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ㆍ대림피정 [대림특강] 소화데레사의 삶과 사랑 2편
무비.보조.성전지기 23.12.06 08:15
한 권 이어 듣기_소화 데레사의 삶과 사랑 2편 ( 1:04:51 )
한 권 이어 듣기_소화 데레사의 삶과 사랑 2편
제 2장 내 삶의 두 번째 시기
< 뷔소네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다.> 나는 알랑송을 떠난 것이 전혀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변화가 기뻤으며, 리지외의 새 삶에 대해 기대가 컸다.
알랑송에서 리지외까지의 여행과 저녁에 이시도르 외삼촌 댁에 도착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현관에 들어섰을 때 외숙모와 외사촌 요안나와 마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첫날 밤을 우리는 성 피에르 거리에 있는 외가에서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외가 식구들은 우리의 새 보금자리인 뷔소네까지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뷔소네는 시내에서 뚝 떨어진 외곽에 있었으며, 별들의 공원이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산책길에서 가까웠다.
나는 우리 집에 특히 전망실에 매혹되었는데 이 방에서는 멀리 떨어진 곳까지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주교좌 성당 탑과 우리 본당인 성 야고보 성당, 종탑을 비롯하여 도시 전체를 볼 수 있었다. 집 앞에는 영국풍의 정원이 있었으며, 그 뒤로는 단층집이 있었는데 뛰어다니며 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가옥 전체는 담장과 키 큰 나무에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우리 가족에게 더없이 아늑한 보금자리였다.
우리는 이사한 바로 그날부터 부지런히 이삿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1층에는 주방과 식당이 있었고, 좁은 계단이 마리와 폴리나의 방으로 이어져 있었으며, 그 옆이 아빠의 방이었다. 레오니와 셀리나, 그리고 내 방에는 뒤쪽 정원으로 통하는 출입문이 있었다. 집 맨 꼭대기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전망실은 아빠의 서재로 꾸몄다.
그 당시 리지외는 인구 1만 8천 600명이 사는 칼바도스 지역에서 가장 큰 산업도시였고 이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포공장, 연사 직물공장, 침구류 공장, 피업공장, 증류주 제조공장 등이 있었다. 토요일마다 노르망디 지역의 생산물을 시장에서 살 수 있었다.
리지외는 목조 가옥이 빽빽하게 들어선 오래된 거리로 인해 중세 도시와도 같았다. 축일에는 주교좌 성당 옆에 있는 공원 가로수길에서 군악대가 연주를 하여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러나 1870년 리지외도 전쟁 후유증에 시달렸다. 번창했던 직물 산업은 눈에 띄게 쇠퇴했으며, 경제 상태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분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네 살 반밖에 안 된 나에게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나의 세계는 아직도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사랑하는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의기소침해지긴 했지만 그 아픔을 떨쳐버리는 데 도움이 되는 아름다운 일들을 많이 체험했다.
내가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도록 언니들은 애를 썼다. 아침에 언니들은 나를 꼭 안고 사랑스럽게 깨워주었고, 다 같이 기도하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마리와 폴리나는 새 가정부 빅토리아한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엄마에게 살림하는 것을 배운 마리가 집안 살림을 이어 받았으며, 폴리나가 집안 일을 거들면서 셀리나와 나의 교육을 도맡았다.
레오니는 도시 서쪽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 기숙학교에 들어갔으며, 셀리나는 그곳에서 반 기숙생으로 다녔다. 나는 5살에 이미 읽기와 쓰기를 배웠으며, 나 혼자 읽은 첫 단어가 천국이었다.
마리가 읽기를 넘겨받아 가르쳤고, 폴리나는 쓰기와 내가 즐겨하지 않는 문법을 연습시켰다. 문법 시간에 여성이니 남성이니 하는 것들을 구별해야 할 때는 눈물이 방울방울 연습장 위로 떨어졌다. 배우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나는 기억력이 좋았다.
가장 좋아한 분야는 의심할 여지 없이 교리 교육과 재미있는 성경 이야기였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아빠의 서재인 전망실로 올라가 마리와 폴리나가 매겨준 점수를 아빠에게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또한 언니들은 열심히 따라하는 나에게 칭찬 점수를 주었는데, 일정한 점수가 모이면 상과 함께 수업 없는 휴일을 주었다. 오후가 되면 아빠는 어김없이 나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아빠는 도시에 있는 많은 것들을 보여주었는데, 특히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장식된 성당을 보여주었다.
아빠에게 특별히 중요한 것은 매번 성체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처음으로 가르멜 수녀원 성당을 방문했는데, 아빠는 창살을 가리키면서 저 뒤에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계속해서 기도하는 경건한 수녀님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산책에서 돌아오면 나는 곧장 두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했다. 때로는 저녁 식사 때까지 정원에서 뛰놀았으며 온갖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곤 했다.
나는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특히 화창한 날 정원이 나를 부를 때는 더욱 그랬다. 나무, 껍질, 곡식알, 솔방울, 돌 등 자연 속에서 만나는 것들과 놀기를 좋아했다.
또 아빠를 놀이에 끌어들이기도 했다. 아빠는 온갖 방해에도, 예를 들면 독서를 중단시켰을 때에도 결코 화를 내지 않았다. 나의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했던 많은 것들을 모두 열거할 수는 없다.
