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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로마서 8장 38-39절
TULIP5 성도의 견인
인간을 아는 지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우리가 아담 안에서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데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지만 인간 스스로가 불순종으로 인하여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무능력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선도 행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인간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했을 때 결코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죽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이러한 상태에 있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중 일부를 구원하시기로 하셨는데, 성경은 타락한 직후 하나님께서 누구는 선택하기로 하시고 누구는 버리시기로 하신 것으로 말하지 않고, 타락하기 이전, 성경의 표현을 따라 말하자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 이전, 다시 말해 창조의 역사가 있기 전 영원 전에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버리시기로 정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대상에 있어 어떤 자들은 선택하시고, 어떤 자들은 유기하기로 하셨는데, 소위 하나님의 전지하심으로 앞으로 있을 모든 것을 아시고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서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무조건적 선택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어떤 조건을 보시고서 선택 혹은 유기하기로 하신 것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선택과 유기로 정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대상만이 아니라 그들의 타락과 구속을 위한 모든 것을 정하셨는데, 하나님의 작정 안에 타락이 있다고 해서 타락을 하나님 탓으로, 하나님이 마치 죄의 원인자인 것처럼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타락은 인간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타락을 작정하셨지만 하나님이 죄의 저자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그렇게 정하셨다고 할 때 그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감히 다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여는 것에 대해 주의를 하셔야 합니다. 내 이성에 안 맞는다는 것 때문에 마치 하나님을 판단할 수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함부로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어떤 자들에 대하여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러나 시간 속에서 그 스스로가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기 백성들의 구속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주셨습니다. 그는 본래 하나님이시지만 때가 되어 이 땅에 오실 때는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신 이후로는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으로서 불순종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드리셨습니다. 특별히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순종의 절정으로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택이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않듯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속죄 역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무한한 가치와 효력이 있지만 그 무한한 가치와 효력의 대상은 누구냐? 모든 자가 아니라 오직 택자에게만 있습니다. 제한 속죄란 이런 의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를 우리에게 거저 주신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은혜라는 말을 하는데, 그 은혜를 우리가 저항할 수 있는가? 없다는 의미에서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말합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들 가운데 택자를 부르시는 것부터 시작하여 거듭나게 하시는 모든 역사,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시며 거룩하게 하시고 결국 영화롭게 하시는 모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하나님 홀로 그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불가항력적이라는 말이 강제성을 띠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의 내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고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심으로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하심으로 나아가도록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칼빈의 5대 교리 중 마지막인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에 대한 부분입니다. 보통 견인(堅忍)이라고 할 때 한자나 영어나 ‘인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에서 이 말은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영원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7장 성도의 견인에 대한 첫 번째 항목에서 이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즉,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으시고, 효력 있게 부르시고, 그의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나거나 혹은 최종적으로[즉, 맨 끝에 가서라도] 떨어질 수 없다. 은혜의 상태 안에서 마지막까지 확실하게 보존되어 영원히 구원받을 것이다(빌1:6, 벧후1:10, 요10:28-29, 요일3:9, 벧전1:5,9).” 이런 측면에서 참고 인내한다고 할 때도 그 주체가 내 쪽에서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존과 그 결과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방금 말씀드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내용에서 “은혜의 상태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나거나 혹은 최종적으로 떨어질 수 없다.”고 말하는 부분을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여기 보면 ‘전적으로’ ‘최종적으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역으로 표현하자면 은혜의 상태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날 수는 없지만 부분적으로는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둔 표현입입니다. 최종적으로 떨어질 수 없지만 이 땅을 살면서 은혜의 상태에서 떨어지는 경험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벗어나거나 최종적으로 떨어질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8장 38절과 39절이 그것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핵심은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만큼 우리가 강해서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 스스로가 고백한 것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고 말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중생자로서 내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실제로 보는 자들로 있습니다(롬7:22-23).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의 정죄함이 없을 뿐입니다(롬8:1-2). 달리 말하면 정죄함을 받지는 않지만 여전히 죄에 대한 유혹이 있다는 것이요, 그런 측면에서 죄와의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무엇을 권면하는가? 로마서 8장 12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그리고 17절로 넘어가시면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그러나 지난주 말씀드린 것처럼 구원의 모든 과정은 누가 친히 붙들고 계시는가?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은혜를 거두시지 않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영광을 위하여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 맡겨놓겠다는 의미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26절을 보시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라고 되어 있지만 ‘작정’대로입니다. “...곧 그의 작정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되,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특히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할 때 모든 것에 대해 그렇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보기에 좋은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보기에 좋지 못한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괜찮은 것이 있을 수 있고, 우리가 보기에 괜찮지 않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45장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있는데, 빛과 평안으로만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과 환난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3장은 여러 때에 대해 열거하고 있는데, 이런 때가 있으면 저런 때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선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겁니다.
