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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지혜로운 생활 (마 6:31~34)
지금 읽은 말씀은 너무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성도의 지혜로운 생활을 교훈받도록 하겠습니다.
1. 성도의 지혜로운 생활 첫째는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염려하지 않을 것은 먹는 것과 입는 것을 거론하셨습니다. 유대나라는 추운 겨울이 없기 때문에 주택문제는 장막집으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가 염려를 하지 않으려면 상당한 믿음과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1) 인간이 피조물로서 빈손으로 와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으로 살고 있음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염려”자체는 해결의 방법이 아닌 것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27절에 보시면 “누가 염려하므로 그 키를 한자나 더 할 수 있느냐?”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염려가 무익하다는 뜻입니다.
3) 하나님은 성도보다 못한 대상도 키우신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보다 못한 대상은 이방인들이요, 공중의 새들이며, 들의 백합화요, 금방 아궁에 던져질 들풀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도 하나님이 키우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30절)하신 말씀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이미 아시느니라”하신 말씀을 신뢰하셔야 합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들어갔으나 하나도 상하지 않고 보호를 받았으니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신뢰하였기 때문이라”(단 6:23)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 생활에 하나님이 필요한 것으로 공급하여 주셨습니다. 발이 부릍지 않고 신발이 달치 않으며 의복이 해지지 않고 그날 그날의 양식을 주시고 대적을 이기게 하신 것들이 그런 은혜인데 이것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복종한 데서 받게 된 은혜인 것입니다.
5) 이 시대의 사람들은 옛날의 가난한 생활에 비할 때 풍요로운 세계에서 사니까 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꼭 필요한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근면하게 사는 것입니다.
2. 지혜로운 생활 두 번째는 먼저 할 일과 나중할 일을 구별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1) 성도는 언제나 먼저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어느 곳으로 이동을 하던지 먼저 제단 쌓는 일을 한 것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창 12:4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갔고 하란에서 세겜 땅에 도착했을 때 먼저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으며(창 12:7) 또 세겜에서 벧엘로 갔을 때도 제단을 먼저 쌓았으니(창 12:8) 이것이 먼저 하나님을 의식하고 경외하는 생활인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도 항상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2) 그리고 본문 말씀에서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① 그의 나라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세계입니다. 믿음으로 모시고 사는 세계요, 예수님을 왕으로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세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앞세워 받들지 않는 세계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언제,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백성들이 되셔야 하며 ②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의 의”란 예수님의 의를 의미하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짐을 짊어지시는 의를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의 의를 힘입어 죄사함 받게 되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의를 믿음으로 힘입은 성도는 죄와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노력은 바로 죄 안짓는 노력입니다. 따라서 죄사함을 받고 죄 안짓는 노력이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입니다(빌 3:6). 성도는 세상의 모든 것을 더하여 받기 위해서도 먼저 의를 추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 자족하는 생활입니다. 적다고 짜증을 낸다하여 더 생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34절의 “내일 일을 내일 염려하라”는 말씀은 내일 일을 오늘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므로 성도가 하루 단위로 충실하게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하루를 잘 살았으면 만족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요, 혹 한날의 괴로움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괴로움을 그 날에 감당한 것을 족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고생스럽게 살았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뜻대로 산 것이면 그 괴로움을 잘 감당하였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주님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고 고난을 감수하였으면 퍽 만족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의 지혜로운 생활은 ① 염려를 안하는 생활 ② 하나님 공경하는 일을 먼저하는 생활 ③ 고난 중에서도 자족하는 생활임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제2과 반석 위에 지은 집 (마 7:21~29)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저희들에게 두 가지 큰 교훈을 줍니다. 하나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어떤 능력을 나타내기까지 하지만 그 중에도 외식자가 있을 수 있다는 내용이요, 또 한가지는 성도의 신앙을 건축으로 비유하여 기초가 든든한 집처럼 견고한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1. 외식자를 지적하신 말씀에 대하여
1) 외식자의 정당하게 나타나는 형편이 어떠한가? 하면 ① 예수님을 주여 주여 하면서 따른다는 것입니다. ② 예수님께 “주여 주여”한다는 뜻은 기도를 열심히 하는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③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였으니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증언하기도 했다는 뜻입니다. ④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모른다”하신 것을 보면 그들이 귀신을 쫓은 것이나 다른 권능을 행한 것이 예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귀신은 귀신의 왕명으로도 잘 쫓아질 것이고 마귀도 상당한 권능을 행할 수 있으니까(출 7:22,8:7, 계 13:13) 어떤 권능이 참의 표준이 될 수 없음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외식자가 시행할 수 있었던 정당한 표현은 예수님을 따르고 기도를 하고 성경을 말하고 귀신을 쫓고 어떤 이적(권능)을 행하는 것입니다.