아빠, 사랑하는 임금님께서 나를 낚시터에 데려간 여름날들은 특히 아름다웠다. 때때로 작은 낚싯대를 드리우기도 했지만, 대부분 꽃이 만발한 초원에 앉아 사색에 잠기거나 코끝을 간지럽히며 스쳐가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오후 시간은 너무도 빨리 지나갔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폴리나가 싸준 빨간 잼을 바른 빵을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어느 날 빵에 바른 잼의 색깔이 변한 것을 알았다. 그때 나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사라지며 오로지 하늘나라에서만 구름 한 점 없는 영원한 기쁨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하나 내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산책길에서 만난 불쌍한 남자였다.
그는 지팡이에 의지해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는 동전을 들고 그에게 달려갔다. 그는 슬픈 표정으로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씁쓸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저어 내 동전을 거절했다.
나는 말할 수 없이 슬펐다. 나는 단지 그를 위로하고 그에게 기쁨이 되고자 했을 뿐인데, 뒤늦게 내 생각을 했는지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웃어주었다.
그때 아빠가 과자를 사주었는데, 나는 그것을 들고 얼마나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 당시 나는 다음과 같은 격언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가끔 한 조각의 빵보다 한송이의 장미가 더 의미가 있다.
나는 첫영성체를 하는 날 이 불쌍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기로 결심했다. 사랑하는 하느님은 첫영성체를 하는 어린이의 기도를 잘 들어주신다고 했기 때문이다. 5년 후 나는 약속을 실천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를 틀림없이 도와주셨을 것이다.
나는 주일과 축일을 무척 좋아했는데, 그날은 평상시와 달랐기 때문이다. 특히 수업이 없었으며 숙제도 없었다.
나는 실컷 늦잠을 잤으며, 언니는 아침 식사로 초콜릿 우유를 침대까지 갖다 주었다. 그런 다음 마리는 옷을 입혀주고 머리를 빗겨주었는데, 나는 늘 소리를 지르고 대들고 하여 언니 속을 썩였다.
우리는 주교좌 성당인 성 베드로 성당으로 미사를 갔는데, 거기 가면 친척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리지외로 이사 온 지 두 달 후 나는 처음으로 내가 들은 강론을 이해했다. 그때 뒤슬리에 신부님은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서 강론을 했는데, 어린 내 마음은 온통 그 말씀에 쏠렸다. 그때부터 나는 모든 강론을 이해하게 되었다.
한 번은 신부님이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에 대해 강론을 했는데, 아빠는 나를 내려다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잘 들어라. 신부님께서 너의 주보성인에 대해 말씀하신다."
나는 신부님 말씀을 열심히 들었지만 신부님보다는 아빠의 얼굴을 더 자주 쳐다보았다. 왜냐하면 임금님의 진지한 얼굴이 믿음은 불가사이한 어떤 것임을 잘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일과 축일에 외가 식구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했는데 무척 즐거웠다. 나는 종종 마리나 셀리나와 함께 저녁 때까지 친척들 곁에 있었다. 우리는 사촌들과 놀거나 이시도르 외삼촌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날은 빨리 지나갔다. 저녁이면 아빠가 우리를 데리러 오셨는데, 나는 아빠를 만나는 것이 기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늘은 맑았으며, 우리는 반짝이는 별들을 관찰했다. 한 번은 오리온 별자리를 보았는데, 나는 거기서 'T'자처럼 보이는 별들을 발견하고는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기쁨에 넘쳐서 나는 이렇게 소리쳤다. "아빠, 저기 좀 보세요. 내 이름이 하늘에 쓰여 있어요."
평일이 시작되면 수업이 계속되었다. 폴리나는 엄마 역할에 충실하려 했으므로 쉽게 예외를 만들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아빠는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아빠를 통해서 내 마음대로 했다.
폴리나는 오전 수업을 잘하기 위해 오후 산책을 빼버리기도 했다. 그러면 아빠는 나를 위해서 폴리나에게 허락을 청했고, 드디어 아빠와 함께 산책을 나가곤 했다.
폴리나는 내가 착하게 자라도록 마음을 많이 썼다. 나의 지나친 감수성은 종종 가족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는데, 우리 집 식구들은 고집불통인 나를 길들이는 데 훌륭한 조련사들이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일이 있다. 한 번은 우리 집 가정부 빅토리아에게 심하게 화를 냈는데 그녀가 나를 있는 대로 놀렸기 때문이다. 나를 작은 악마라고 놀리면서 재미있어 했다.
이렇게 그녀는 종종 내 화를 돋우었다. 한 번은 내가 '빅토리아는 작은 난장이야!' 라고 소리쳤는데 그녀는 심하게 기분이 상했다.
폴리나는 많은 인내심과 섬세한 이해심으로 나의 모난 성격을 스스로 의식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매일 저녁 반성 시간이면 사랑하는 하느님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도록 나를 이끌어 주었다. 나 역시 가족들이 나를 항상 용서해 주고 넉넉한 사랑으로 감싸준다는 것을 느꼈다.
다섯 살 반쯤 되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고해성사를 보게 되었다. 이것은 나에게 행복하고도 소중한 기억이다.
