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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한강교
2017. 8. 24. 향기 이영란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서 마음을 싣고서
젊음은 피어나는
꽃처럼 이밤을 맴돌다가
새처럼 바람처럼
물처럼 흘러만 갑니다
어제 다시 만나서 다짐을 하고
우리들은 맹세를 하였습니다
이밤이 새이며는 첫차를 타고
행복어린 거리로 떠나갈거예요
오오 뚜룻뚜룻뚜 하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바다로 쉬지않고
바다로 흘러만 갑니다
귓등을 스쳐는 갔을 터이나 불러 본 적 없고, 부를 일도 없었던 노래이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가수 혜은이가 1979년에 발표하였으나 가사가 방송부적격이라고 판정받아 금지된 노래였다고도 한다.
웬 일로 남편이 영화를 보러 가겠다고 했다. 팟캐스트를 탐청하는 사람이 <택시 운전사>에 대해 많이 주워 들은 모양이었다. 우리가 좀 그렇지 않은가? 옆에 있는 사람 말은 잘 안 들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말은 잘 듣는. 내 말을 곧잘 무시하는 남편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 논리적으로 따져서 좋을 것 없다. 세상엔 논리로 해결 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
“나도 같이 가야 돼?”
“그럼 나 혼자 영화관에 가란 말이가!”
이봐요 ‘그럼 영화 보러 가자’라고 좀 멋지게 제안을 하시던지!
어쨌든 나는 오랜만에 모처럼 멋을 부리고 데이트 하는 기분으로 남편과 함께 영화관을 갔다. 사실 그렇게 예쁜 척 하고 가서 볼 분위기의 주제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영화의 시작은 택시 운전사 김만섭(송강호)이 ‘단발 머리’를 흥얼거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주 방정맞지만 자연스럽고, 넘치지 않게. 김만섭은 1970년대 산업역군으로 중동을 다녀 온 후, 개인택시를 겨우 장만하지만, 병으로 아내가 죽고 만다. 아내가 자신의 병에 너무 많은 돈을 쓰지 않기를 원했지만, 그걸 뿌리치지 못하고 좀 더 나은 진료를 해 주지 못한 것이 한이 되지만, 그래도 하나 있는 딸에게 그지 없이 자상한 아버지이다. 일을 다니느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해 마음이 아프지만 그 시절 우리는 함께 다정한 시간을 보낸다는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무척이나 생활력이 강하고, 궁상을 떨어가며 돈을 모아보고자 하지만 운은 따르지 않고 그렇다고 손님들에게 매정하게도 못하는 어중간한 주변에서 볼 듯한 남자이다.
때는 1980년 5월 17일 경, 20여년의 군부독재에 종지부를 찍고, 서울의 봄을 맞고자 했던 시대를 전두환을 비롯한 일당들이 권력욕을 드러내자 학생, 시민, 지식인들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시위로 터져 나온다. 김만섭은 우리나라 어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의 하나인 ‘비싼 등록금 들여서 대학 보냈더니 데모만 하고 자빠졌네’를, 자신의 경험의 폭을 넘어서지 못하는 ‘너그들이 사우디 그 땡뼡 아래에서 일해 봐야 우리나라가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 알거여’를 뱉어내는 특별할 것 없는, 어찌보면 말 안 통하고 꼰대 같은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처럼 며칠 째 좀처럼 되는 일이 없던 그에게, 거금 10만원이 생길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정확하게 말하면 동료에게 간 기회를 낚아챈 것이지만. 광주까지 가는 손님을 태우고 다녀오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어디 세상이 그리 만만하던가 말이다. 광주에서의 상황을 알 리 없는 김만섭은 그 광주를 취재하고자 하는 독일기자 위르겐 힌즈페터(피터)를 태우고 광주로 진입하게 된다. 광주에서 무방비 상태의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진압을 일삼는 모습을 본 김만섭은 비로소 계엄군의 실체를 파악하게 되고, 그들의 만행이 외국기자에 의해 알려지기를 막기 위한 작전에 그 자신도 얽히게 되어 계엄군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당한다. 서울에 남겨진 딸을 걱정하며 만섭은 두려움에 밤을 지샌다. 딸에게 연락할 길이 없는 만섭은 광주를 탈출해서 순천으로 내려오지만, 그가 아니면 돌아갈 수 없는 피터를 데리고 나오기 위해 다시 광주를 찾는다. 딸에게는 “아빠가 손님을 두고 왔어.”라는 피눈물 나는 전화를 한 후.
