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남부여행기
3. 바그가자르출루를 향하여.
김 선 구
우리의 여행계획은 먼저 고비지역의 매력적인 여행지로 채워졌다. 화강암 바위산 바그가자르출루, 독수리 계곡 욜링암, 주황빛 모래언덕 홍고르엘스, 불타는 언덕 바얀자그로를 답사하고, 이어서 몽골최대불교사원의 유적을 끼고 있는 옹깅강, 몽골의 옛 수도 하르호랑을 거쳐 울란바토르로 돌아가도록 짜여 져 있었다. 바그가자르출루는 몽골어로 “작은 돌이 많은 산”이란 뜻으로 돈드고비(중부고비)지역에 있었다. 울란바토르에서 남쪽으로 400km를 이동해야하는 먼 길이었다. 가는 도중에는 마을도 음식점도 기대할 수가 없어서, 모든 것은 길 위에서 스스로 해결해야했다. 슈퍼에 들려 쌀, 과일, 라면, 물 등 먹을 것과 버너, 일회용 접시 등 살림 일체를 준비하고 출발하였다.
울란바토르를 벗어나 남쪽으로 가다보니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거대한 공동묘지였다. 남쪽을 향한 구릉지 위에 만들어진 무덤들이 대단위 단지를 형성하였고 커다란 부처상도 세워 놓았다. 몽골 인들도 영혼의 불멸에 대한 인식은 우리와 같은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원래 몽골 인들에게는 장례식이 없었다고 했다.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낙타에 싣고 가다가 낙타가 오줌 누는 곳에 시신을 내려놓는 것으로 대신한다. 땅에 놓인 시신은 먼저 늑대가 달려들어 물어뜯고, 이어 새가 내려와 쪼아 먹는다. 시신은 부패하지 않게 처리되고, 영혼은 새가 안식처로 데려가는 것으로 믿었다. 땅을 파는 것을 꺼려하는 몽골 인들에게 최선의 방법이라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시절 이러한 조장(鳥葬)법이 금지되었다. 이제 몽골도 장례문화가 매장하는 쪽으로 바뀌어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계속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마유주를 만들어 판다는 말 목장에 들렸다. 마유주는 말 젖을 발효시켜 막걸리처럼 만든 술이다. 부부가 말에서 젖을 짜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설펐다. 착유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들판에 떼 지어 있는 말들 중에서 밧줄을 날려 잡힌 말을 붙들어 야외에서 손으로 젖을 짰다. 내가 대학생 시절 학교부속농장에서 소젖을 짜던 일을 떠 올리며 낙후했던 시절의 우리나라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 때는 우리도 기계시설이 없어서 손으로 젖을 짰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열악한 모습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말 젖을 발효 시키는 곳은 게르 안에 있었다. 방으로 들어서는 입구 왼쪽에 물 한 동이 분량의 양가죽 포대가 하나 걸려있는데 그것이 발효처리장이었다. 여기에서 자연발효를 시키고 시큼한 맛이 돌면 그것이 곧 마유주가 되었다. 우리는 마유주 몇 병을 사들고 길을 재촉 하였다.
점심때가 되어 돈드고비 지역에 접어들었다. 광활한 초원이 펼쳐졌다. 들판 한가운데 차를 세우고 차 밖으로 나오자 진한 허브향이 우리를 맞이했다. 맑은 공기와 파란 하늘, 한없이 너른 들판, 하늘과 맞닿는 곳이 지평선이다. 바다 위 수평선은 보아왔지만 이처럼 지평선을 대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산도 언덕도 없이 밋밋한 광야 일 뿐이다. 멀리에 양떼인지 소떼인지 구분 못 할 무리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짐승들에게는 그야말로 평화의 낙원이란 생각이 들었다.
시급한 것은 용변을 보는 일이었다. 그런데 가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라 난감했다. 할 수 없이 버스를 경계로 영역을 정했다. 길 가 반대쪽은 여자들, 길 가 쪽은 남자들의 화장실이다. 몽골 인들은 볼 일 보러 갈 때면 여자들은 ”꽃 따러 간다.“하고 남자들은 “말보로 간다.“고 한단다. 우리 일행들도 여자들은 양산을 들고 멀리 가서 들판 위에서 꽃을 따는 시늉을 했고, 남자들은 일열 횡대로 서서 공중으로 호스를 들이 대었다. 마치 말의 발굽이라도 씻겨주려는 듯이 방뇨에 집중 해 있는데 푸르공(러시아산 소형차)이 지나면서 클랙션을 울리고 갔다. 누군가 몽골의 들판은 천국의 화장실이라 했다. 우리도 천국의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꺼릴게 없었다. 설령 차속에 여성들이 타고 있다가 우리들을 흉보았다 해도 괜찮았다. 앞으로 며칠간은 이 천혜의 기회를 만끽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점심을 해결하기위해 풀밭 위에 자리를 폈다. 허지만 바람이 거세어 버너를 켤 수가 없었다.. 버스에 의지하여 종이박스를 뜯어 바람막이를 하고서야 불을 피울 수 있었다. 밥도 하고 라면도 끓였다. 반찬은 미리 준비하고 와서 접시에 꺼내기만 하면 되었다. 몽골초원 위에서 최초의 만찬을 벌렸다. 앞으로 순조로운 여행을 기원하며 축배도 들었다. 숭늉의 구수함도 커피 향도 평소와 달리 더 짙고 맛있었다.