폴리나는 신중하게 나를 준비시켰다. 한 인간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죄를 고백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나는 진지하게 내가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고백 사제에게 말하면 안 되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내가 말할 내용과 취할 태도를 분명히 알고 고해실로 들어가 고해 틀에 무릎을 꿇었다. 신부님이 나를 향해 돌아 앉았을 때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는데, 내가 너무 작아서 내 머리가 겨우 고해틀에 팔 받침대에 닿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신부님은 내가 서서 고해성사를 보도록 했다. 나는 마치 어른처럼 고해성사를 보았으며 축복을 받았다. 고해실을 떠날 때 나는 마치 깃털처럼 가벼운 느낌이었으며,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큰 기쁨을 느꼈다.
그때부터 큰 축일 전에는 꼭 고해성사를 보았으며, 그것은 매번 축제가 되었다. 첫 고해성사를 본 지 얼마 안되어 나는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다.
1878년 8월 8일 아빠는 나를 데리고 리지외에서 북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트루빌에 갔는데, 여행의 목적은 마리를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이시도르 외삼촌은 트루빌에 별장을 하나 빌렸는데 언니들을 차례로 초대하여 사촌들과 지내도록 했던 것이다.
바다에 대한 첫 인상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출렁거리는 파도는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았으며, 석양이 지는 광경은 깊은 감명을 주었다. 석양은 불덩어리처럼 바다의 수면을 스치면서 물 위에 밝은 길을 활짝 펼쳤다.
나는 이렇게 상상했다. 내 마음은 하얀 돛을 단 날쌘 보트가 되어 태양을 향해 빛나는 이 길을 달려가고 있다.
나는 영원한 생명의 강가에 빠르고도 기쁘게 도달할 수 있도록 예수님을 항상 눈앞에 모시고 있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지만 내 삶의 기본 방향을 보여주는 작은 사건 하나를 들려주고자 한다.
마리가 인형 옷과 천 조각, 그리고 색색의 레이스가 가득한 바구니를 가지고 왔을 때 셀리나와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는 그때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마리는 우리가 그런 것을 가지고 놀기에는 지났다고 느꼈는지 상냥하게 말했다. "얘들아, 너희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가지렴." 셀리나는 레이스 몇 개를 골랐다. 나는 잠시 생각한 후 바구니를 통째로 집어들고 달아나면서 어이없이 쳐다보는 언니들을 향하여 이렇게 소리쳤다. "나는 다 가질 거야!"
<베네딕토 수도원 학교에서>
뷔소네의 첫 3년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후다닥 지나간 행복한 시절!' 1881년 10월 3일, 나는 8살의 나이로 베네딕토회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학교에 들어갔는데, 레오니는 그때 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초록색 반이라고 불리는 네 번째 반에 들어갔다. 80여 명의 여학생은 여섯 반으로 나누어 졌으며, 각기 하얀색, 오렌지색, 빨간색, 초록색, 하늘색, 보라색 허리띠로 구분했다.
나는 셀리나와 외사촌, 요안나, 그리고 마리와 함께 1.5km 떨어진 학교까지 걸어다녔다. 외가의 가정부가 우리를 학교까지 데려다 주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우리는 반 기숙생으로서 저녁 때까지 학교에 머물렀는데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자습실에서 숙제를 했으며, 운동장에서 뛰어놀기도 했다. 저녁 6시쯤에 아빠나 외삼촌이 우리를 데리러 왔다.
나는 기숙사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편안했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았다. 1886년 5월까지 수도원 학교에 다닌 5년이란 세월은 내 인생에서 가장 우울한 시절이었다.
셀리나가 없었다면 단 한 달도 견디지 못하고 병이 났을 것이다. 마리와 폴리나가 나를 가르친 덕분에 나는 우리 반 아이들보다 한 발 앞서 있었다. 수학과 철자법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반에서 첫째였다.
우리 반 아이들은 질투심 때문에 나를 따돌렸다. 한때 기숙사에서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얼마 뒤 그 아이마저 따돌림을 받지 않으려고 다른 아이들 편을 들었다.
나는 이 경험을 통해 모든 공동체와 우정은 시기와 질투 때문에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무력한 느낌이 드는 한편으로 친구를 사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놀이에 대해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므로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즐겼다.
쉬는 시간에 꽃을 따거나 죽은 새를 묻어 주었으며, 내게 귀 기울이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거나 유치원 아이들과 놀아주었다.
다시 말해 우리 반 아이들과는 제대로 사귈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나와는 전혀 다른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죽음을 통해서, 언니들과 함께하는 생활을 통해서, 그리고 어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성장했으므로 또래 아이들보다 성숙한 편이었다.
저녁에 뷔소네로 돌아오면 얼마나 해방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의기소침했던 나는 다시 살아난 것처럼 아빠의 무릎에 매달려 내가 받은 점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아빠의 입맞춤은 나의 모든 고통을 잊게 해주었다.
학교가 쉬는 날에는 정원에서 놀았다. 외사촌 마리와 함께 은수자의 삶이라는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작은 제대를 꾸며놓고 거기서 기도했으며, 침묵 가운데 사랑하는 하느님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어느 날 폴리나에게 나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나는 은수자가 되어서 그녀와 함께 먼 사막으로 떠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다정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클 때까지 기다릴게. 나는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다른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 두 번째 엄마의 출가 >
1882년 여름 우연히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폴리나가 리지외에 있는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제 나는 두 번째로 고아가 되는 것이다. 나는 순진하게도 내가 자라면 폴리나와 함께 수도원에 가리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고,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 땅 위에 하늘이 아득히 높듯이, 그분의 길 또한 우리의 길보다 아득히 높다.
