중이었다.
첫댓글 통찰력/공감: '좋은 의도로 건넨 조언도 때에 따라 상대방에게 가시를 남기기 마련인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만하면서도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을 수 있는 말이라 좋았습니다.
(종종 좋은 소설을 읽다보면 스토리 중간에 이렇게 보편적인 경험을 담으면서도 읽기 전엔 알아채지 못했던 메시지들이 담겨 있는데 그런 소설이 떠올랐던 문장입니다.👍)
주목도★★: 주인공이 자막 다는 일을 하는 자신에 쓸모를 느끼지 못 하다가 자막과 자신의 쓸모를 느끼는 사람으로 변화하는 스토리가 좋았습니다.
인물의 생각이 변화하는 과정과 여러 개의 일화(회사에서 자막 달던 일/선배의 조언/숯불집/대동제)가 있어서 이야기가 풍부하게 느껴졌습니다.
선배의 조언이 살아있어서 이야기가 실제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져 몰입감을 줬습니다.
‘최초로 이것 도입해, 모두의 축제 만든 00 대학’ : 성공적인 결과를 보여주기 좋은 표현이었습니다. 아예 줄바꿈을 해서 넣으면 눈에 확 들어올 것 같습니다.
ex) 최초로 '이것' 도입해 모두의 축제 만든 OO 대학 - XX일보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
쉼표가 찍힌 긴 문장들이 있는데 끊어주면 더 수월하게 읽힐 것 같습니다!
이게 주목도(글이 술술 읽히는가?)로 이어질 때가 있어서 첫 문단엔 문장을 짧게 처줘도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이건 괜히 깊생한 것 같아서 조심스러운데요
마지막의 '무언가의 쓸모를 알아주는 사람이 되어 가는 중'에 대한 내용입니다
'무언가'라고 하니 처음엔 '화자가 자막의 쓸모를 알았구나' 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화자는 '스스로의 쓸모'를 발견할 수 없었을 뿐 자막의 쓸모를 몰랐던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아서요..!
자신을 포함할 수 있도록 다듬어주면 좋을 것 같아요
ps 개인적으로 이번 작문이 가장 재밌고 좋았습니다!! 저도 발전해보겠습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