다만 지금 살피고 있는 로마서에서는 이 모든 것 안에서 다음의 내용으로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35절과 36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싸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싸움은 필수입니다. 다만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입니다(엡6:12). 죄와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싸움 속에서 환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곤고함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박해를 당하고 기근을 만나고 적신, 즉 한자어 그대로 하자면 붉은 몸인데, 벌거벗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일을 당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위험을 당하기도 하며 칼의 위협 가운데 놓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실제로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잘 나타나는 것처럼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고후11:23). 이런 저런 위기, 그리고 고난을 얼마나 많이 당했는지 모릅니다. 바울만이 아니라 사도들 역시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참되게 믿는 신자들도 박해를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신약의 백성들 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죄와의 싸움이기 때문에 육신적인 위험은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주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함으로 육신적인 위험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육신의 위험이 그 마음을 흔들어 놓기도 합니다. 시편을 보십시오. 그런 내용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 아뢰고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아뢰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혹은 자신의 죄 문제를 하나님 앞에 아뢰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런 죄 문제로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을 떠난 것처럼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는가? 중도에 탈락되는 일이 있는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패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오히려 37절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 실력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일에 대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서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기는 것입니다. 이기는데 넉넉히 이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붙들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의 오늘 본문인 것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하나님의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역사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존의 역사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확실하기 때문에 구원의 완성의 자리까지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예수 믿으면 죄를 전혀 안 짓고, 예수 믿으면 어려움이 일체 없고, 예수 믿으면 소위 만사형통한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마셔야 합니다. 로마서의 증거처럼 죄의 유혹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결코 만사형통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 믿으면 복되다는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조금 전에 언급한 것처럼 죄와 사망의 몸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죄 받을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거저 주시는 은혜의 상급만이 기다릴 뿐입니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보다 클 수 없기에 가장 큰 상급이신 하나님 자신을 선물로 받은 자들로 있습니다. 때문에 어떤 것에 있어서도 우리는 부족함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믿으면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은 최고 상급이신 하나님 자신을 준 것에 비하면 부수적인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 자신 때문에 영생이 있고, 하나님 자신 때문에 천국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당연히 상급이 주어질 것이지만 그것은 결코 내 공로에 대한 상급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상급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급도 하나님 자신보다 클 수 있는가? 없습니다. 때문에 상급 역시 부수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믿으면 복되다는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닙니다. 그 복을 어디서부터 누리느냐? 이 땅에서부터 누립니다. 지금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복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복을 누리고 있지만 지금 현재 완성된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완성을 향하여 가는 자로서 이 땅을 살게 하십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이 말은 역으로 말하면 거룩을 방해하고 흠집을 내기 위한 일들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유혹이 있다는 것이요, 세상적인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무엇인가? 그 모든 일들이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자신은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것이고, 또한 모든 일에 대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구원을 완성케 하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한편 반대자들은 이런 견인의 은총을 부인합니다. 예를 들어 알미니안주의의 경우 1610년에 작성한 항론서 다섯 번째와 관련해 성령의 조력하는 은혜로 사탄과 죄와 세상과 자신의 육체를 대적하여 승리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의 첫 시작을 저버리고 악한 현세로 돌아가거나, 구원의 거룩한 교리를 잃거나, 선한 양심을 잃거나, 은혜를 잃어버리면 언제든지 구원에서 간과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참된 신자이고 중생자라 할지라도 자유의지를 통해서, 그리고 의무 이행을 통해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구원에서 전적으로 버림받을 수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들이 이런 주장을 할 수밖에 없느냐? 