예리한 칼날이 내 가슴을 꿰뚫는 것 같았다. 나는 가르멜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폴리나가 수도원에 들어가길 원하며 나를 더 이상 돌봐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나중에 들은 것이지만, 폴리나 본인도 가르멜의 성소에 대해서 매우 놀랐다고 한다. 그것은 갑작스럽게 생긴 일로 1882년 2월 16일 그녀가 '가르멜 산의 사랑스러운 부인' 마리아 동상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영감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 동상은 우리 본당 성 야고보 성당 안에 있었으며, 마침 가르멜 수도회의 정신적 어머니인 아빌라의 데레사 성인 서거 300주년을 기념하여 드라트루에트 신부님이 우리 본당에서 3일간 기도의 날 행사를 하던 때였다.
폴리나는 성소를 받은 바로 그날 아빠께 말씀드렸고 승낙을 받았다. 그리고 가르멜 수도원 원장 수녀님도 그녀의 결정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때의 놀라움과 두려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인생은 고통과 계속되는 이별뿐이라는 느낌을 받았으며 많이 울었다. 반면에 폴리나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그녀는 가르멜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 설명해 주면서 나를 위로해 주려고 애썼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녀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언젠가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나도 불러주실 가르멜은 사막과 같은 곳일 거라고 생각했다.
폴리나는 입회를 앞둔 마지막 주간이 되자 입맞춤과 선물 공세로 지나칠 만큼 잘해주었으며, 맛있는 케이크를 잔뜩 만들어 주었다.
이별의 날 곧 1882년 1월 2일 월요일을 태양이 찬란하게 빛났음에도 하루 종일 눈물로 보낸 것을 기억한다. 아빠는 폴리나와 함께 가르멜에 갔고, 나머지 가족들과 외가, 친척들은 미사에 참석했다. 우리는 미사 동안 내내 울었다.
미사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흐느낌 때문에 자주 우리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들은 우리의 가슴이 얼마나 메어지는지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은 정말 불행한 날이었다.
왜냐하면 그날은 새 학기가 시작되는 날이라 미사 후에는 학교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3학년이 되었는데 우리는 첫영성체 준비를 했다. 종교 교육은 다른 과목에 비해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 밖에도 여자 선생님 한 분이 왔는데, 일주일에 세 번씩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어린이들을 보살펴 주었다.
성체를 모시게 된다는 생각이 고통 중에서도 깊은 행복을 느꼈지만 그것마저도 우울한 일이 되었다.
주교님은 첫영성체 교육에서 나를 제외시키기로 결정했는데, 그 이유는 내가 너무 어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교회법이 요구하는 기준에서 이틀이 모자랐다. (내 생일은 1월 2일이었으므로 12월 31일까지라는 기준에서 이틀이 부족한 상태였다.)
이시도르 외삼촌은 특별 관면을 청하기 위해 지체 없이 주교님이 있는 바위외를 찾아갔다. 그러나 친절하지만 단호한 거절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예외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약사님의 조카딸에게도 어쩔 수 없습니다. 첫영성체를 하는 어린이는 만 11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 말은 상처투성이인 내 가슴에 너무도 가혹한 것이었다.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매주 폴리나를 찾아갔는데 그것마저 고통뿐이었다. 면회시간은 삼십분이었는데 마리와 외숙모가 계속 이야기를 했고, 나에게 허락된 시간은 겨우 2~ 3분 뿐이었다.
결국 나는 '언니가 나를 완전히 잊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러한 충격은 내 영혼 깊숙히 숨겨두었던 엄마의 죽음을 일깨워 주었다.
< 희귀한 병 >
나는 1882년 12월부터 아프기 시작했는데, 그 원인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두통과 옆구리와 가슴 통증이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내 얼굴은 부스럼으로 뒤덮였으며, 나는 거울 보는 것조차 싫어했다. 밥도 먹을 수 없었으며,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이제는 큰언니 마리가 엄마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나를 다루는 방법이나 성격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반항했다. 셀리나와 나 사이에는 자주 작은 마찰이 일어났으며,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말다툼을 했다. 나는 마치 선인장처럼 가시돋친 사람으로 변했다.
사랑하는 폴리나는 가르멜 안에서 이 모든 일을 다 알고 있었다. 그녀는 따끔한 경고와 함께 비록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유익한 충고가 적힌 작은 쪽지를 자주 보내주었다.
곤자가의 마리아 원장 수녀님은 나의 걱정스러운 상태를 알아채고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내 작은 딸 데레사가 잠도 못 자고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작은 천사 같은 대레사에게 충고하니 하루 종일 폴리나 생각만 하고 있지 말아요. 그것은 데레사의 작은 가슴을 지치게 하고 건강을 해칠 수 있어요.'
나는 편지를 읽고 반항심이 생겨서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첫째, 나는 당신의 작은 딸이 아니에요. 둘째, 나는 이미 작은 천사가 아니에요. 셋째, 당신이 내 가슴의 상처를 들추어내는 것은 야비한 짓이에요.
분명히 원장 수녀님은 내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폴리나와 다른 수녀님에게도 말했을 것이다.
내가 완전히 그들의 손에 들어있다는 생각을 하자 심한 무력감을 느꼈으며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셀리나가 기쁘게 생활하며 말괄량이로 변해가는 동안 나는 점점 내 안으로 더 움츠러들었고, 가족들이 견디기 힘들 만큼 울보가 되었다.
