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일: “하느님 사랑의 신비가 드러남”(신론/삼위일체론/창조론)
[가톨릭교회 교리서 103-185쪽 (185-421항)]
[참고 문헌]
1) 박준양, 『삼위일체론, 그 사랑의 신비에 관하여』(박준양 신부와 함께하는 신학 여행 제1권), 생활성서사, 2007.
2) 박준양, 『창조론, 아름다운 세상의 회복을 꿈꾸며』(박준양 신부와 함께하는 신학 여행 제4권), 생활성서사, 2008.
Ⅰ. 신경(神經)들
1. 신앙 고백(신앙의 종합, Symbolum 혹은 Credo) (185-193항)
2. 사도신경(194항, 196-197항)
3.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325년, 381년) (195항)
Ⅱ. 신론(神論): “천주 성부를 믿나이다”
1.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198-29=02항)
2.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느님
1) 계약 사상과 유일신 사상
2) 탈출기의 원체험(原體驗): “하느님게서는 당신의 이름을 계시하시다.”(203-213항)
3) 바빌론 유배와 창조 신앙의 성립
4) 하느님의 영원한 충실성: “하느님께서는 진리와 사랑이시다.” (214-231항)
3. 신약성경에 나타난 하느님
1)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2) 하느님 나라
3) 새로운 하느님 체험
4. 성서적 신관과 철학적 신관의 통합
1) 성경의 위격 – 존재적 신관
교황 베네딕토 16세(재위 2005- )에 의하면, 성서적 신 신앙에서 위격(位格, per-
son)과 존재(存在)의 두 가지 측면이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역사 안에서의 위격적 하느님에 대한 구체적 체험이 시공을 초월하여 그 어느 것에도 묶이지 않는 존재론적 초월성에 의해서 조화로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2) 그리스 철학적 신관과의 만남
성서적 신 신앙에서 드러나는 위격과 존재의 두 가지 측면의 조화와 통합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발전 단계에서도 역시 반복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성서적인 위격-존재적 신관이 그리스 철하가자들의 존재론적 신관과 결합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탈출기 3장 14절에 나오는 “나는 있는 나다.”(I am who I am) 하는 존재론적인 신적(神的) 언명이 그리스 철학적 배경에서 자라난 초세기 교부들에게 호소력 있게 작용하여, 성서적 신 개념과 그리스 사상의 연계를 이룩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이를 한 마디로 이렇게 설명한다. “이 모든 역사를 이어받은 초기 그리스도교는 철학자의 신을 만들고 이교의 신들에 역행함으로써 자신의 선택과 정화를 과감히 단행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과 존재론의 결합은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 체계의 정립에 결정적인 영행을 미치게 된다.
그런데 이미 성경 자체에서부터 발견되는 이러한 선택과 결단 과정의 핵심은 바로 “모든 신화(神化, Mythos)dp 반대되는 로고스의 선택”이었다. 이렇듯 성경에서 만나는 자비롭고 인간적이며 위격적 존재로서의 신관이 철학적 ‘지상존재’(至上存在) 개념과 결합됨으로써, “가장 위대한 것도 초월하면서도 관계적이기에, 진리와 사랑이 합일되는 그리스도교적 하느님 상을 제시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네딕토 16세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하는 성서적 진술에 나타난 신적 통합에 바로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새로움“이 담겨 있다고 거듭 강조한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베네딕토 16세는 초월적이며 역사적인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본질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스도 신앙은 이념이 아니라 삶이다. 자족하는 정신이 아니라 강생이다. 역사의 혈육 안에 그리고 역사의 ‘우리’ 안에 자리하는 정신이다. 믿음이란 정신 스스로가 신과 일체임을 깨닫는 신비주의가 아니라 순종이며 봉사이다. 자신의 초월, 나 스스로가 이루지도 않았고 생각해내지도 않은 존배를 받들어 섬김을 통한 자신의 해방이다.‘
3) 유다이즘과 헬레니즘의 만남
이러한 신관의 통합과정은 어떤 의미에서 유다이즘과 헬레니즘의 결합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을 알리는 가장 효과적이고도 의미 있는 표상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신비를 통해서 결정적으로 구체화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이제는 유다-그리스적 사고 지평의 확장을 통하여 전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보편적 진리로서 선포되는 과정을 밟기 시작함을 의미한다.
4) 종교 발전의 세 단계 : 원체험-증인-역사화
이러한 신관의 발전 과정은 그리스도교 신앙 본래의 ‘원체험’이 초기의 ‘증언’ 단계를 거쳐 역사적 ‘해석’의 단계에 접어드는 과정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사실, 네케아(325)에서 콘스탄티토플리스(381)와 에페소(431)를 거쳐 칼케돈(451)에 이르기까지의 제1-4차 보편공의회에서 이루어진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의 핵심적 교의 정립 과정에서 그리스 철학적 개념과 용어들이 많이 도입되어 사용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역사적 지평에서 볼 때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이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5. 진리를 향한 결단
1) 믿음과 행동의 일치
오늘날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 고백은 바로 진리를 향한 결단과 투신으로 드러나야 한다. 신앙이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세상에서 마주하는 여러 실재들 중 가장 우선적인 가치와 의의, 그리고 진리에 대한 선별적이고 선택적인 결단임을 말해준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온갖 우상숭배를 거슬러 한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듯이, 그리고 초대 교회의 교부들이 여러 이단적 주장들과 싸우며 신앙 진리를 찾아나간 것처럼, 오늘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에게는 참다운 진리를 향한 결단의 태도가 요구된다.
2)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스도교적 신(神) 신앙에 따르면, 진리에 대한 이해, 진리를 향한 결단이란 물질을 능가하고 물질에 우선하는 존재 자체로서의 말씀의 가치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는 당연히 물질만이 입증 가능한 실재라고 주장하는 유물론의 길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존재는 궁극적으로 사유됨이며 근원적 현실인 정신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관념론을 간단히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신앙과 관념론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관념주의는 모든 현실을 유일한 의식의 내용으로 여기는 데 비해 그리스도적 견해로는 모든 것의 근거가 하나의 창조적 자유이고 이 자유는 생각된 것으로 하여금 제 나름대로 존재의 자유를 가지게 하여, 한편으로는 하나인 의식의 상념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참된 자존재(自存在)가 되게 한다.”