성경의 표현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6장에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4절 이하 6절입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이 본문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2장을 다루면서 언급한 바가 있는데, 분명 기록의 형태로 보자면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저들의 경우 복음의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면 참된 신자요, 중생자로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고 해서 참된 신자, 중생자라고 할 수 있는가? 동일한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씨 뿌리는 비유가 나옵니다. 거기 보면 네 가지 밭이 나오는데 특별히 두 번째와 세 번째 밭은 복음의 빛이 비춰졌다고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 그리고 그 말씀을 듣고서 즉시 기쁨으로 받는다고 할 때 복음의 빛이 비춰지지 않았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넘어지는 자들로 있습니다. 혹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들로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어떻게 참된 신자요, 중생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에서는 거짓 선지자와 관련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도 말합니다. 선지자 노릇 했다는 것은 말씀 사역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는 것은 비상시대 사도와 같은 자들에게 주어진 은사의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무엇을 말하느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참된 신자요, 중생자인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구약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은 어떻습니까? 사무엘상 10장에서 사울은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까지 한 사람입니다. 이후 왕이 되어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반대자들 입장에서 보자면 선택하셨다가 버리신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본래부터 버린 자로 있었지만 그런 자에게도 예언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왕의 직분을 주기도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가 아닐지라도 복음의 빛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서도 중생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지만 본래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가 그런 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히브리서 6장은 저들이 말하는 것처럼 택자도 타락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견인의 은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본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히브리서 6장에서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들은 근원적으로 유기자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유기자일지라도 한 번 빛을 받을 수 있고, 하늘의 은사를 맛볼 수 있고, 성령에 참여한바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곡식만 있는가? 아닙니다. 가라지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라지가 처음에는 곡식과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사울 왕이 그런 경우이고, 사도들 가운데 가룟 유다 역시 그런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에게는 일시적으로 있을 뿐입니다. 좀 더 일반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유기자들도 믿음처럼 보이는 것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이 참된 믿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지만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마음의 동의 없이 입으로만 믿는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6장과 관련해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도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도 맛보는 것들은 결코 내적인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외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복음의 빛을 받는 것도 외적이요, 하늘의 은사를 맛보는 것도 외적입니다. 성령에 참여한 것,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는 것도 외적입니다. 이런 외적인 것은 유기자도 경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때문에 외적으로 비춰지는 것이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는 아닌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이 열매로 그들을 알라고 말씀하실 때 그 열매는 결코 외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건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참된 신자인가? 영원한 구원을 받을 대상인가? 외적이요, 외식에 불과하다면 결코 구원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해 두셔야 합니다.
유기자가 일시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택자 역시 일시적으로는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잠시잠깐 혹은 그것보다 오랜 시간 심각한 죄 가운데 빠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로 인하여 일시적인 심판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통해 말하는 것처럼 은혜의 상태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날 수는 없지만 부분적으로 벗어날 수 있으며, 최종적으로는 떨어질 수 없지만 이 땅을 살면서 은혜의 상태에서 떨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7장 성도의 견인에 대한 세 번째 항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해 주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사탄과 세상의 유혹, 성도 자신들 안에 남아있는 부패성의 지배력, 그들을 위한 견인의 방편들에 대한 무시로 인해 심각한 죄들 가운데 떨어질 수도 있다(마26:70,72,74). 그리고 그렇게 죄 가운데 떨어진 상태가 잠시 동안 지속될 수도 있다(시51:표제,14). 그로 인해 성도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사64:5,7,9, 삼하11:27)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시켜(엡4:30), 그들이 받은 은혜들과 위로들의 얼마를 박탈당하게 되며(시51:8,10,12, 계2:4, 아5:2-4), 그들의 마음이 강퍅케 되며(사63:17, 막6:52, 16:14), 그들의 양심이 상하게 되며(시32:3-4, 51:8), 다른 사람들을 해롭게 하거나 실족케 하며(삼하12:14), 그들 자신에게 일시적인 심판을 초래할 수도 있다(시89:31-32, 고전11:32).”
