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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26년 4월 24일~28일
장소: 중국 · 연해주일원(하얼빈-우수리스크-블라디보스톡-크라스키노(연추)-용정-연길)
인원: 46명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했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권총으로 저격했다. 이토를 저격한 후 안중근은 ‘코레야 우라!’라고 크게 외쳤다. 이 외침은 한국 만세라는 뜻이다. 이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이토를 살해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항일 의지를 만세계에 천명한 것이며 일본의 침략의 부당함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바닥에는 안중근 의사가 서 있던 자리(세모)와 이토 히로부미가 피격된 자리(네모/다이아몬드)가 표시되어 있다. 현장에 관한 회원들의 관심이 뜨겁다.
중국 국가 주석 시진핑이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정율성(1914 또는 1918~1976)을 중국과 한국의 우의를 상징하는 10명 중의 한 사람으로 언급하였다. 정율성은 ‘신 중국건국 100대 인물’ 중 6위에 선정되었으며 중국의 3대 작곡가로 꼽힌다. 정율성은 광주 출생이며 숭일학교와 전주 신흥중학교를 다녔다. 첫째형 정남근과 둘째형 정인제, 셋째형 정의은 등이 모두 독립운동가로 활약하였다. 1933년 봄 셋째형 정의은(조선공산당 당원), 누나 정 봉과 함께 중국 남경(南京)으로 건너가 의열단의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1933.9∼1934.4.)로 졸업하였다. 이후 조선의용군의 일원으로서 항일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중일전쟁 발발 후 연안에 있을 때 작곡한 「연안송가(延安頌歌)」와 「팔로군행진곡(八路軍行進曲)」(이후 「중국인민해방군(中國人民解放軍)」 군가로 바뀌어 불렸다) 외에, 「3.1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조선인민군행진곡」, 「두만강」 등이 있다.
항일독립운동가이자 음악가인 정율성은 해방후 북한에서의 활동을 이유로 아직도 건국훈장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운 현실이다..
하얼빈 성 소피아 성당은 러시아 제국 시절인 1907년에 건립된 극동 지역 최대 규모의 정교회 성당이자, 하얼빈이 '동양의 모스크바'라고 불리게 된 배경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또한 20세기 초 하얼빈이 러시아의 영향 아래 국제적인 상업 도시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성당 주변의 광장은 유럽풍의 분위기를 자아내며, 성당 내부의 낡은 벽화와 흔적들은 과거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던 수많은 러시아 망명객들의 삶과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는 하얼빈이 중국, 러시아, 그리고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역사가 복잡하게 얽힌 다층적인 공간임을 상기시켜 준다.
성당안에서 피아노 연주, 바이올린 연주가 방문객의 지친 여정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
조린공원은 안중근 의사와 관련이 있다.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과 함께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3일 아침 조린공원에서 의거계획을 점검한다. 이들은 전날 입수한 중문판 ‘원동보(遠東報)'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방문하는 날짜를 알게 된다. 계획을 점검한 후, 조린공원 남문 밖 중국인의 사진관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공원의 현재 명칭인 '조린'은 중국의 항일 영웅인 이조린(Li Zhaolin)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조린 장군은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하며 우리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일제에 맞서 싸웠던 인물이다. 안중근 의사는 순국 직전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현 조린공원) 옆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라는 눈물겨운 유언을 남기셨다. 비록 선생의 유해는 아직 찾지 못했으나 공원 내에는 그 유언을 기리는 안중근 의사 유묵 비석과 청초당이 세워져 있어 선생의 넋을 기리는 성지가 되었다.
이상설 선생 유허비는 우스리스크시 근처 수이픈 강변(러시아말로는 라즈돌라노예강)의 언덕에 세워져 있다.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던 중, 병을 얻어 1917년 망명지인 우수리스크에서 서거하셨다. 기념비는 그 유해를 뿌렸던 곳에 세워졌다.
유허비가 세워진 배경에는 선생의 처절하고도 결연한 마지막 유언이 서려 있다. 선생은 "독립을 이루지 못했으니 내 몸과 유품, 원고를 모두 불태워 바다에 던지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동료들은 선생의 뜻에 따라 시신을 화장하여 라즈돌나야 강물에 흘려보냈다.