3) 사물과 지성의 합치
전통적인 스콜라 철학에 따르면, 진리란 ‘사물과 지성의 합치’를 의미한다. 이 진리관에 기반하여, 우리는 지성적 주체의 정신과 판단의 기원에 대한 구명(究明)을 통하여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로 나아가고자 시도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인간 존재자의 본성에 관한 진리를 추적한다고 할 수 있다.
4) 창조 신앙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온 인류가 하느님을 향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창조 신앙이 제시 가능하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따르면, “창조 신앙이란 다름 아니라 우리가 사물의 이치를 깊이 깨달아 갈수록 모든 사물에 선험적으로 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저 객관적 정신이 바로 주관적 정신의 모상이고 표현이라는 믿음이며, 존재가 지니고 있고 우리가 ‘뒤따라 생각할 수 있는 이런 사유적 구조가 바로 사물을 존재케 하는 저 창조적 ’예상‘(豫想)의 표현이라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5) 자유 개념
이러한 창조적 사유란 곧 자유 개념과 연결된다. 베네딕토 16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뜻에서는 그리스도 신앙이 참된 의미의 자유 철학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 신앙의 입장에서는 포괄적 의식이나 유일한 물질성이 현실의 총체적 설명일 수는 없다. 오히려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자유들을 창조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유를 모든 존재의 구조 양식으로 만드는 하나인 자유가 정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생각함으로써 존재케 하는 저 원사유(原思惟)는 어떤 중립된 무명의 의식이 아니라 자유이고 창조적 사랑이며 위격이다.” 하고 거듭 강조된다.
6) 그리스도교 신앙의 보편적 메시지와 진리관
이러한 통합적 신 관념의 정립을 통하여 우리는 오늘날 이 세상에 만연해 있는 온갖 종류의 그릇된 풍조들, 특히 유물론과 물질주의적 사고를 거슬러 그리스도 신앙의 보편적 메시지와 진리관을 전할 수 있게 된다. 위에서 제시된 존재론적 진리 이해는 위격적 신관과 통합되어 그리스도교적 신 신앙을 구성하며, 이러한 통합적 신 신앙은 ‘로고스’라는 핵심 개념을 통해서 제시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는 1998년 회칙 「신앙과 이성」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하는 이 진리는 철학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진리들에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두 가지 인식 양식은 온통 충만한 진리로 이끌어 줍니다.”(34항)
7) 신앙적 수용
신앙을 하나의 ‘수용적 태도’라고 개념적으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곧 인간의 근원에 대한 존재론적 자각과 수용인 동시에, 인간에게 ‘계시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인격적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헌장」5항에서는 인간의 신앙적 수용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신앙의 복종’을(로마 16,26; 로마 1,5; 2코린 10,5-6 참조) 드러내야 한다. 이로써 인간은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을 드러내고 하느님께서 주신 계시에 자발적으로 동의함으로써 자기를 온전히 그분께 자유로이 맡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믿음이 있으려면 하느님의 도움의 은총이 선행되어야 하며, 성령의 내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이처럼 「계시헌장」5항에서는 하느님의 초대에 대한 인간의 수용과 응답, 그리고 ‘신앙의 복종’을 위한 ‘성령의 내적인 도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와 동일한 성령론적 맥락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1965.12.7. 이하 「선교교령」) 15항에서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부르시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신앙의 순종’을 불러일으키시는 성령‘에 관하여 진술한다. 결국,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인간관계에서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계시하시는 하느님‘을 향하여 응답해야 하는 인간의 소명,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된 계시 진리의 선포를 잘 수용할 수 있도록 인간을 준비시키고 도와주시는 성령에 관한 전망이 교차되어 나타나고 있다.
6. 현대 무신론
1) Ludwig Feuerbach(1804-1872)
2) Karl Marx(1818-1883)
3) Friedrich Nietzsche(1844-1900)
4) Sigmund Freud(1856-1939)
5) 방법론적 무신론: 세상에 대한 관심(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무관심)
6) 전투적 무신론: 인간 자율성의 획득7) 인도주의적 무신론: 체험적 무신론
7. 전능하신 하느님(268-278항)
Ⅲ. 삼위일체론(232-267항)
1. ‘삼위일체(三位一體)’란 무엇인가?
삼위일체란 하느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한 분이시라는 신비이다. 이는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 신앙의 기본 진리이면서도 동시에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이기도 하다.
이를 지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가 있다. 『삼위일체론』이란 책을 통해 삼위일체 신학에서 중요한 이론을 제시했던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354-430) 성인이 어느 날 삼위일체의 신비를 골똘히 생각하면서 북아프리카의 아름다운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어린아이가 모래사장에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달팽이 껍질로 바닷물을 퍼 담는 것을 목격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그 이유를 물어보니, 그 어린아이는 모든 바닷물을 그 모래 구덩이에 담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고 지적하자, 그 꼬마는 천사의 모습으로 변해 떠나가면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그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2. ‘삼위일체론’의 신학적 흐름에 관하여
1) 성경적 전망
신학 성경에서는 이미 삼위일체 신비에 관한 기초적 증언이 발견된다. 예수께서는 부활 후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 하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부와 예수의 관계, 예수와 성령의 관계, 성부와 성령의 관계가 예수의 입을 통하여 증언되고 있다(5,19-47; 10,30; 14,1-17,26 참조). 루카복음(10,21 참조)과 바오로 서간(로마 8,9-11; 1코린 2,4-6; 2코린 13,13 참조)에서도 삼위일체론적인 전망을 발견할 수 있다.
