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는 아무 데라도 좋지만 시간은 황혼이었으면 한다.
도회의 황혼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지하도며 떠밀리는 인파, 그리고 목적지가 막연한 사람들의 기웃거림이 있을 것이다. 들에는 깃을 찾는 새 떼의 날갯짓이 한창일 것이고, 진홍빛 개가를 싣고 들어오는 항구의 배, 안개가 너울처럼 드리워진 산중의 남빛 저녁, 이러한 황혼에 우수에 가리운 나의 사랑은 온다.
늘 피곤하여 절룩거리며 온다. 나는 매우 소탈하고 평범하지만, 사랑의 범주는 지극히 협소하고 제한적이며 폐쇄적이다. 나는 사랑이라는 어휘를 앉힐 자리에 매우 까다로운 편이며 친구를 선택할 때도 매우 민감하게 감별한다.
나는 가도에 서 있지 않다. 골목 안에 있는 집, 아무에게나 문을 열어주지 않는 집이다,
그러나 그 집 안에는 늘 초대받은 객이 있다. 나는 어느 누군가를 가슴에 두고 살아왔다. 사랑의 감정은 나를 살게 하는 지주(支柱)라 할 수 있다. 내가 태어난 조국과 내가 열성을 바치고 있는 일들. 그리고 내 혈육. 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내 엄연하고도 가열한 현실이다. 그러나 나는 또 아슬한 피안을 향하듯, 그리움의 비단실을 자아올린다. 내 사랑은 보호색이다. 거기 피신하여 생애를 끝낼 수 있는 완충지대와도 같은 공간. 사랑은 전차의 선(線)이나 산소 용접공이 튕기는 파아란 섬광의 불빛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내 사랑은 천천히, 간절히, 그리고 노출을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며 흐른다. 그러나 다분히 관념적인 것이었다. 생활의 순간순간 나는 무수한 사랑의 발단을 갖지만 그 사랑을 전개하고 실행하는 일에 나는 지극히 서툴렀다. 냉엄하고 단호한 제재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 이전에 이미 사랑 내 안에서 보편화되고 무덤덤하게 흡수되어 버리곤 하는 까닭이다.
“엄마! 나는 꼭 동갑인 사람하고 결혼할래.”
“왜?”
“그래야만 똑같이 죽지.”
이것은 여섯 살쯤 되었을 때 내 애정관에 관하여 언급한 최초의 발언이라지만 매우 적절한 단면을 보여준 듯하다. 나는 그 후로 내가 장차 사랑하게 될 어떤 사람에 대하여 열심히 생각하였다. 그 사람을 위하여 가장 아름답게, 순수하게, 도도하게 살아가리라고 결심했다. 나는 성장하면서 여러 번 사랑하는 연습을 했다. 고모를 사랑하고, 학교 때 선생님들을 사랑했다. 친구를 선택하고 떨리는 내 우정을 고백하며 상급생 언니와 연애 감정을 경험하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내가 존경하던 선생님이 자녀와 아내를 버리고 너무나도 평범한 후배와 갑자기 애정 소설의 주인공처럼 도피행각을 떠났을 때 나는 이것이 사랑인가 의심하였다. 부도덕하고 추악하고, 천박하여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독선이라고는 더욱 생각하지 않았다. 심한 허탈을 느꼈다.
그러나 내가 더 자라서 사랑에 눈을 떴을 때도 내 눈이 본 것은 실체가 아닌 허상이었다. 내 유연하고 어여쁜 나이는 이러한 허상의 추구로 실망하기도 하면서 비산되었다. 나는 대상을 곧잘 여과지를 통해서 본다. 나는 사랑이야말로 성지처럼 어떤 티도 잡음도 없는 거룩한 지역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늘 유감스러운 일은 사랑이라는 그 종교를 위해 나를 바치고 불태우는 일을 역할을 꺼렸다. 이것이 늘 구체화 되기를 두려워하는 내 사랑의 한계점이었다.
사랑이 아름다운 화음의 예술로만 남아있기를 원하는 것, 어쩌면 이것은 내 저면에 도사린 이기와 아집의 요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 사랑은 적중을 피하여 우회하다가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와 안주해 있는 것인가. 그러나 아무러면 어떠랴? 나는 변천하는 내 사랑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그것이 내 생명과 동행하고 죽음을 보라빛으로 덮을 때까지. 나는 아무 기대도 희망도 요구도 내 걸지 않는 그 사랑이라는 임무를 계속해 나가고 싶다. 진실로 이러한 저녁나절이면 절룩거리며 지쳐 돌아오는 어느 눈물겨운 영혼을 기척 없이 흔적도 없이 맞아들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