1883년 부활절을 앞두고 아빠는 마리와 레오니를 데리고 파리에 가서 성주간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셀리나와 나는 외삼촌 댁으로 보내졌다. 나는 사촌들이 그들의 엄마와 함께 얼마나 행복하게 지내는지를 매일 체험했다.
나도 엄마를 갖고 싶어서 외숙모에게 '엄마'라고 불렀다. 그러자 사촌 하나가 나에게 소리쳤다. "우리 엄마는 너희 엄마가 아니야. 너희 엄마는 더 이상 없어!"
부활절 저녁에 이시도르 외삼촌이 일찍 죽은 당신의 여동생에 대해서 나의 엄마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나는 완전히 균형을 잃어버렸다.
나는 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외숙모와 셀리나가 나를 침대로 옮겼다. 갑자기 심한 전율과 오한, 그리고 무서운 불안에 시달렸다.
의사 선생님이 달려왔고, 그는 심각한 진단을 내렸다. "일찍이 어린이가 걸린 적이 없는 중병입니다." 그는 냉수 요법 처방을 내렸다.
결국 전보를 쳐서 파리에 있던 아빠와 두 언니를 불렀다. 나는 뷔소네로 옮길 수 없을 만큼 약해졌다. 신경과민으로 인한 전율과 공포, 그리고 환각 상태까지 왔다.
이런 나를 혼자 둘 수 없어 가련한 언니 마리도 외삼촌 댁에 머물렀다. 언니가 그렇게 헌신적으로 보살펴준 데 대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병은 아주 심각했고 더 이상 좋아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1883년 4월 6일 폴리나의 착복식에 무조건 참석하려 했다.
큰 기대에 부풀어 그날 나는 병상을 떠나 온 가족과 함께 가르멜에 갈 수 있었다. 엄숙한 착복식 후에 폴리나는 수도명으로 '예수의 아네스 수녀'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우리는 외부 면회실에서 만났다. 나는 다시 찾은 엄마의 무릎 앞에 앉을 수 있었으며, 온종일 활기찬 기쁨으로 충만했다.
모두가 꿈을 꾸는 듯 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하루를 보내고 다시 뷔소네로 돌아왔을 때, 가족들은 더 이상 아프지 않다고 저항하는 나를 반강제로 다시 침대에 눕혔다. 다음 날 나는 다시 심각한 증상에 시달렸다. 기억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했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아무 뜻도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나는 확신하건데 한순간도 의식을 잃은 적이 없었다. 나는 실신해서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를 두고 하는 말들을 다 들었다. 그것은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최악의 상태였다.
주치의와 가족들은 혹시 내가 평생을 이렇게 지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했다. 가르멜 수녀님들이 우리 가족과 함께 나의 완치를 위해 기도했다.
그들은 우리 가족이 사랑하는 파리의 성지 노트르담 대성당에 9일 기도를 부탁했던 것이다.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한 아빠와 언니들의 신뢰는 기적을 불러올 만큼 컸다.
< 웃음 짓는 마리아 >
내가 병이 났던 부활절도 어느새 6주나 지나갔다. 달력은 1883년 5월 13일을 빨간색으로 칠해 놓았는데 성령강림 대축일이었던 것이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나를 위한 9일 기도가 드려지는 동안 레온이는 내 머리 맡에 앉아 있었는데 내가 끊임없이 엄마를 불렀다고 한다. 이 소리는 정원에 있는 마리에게도 들렸으므로 그녀는 서둘러 들어왔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때 나는 언니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나를 진정시키려는 언니의 수고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때 새 언니 마리, 레오니, 그리고 셀리나는 내 발치에 무릎을 꿇고 마리아상을 바라보며 막내 동생을 살려주시길 간절히 빌었다. 나 역시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천상의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간절히 청했다.
성모님을 바라보는 동안 갑자기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부인을 보았음을 깨달았다. 성모님의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선함과 부드러움으로 가득했으며, 그녀의 매력적인 웃음은 내 영혼 깊숙히 파고들었다.
그 순간 내 모든 고통이 마치 떠오르는 태양에 안개가 걷히듯이 사라졌다. 두 줄기 굵은 눈물이 내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기쁨의 눈물이었다. 성모님이 나를 보고 웃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이튿날 나는 가족들의 일상생활에 다시 참여할 수 있었으며, 5월 말에는 가르멜의 폴리나를 방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학교는 방학이 끝나서야 겨우 갈 수 있었다. 몸도, 마음도 아직은 무척 허약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가족들 역시 내 병의 드라마틱한 후유증으로부터 서서히 회복되었다. 가족들은 내 병이 다시 재발할까 봐 한동안 두려워했다.
마리는 내 갑작스러운 치유에 대해서 끈질기게 물었으며, 나는 결국 그녀에게 비밀을 털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만사를 제쳐놓고 가르멜의 수녀님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으며, 모두들 기적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면회실에서는 모두들 기적으로 치유된 아이인 양 나를 바라 보았으며 많이들 물었다.
"성모님은 어떤 모습이더냐? 그분의 옷은 무슨 색이었느냐? 그분은 빛으로 둘러싸여 있더냐?"
나는 이런 질문 앞에서 혼란스럽고 슬펐다. 그런 것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어떤 질문에도 대답할 수가 없었으며, 혹시 내가 본 것이 환상이거나 거짓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모든 기쁨이 사라졌다.
