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글
2000-01
편안(便安)과 평안(平安)
박 병 민 목사(새터공동체)
97년 겨울 무렵 사랑방교회에 있으면서, 평안교회에 나가 한시간 예배를 인도한 때가 있었다. 기억되어지는 것은 노래를 함께 부른 것인데, 갑자기 그럴듯하게 생각나서 함께 부른 노랫가사는 이러하다.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 평-안, 평-안, 평안을 네게 주노라. 사랑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사랑, 사-랑, 사-랑, 사랑을 네게 주노라. 잠시 그 노래로 인하여 평안과 사랑의 이름을 통한 하나라고 할까나? 나는 과연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는 말과 같이 그것을 퍼 낼만큼 담고 있는 사람인가? 그렇지 못하다. 공동체에 쌀포대가 많아서인지? 요사이에는 소화불량에 걸려있다. 성서에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마태복음15:11)하였지만, 엉덩이에서 푹푹 고약한 냄새만 피우고 다닌다. 보은에 사는 홍형께서 나에게 큰 숙제 쪽지를 주었다. ”...... 늘 자신의 길 재미있게 걸으시고, 퍼 올린 맑은 샘물 같은 생각들 나눠주십시오. 평화롭게 사세요(1999.11.26). 홍형께서 숙제를 보이라면 요사이는 별 내어놓을 것이 없다. 재미있게 걷지도 못하고, 평화롭게 살지도 못하는 편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도, 부활하지 못하고 뒤척뒤척 대는 사람들에게 이 확인을 하셨다. 마태 28:9에서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물으셨다.
편안(便安)과 평안(平安)은 여인네(女)가 갓(宀) 속에 쏙 들어가 있는 아늑한 모습의 “안(安)”자를 갖고 있다. 편안은 보이는 외형적인 형편(形便)이라면, 평안은 보이지 않는 마음에서의 형편일 것이다. 편안이 그저 안일무사(安逸無事)라면, 평안은 안정(安定)이다.
나는 몸이 불편(不便)한 중에서도, 그것을 잘 알지 못하고 초중고등학교를 잘 다녔다. 왼편의 손발이 부족(不足)한데도, 몸이 커 줄의 뒤에 섰다. 그러나 눈이 어두워 앉는 자리는, 뒤쪽 아이들의 눈을 막으며 앞을 차지하였다. 체육시간에는 밖을 나가지 않고 교실에서 놀 수 있었으며, 때때로 교실청소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철부지라서 그것이 좋은 것으로만 알았다. 몸은 잠시 편안하였을지 모르지만, 얼굴인 체면(體面)은 평안(平顔)(?)하지 못하고 주름이 지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체육시간에 이 선생님께서 급우(級友)의 무리에 집어넣어 체육을 시켰다. 그 시간에 멀리뛰기를 하다가 마음과 함께 몸이 미끄러지며 모래땅에 내동댕이치며 좌절(挫折)하고 말았다. 지금 서서 새기니 대열에 끼어 주신 그 이선생님이 고맙기만 하다. 신학교 기숙사 생활 중에는 안일(安逸)한 나를 때로는 일어나라고 자리를 추스려대었던, 임선배님과 한선배님이 역시 고맙다. 이것이 그 순간의 불편이 아닌, 되뇌면서 갖게되는 평안이다.
장애인에게 소홀(疎忽)한 우리네가 버젓한 세상(世相)을 갖기 위하여서는 허둥대는 이들에게 편안을 가져다주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양(洋)탄자 펴는 세상(世上)이 꼭 필요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떡으로 살면서, 말씀으로 사는 사람들”(마태복음 4 : 4), 곧 장애인들과 모든 이들이 양탄자 위를 구약성서 시편 119 : 105의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누구나 해 아래서 길을 걷는 사람(道上의 사람)으로써, 자기정체성(自己正體性,identity) 속에서 걷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편안과 평안을 가져다주는 것이 복지의 한 방편(方便)이라 여겨진다.