2) 교부들의 사상
이러한 성경적 전망은 2-3세기를 거치면서 여러 교부들에 의해서 보다 본격적으로 이론화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교의 정통 신앙을 수호하고자 노력하였던 2세기의 호교 교부인 리옹의 이레네우스(130/149?-201) 성인은 당시 가장 본격적인 형태의 삼위일체론적 전망을 제시하였다. 그는 모든 구원 역사는 성부로부터 유래하고, 성자에 의해서 실현되어 성령에 의해서 충만히 성취된다고 설명하면서, 성자와 성령은 “하느님의 두 손”이라는 유명한 표현을 남겼다.
한편,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160년경에 출생하고 220년 이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테르툴리아누스 교부는 처음으로 “삼위일체”란 표현을 사용한 라틴 교부이다. 그는 하느님께서는 “하나의 실체이면서 동시에 세 위격”이시라는 유명한 정식을 통해서 삼위일체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자 노력했다.
법률가이자 신학자였던 그는 법률적으로 ‘인격’이라는 뜻을 가진
페르소나‘는 용어를 사용하여 성부, 성자, 성령을 구분하고자 시도했다. 원래 이는 출두 명령을 받았으나 몸이 아파서, 혹은 이미 도주하여서 나올 수 없는 피소자를 대신해 법정에 서게 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용어는 희랍어 ’프로소폰‘에서 번역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연극배우가 극중에서 사용하는 가면, 혹은 그 역할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외적 모습을 지시하는 이 단어와는 달리 보다 존재론적인 의미를 지니는 ’휘포스타시스(hypostasis)‘라는 희랍어 단어가 라틴어 ’페르소나‘와 동등한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3) 단원론(單原論)
2-3세기는 이단적 주장들이 생겨나던 시기였는데, 이 당시 삼위일체론의 발전을 가로막던 가장 큰 가장 이단적 주장은 바로 단원론이었다. 이는 주로 유다교에서 개종한 사람들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문제는 이들이 구약의 유일신 사상에 입각하여 성자와 성령을 성부에 종속적인 부차적 신(神)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4) 니케아 공의회(325년)
결국, 4세기 초반에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였던 아리우스가 이러한 맥락을 이어받아 종속적인 그리스도론을 주장함으로써 교회는 크게 분열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325년에 니케아에서 첫 번째 보편공의회(혹은 세계공의회)가 열리게 된다. 여기에서 아리우스 이단으로 단죄 받고 니케아 신경이 믿음의 신조로서 반포되는데, 이는 처음으로 체계적인 형태의 삼위일체론적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 공적인 신경이다.
5)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
그러나 이후에도 아리우스 이단의 문제가 계속 해결되지 않았고, 결국 381년에 콘스탄티노플-예전의 비잔티움, 지금의 이스탄불-에서 두 번째 보편 공의회가 열리게 된다. 여기에서 아리우스 이단은 다시 한 번 결정적인 단죄를 받게 되고, 기준의 니케아 신경을 확대, 보완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이 장엄하게 선포되기에 이른다. 이 유명한 신경이 바로 오늘날 미사 인에서 사도신경과 더불어 선택적으로 고백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신경은 다음과 같이 매우 분명한 삼위일체론적 고백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이렇게 해서 삼위일체론에 관한 교의가 체계적으로 정립되게 된다.
6)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삼위일체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1224/1225-1274)와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에 의해서 더욱 발전하게 된다. 먼저, 아우구스티누스는 세 위격 안에서의 동일한 신적 본성을 강조한다. 즉, 삼위일체론은 삼신사상(三神思想)이 아니라 세 위격이신 한 분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세 위격은 실제적으로 구분되는데, 그것은 바로 관계 안에서이다. 즉, 세 위격은 그 근원이 가지는 관계들에 의하여 실제적으로 구분되는데, 성부께서는 낳으시는 분이고 성자께서는 나시는 분이며 성령께서는 발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 안에서의 세 위격들이란 나란히 함께 존재하는 ‘실체’들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관계들을 의미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출생과 발출의 의미를 이론적으로 분명히 밝히고자 시도하였다. 이미 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 이러한 내적인 상호관계성이 제시된 바 있다. 이는 니케아 공의회 이후 4세기에 활동하였던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세 교부들인 대 바실리우스(329/330-379),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35?-395?),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326?-389/390)에 의해서 그 이론적 계발이 이루어졌다.
성자께서는 성부로부터 출생하시며,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신다는 이 내적인 상호관계성에 의해서 세 위격은 실제적으로 구별된다. 그런데 동방에서는 성령께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로부터’ 발출하신다고 해석하였고, 이러한 차이는 1054년에 발생한 동방과 서방 교회의 대분열의 이론적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7) 내재적 삼위일체와 구원경륜적 삼위일체
이러한 맥락에서의 신학적 설명을 ‘심리학적 삼위이체론’이라고 하는데, 이는 주로 ‘내재적 삼위일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내재적 삼위일체’란 영원으로부터 존재하는 삼위일체의 내적인 신비를 가리키는 말이고, 이와 구분되는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란 용어는 구원의 역사 안에서 인간을 위하여 활동하시는 삼위일체의 실재를 의미한다. 현대 신학에서는 오히려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에 보다 초점을 맞추려는 경향과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즉, 구체적인 인간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신학적 사유와 성찰에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재적 삼위일체’를 경시하거나 간과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20세기의 유명한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1904-1984)는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동일성을 삼위일체론의 기본 원리로서 제시한다. 다시 말하면, 구원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삼위일체이신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전달해 주셨기에,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내적 신비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자기전달은 부분적이 아니라 오넌한 것이기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드러난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보다 더 큰 내적 신비를 숨기거나 하시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삼위일체의 신비는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신비라고 할 수 있겠다.
3. 삼위일체에관한 일문일답
1) 첫 번째 질문과 대답
Q: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 서열이나 등급이 있는 건 아닌가요? 그중 성부께서 가장 높으신 분 아닐까요? 성자와 성령께서 모두 성부로부터 생겨나셨다고 하고, 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성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마르 14,36)라고 부르시는데요?