우리 일행은 '국외 독립운동의 아버지 이상설'을 기억하기로 다짐했다.
우수리스크의 발해 옛 성터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5경 15부 62주 중 하나인 솔빈부(率賓府)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역사적 현장이다. 우수리스크 발해 성터는 당시 발해의 행정 구역이었던 솔빈부의 중심 성곽이다. 솔빈부는 발해의 명마인 솔빈마가 생산되던 곳이자, 주변 말갈족들을 통제하고 당나라 및 신라와 교류하던 교통의 요충지이다. 이곳 성터는 발해가 단순히 한반도 북부에 머물지 않고 광활한 만주와 연해주 대륙을 경영했음을 보여주는 실질적인 증거물이다.
최재형 선생 고택 기념관(최재형 박물관)은 러시아 우수리스크에 위치한 역사적 장소이자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년 일본군에 의해 피체되기 전까지 머물렀던 마지막 거주지이다.
최재형 고택은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전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선생의 숭고한 정신이 깃든 곳이다. 러시아로 이주하여 막대한 부를 일군 선생은 이곳에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거사를 배후 지원하고, 독립군들에게 무기와 식량을 아낌없이 내주었다. 당시 연해주 한인들은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아버지라는 뜻에서 최재형 선생을 ‘페치카(난로) 최’라고 불렀다. 이 집은 고단한 망명 생활을 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고려인 역사관은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는 곳에 머물지 않고, 오늘날 한국과 러시아를 잇는 문화적 가교 역할을 수행한다. 고려인 문화센터 내에 위치하여 현지 한인 동포들이 모여 전통 공연을 연습하고 한국어를 배우는 활동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이곳은 방문객들에게 고려인이 남이 아닌 우리와 피를 나눈 형제임을 깨닫게 하며, 미래 한민족 공동체의 외연을 넓히는 중요한 거점이다.
고려인 최초 강제이주 지역인 라즈돌노예역-스탈린 독재 정권 당시 고려인의 강제 이주를 위해 집결했던 장소가 ‘라즈돌노예’ 역이다. 1937년 8월21일 소련 정부에 의해 강제이주가 결정된 후 2단계로 진행되었다. 우선 9월초부터 국경지역(하산, 수풍, 우수리스크, 수청지역)의 고려인들이 우선적으로 이송됐다. 라즈돌노예 주변의 고려인은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이송됐다. 1937년 9월9일 고려인을 실은 최초의 강제이주 열차가 라즈돌노예 역에서 출발했다. 그해 11월에는 이주민 배치까지 완료되었다. 1937년 12월5일의 보고서에 따르면 카자흐 공화국에 20,141가구 95,427명, 우즈베크 공화국에 16,079가구 73,990명, 타지크 공화국에 13가구 89명, 키르기즈 공화국에 215가구 421명 등 총 36,448가구 169,927명의 고려인들이 이송, 배치되었다.
1864년 연해주로 이주해 온 한인들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위해 투쟁한 애국지사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다. 1911년 연해주 지방정부의 명령으로 개척리에 살던 한인들은 약 2Km 떨어진 이곳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곳에서 한국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신한촌’이라고 이름 지었다. 1915년 한인 약 1만여 명이 거주했고 독립운동 단체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한 중심지였다. 그러나 신한촌은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 기념비는 1999년 8월 15일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한민족 연구소에서 건립했다. 3개의 기둥은 남한·북한·재외 동포를 의미하기도 하고, 한성 임시정부·상하이 임시정부·블라디보스토크 대한국민의회 등 3곳의 임시정부를 뜻하기도 한다. 8개의 돌은 조선 팔도를 뜻한다. 기념비에는 독립투사들의 넋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역사 인식을 일깨워 주기 위해 적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한인 밀집 거주지)에 위치한 '서울 거리 2A(Seoul Street 2A)'는 과거 한인들의 이주 역사와 관련된 장소이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일대의 아파트 단지와 주택가로 변해버린 한민학교 터 및 권업신문사 터는 과거의 교사(校舍) 및 건물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이곳에서 교육받은 후예들이 훗날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라는 가혹한 운명 속에서도 우리 문화와 언어를 지켜내는 저력을 발휘했다.