점심을 하고나니 몸과 마음이 활기를 되찾았다. 차창을 통하여 전달되는 초원의 풀 향기와 경쾌한 음악의 리듬과 함께 드라이브를 즐겼다. 드디어 돈드고비의 주도인 만달고비에 도착했다. 울란바토르에서 220km 덜어진 곳. 주도라 했지만 인구 1만 명 정도의 소도시이다. 아직도 몽골의 주산업은 축산업이고, 그들은 초원의 게르에서 생활 할 터인데 이러한 도시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조그만 상점들이 즐비하고, 커피점도 보이고 음식점도 보였다. 슈퍼에 들려 필요한 물건도 사고 제품들을 구경도 했다. 라면, 참기름, 초코파이 등 우리나라 제품들이 눈에 띄어 반가웠다. 교통이 발달하면서 목장 주들도 주거공간을 도시에 마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거생활도 게르가 아닌 지붕달린 가옥들이 즐비하였고 아파트와 커다란 관공서 건물도 보였다. 몽골도 민주화 이후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흐름을 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달고비를 지나면서 우리가 타고 있는 버스는 비포장도로로 들어섰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고비길 행진이 시작 되었다. 표토가 날려버린 차도는 자갈과 돌덩이가 드러나 있고, 길은 험악하기 짝이 없었다. 드러낸 돌들을 피하기도하고 그냥 넘기도 하며 달리려니 숫제 걷는 것만 못한 느낌이 들었다. 시간은 흐르고 움직임은 시원찮고. 황량한 들판에 아무런 이정표도 없이 운전사의 처사만 따르다보니 조바심이 났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물어 바도 답변에 확신이 없었다. 운전기사도 안내양도 모두 처음 와보는 길인 것 같았다. 차도는 사면팔방으로 나 있고 차선도 몇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이러한 길을 어떻게 구분하여 목적지를 찾아가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저녁 무렵에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길을 잃고 몇 시간을 헤매 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바그가자르출루는 화강암으로 둘러싸여 움푹 들어 간 분지였다. 바위산의 높이는 1,768m. 거대한 햄버거처럼 생긴 바위 돌 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들이 특이했다. 이곳에는 수정을 캐던 동굴이 많다고 한다. 수정의 신비한 에너지가 모인 곳으로 우리나라의 계룡산 신도안처럼 기도하거나 요양처로 유명했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이름 높은 승려가 기도했다는 동굴이 있었다. 입구의 직경이 2m, 길이 18m, 승려의 이름인지는 모르나 자르갈란트 동굴이라 불렀다. 승려가 떠난 뒤 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양떼를 넣었다가 떼죽음을 당했다. 신성한 곳을 더럽혔다는 죄 값이라 했다.
가까운 곳에는 장님의 눈을 뜨게 했다는 약수바위도 있었다. 바위에 숟가락 하나 들어 갈 만큼 작은 구멍이 있고, 그 밑 깊은 곳으로 약수가 흘렀다. 가뭄이나 장마에도 그 양을 변하지 않고 일정하며, 신의 허락이 있어야만 그 구멍이 눈에 보인단다. 현지인들은 미네랄이 풍부해서 이 약수로 눈을 씻으면 시력이 좋아진다고 믿는다. 지금은 작은 숟가락으로 약수를 떠서 관광객들에게 눈에 발라보도록 했다.
다시 입구 쪽으로 내려오자 절터가 보였다. 17,8세기 한 승려가 수도 했던 곳이다. 근래에 마을 청년들이 그 곳에 집을 지으려 공사를 하자 지붕이 무너졌고, 그래도 간신히 집을 짓고 나니 집안에서 포플러나무가 자라 집을 무너뜨렸다. 무너진 벽체가 남아 있고 포플러 나무에는 하닥(오보에 두르는 천 조각)이라는 푸른 천이 감겨 있었다.
몽골은 미신이 많은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는 곳 마다 오보가 산재하고 금기사항이 많았다. 하늘의 신, 땅의 신, 강의 신, 산의 신을 추앙한다. 성스러운 산에는 함부로 접근 할 수도 없고 산의 이름도 부르면 안 된다고 했다. 이곳 역시 신비의 땅이었다. 허지만 이런 전설적인 얘기를 듣기 위하여 들판을 헤매어 왔던가 하는 허탈감이 생겼다. 차라리 산봉우리에 올라가 주변 경관을 둘러보고, 해지는 저녁놀의 장엄한 모습을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산 위로 올라가 볼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초원 위에 마련된 숙소에서 저녁놀을 맞이하며 하루의 여정을 소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