A: 사실 이는 삼위일체에 관하여 가장 많이 받는 질문들 중 대표적인 것입니다. 결론부터 분명히 말씀드린다면, 세 위격들 사이에는 그 어떠한 ‘우열’이나 ‘등급’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각기 독립적이고 고유한 세 위격들로 구분되지만, 모두 동일한 한 분 하느님으로서 같은 본질, 같은 실체, 같은 본성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 위격은 동일한 신원과 동일한 능력을 지니시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구분되는 것이 있다면, 다만 ‘관계’로 인해 구별될 뿐입니다. 이 ‘관계’ 때문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호칭의 순서가 생겨날 뿐입니다. 그런데 이 호칭의 순서는 ‘우열적 등급’이 아닌 바로 ‘사랑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본질적 사랑 안에서 성자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6년 회칙인 「생명을 주시는 주님」10항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당신의 내밀한 생명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1요한 4,8.16 참조). 그분께서는 본질적인 사랑으로, 이 사랑은 세 신적 위격들에 공통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자께서 성부로부터 출생하셨다면, 그리고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신다면, 거기에 의존적이거나 종속적인 관계로 인한 등급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우리 인간사에서처럼 말입니다. 보통 자식이 부모에게 종속적이라는 것은 출생 이후 혼자서는 생존할 수도 없고 나중에 독립적으로 성장할 때까지 모든 면에서 부모에 의존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이유에서 비롯되는 것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에 대해서는 이런 인간적인 생각을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 위격들 간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기에 출생을 통하여 성부께서는 성자에게 그 모든 것을, 그리고 발출을 통하여 성부와 성자께서는 성령께서 그 모든 것을, 즉 동일한 본질과 신원과 능력을 전달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성부께서 성자에게 모든 것을 다 선사하심으로써 성부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닌 빈 상태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차이로서 남는 것은 오로지 출생시키신 분과 출생하신 분, 그리고 발출시키신 분과 근원에 관한 관계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삼위일체의 내적 상호관계성 안에서의 실체적 전달에 관한 교리는 1215년의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설명된 바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세 위격은 오직 관계성에 의해서만 실제적으로 구별된다고 하는 것이며, 이 관계적 구별에서는 ‘우열적 순위’가 아닌 ‘호칭의 순서’가 드러날 뿐입니다.
2) 두 번째 질문과 대답
Q: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 중 어느 분께 드리는 기도가 가장 효과가 있나요?
A: 특별히 어느 한 위격에게 드리는 기도가 더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지금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우리 삶의 현장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더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기도를 바치면 됩니다. 한 위격만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며 바치는 기도라 할지라도, 이는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각 위격은 그 위격적 특성에 따라서 개별 활동을 하시지만, 동시에 이는 세 위격의 공동 작업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모든 계획과 활동은 세 위격의 공동 작업이지만, 이를 각 위격의 속성에 따라 그 위격에 해당하는 개별 활동으로 간주하는 것을 신학적 용어로 바로 ‘귀속(歸屬)’이라고 합니다. 물론, 명시적으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기도와 흠숭은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권고해야 합니다.
3) 세 번째 질문과 대답
Q: 주일학교 초등부 교사입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하기 쉽게 가르치기 위해서 삼각자, 혹은 세 잎 클로버를 예로 드는 것은 어떤가요?
A: 이는 잘못된 예시적 설명입니다. 세 위격은 동일한 신적 본성과 실체를 지니되 관계를 통해서만 실제적으로 구별됩니다. 그런데 위의 예시는 마치 세 위격들이 전체의 어느 일정 부분을 구성하는 것처럼 설명함으로써, 그 자체로는 완전하지 못한 하나의 부분일 뿐이라고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4) 네 번째 질문과 대답
Q: 만화에 나오는 로봇에 머리, 상체, 하체가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 각기 적들과 싸우다가 마지막 위기 때에 힘을 모으기 위해서 큰 로봇으로 결합해 마침내 승리하는 것을 봅니다. 이처럼 삼위일체도 한 분 하느님께서 필요에 따라 각기 나뉘져 다른 모습으로 일하시다가 마침내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는 설명은 어떤가요?
A: 이 역시 잘못된 설명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어느 한 위격의 개별적인 활동이라 할지라도 이는 세 위격의 공동 작업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모든 위격의 개별적 활동은 다른 위격들의 활동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느님의 계획과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하는 로봇의 예를 들어 세 위격의 활동들을 각기 부분적인 것으로 분리시켜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5) 다섯 번째 질문과 대답
Q: 한 남자가 아빠, 남편, 아들이라는 역할의 다양성을 갖는 현상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하면 안 될까요?
A: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을 단지 동일한 한 분 하느님의 세 가지 역할로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경우에는 동일한 한 인물이 그 역할에 따라서 다르게 호칭되는 것처럼 삼위일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인데, ‘위격’이란 단순히 역할이나 외적 모습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고유한 인격의 주체의 현존성을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희랍어에서 ‘프로소폰(prosopon)’이라는 말 대신에 ‘휘포스타시스(hypostasis)’라는 단어가 ‘위격’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입니다.
6) 여섯 번째 질문자와 대답
Q: 물이 온도의 변화에 따라서 수증기, 얼음이 되지만 물이라는 본래의 성질에는 변함이 없듯이, 하느님께서도 시대와 상황의 필요에 따라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시지만 원하는 한 분이시라는 설명은 어떤가요?
A: 이는 신학적 오류를 담고 있는 설명입니다. 이미 2-3세기에 이러한 내용을 주장하는 ‘양태론’이란 이단이 존재했습니다. 양태론은 앞서 설명한 바 있는 ‘단원론’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한 분 하느님께서는 단지 그 외적인 양태나 양상만을 바꾸어서 이 세상에 나타나 활동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제로 십자가에서 수난을 받으신 분은 성자가 아니라 바로 성부였다고 주장하기에, 이를 ‘성부수난설’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양태론의 논리는 마치 컴퓨터에 절전 모드가 있고, 선풍기에 수면 모드가 있는 것과 같은 원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즉,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란 한 분 하느님께서 필요나 상항에 따라서 단지 그 외적인 양식만을 바꾸어 현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바로 양태론이 견지하는 이단적 주장의 핵심입니다.