마린스키 극장-이 극장은 본래 2013년 '연해주 오페라 발레 극장'으로 개관하였으나, 201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이 이를 인수하여 분원 체제로 운영한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극동 지역을 문화적 거점으로 육성하려는 전략의 일환이었다. 덕분에 블라디보스톡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오페라와 발레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극장은 블라디보스톡의 랜드마크인 금각교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고전적인 외형을 지닌 상트페테르부르크 본관과 달리, 이곳은 전면 유리창으로 설계된 현대적이고 세련된 건축미를 자랑한다. 특히 밤이 되면 조명을 받은 극장 건물이 바다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로비에서 통유리를 통해 바라보는 금각교의 야경은 유명한 볼거리다.
블라디보스토크 역 플랫폼에는 숫자 '9288'이 새겨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는 모스크바 역에서부터 이곳까지 이어진 철도의 총 길이를 킬로미터 단위로 나타낸 것이다. 과거 증기기관차 시절부터 현대의 전기 열차에 이르기까지 이 철도는 수많은 물자와 사람을 실어 나르며 러시아 근현대사의 대동맥 역할을 수행해 왔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우리 민족에게도 지울 수 없는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연해주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이 화물 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떠나야 했던 비극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위해 하얼빈으로 향할 때 이용했던 철도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에게는 복합적인 감정이 교차하는 역사적 장소이다.
주변에는 혁명광장 및 러시아 정교회, 개선문, 잠수함 박물관 등이 있다.
지신허 마을은 1863년 한인 13가구가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땅에 처음으로 조성한 최초의 한인 이주 정착지이다. 러시아 핫산 지구(군 단위)의 포시예트 구역(읍 단위)의 지신허 강변에 위치한 마을(동 단위)이다. 당시 함경도 지역의 극심한 기근과 세도 정치의 수탈을 피해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넌 선조들이 일구어낸 삶의 터전이다. 지신허 마을은 단순히 농사를 짓는 곳을 넘어 항일 의병과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든든한 후방 기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연추(크라스키노) 지역과 인접해 있어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이 마을을 거쳐 이동하거나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은신하기도 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자신들의 삶도 넉넉하지 않았으나 독립 자금을 모으고 독립군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등 조국 광복을 향한 길에 묵묵히 동참하였다.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지신허 마을의 모든 주민은 정든 터전을 떠나 중앙아시아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어야 했다. 주민들이 떠난 뒤 마을은 폐허가 되었다. 현재는 그 당시의 집이나 건물의 형체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2004년 고려인 이주 140주년을 맞이하여 마을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한인 이주 기념비'가 이곳이 우리 선조들의 첫 안식처였음을 알리고 있다. 지신허 이주 기념비는 2004년 가수 서태지가 세웠다.
크라스키노 전망대는 러시아 연해주 최남단인 핫산지구의 크라스키노 마을 인근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 서면 광활하게 펼쳐진 연해주의 대지와 포시예트(Posyet)만의 푸른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특히 남쪽으로는 북한의 국경 마을과 두만강 유역이, 서쪽으로는 중국 훈춘 지역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가깝게 보여 세 나라의 국경이 맞닿은 접경 지역 특유의 긴장감과 평화로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전망대 아래로는 발해의 옛 성터인 크라스키노 성지와 한인들의 초기 정착지였던 지신허 마을 터 등이 넓게 펼쳐져 있다. 고대사와 근현대사가 겹쳐진 독특한 역사성이 느껴진다. 탁 트인 시야 덕분에 과거 발해인들이 일본으로 향하는 배를 띄웠던 바닷길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동시에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라는 비극을 겪기 전까지 일구었던 땅의 흔적을 조망할 수 있다.