내 병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이 거짓이 아니며, 가족과 주치의가 그것을 보증했음에도 나는 4년 동안이나 죄책감에 시달렸다. 내가 다시 영적 균형을 되찾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해 여름방학 때 모든 걱정을 잊어버릴 만큼 많은 기쁨을 누렸다. 1877년 우리가 리지외로 이사한 뒤 처음으로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이 묻어있는 알랑송을 찾아갔다.
가족들과 함께 엄마의 산소를 참배했고, 아빠는 나를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스말레의 유모 로즈 타이 가족은 우리가 찾아갔을 때 무척 반가워했다.
방학 동안 내가 체험한 모든 것들로 나는 기쁨과 행복에 겨웠다. 많은 이들이 나를 축복해주고 귀여워해 주었으며, 경의롭게 생각했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사람들과의 만남이 나를 들뜨게 했다. 나는 겨우 10살이 지나지 않았지만 이 세상은 정말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 첫 영성체와 견진 성사 >
나는 1883년 10월 수도원 학교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으며,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보라색 학년의 둘째 반에 들어갔다.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시간이 학교 수업 중에서 가장 즐거웠다.
폴리나는 기도와 좋은 생각으로 엮어진 작은 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으로 기쁘게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간은 내게 특별한 인상을 남겼다. 나는 이 기간이 끝날 무렵 세 가지 결심을 했다.
첫째, 나는 결코 용기를 잃지 않겠다. 둘째, 나는 매일 성모님께 기도하겠다. 셋째, 나는 나의 자존심을 굽히도록 노력하겠다.
드디어 4년이나 기다려온 첫영성체 날인 1884년 5월 8일이 다가왔다. 내 가슴속에선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일어났으며, 예수님은 내게 첫 키스를 하기 위해 서두르셨다.
그것은 사랑의 키스였다. 나는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꼈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며 영원히 나를 당신께 드립니다.'
예수님과 나의 결합은 넓은 바다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과도 비슷했다. 나는 예수님의 넓은 사랑의 바다 안에서 사라졌다. 나는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진다거나 이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영원히 내 곁에 머문다.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 기쁨의 눈물이 시냇물처럼 내 얼굴을 타고 내렸는데, 다른 아이들은 내가 엄마가 없어서 운다고 믿었다.
첫 영성체를 하던 날, 엄마의 부재가 결코 슬프지는 않았다. 내 마음속에서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곧 천국이었으며, 엄마는 이미 오래전 그곳에 당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예수님의 방문과 함께 엄마의 방문도 받았던 것이다.
오후에 나는 가족들에 둘러싸여 첫 영성체를 한 어린이로서 인사하기 위해서 가르멜에 갔다.
저녁이 되어서야 드디어 우리 가족만의 잔치를 즐겼다. 나는 많은 선물을 풀어 보았다. 특히 두 가지 선물을 보고 환호성을 올렸다. 아빠가 선물한 예쁜 시계와 크림색의 모직으로 된 멋진 옷이었다.
1884년 6월 14일 첫영성체를 한 지 5주 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리지외와 바이외의 교구장인 위고넹 주교님한테서 견진 성사를 받았다. 레오니가 견진 대모가 되었다. 견진 성사를 위해서 많은 준비를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기본적인 것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견진성사는 사랑의 성사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사랑하고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신다.'
<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함 > 1885년으로 넘어가기 전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1884년 6월 26일 뷔소네에 톰이 왔다. 하얀색의 예쁜 스파니엘로 나의 간절한 소망을 아빠가 들어주신 것이다. 이 개는 훌륭한 보디가드로 내가 산책할 때는 어디든지 따라다녔다.
톰은 충실한 심복이었고 나를 떠나지 않았다. 1884년 여름방학은 아주 멋있었다.
언니와 외사촌과 함께 리지웨에서 10킬로미터쯤 떨어진 셍켕루펭이라는 시골에서 여름방학을 보냈다. 그곳에 있는 농가는 외숙모의 어머니, 푸르네 부인의 소유였는데 우리에게는 낙원과 같았다.
나는 매일 저녁 소젖 짜는 것을 지켜 보았으며, 자상한 외숙모는 금방 짠 따뜻하고 신선한 우유를 내가 마셔야 한다고 고집했다. 석 달째 나를 괴롭히고 있는 백일해에 그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 밖에 1884년에는 아름다운 추억이 많다.
1885년 부활절 방학 때 바다를 다시 볼 수 있어서 기뻤다. 5월 3일부터 10일까지 우리는 도빌에서 많은 체험을 했다. 리지외로 돌아온 후 학교에서는 첫영성체 1주년 기념을 준비했다.
도밍 신부님이 우리에게 3일간 강의를 해주었는데, 죽을 죄와 죽음에 대한 내용으로 자비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협박으로 많은 공포를 불러 일으켰으며, 나는 '소심증'이라는 심각한 영적 병에 걸리게 되었다. 작은 실수를 두고도 죽을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언니 마리만을 믿었는데, 언니는 이 고통스러운 시기에 유일한 충고자였지만 결국 언니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언니는 내가 걱정거리를 이야기할 때 싫증을 내거나 하품하는 일도 없이 대단한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 주었다. 돌이켜보면 당시 내가 털어놓았던 이야기들은 가끔은 신경질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회전 목마에 탄 것처럼 늘 나 자신을 축으로 돌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방학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분위기를 바꿀 수 있었다. 우리는 다시 셍켕루펭에서 방학의 절반을 보냈다. 그런 다음 투르빌에 바닷가로 갔는데 그때는 아빠가 함께 가지 않았다.