이 같은 양태론의 잘못된 주장과는 달리, 가톨릭교회의 저통 교의와 신학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동일한 신적 본체를 이루면서도 매우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사실, ‘위격’이란 단어 자체가 이러한 독자적 현존성을 가리키는 용어인 것입니다.
7) 일곱 번째 질문과 대답
Q: 그렇다고 우리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를 통해서 예시적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고 해야 하는 건가요?
A: 사실 앞에서 소개된 삼위일체 교의와 신학의 가르침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예시적 설명이나 그것을 가능케 하는 비유를 찾아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심지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까지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비유에 의한 예시적 설명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만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설명을 시도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어떤 근본적인 한계가 이미 존재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유명한 그의 저서인 『고백론』의 끝부분과 『삼위일체론』의 후반부를 통하여, 우리 인간의 정신과 삶에 투영된 ‘삼위일체적 흔적들’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신학적 이론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첫째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이시라는 것, 둘째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창세 1,27)는 두 가지 기본 진리의 조합을 근거로 하여 출발하고 전개되는 신학 이론입니다. 이 이론에 입각해서, ‘기억-지성(인식)-의지’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정신 구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람(존재)-의미(삶)-사랑(원함)’의 충만함을 향한 추구 속에서, 또 ‘아버지-어머니-자식’이라는 인간의 가족관계 안에서, 그리고 ‘나-너-우리’라는 인격적 상호간계 안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자취)이 발견된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유비’에 의한 설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유비’란 사물들이나 실재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유사성’뿐만이 아니라 ‘비유사성’ 즉 ‘상이성’까지도 반드시 포함하여 적용되는 철학적, 신학적 개념입니다. 더욱이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 있어서의 유비를 말할 경우에, 그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은 반드시 그보다 더 큰 비유사성(상이성)을 전제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는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신비에 대하여 우리 인간사의 모습을 통하여 비유적으로 설명을 시도할 수도 있겠으나, 이렇게 인간적인 예시를 통해서 설명 가능한 부분보다는 도저히 설명되어질 수 없는 부분이 훨씬 더 크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삼위일체에 대한 예시적 설명의 근본적인 한계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흔적들’이라는 이론을 통하여 제시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통찰에 입각한 예시적 설명은 매우 예리하고 탁월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 역시 이러한 유비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결국 삼위일체의 신비를 온전히 드러낼 수는 없는,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설명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Ⅳ. 창조론
1.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교황청에는 수많은 귀중 예술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바티칸 박물관이 있다. 이 유명한 박물관의 백미 중 하나인 그 안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서구 르네상스 시대 미술의 최고 거장으로 손꼽히는 미켈란젤로(1475-1564)가 그린 프레스토 벽화 두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1508-1512년에 걸쳐 그려진 천장화인데, 이는 중앙에 9개의 연작으로써 창세기 1-9장의 창조론적 내용을 묘사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제대 벽면에 그려진 ‘최후의 심판’인데 종말론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천장화가 그려진지 23년이 지난 후인 1535-1541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9개의 연속적인 주제화로 이루어진 시스티나 성당의 중안 천장화는 성서적 창조론과 원죄론의 내용을 미켈란젤로가 바라보는 관점에서 해석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창조론이란 우주와 세상과 인간의 기원과 창조에 관한 신학적 성찰을 의미한다. 이는 주로 구약성경의 창세기를 근거로 하여 형성되었으며, 나아가 신 ․ 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여 그리스도 신앙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는 신학사상이다.
한편, 원죄론이란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그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이 어떻게 죄의 실재와 만나게 되어 상처와 파멸의 길로 접어드는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바로 이 원죄론에서부터 그리스도 신앙의 구원신학이 시작된다.
주의 깊게 바라본다면, 미켈란젤로의 그림들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성경의 내용을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하게끔 도와주는 신학적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세상과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이 창조 역사를 이루신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지, 왜 인간의 삶에 죄와 악의 실재가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구원에로 이끄시는지에 관하여 생각하게끔 인도한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미켈란젤로의 그림들은 단순한 기술적 차원의 뛰어남을 넘어서 보는 이들을 신학적 차원에서의 심도 있는 사색에로 이끄는, 거장의 치열한 예술적 혼과 심오한 미학적 성찰이 담긴 위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2. 하늘과 땅의 창조(279-354항)
총 9개로 이루어진 중앙 천장화 중 처음의 세 가지는 우주와 세상의 창조에 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중 첫 번째 그림은 하느님께서 빛을 창조하시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 1,3) 하는 성경 말씀처럼, 태초에 이루어진 빛과 어둠의 분리가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정적이 아니라 매우 동적인 형태로 이 사건이 표현되고 있다. 강한 돌풍에 휩싸인 채 비스듬히 기울어져 옷자락을 휘날리며 회전하고 있는 것 같은 하느님의 모습은 마치 미국 중서부에서 자주 일어난다는 회오리바람 ‘토네이도’에 휘말려 공중으로 떠올라가는 사람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바로 이러한 상징적 표현에서 창조의 극적인 역동성을 느낄 수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창세 1,4-5) 하는 것이 바로 창조의 첫 번째 날에 이루어진 역동적인 위업이다. 그리스도 신앙이 고백하는 것은 ‘무로부터의 창조’이다. 비존재의 현실이라는 혼돈 상태로부터 유의 창조가 이루어졌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이 바로 이 빛의 창조이다.
이어서 창조의 두 번째 날 이야기가 미켈란젤로의 세 번째 그림에서 묘사된다. 창세기에 의하면, 빛이 창조되었지만 세상은 아직 물로 가득 찬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고대 근동의 우주론적 세계관에서 물은 죽음과 혼란의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물로 뒤덮인 세상이란 아직 정리되지 않은 무질서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명령하신다.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창세 1,6) 이렇게 하여 비로소 하늘이 열리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그림에서는 밑으로 모여진 물, 즉 바다 바로 위의 왼쪽 하단에서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상단으로 갈수록 점차 하늘색이 짙어져 마침내 왼편 상단에 새로운 하늘이 열리는 것이 상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처럼 온 세상을 뒤덮고 있던 물이 한쪽으로 정리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의 무질서와 혼란을 차차 정리해나가심을 의미한다.