이곳은 동북아시아의 복잡한 역사와 영토 분쟁의 흔적을 되새겨보는 교육적인 장소로서의 가치가 높다. 특히 날씨가 맑은 날에는 두만강 너머 북한 땅이 매우 가깝게 보여, 한반도의 분단 현실과 대륙으로 이어지는 길에 대한 깊은 감회를 자아낸다. 전망대 정상에는 1938년 일본군과의 국경 분쟁이었던 '핫산 전투'에서 전사한 소련군들을 기리는 대형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는 1909년 3월, 안중근 의사를 포함한 12명의 독립운동가가 연추의 하리 마을에 모여 항일 투쟁의 의지를 다졌던 일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당시 안중근 의사는 왼손 무명손가락 마디를 잘라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大韓獨立)' 네 글자를 쓰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이 결연한 의지는 같은 해 10월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거사의 결정적인 동력이 되었다.
용호각전망대-용호각은 '한눈에 세 나라를 본다'는 뜻의 ‘일안망삼국(一眼望三國)’을 실현하는 장소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왼쪽으로는 러시아의 광활한 영토와 핫산 지구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함경북도가 펼쳐진다. 특히 정면으로는 두만강 물줄기가 동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장관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중국 영토 안에서 동해를 조망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지점이기도 하다.
서전서숙(瑞甸書塾) 터-이상설(李相卨)을 중심으로 여준(呂準)·정순만(鄭淳萬)·이동녕(李東寧)·박정서(朴禎瑞)·김우용(金禹鏞)·황달영(黃達永)·홍창섭 등의 애국지사들이 교육을 통한 독립사상의 고취를 위하여 연길현(延吉縣) 육두구(六頭溝)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설립하였다. 이상설이 천주교회장 최병익(崔秉翼)의 집을 사재로 매입하여 학교건물로 개수하였으며, 학교명은 서전평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1907년 4월 이상설이 이동녕·정순만과 함께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게 되자 재정난을 겪게 되었고, 또한 통감부 간도출장소가 설치되어 일제의 감시와 방해가 심해지자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폐교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같이 비록 1년 미만의 짧은 역사로 폐교되고 말았지만, 민족주의에 입각한 교육기관으로서, 그 뒤 북간도뿐만 아니라 서간도와 노령 연해주, 한국 내의 각 지역에서 우리의 민족교육이 일제식민교육정책과 대항하면서 발전, 성장해 나가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3·13 반일의사릉원은 간도 지역에서 일어난 3.13 만세 시위의 희생자들을 모신 묘역이다. 당시 용정 비암산 기슭에 모인 3만여 명의 한인은 대한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는 만주 대륙에서 일어난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반일 시위였으며,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가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음을 증명한 사건이다.
시위대가 용정의 일본 영사관을 향해 행진하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군벌의 무차별 사격으로 현장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때 순국한 10여 명의 열사를 비롯하여 부상으로 인해 나중에 숨진 이들을 합쳐 총 14위의 유해가 있었느나 1위가 이장되어 현재는 13위가 안치되어 었다. 이들의 희생은 간도 한인 사회에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으나 동시에 평화적인 만세 시위를 통해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5만원 탈취비-철혈광복단은 명동중학교 출신 청년들로 구성된 무장 독립운동 조직으로, 일제의 자금을 강탈해 무기를 구입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조선은행 직원 전홍섭의 협조로 일제 자금 운송 일정이 철혈광복단에게 전달되었고, 이들은 용정으로 이동하는 경로에 매복해 있었다. 총 6명의 단원은 일본 순사와 조선은행 직원 등을 습격해 15만원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철혈광복단의 대담한 작전은 당시 일본 헌병대의 밀정으로 활동한 엄인섭의 배신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밀정의 정보는 일본 영사관에 전달되었고, 이후 철혈광복단원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포되었다. 체포된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는 192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으며, 최봉설만이 탈출해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이들은 재판 과정에서도 자신들의 행동이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와 인도에 기초한 행동”이라며 당당하게 맞섰고, 탈취한 자금을 독립군의 무기 구입에 사용하려 했음을 밝혔다. 하지만 일본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강도살인죄로 이들을 사형에 처했다.
철혈광복단의 작전이 성공했다면 신식 무기를 통해 만주 지역에서의 무장투쟁이 크게 활성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비극적으로 끝났고, 독립운동의 판도는 바뀌지 않았다. 철혈광복단의 청년들은 실패로 돌아간 작전 속에서도 민족의 정의와 인도를 위해 헌신했으며, 그들의 용기와 기개는 후세에 큰 영감을 남겼다. 철혈광복단의 이야기는 후에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모티브가 되었다.