공동체 이야기
주고받고(give and take)
한씨 할머니께서 돌아가신(99.12.4) 후에 우리 무리에 정진희 전도사님과 ,이정남 목사님 부부가 지난 99년 12월 10일에, 김창준 선생님과 김교은 선생님께서 각각 12월 13일과 14일에 함께 하여 식구(食口)가 되셨다. 새해가 되면서 는 박성규 선생님께서 1월 12일에 오셨다. 그래서 이제 공동체에 버젓이 목사님 가정이 셋을 이루고, 목사님 보다 연세(年歲)가 위인 선생(先生)님이 세분이시다. 봄과 여름에 헤집어 파먹고 살던 땅도 쉬는 철에, 문 걸고 차가운 바람 막으며, 땅을 따라서 집사람들도 무위도식(無爲徒食)이다. 그러나 아이들 다섯은 철없이 한가지로 바쁘다. 동네와 좀 외딴 곳이라 가끔씩 찾아오는 지혜(智慧)가 이들에게는 손님이다. 어른들은 한가지가 아닌 여럿이다. 매일 새로움을 찾아 나서시는 김목사님, 또한 새로이 기도할 곳을 찾으시는 이 목사님, 박목사는 문단속하기 위하여 안에 우두커니 있을 때가 많다. 이 목사님 남편 정 전도사님은 신문(新聞) 일로 새 천년과 함께 천년을 알리는 광고 담느라고 전화통과 함께 하고, 전화통 따라 역시 바쁘다. 그 아들 재문이는 제 작은 방안에서지만 운동하기, 기타 치며 노래하기 등등으로 우렁차다. 한집에서 각색의 다른 일들이 벌어지니 공동체(共同體)라 할 만하지 않은가?
무위도식하며, 살림살이가 못 믿어워 우두커니 있는 나에게 뿌듯하게 찾아든 것은 소화불량이었다. 병원 선생님의 처방 중의 하나가 한시간 이상의 운동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하루에 20여분 가량의 베드맨트를 친다고 둘러대었다. 아니 그것은 처와 마음먹고 마주보며 함께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처가 못할 때에는 잘 치시는 김목사님이 함께 해 주셨다. 그 다음으로는 김목사님과 비등(比等)한 김창준 선생님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셨다. 짧고 긴 것을 받아 주시는 선생님, 내가 세게 칠 때 부드럽게 대(對)하여 주시는 선생님, 공이 가라앉을 때 북돋아 주시는 선생님, 잘 못 주어 내가 허둥대게 될 때에 멋 적어 하시는 선생님, 공이 중간에 떨어졌을 때에 주어가시는 선생님, 내가 가까이 에서도 못 보는 공을 멀리에서도 잘 보시는 선생님, 해를 마주 보면서도 공을 보시는 선생님, 등등 두루두루 가르쳐 주셨다. 베드맨트를 마치고, 밥상에 둘러앉았을 때에는 더 좋은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셨다. 잘 치기 위해서는 “주고받기”를 잘 해야 한다는 명언(明言) 이셨다. 사람들에게는 주고받기가 잘 안되어서 어색할 때가 있다. 말 주고받기, 마음 주고받기, 눈 주고받기.... 나는 받으면서 능청스럽지 못하고, 어색해 할 때가 많다. 누가 그러던가? 받을 줄 알아야 줄 줄도 안다고, 그러나 아직도 그 신비(神秘)를 터득하지 못하였다. 의사소통을 잘 배우지 못한 산물이라고나 할까? 우리 집 안에서 그것을 배웠으면 한다.
어제 수요설교 중에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누가 찾아들면은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질 치거나, 스쳐 지나지 말자고.... 운영자는 잘 나서는데, 그 외의 식구들은 마치 외인(外人)들처럼 선뜻 나서지를 못하고, 눈 둘 곳을 찾지 못한다. 더 나아가서는 자리를 피하여 숨어버리기 까지 하여야 한다. 주고받기가 잘 안되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 받을 태세가 갖추어 있지 못해서 인가? 말 나누기의 장을 만들자.
공 동 체 소 식
☻ 새터 공동체 가족
박병민,진선미,한솔,진솔, (99. 7.16)
김기홍,김인자,찬미,은혜,기진 (99.10. 2)
정진희,이정남,재문 (99.12.10)
김창준 (99.12.13)
김교은 (99.12.14)
박성규 (00. 1.12)
☻ 새터 공동체에서는 거처를 정하지 못하는 노인, 장애인 분들을 모시고자 합니다.
☻ 기도하며 함께하신 분들
김명렬,최은희,김대학,낭월교회제2선교회(이근성.조성원.성경열),강준규(조미형),신평교회(김춘근.우숙자),최재형(유명숙),말씀교회(박종은),금산읍교회(김철우),이원교회(안천일),반석교회,늘봄교회(주영봉),전경원,예수마을(김형곤),삼성생명(김문호외),대덕교회,벧엘교회(지철희),낭월교회(김기,서재후),예수마을(김광수.임정숙),이종일(정문순),이희숙,표성식,논산영생교회,유인숙,진수정,노정숙,서미향,채윤기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