제 3한강교는 만섭이 다시 광주를 찾으면서 나온 노래이다. 아마 라디오에서 나온 노래?인 듯 하지만, 만섭의 마음 속에는 두려움과 슬픔, 분노, 나와 상관 없는 일이니 도망가자는 마음을 누르고, 그래도 피터를 데리고 나와 그 만행을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저 심연 깊은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선택했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그렇게 그렇게 울컥했다. 그런 역설이 어디 있단 말인가?
영화 <택시 운전사>는 아무도 영웅이기를 거부한다. 끝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김만섭(김사복),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도 피터가 광주 상황을 알릴 수 있도록 도망가라고 말했던 대학가요제 나가는 것이 꿈이었던 구재식, 위험한 광주를 피해 떠나려는 만섭을 욕하기 보다는 오히려 당연하다며, 전남 번호판과 지도를 주는 유해진(아 그는 얼마나 촌스럽고 자연스런 전라도 남자였던지, 그건 연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피터를 태운 만섭의 택시를 탈출 시키기 위한 광주 택시들과 진압군들의 차량 충돌 장면들, 마지막 검문소에서 트렁크 안에서 서울택시 번호판을 발견하고도 ‘보내, 보내 주라고...’를 말하며 군인 중사가 눈감아 주고 보내는 장면(이것은 진짜 실화였다고 했다).
영화의 시선 역시 영웅이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마음 속 깊이 다가왔다. 영화는 택시 운전사 만섭의 시선 너머를 보여 주는 것을 거부한다. 나머지는 관객의 상상력과 숙제로 남겼다. 특별할 것 없는 한 사람의 시선만으로도 충분했다. 우리는 모두 평범한 한 사람이고, 그 평범한 상식과 인정과 도리로 삶을 살아낸다. 그것을 통하지 않게 만드는 부당한 정권에 대한 목숨을 건 저항은 어쩌면 당연하였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연으로 얽힌 삶은 파괴되고 끊어지는 지옥을 만들어 냈다.
힌즈페터는 만섭의 도움으로 출국을 할 수 있게 되자 그에게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 달라고 한다. 만섭은 자신에게 닥칠 후환이 두려워 김사복이라는 가짜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준다. 광주 시민들의 항쟁에 깊이 감동한 힌즈페터는 후에도 계속된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과 관련한 취재와 광주항쟁 취재의 공적으로 국내 언론상을 수상하기 위한 방문 등 여러 번 한국을 드나들며, 자신을 위해 위험을 무릅 쓴 그를 찾고자 하지만 만섭은 피터를 멀리서만 바라본다. 지금 쯤은 나타나도 좋으련만, 뼛속 깊이 자리 잡은 두려움의 잔재일 수도, 불편한 카메라 플래시를 맞지 않으려는 보통 사람의 선택일 수도, 그 어느 쪽도 우리는 말할 수 없다.
맘 놓고 분노도 못하고 알려고도 못했다. 진실을 들여다 보는 일은 불편했다. 뻔뻔하게 국민을 속여대는 정권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대다수의 순종적인 국민은 규칙을 거스르는 일이 어려운 일이었다. 나 역시 그랬다.
이제는 과거의 잘못된 일을 잘못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걸 새 대통령이 앞장 서서 말한다. 과거의 정권이 잘못한 일을 대신 사과하고 유족의 슬픔을 어루만진다. 그 용감하고 정의롭고 아름다운 대통령 뒤에서 우리는 맘 놓고 슬퍼하고 공감하고 분노할 수 있다. 우리는 분노와 슬픔의 해방구를 이제서야 찾은 듯 쌓여진 세월동안의 울음을 한꺼번에 쏟아낸다.