셀리나와 나는 외가의 친척들과 함께 로즈빌라에서 지냈다. 우리는 바닷가 모래밭에서 함께 뛰놀았고, 외숙모가 마련해 주는 다양한 오락을 즐겼다. 나귀를 타고 소풍을 간다거나 낚시를 하기도 하고 시장을 보기도 했다.
나는 내적 고통을 잘 숨길 수 있었다. 외숙모는 이렇게 확신했다. '데레사는 분명히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 얘가 이렇게 명랑한 것은 처음 보는 걸.'
그동안 아빠는 중부 유럽을 두루 거쳐 발칸 반도에 이르는 긴 여행을 했다. 갈 때는 뮌헨과 빈을 들렀고, 돌아올 때는 아테네, 네팔, 로마, 그리고 밀라노를 거쳐서 왔다. 우리는 그리움과 기대에 가득차 역에서 아빠를 기다렸다.
벽난로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겨울날 저녁, 아빠는 우리에게 당신의 여행담을 들려주었다. 나는 이런 저녁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1885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10월 5일 월요일부터 다시 학교에 가야 했는데 정말 힘들게 느껴졌다. 이때부터 혼자 학교에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셀리나는 학교를 졸업했으며, 사촌 마리는 병치레가 잦아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된 것이다. 나는 고독한 가운데에서도 학급에 적응하려고 애썼으며, 담임 선생님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아무도 나를 돌보아주지 않았으므로 예수님한테서 위로를 받았다. 나는 수도원 성당 2층 성가대에서 아빠가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3월 초 아빠는 나를 더 이상 수도원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가정교사를 두기로 결정했다. 나는 1주일에 여러 번 파비뇽 부인을 찾아갔는데, 그녀는 어머니와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우리 외가에서 가까운 성 피에르 광장에 살고 있었다.
선생님은 50대였는데 세련되고 상냥했지만 약간은 노처녀 기질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집에 들어설 때면 언제나 그녀의 어머니가 나를 맞이했는데, 그분은 크고 맑은 눈으로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훑어본 후에야 나직하고 꾸민 듯한 목소리로 당신 딸을 불렀다.
"파비뇽 부인, 데레사가 왔어요." 그러면 선생님은 어린애 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 여기 있어요." 그런 다음에 수업이 시작되었다.
나는 고풍스러운 가구로 장식되고 책과 노트가 가득한 방에서 수도원 학교에서 느끼지 못했던 하나의 세계를 발견했다.
사람들의 방문이 잦아 수업은 종종 중단되었다. 책과 씨름하면서도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들었으며, 내가 듣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말들도 다 들었다. 여자들이 수다를 떠는 동안 나에 관한 내용도 많았다.
한 부인이 "저 예쁜 소녀는 누구야?" 하고 말하면 다른 부인은 "머리가 참으로 예쁘기도 하네!" 하고 맞장구를 쳤다. 나는 이런 말을 즐겨 들었으며, 이것들은 마치 기름처럼 내게 스며들어 내 영혼의 허영심과 교만을 남겨놓았다.
그때에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으므로 우리 집 이층 다락방을 내 취미에 맞게 꾸몄다.
새들이 있는 커다란 새장과 화분, 금붕어가 헤엄쳐 다니는 어항, 성인들의 성상, 상자와 바구니, 그리고 인형을 비롯하여 많은 책, 다락방은 마치 시장과 같았다. 이러한 왕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여기서 공부도 하고 책도 읽었으며, 기도와 묵상도 했다.
< 세 번째 엄마와의 작별 >
허약한 내 건강을 생각할 때 또 한 번의 새로운 이별은 지나친 것이었다. 1886년 8월, 마리가 10월 15일에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겠다고 통보한 것은 마치 번개가 친 것 같았다.
나는 이층 다락방에 대한 매력을 한꺼번에 잃어버렸다. 나를 곧 떠날 사랑하는 언니한테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으려 애썼다.
언니의 방 앞을 지날 때마다 방문을 두드리며 언니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나는 언니를 껴안고 수없이 많은 입맞춤을 했으며, 우리가 헤어진 다음을 위해서 충고를 듣고자 했다.
나는 더 이상 감정의 여왕이 아니었지만 13살이라는 나이에도 여전히 어린애처럼 행동했다.
아빠는 당신의 감정을 감추었다. 아빠는 당신의 보석이 떠나지 않길 바랐다.
외가의 친척들도 마리의 결정에 매우 놀랐다. 그 누구도 자유롭게 지내던 집시가 수도원에 들어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리가 가르멜에 입회했을 때 나는 여전히 겁 많은 소녀였으며, 작은 일에도 매번 눈물을 흘렸다. 그러므로 친지들은 내 성격이 나약하다고 생각했다. 외가의 친척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착하고 상냥한 반면에 삶에 무능한 작은 바보 정도로 여겼다.
내 불행은 레오니가 한마디 통보도 없이, 그리고 작별 인사도 없이 글라라 수녀원으로 사라졌을 때 극에 달했다.
엄마가 글라라 수녀원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아빠는 레오니와 함께 그 수녀원을 단지 한 번 방문했는데, 레오니는 수녀님들을 만나는 순간 그들의 엄격한 생활에 강한 매력을 느꼈고 그대로 그곳에 머물렀던 것이다.