다윗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 해 오던 분들이라면 다윗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많이 들어봤을 겁니다. 그리고 다윗 하면 공식처럼 있는 것이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문구입니다(행13:22 참조). 그러나 다윗의 죄는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죄가 결코 가볍다고 말할 수 없지만, 비교 차원에서 말씀 드리자면 다윗은 간음죄를 저질렀습니다. 마음으로만 간음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숨기기 위해 충신인 우리아를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살인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외적으로만이 아니라 이미 내적인 탐욕이 그 마음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외적 죄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를 죄로 생각하지 못하는 심각한 어두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다른 것보다 베드로는 주를 부인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니 주를 부인하기 전에 부인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말씀 앞에 베드로는 결코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주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부인했어야 했지만, 오히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주님을 부인했던 겁니다. 한번 부인하고, 또 부인할 때는 맹세하여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 맹세하여 부인했습니다. 특히 닭이 울고난 뒤에야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전에는 예수님의 경고와 자신의 확신을 생각하지도 못했음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보면 다윗과 전혀 다르지 않는 모습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내용처럼 성도에게는 사탄과 세상의 유혹이 있습니다. 유혹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안에는 남아 있는 부패성의 지배력도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아담과 하와조차 사탄의 유혹에서 넘어졌는데, 어떻게 부패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유혹 앞에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지난주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은혜의 방편이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은혜의 방편은 곧 견인의 방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방편들을 항상 잘 활용하는가? 그렇지 못합니다. 말씀의 양식을 매일 먹고 마셔야 하지만 그 말씀을 등한시 할 때도 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하지만 기도하지 못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죄에 빠지되 심각한 죄에 빠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잠시 잠깐이 아니라 때로는 오랜 시간동안 지속되는 때도 있습니다.
이런 죄의 결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여 그들이 받은 은혜들과 위로들의 얼마나 박탈당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 마음이 강퍅하게 된다고도 말합니다. 그들의 양심이 상하게 되며,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해롭게 하거나 실족하게 하는 일들도 있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그들 자신에게 일시적인 심판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일시적입니다. 그들에게 내려지는 심판은 일시적이지 영원한 심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견인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유로우시며 불변하시는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선택의 작정의 불변성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의 효력과 중보, 성도들 안에 성령의 거하심을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않겠다는 영원한 언약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7장 2항 참조). 지난주 살핀 내용과 함께 말씀드리자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그 영원한 언약을 성취하시고야 말 것이기 때문에 택자가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에게 주시는 복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견인의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확신이 한편으로는 분명 선택의 불변성에 의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의 효력과 중보,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것이 사실이지만, 은혜의 방편이라고 하는 것들을 무시할 때 죄에 빠지게 된다는 것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들을 잘 활용함으로서 은혜 가운데 있기를 원하시고, 또한 견인의 확신을 가지길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고 믿고 그를 신실하게 사랑하며 그 앞에서 모든 선한 양심을 따라 걷는 것을 통하여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8장 1항 참조).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베드로후서 1장 10절과 1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인가? 12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이미 있는 진리 위에 서 있지만 그것을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한다고 하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19절 이하를 보시면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1:19-21) 여기 보면 더 확실한 예언이라고 말하면서 성경의 모든 예언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사도 베드로가 성경을 더 확실한 예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가 경험한, 그러나 단순히 신비한 경험 정도가 아니라 성경이 보증할만한 경험, 변화산 사건의 경험을 말하면서 그런 경험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 바로 성경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별한 경험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비상적인 계시가 없어도 됩니다. 이니 오늘날 시대는 그런 비상적인 계시가 더 이상 없습니다. 오히려 일반 방편들, 예를 들어 지금 베드로 사도를 통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은혜의 방편인 이 말씀을 합당하게만 사용해도 우리는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며 견인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때문에 지난주에 이어 다시금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은혜의 방편을 잘 활용하셔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10절을 다시 보시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은혜의 방편을 활용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실족하여 넘어지게 됩니다. 진리 위에 서 있다고 해서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서 있지만 은혜의 방편을 무시하면 우리는 그렇게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는 자들인 겁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의 양식이라고 그러는가? 매일의 양식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사에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실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방편들을 잘 활용하기만 하면 실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11절 말씀처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주십니다. 넉넉히 주신다는 것은 더 많이 주신다는 의미보다는 확실히, 분명히 주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해서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을 말씀 아래 있는 것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유기자에게 있는 외적인 어떤 모습들을 통해 우리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안 된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방편으로서 말씀을 강조하는 것은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일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측면에서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말씀을 듣고 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마셔야 합니다. 말씀만이 아니라 은혜의 방편으로 주신 모든 것을 게을리 하지 마셔야 합니다. 이같이 할 때 베드로후서 1장 1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받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