나는 골백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를 못하겠다. 자신의 뻔뻔한 권력욕을 위해 수백, 수천명의 무고한 시민을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거나 다치게 만든 그 한 맺힌 원혼들과, 살아도 살아 있을 수 없었던 생존 피해자들과, 결코 지워지지 않은 유족들의 슬픔이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단 말인가? 왜 역사는 그다지도 더디게 흐르고, 그 단죄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가? 광주는 여전히 다른 모습으로 대한민국의 또 다른 곳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주제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영상이 자꾸만 머리에 머물렀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청년시절, 페트라세프스키 사건으로 회원들에게 8년의 요새 유형에 처하는 벌을 내리는데, 황제 니콜라이 1세는 도스토예프스키를 포함한 20명의 회원들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연극을 꾸민다. 죄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이 연극은 자칭 민중을 사랑한다는 조무래기 지성인들을 한번쯤 혼쭐내주고,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게 한 후 풀어주어 그들에 대한 황제의 자비심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극적인 사건은 그의 작가로서의 삶에 비옥한 거름이 되어, 후에 소설 <백치>(1868)를 통해 예술언어로 옮겨지게 된다. 사형집행인이 사형 전 5분의 시간을 주었을 때 그가 한 말이다.
매서운 칼바람도 느낄 수 없겠구나. 맨발로 전해지는 땅의 냉기도 못 느끼겠구나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겠구나. 모든 것이 아쉽고 아쉽다.
나에게 마지막 5분이 주어진다면, 2분은 동지들과 작별하는 데, 2분은 삶을 돌아보는 데, 그리고 마지막 1분은 세상을 바라보는 데 쓰고 싶다. 언제나 이 세상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은 단 5분 뿐이다
아름답고도 아름다운 시간과 삶이다. 사랑하고 사랑해도 모자랄 삶의 시간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이 얼마나 가정, 지역, 소모임, 사회, 국가 공동체와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 우리 삶이 얼마나 정치적인 것인지, 나는 이번 정권이 바뀌고 나서 상승한 행복지수와 후련함과 그래, 그렇지 비로소 순리대로 흐른다는 느낌이 내 뼛속을 스민다. 나는 그것이 나의 느낌만은 아니다는 증거를 곳곳에서 확인한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자료>
5.18 민주화 운동은 1979년 군사정권이 붕괴된 후, 혼란한 정국을 틈타 신군부 세력이 등장하면서 발단이 되었다. 신군부 세력이 12.12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며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유신독재체제에 이은 신군부세력의 탄압정치는 국민들의 불만을 고조시켰고, 전국적으로 산발적인 학생시위가 이어졌다. 1980년 5.17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어, 각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지며 계엄군이 주둔하였다. 5.18 광주 전남대 학생들은 등교가 저지되자 계엄령과 휴교령 해체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학생들과 계엄군간의 충돌이 일어나며 계엄군에게 구타를 당한 학생들이 속출하자 학생들은 광주의 중심대로인 금남로로 진출하였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계엄군은 학생시위대를 지지하는 일반 시민들까지 구타하고 체포하였으며 그 결과 많은 부상자와 연행자들이 발생하였다. 계엄군의 폭력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은 대학생들의 시위에 동조하며 금남로에 모이기 시작했다. 공방전이 계속되면서 시위는 점점 격화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과 시위대 모두 사망자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계엄군의 무차별 집단발포까지 이어졌다. 폭력진압이 더욱 거세지자 시위대는 예비군 무기고를 이용하여 무장하기 시작했고, 시위로 시작한 민주화 운동은 결국 무력항쟁으로 변했다. 계엄군과 시민군간의 투쟁이 격화되어 많은 사상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1980년 5월 27일 탱크를 앞세운 대규모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하여 도청과 시내를 장악함으로써 시위는 종결되었다.
이 기간 동안 외부인의 접근 차단은 물론, 언론 탄압 및 시내, 시외 전화가 두절되고, 광주 시내를 탈출한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만 그 소식들이 밖으로 조금씩 전해지기는 했으나 유언비어처럼 전해지며 북한 무장 간첩이 침투하여 저지른 만행이라고 소문나기도 했다. 이 후 언론에 보도되면서 광주 외부로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1988년 5.18 민주화 운동 희생자의 공식적 발표는 사망 191명, 부상자 852명으로 6.25전쟁 이래 최대의 희생자를 낸 사건이었다. 하지만 5.18기념재단 관련 통계에 따르면 5.18민주유공자 보훈대상자는 총 3,586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그 후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이나 보상, 책임자 처리 등 사후 처리에 대한 시민의 요구가 이어졌고, 이로 인해 광주 희생자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고, 책임자에 대한 처벌도 이루어졌다?. 1997년부터 정부주관 기념행사를 가지게 되었으며 2011년 5월에는 관련 기록불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한양사이버대학교 5.18민주화 운동 설명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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