이러한 일을 이루시는 하느님께서는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바다 위에 떠 계시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그 힘 있게 쭉 펼쳐진 열 손가락들에 주목하게 된다. 이는 창조된 세상에 점차로 당신의 질서를 부여해나가시는 하느님의 권위와 권능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하느님의 모습은 노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노인의 이미지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너그러움과 관용, 지혜, 혹은 완고함 등 … 그런데 여기에서는 인생을 오래 산 이의 경험적 지혜로 말미암은 권위가 특히 강조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미켈란젤로는 하느님을 노인의 모습으로 표현함으로써,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대한 절대적 주권과 권능을 행사하는 분이심을 잘 드러낸다.
다음으로는 창조의 네 번째 날 이야기가 두 번째 그림에서 묘사된다.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궁창에 빛물체들이 생겨, 낮과 밤을 가르고, 표징과 절기, 날과 해를 나타내어라.”(창세 1,14) 하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 거기에 당신의 주권적 이치를 점차 단계적으로 부여하심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이 표현하고 있는 것은 특히 해와 달리 창조이다. “하느님께서는 큰 빛물체 두 개를 만드시어, 그 가운데에서 큰 빛물체는 낮을 다스리고 작은 빛물체는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창세 1,16)
여기에서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는 이는 하느님의 오른손이 가리키는 금빛 물체가 해이며, 왼쪽 손이 가리키는 은빛 물체는 달임을 금방 알 수가 있다. 이 그림에서도 역시 창조된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권위가 잘 표현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광채 있게 번쩍거리는 하느님의 눈을 통해서이다. 한편으로는 역시 흰 수염과 백발의 노인 모습을 그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구리 빛의 강한 남성적 얼굴 근육과 번쩍이는 눈빛을 강조하여 표현함으로써, 미켈란젤로는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거기에 당신의 질서를 부여하시는 한늼의 위대한 권능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시스티나 성당의 중안 천장화 중 첫 세 그림은 창조론과 우주론적 관점에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즉,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과 우주,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만드신 주인이시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절대자 하느님께서 정하신 이치와 질서와 조화가 부여되어 있기에, 반드시 이를 따르고 지켜야 함이 또한 고백된다.
3. 인간의 창조(355-384항)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중앙 천장화 중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그림은 인간의 창조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네 번째 그림은 하느님 창조 사업의 절정으로서 마지막 여섯 번째 날에야 비로소 이루어진 ‘인간(아담)의 창조’를 그리고 있다.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에서 ‘아담’이란 어느 특정 인물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영어의 ‘man’과도 같이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창세기 1장 26-27절에서는 인간의 창조를 이렇게 묘사하고 잇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여기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음이 강조되고 있는데, 이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외적인, 신체적인 모습이 닮았다는 것인가? 그런데 그 어느 누구도 하느님을 직접 만나본 일이 없다. 우리가 하느님을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뵐 수 있는 것은 구원의 순간인 ‘지복직관’을 통해서일 뿐이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1코린 13,12)이지만, 지금은 우리의 앎과 지식이 부분적이고 한계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진술의 의미는 다음의 창세기 2장 6-7절을 통해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땅에서 안개가 솟아올라 땅거죽을 모두 적셨다.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이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단순히 그 외적 형체가 비슷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숨결을 받았기에 그러하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옛말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게 있다. 옛 중국에서 어느 화가가 용 두 마리를 그렸는데, 거기에는 눈동자가 없었다. 이를 궁금히 여긴 사람들이 묻자, 하가는 만일 눈동자를 그려 넣으면 용이 살아서 날아갈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사람들은 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실제로 용 한 마리에 눈동자를 그려 넣자 천둥번개가 일어나면서 용이 살아 하늘로 올라갔으나, 반면에 눈동자를 그려 넣지 않은 용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 화룡점정이라는 말을 인간의 창조 사건에 적용해 본다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숨결을 불어 넣으시는 순간이야말로 용의 눈에 마지막 점이 찍혀 용이 기운차게 살아나는 순간이라고 비유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를 반대로 말하면, 하느님의 숨결을 받지 못한 인간은 외적 형체는 갖추어져 있다 하더라도 아직 참다운 인간이 되지 못한 상태, 즉 ‘화룡에 점정이 빠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참으로 인간답게 만드는 결정적인 마지막 손길은 바로 창조의 순간에 인간에게 선사되는 하느님의 숨결이다.
하느님께로부터 생명의 기운을 부여받은 인간은 바로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귀한 존재이다. 내 심장이 박동할 때마다, 그래서 내 혈관 안에서 피가 솟구치고 맥박이 뛸 때마다, 그리고 내가 숨을 쉬고 호흡을 할 때마다 하느님의 숨결은 내 안에서 함께 살아 계신 것이다. 성서적, 신학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바로 여기에서 인간 생명 존엄성의 원천적 근거가 발견된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괴롭히고 고문하여 살해할 수 없는 절대적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한 행위는 한 인간성을 말살하는 잔인함을 넘어서 그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거룩한 숨결에 대한 도전이요 모욕이며 반역이기 때문이다.