명동학교-1899년 2월 김약연(金躍淵)과 김정규(金貞奎), 문치정(文治政), 남위언(南韋彥) 등 총 114명은 북간도 화룡현(和龍縣)으로 이주해 명동촌(明東村)이라는 마을을 세웠다. 1906년 당시 용정촌(龍井村)에서는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워 신교육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였으나, 1년 만에 중단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김약연과 김학연(金學淵) 등의 애국지사들은 인근 지역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던 용암촌의 규암재, 대룡동의 소암재, 상중용천의 오룡재 등의 사숙을 통합해 1908년 4월 화룡현 명동촌에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세웠다. 초대 숙장(塾長)으로 박무림이 취임하였고, 숙감에 김약연, 재정에 문치정, 교원으로 김학연과 남위언을 포함해 김하규(金河圭), 여준(呂準) 등이 부임해 3재주1에 모였던 42명의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09년 신민회(新民會)에서 파견된 북간도교육단이 명동촌을 방문하였는데, 이들은 명동서숙의 체재를 새롭게 하여 독립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신교육을 시행하고자 하였다. 또 근대 민족주의를 발전시키는 데에는 재래의 유교보다는 참신한 기독교가 나으며, 북간도의 특수 사정상 중국과 일제의 견제를 보다 적게 받으려면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여 학교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명동서숙은 기독교 학교로 개편되었고, 학교 이름을 명동학교로 바꾸었다.
윤동주는 1917년 중국 길림성 용정시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민족 교육의 요람이었던 명동학교가 있던 곳으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 정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자랐다. 용정의 대성중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서 수학하며 고뇌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문학적 자양분을 쌓았으며, 이때의 감수성은 훗날 그의 시 전반에 흐르는 부끄러움과 성찰의 기저가 되었다.
더 넓은 학문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윤동주는 도시샤 대학 재학 중이던 1943년, 항일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 차가운 감옥 안에서 이름 모를 주사를 맞는 등 마루타 생체 실험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의혹 속에 1945년 2월, 광복을 불과 반년 앞두고 27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시신은 고향인 용정의 동산 중앙교회 묘지에 안치되었다.
그가 생전에 출판하려 했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948년에야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시집은 오늘날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집 중 하나이며, 세대를 초월하여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감동을 주고 있다. 그는 비록 짧은 생을 살았으나, 그의 시는 영원히 남아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가장 아름다운 문학적 유산이 되었다.
윤동주시인의 주옥같은 시를 낭송하는 시간도 가졌다.
용정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비암산 정상에는 가곡 '선구자'에 등장하는 일송정이 있다. 과거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모여 항일의 의지를 다졌던 정자 모양의 소나무로 유명하며, 일제는 독립 정신의 상징인 이 소나무를 강제로 고사시키려 했을 만큼 이곳의 상징성을 두려워했다. 현재는 새롭게 심어진 소나무와 정자가 그 자리를 지키며 광활한 간도 벌판을 굽어보고 있다. 우리 일행은 소형 전동카를 타고 이동하였는데 우리의 항일운동유적을 중국의 항일운동 유적으로 변화(?)시키려는 흐름이 여기저기서 느껴진다. 독립운동가들의 항일 정신을 기리며 정상에서 해란강을 바라보면서 '선구자' 노래를 합창하였다.
"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
연변 박물관은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에 위치한 국가 1급 박물관이자, 중국 내 조선족의 역사와 문화를 집대성한 가장 대표적인 전시 공간이다. 연변 박물관은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조선족의 중국 이주사와 그들이 황무지를 일궈 오늘날의 자치주를 형성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역사 기록관이다. 초기 이주민들이 사용하던 농기구, 생활용품, 그리고 혹독한 자연환경과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지켜온 전통 의식주 문화가 방대한 유물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이는 조선족이 중국이라는 다민족 국가 내에서 어떻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고유한 공동체를 형성했는지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이다.
좋은 사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답사내용 정리는 자료집을 참고로 하였습니다.
선생님들! 이번에도 멋집니다^^

첫댓글 답사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세세하게 정리해주셔서 다시한번 탐방길을 되돌아 간듯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