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씀)
가을이 익어 깊은 맛이 들면
은행나무는 거대한 한송이
노란꽃이 된다
은행잎들이 샛노랗게
불꽃처럼 터지는
잔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던 날
우수에 젖은 이 가을
행여나 놓칠까 더 가까히 만나서
가을 날의 쓸쓸함을 즐기자
슬픈 음악은 끄고
고목들이 오색으로 짙게 우거진
덕수궁을 찾아 갔다
오십육세 내가 열두살 계집아이일때
엄마가 서울 다녀오며 사다 주신
제일 아끼는 코코아색 원피스로
한껏 멋을 내고 기차 타고
두근거리며 수학여행 왔던 고궁
오랜 세월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의외였다
수십년 전 석조전 앞에서
햇빛이 눈부시다고 찡그리며 찍은
내 흑백 사진은 바래어 있건만
지난 세월이 얼마인가?
세어 보기도 무색하리만치 석조전은
수십년 전 그 모습 그대로
익어가는 가을 오색 단풍을 배경으로 한 채
묵은 때 없이 정갈하고 건재하다
그때 그대로여서 쓸쓸하다
덕수궁을 나와 거리에 뿌려진
낙엽을 밟으며 걷다가 예전 정동길을 만났다
내가 동행이 있어 다행이라는
느낌이 들 만큼
어스름한 저녁이 되자
키 작은 구옥을 새로 꾸민
아담한 찻집 불빛 마저도 외롭다
추억이 서려 있는 것은
왜 늘 아런할까?
아무리 정동길에 예배당이 있고
거리에 오가는 이들이 있다해도
군중속에 고독이어서
저마다 간직한 옛 사연은
홀로 가슴을 울린다
멀리 가버린 지난 시절이 쓸쓸하다
걷다보니 종로 도심 속이다
나란히 각을 세워 서있는
번지르한 고층빌딩 건너편에
아직도 남아 있는
내 유년시절의 골동품
낡은 구옥들이
정겹게 모여 있었다
시멘트 담벼락이
울퉁불퉁한 옛집 그대로다
헤어졌다 찾아낸 이산가족들은
이처럼 반가웠을까?
오래 된 낡은 집을 보고 또 보고
좋아서
"어머나! 어머나!" 만 연발했다
다시 이별해야하니 쓸쓸하다
낙엽이 하나 둘 나무에서
처절하게 뛰어 내리는데
시애틀로 떠난 창백한 얼굴의
가엾은 그녀가 생각난다
카키색 야상 점퍼가
후줄근해도 멋스럽듯이
가을 이야기들은 쓸쓸함마저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