거장 미켈란젤로는 이렇듯 인간이 하느님께로부터 숨결을 부여받는 순간을 자신의 그림에서 이른바 ‘구강 대 구강’ 호흡법을 통해거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 손가락을 인간의 손가락에 마주 닿기 위하여 다가가서는 모습으로 묘사함으로써 자신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여기서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로 그려진 아담(사람)의 모습은 그 이전의 부정적 시각과는 달리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을 긍정하는 르네상스 미술의 혁명적인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스듬히 자신의 오른쪽 팔꿈치에 기대어 앉은 채로 하느님을 향해 왼손을 내뻗고 있는 인간은 아름다운 얼굴과 훌륭한 근육의 완벽한 몸매를 지니고 있지만, 아직 하느님의 숨결을 받지 않은 상태이기에 어딘지 모르게 생기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공중에 떠서 바람에 휘날리는 큰 겉옷에 여러 꼬마 천사들을 거느린 채 인간을 향해 날아오고 계신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인간의 왼손을 향해 힘차게 내뻗어진 하느님의 오른손은 근육질의 투박한 남성적 모양을 함으로써 당신 숨결을 전하고자 하는 능동성과 역동성을 드러내고 있다. 반면에 인간의 왼손 모양은 근육질의 몸매와는 달리 연약하고 섬세한 모습이며 쭉 뻗지 못하고 약간 늘어진 상태를 보임으로써, 하느님의 숨결을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의 수용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미켈란젤로의 그림에서 하느님의 손가락과 인간의 손가락이 거의 닿을 듯 말듯 하면서 약간의 간격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존재의 유비’를 암시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존재의 유비’란 실재들 사이의 유사성과 비유사상, 혹은 유사성과 상이성을 동시에 포함하는 개념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존재라는 사실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사성을 가리킨다. 그런데 1215년의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창조주이신 한늼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에 관해 말할 때에는 반드시 그보다 더 큰 비유사성(상이성)이 전제되어야 함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므로 미켈란젤로의 그림에서 드러나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근접성이란 바로 그 유사성을 가리키는 것이며, 매우 근접한 거리이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두 손가락 사이의 작은 간격이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비유사성(상이성)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느님을 닮았으면서도 결코 이 세상과 우주의 창조주이자 주권자이신 하느님의 위치에 오르려 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피조물인 자신의 한계와 조건을 뼈저리게 체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 안에 내재된 선한 속성을 계발시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1요한 4,8 참조)을 닮아가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인간 존재의 역설적인 본래적 운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전의 그림들과는 달리, 인간의 창조를 다루는 그림에서 하느님의 모습은 특히 그 눈을 통해서 매우 인자롭게 묘사되고 있다. 자세히 보면 인간을 바라보는 하느님의 눈에서 그 검은 눈동자를 흐릿하게 하는 방식으로써 미켈란젤로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자비와 호의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 사이의 차이점이 있다. 다른 모든 것들과는 달리, 인간은 하느님의 숨결을 받아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고귀한 존재이다. 그러기에 이를 바라보는 하느님의 눈길에는 피조물에 대한 주권적 위엄보다는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과 흐뭇한 이 가득 배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다섯 번째 그림은 다음과 같은 여자의 창조를 그리고 있다. “주 하느님께서는 살함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 2,21-23)” 이는 태초부터 삶의 협력자로서 창조되어 서로의 인격적인 보완을 통하여 생명의 완성을 향해 성장해 나가야만 하는 남자와 여자의 본질적인 운명, 즉 ‘동반자성’을 제시하는 성경 대목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사하신 가장 고귀한 선물인 생명의 큰 특징은 바로 ‘성장’에 있다. 씨앗을 부리면 거기에서 나무가 자라나고 꽃이 피며 열매가 맺는 것이 생명의 이치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렇듯 우리가 생명의 완성과 충만함을 향해 성장해 나가는 여정의 상호동반자로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만나게끔 정하셨다. 평화를 뜻하는 히브리어 명사 ‘살롬’은 어원적으로 ‘온전함’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남성과 여성은 부족함이 없이 온전함과 충만함이 넘쳐나는 인간성의 실현, 그 평화를 향하여 함께 나아가는 동반자이며 협력자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2,24-25)
4. 인간의 원죄와 본성에 관한 성찰(385-421항)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에덴동산에서 아무런 부족함 없이 충만함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던 인간에게 죄의 유혹이 다가온다. 불행히도 인간은 그 유혹에 빠져 평화는 깨어지고 이 세상에는 죄와 악의 실재가 생겨나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중앙 천장화 중 여섯 번째 그림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원초적 죄와 벌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그림의 왼쪽 절반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유혹에 빠져 죄를 짓는 장면을, 그리고 오른쪽 절반에서는 그 죄의 결과로 벌을 받아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람에게 다가온 유혹자는 모든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한 뱀이었다(창세 3,1 참조).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남자와 여자에게 금지된 나무 열매를 먹으라고 유혹하는 뱀의 모습을 반인반수의 형태로 그리고 있다. 즉, 상체는 매우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하고서 유혹의 손길을 내밀고 있지만, 반면에 나무에 칭칭 감겨 있는 큰 구렁이 모양의 흉측한 하체는 숨기고자 하는 것이다. 유혹자는 결코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며, 그 유혹은 언제나 황홀함을 가장하여 인간에게 다가오는 법이다. 사실, 남자와 여자의 눈길은 유혹자의 매력적인 상체를 향하고만 있어 하체의 모습은 바라볼 겨를이 없다.
그렇게 아름다움과 황홀감을 가장하여 인간에게 다가온 유혹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4-5) 하느님에 의해 깨뜨리게 한 것은 바로 인간이 하느님의 위치에 오르고자 했던 교만과 탐욕이었다.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하느님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유혹의 황홀감에 빠져, 인간으로 하여금 그러한 범죄가 파생시킬 끔찍한 결과와 치러야 할 대가에 관해 전혀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자 하는 유혹자의 효과적인 전술이다.
인간은 범죄 후에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자신의 몸을 감추려 했고, 서로 탓을 미루는 변명을 하다가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다.(창세 3,7-24 참조) 커룹의 불 칼에 의해 쫓겨나는 여자의 모습은 왼편의 죄짓기 이전 상태와 비교해 볼 때 너무도 대조적이다. 그림 왼쪽에서는 고운 피부를 지닌 아름답고 당당한 모습을 지녔던 여자가 오른쪽에서는 검게 주름진 피부를 하고 있다. 또 죄의식과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가리며 일그러진 얼굴에 잔뜩 움츠려든 자세를 취함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도피하여 숨으려고 하는 상태를 보이고 있다.
에덴동산이란 공간적이고 지역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실재이다. 즉, 구체적으로 그런 장소가 정말로 존재했는가를 따지기 이전에, 이는 태초에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세상과 인간이 하느님의 질서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상생하였던 하나의 충만하고 온전한 상태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났다는 사실도 단순히 지역적인 이동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태초의 그 온전하고 충만한 상태가 깨어진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인간 스스로가 교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선함과 온전함을 파괴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 본성 안에 선성 외에도 죄를 기울어지는 경향, 즉 죄성이 왜 생겨나게 되었으며 악의 실재가 어떻게 인간 세상 안에 찾아오게 되었는가를 묵상하는 원죄론적 성찰이다.