나는 아빠로부터 레오니가 이미 글라라 수녀원 수녀로서 수도복을 입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당혹스러웠던 것을 잊을 수 없다. 내게는 가르멜을 비롯하여 모든 수도원을 미워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 인생의 버팀목을 잇따라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가르멜 수녀가 되고 싶었다.
폴리나와 마리를 다시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그리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삼갔다. 사람들이 나를 미쳤다고 여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뷔소네의 보호는 서서히 사라졌다. 아빠에게는 단지 당신의 작은 두 딸들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17살에 안주인 역할을 해야 하는 셀리나와 아직도 응석받이인 나만이 아빠 곁에 남아있었다.
1886년 10월 15일 이후 나는 절망에 빠졌으며, 삶에 대한 모든 기쁨과 의욕을 잃어버렸다.
나는 모든 집안일을 셀리나에게 떠맡겼다. 셀리나는 매사에 나를 부추겨야 했는데, 심지어 내 침대를 정리하도록 시켜야 할 정도였다. 나는 마치 아무런 의욕도 없이 남이 시키는 대로 따라하는 구제 불능의 아이와도 같았다.
< 결정적 사건 >
마리와의 이별은 내 영혼의 평정을 또다시 흔들어 놓았다. 나는 생각했다. '인생은 온통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하구나!' 내게는 아무것도 즐거운 것이 없었으며, 아무런 의욕도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으며 단지 훌쩍거리면서 울 뿐이었다. 나의 지나친 감수성을 내 스스로가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상하게 했을 때 나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울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그러다가 진정이 되면 울었다는 사실 때문에 또다시 울기 시작했다.
한 번은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아이 때 그렇게 많이 울었으니 어른이 되면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겠다." 이 말은 내게 몹시 충격적이었다. 온갖 충고를 들었지만 소용이 없었으며, 나 자신의 실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것은 정말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견딜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지나친 감수성과 눈물, 그리고 죄책감이라는 악순환에서 탈출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항상 분명했다. 만일 사랑하는 하느님이 아니라면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 하느님은 작은 기적을 일으키셔야만 한다.
나는 자주 방에 숨어서 기도했다. 나는 나를 압박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하느님께 단순하게 말씀드렸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에게 내 고통을 털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모든 것을 들어주던 마리는 석 달 전 가르멜에 가고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성탄절이 다가왔다.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마리 없이 지내게 될 첫 성탄절을 생각했다.
성탄 전야에 아빠는 우리 세 자매 레오니와 셀리나, 그리고 나와 함께 성베드로 주교좌 성당에 자정 미사에 갔다.
나는 성당에서 첫 영성체 때 강하고 전능하신 하느님을 받아 모실 수 있었다. 그때는 자주 영성체 하는 것이 보편화되지 않았다.
우리는 자정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뷔소네에 도착했을 때 벽난로에서 선물이 가득 담긴 구두를 가져오는 것이 나는 무척 기뻤다.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관습이 어린이들에게 큰 기쁨이었는데, 셀리나는 이를 계속하려 했던 것이다. 우리 가족 중에서 나는 막내였으며, 아직도 나를 어린아이처럼 다루는 것이 그녀에게는 즐거웠던 것이다.
그러나 응석을 부리는 것은 괜찮지만, 다른 한편으로 셀리나한테서 큰 아기 취급을 받는 것이 싫었다. 자정 미사 후 피로해진 아빠는 내 구두가 벽난로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화를 냈다.
나는 모자와 외투를 벗으려고 방으로 난 계단을 올라가면서 아빠의 소리를 들었다. 천만 다행히도 이것이 마지막이구나! 아빠는 내가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며 이제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빠의 말씀은 내 가슴을 꿰뚫었다. 내 감수성을 알고 있으며, 이미 내 눈에 눈물이 맺힌 것을 본 셀리나 역시 하마터면 울 뻔했다.
그녀는 나를 너무도 사랑했으며 나의 슬픔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데레사~" 셀리나가 말했다. "내려가지 마. 지금 네 구두를 보면 너무 가슴이 아플 거야."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내가 영성체를 통하여 당신을 모시는 순간 나를 변화시키셨다.
나는 눈물을 참으며 계단을 서둘러 내려갔다. 가슴이 뛰는 것을 억누르면서 내 구두를 집어들고 아빠 앞에 내보이며 행복한 여왕처럼 기쁘게 그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을 꺼냈다. 아빠는 다시 즐거워하면서 웃었고, 셀리나는 꿈을 꾸는 듯 했다.
우리는 모두 행복했는데 내가 가장 행복했다. 이것은 진정 하나의 기적이었다. 그렇게도 울어대고 감수성이 예민하던 내가 단 한 번에 자의식이 강해지고 모든 슬픔으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밝은 성탄 전야에 내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세 번째 시기가 시작되었다.
예수님은 내가 10대의 노력으로 할 수 없었던 일을 단 한순간에 완성하셨다.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해주고자 하는 사랑이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때부터 나는 행복했다. 예수님은 내가 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나를 변화시키셨다. 나는 다시 태어난 듯했다.
우리 가족은 1887년 1월 2일 14번째 내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우리는 가르멜 수도원에 있는 언니 폴리나와 마리를 방문했는데, 그들은 나의 변화에 대해 무척 놀라워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