이제 그 죄악의 결과는 연속적으로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인간의 죄는 또 다른 죄를 계속 낳게 되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후, 남자와 여자는 두 아들을 낳게 된다. 형 카인은 땅을 부치는 농부가 되었고, 동생 아벨은 양치기가 되었다. 둘 다 주님께 제물을 바쳤으나, 어찌된 일인지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만 기꺼이 굽어보시고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화가 난 카인은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 살해하고 만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당연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교만과 탐욕으로 말미암아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에게 이제 그 필연적 결과로서 분열과 상처를 자아내는 폭력이 찾아오게 된다는 것이 바로 성서적 메시지의 핵심이다.
이러한 죄와 벌의 구조는 창세기 11장 1-9절에 나오는 바벨팁 이야기에서도 잘 드러난다.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는 목적과 동기는 바로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4절) 하는 것이었다. 고대의 우주론적 세계관에서 하늘이란 산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하느님의 위치에까지 침범하고자 도전하는 어리석은 교만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간에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벌을 내리셨다. 교만과 탐욕은 사람들 사이의 통교를 파괴하여 분열시키는 폭력적 결과는 반드시 낳게 되는 법이다.
사실, 교만과 분열은 인간의 마음이 가장 왜곡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루카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하면서 이사야 예언자 40장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전한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3,4-6)
이 성경 구절은 우리에게 과연 어떠한 메시지를 주는가? 우리 마음 안에 쌓여진 교만의 산과 언덕을 낮게 깎아내리고 그 흙으로 분열의 골짜기와 계곡의 깊이 패여 있는 상처를 메울 때, 우리는 비로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임하시면, 꼬이고 비틀어진 우리 마음이 태초의 온전한 모습을 회복하게 된다. 뻣뻣하게 굳어졌으며 냉정하게 얼어붙어 거칠어진 우리 마음이 본래의 부드러움과 자비, 즉 평화를 회복하게 될 것이며, 바로 이때에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이다.
인간에게 찾아온 교만과 탐욕의 범죄, 그리고 분열의 상처와 폭력이 용서와 치유의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뜻과 정의 안으로 회복되지 않을 때, 인간 세상에는 악의 실재가 만연하게 되고 마침내 혼란과 파멸의 위험이 찾아오게 된다. 창세기는 이렇게 증언한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6,5-7)
그래서 찾아온 것이 대홍수였고, 여기서 의롭고 흠 없는 사람 노아만이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방주를 만들어 그 가족들과 함께 살아남게 된다(창세 6,8-8,19 참조). 시스티나 성당 중앙 천장화 중 여덟 번째 그림은 바로 이 대홍수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고대 근동의 문화와 세계관에서 물은 혼돈과 죽음의 상징이었다. 아마도 오늘날과 같은 치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죽음을 가져오는 홍수의 가공할 위력에 대한 체험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창조의 두 번째 날 이야기에서 하느님께서는 물로 뒤덮인 세상을 정리하여 하늘을 여셨는데, 이제 반대로 다시 온 세상이 홍수로 인해 물로 가득하게 된다는 것은 바로 태고의 혼돈 상태에로 회귀함을 의미한다.
미켈란젤로의 그림은 대홍수의 재앙으로 인해 온 세상이 물로 뒤덮이고 있는 상태에서, 이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들의 절망적인 표정과 몸짓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림 중앙부에는 물에 떠 있는 노아의 방주를 향해서 안간힘을 다해 다가가려는 작은 배 하나가 있다. 그런데 그 배에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타 있고, 또 물에 빠진 채 필사적으로 그 배에 매달리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배가 뒤집힐 듯 왼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이다. 거기에 타고 있는 사람들 중 일부는 물에서부터 그 배 위로 올라오려는 한사람을 저지하기 위해 붙잡고 몽둥이로 후려친다.
그림 왼쪽에는 점점 차오르는 물을 피해 놓은 지대로 도망쳐온 사람들이 모여 있다. 나무 위로 서둘러 올라가는 젊은 여인이 있고, 그 밑에서는 이를 부러운 듯 바라보면서 자기들도 따라 올라가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한 쌍의 남녀가 있다. 그 바로 아래에는 올라가기를 포기하고 절망하여 주저앉은 채 흐느끼는 한 모녀가 있다. 그 오른쪽에는 한 여인이 공포에 질려 오는 작은 아이를 안고서 달래고 있다. 그 여인의 왼쪽 다리에는 무서움에 떠는 큰 아이가 착 달라붙어 울고 있다.
그리고 나무 오른편으로는 물을 피해 밑에서부터 막 올라오고 있는 또 한 쌍의 남녀가 있다. 비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여인은 남자의 등에 업힌 채, 고개를 돌려 자신을 뒤쫓아 급히 차오르는 물을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다. 그 뒤로는 짐을 싸들고 계속해서 높은 곳으로 피난 오는 사람들의 행렬이 줄지어 있다.
이처럼 극한상황에 처한 인간의 공포와ㅏ 절망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노라면, 지금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창세기의 메시지가 어찌 그리 정확하게 오늘의 시대 상황마저도 꿰뚫어보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큰 전율을 느끼게 된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의 뜻과 질서를 거역했을 때, 인간에게 찾아온 죄와 벌의 굴레는 끝내 인간을 파멸로 이끌고 말 것인가? 이것이 단지 우리 조상들의 잘못일 뿐이라고 탓을 돌릴 수 있는 것인가? 어떤 의미에서, 죄의 유혹에 빠진 태초의 인간 아담과 여자는 우리의 본성적 나약함과 한계, 그리고 죄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며 체험하는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교차하고 있으며,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세상의 모든 어둠을 밝히고, 모든 악을 없이 하며, 모든 상처를 치유해줄 구원의 실재를 간절히 기다리고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