2) 외식자가 외식자로 지목된 부당한 행위가 무엇인가? 할 때 ① “우리가 무엇 무엇을 하지 않았습니까?”하고 자신들을 예수님 앞에 내세우고 자기들이 선지자 노릇한 것과 권능 행한 것을 나타내려 한 것입니다. 권능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시 62:11). 선지자도 주님이 세워주셔야 하는 것입니다(고전 12:28). 그런데 이들의 선지자직과 받은 권능을 주님이 주시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자진 행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설령 하나님이 주신 직분과 권능을 받아 역사를 하였더라도 자신을 내세울 것이 없거든 하물며 스스로 행사한 일이겠습니까? 이렇게 외식자들의 특징은 자신을 내세우는 일인 것입니다. ②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신앙 생활의 모양은 나타내면서 불법을 임의로 감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란 말씀은 저희들에게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 불법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불법은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는 것이고 죄되는 것이며 따라서 거역하는 것이고 영광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 그러면 성도가 그런 불법에 결백할 수 있는가? 할 때에 성도들도 연약하기 때문에 불법에 가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법에 가담한 자가 다 외식자인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외식자들이 불법을 행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하다가 연약하여 못 지키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인본주의를 내세워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불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외식자는 인본주의적 신앙의 형태를 가진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2. 기초가 든든한 집처럼 견고한 신앙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기초가 약한 집은 쉽게 금이 가고 헐어집니다. 이것은 뿌리가 든든한 나무는 가뭄을 타지 않으며 열매를 잘 맺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견고한 신앙을 갖고 성도의 사명을 다 할 수 있을까요?
1) 신앙의 기초 지식을 잘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초지식이라면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지식, 장로교회 12신조를 이해하는 지식 또는 구원의 도리와 칼빈주의 5대 교리를 깨닫는 지식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성도에게 이런 지식이 부족한가 하면 깨달은 사람들 중에서 그 고백에 입각하지 않은 어긋난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신앙 고백과 원리적 지식이 중요하고
2) 실천 생활입니다. 본문 24절에 보시면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가 반석 위에 집지은 자 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실천이 없고 사랑이 없을 때는 죽은 믿음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의 생활 목표는 자신에 대한 생활, 교회에 대한 생활, 이웃(사회)에 대한 생활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자신에 대한 생활은 기도와 말씀과 반성과 근면이고 ② 교회에 대한 생활은 겸손과 충성과 사랑이요 ③ 사회에 대한 사명은 빛과 소금역할을 하면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3)그런데 성도가 견고한 신앙을 가지려면 이상 말씀드린 세 가지 생활에서 연단을 많이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상당한 경험과 연조를 쌓으면서 연단을 받을 때 성품도 변화되고 가치관도 변화되며 판단의 기준도 달라지고 사랑이상 더 좋은 것이 없는 줄로 알게 되며 포용성도 커지면서 여러 가지로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교회 많은 성도들에게 표준이 흐려가고 있습니다. 기도나 증언이나 능력이 나타나는 것보다 불법이냐 아니냐 또는 인본주의냐 신본주의냐에서 표준을 찾으셔야 할 것이고 견고한 신앙을 갖기 위하여 필요한 성경지식을 잘 배우셔야 하며 어떤 일에도 흔들림이 없이 개인 생활, 교회 생활, 사회 생활을 원만하게 적응해 나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3과 전도자에게 주신 말씀 (마 10:16~2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전도자에게 주신 말씀”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마 10장에는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시고 부탁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평신도들도 전도의 사명이 있습니다. 처음에 전도의 사명을 직접 받은 사람들은 제자들이었고(마 10:5~6,28:19~20, 행 1:8) 그후 오순절 때는 120명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방언을 하며 전도하게 되었고(행 1:15,2:4) 그 후에 평신도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전도한 사실이 있습니다(행 18:26). 이 사실을 보면 전도의 사명이 처음에는 제자들 중심으로 주어졌으나 점차 평신도에게까지 확산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평신도들이 전도의 사명을 잘하려면 우선 빛과 소금 역할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급선무요, 그 다음에 성경지식을 갖고 구원의 도리를 전파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전도자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뱀이 지혜로운 동물인 것은 멀리서 살피며 머리를 먼저 숨긴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뱀이 간교하여 말을 하고 하와를 꾀었지만 예수님 당시의 뱀은 그런 뱀이 아닙니다. 따라서 “뱀처럼 지혜롭다”함은 미리 살피고 치명적 상처를 안 입도록 지혜롭게 하고 또 비둘기는 깨끗한 동물이요 곡식만 먹고 다른 것을 해하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비둘기의 순결은 성결과 겸손을 뜻하는 것입니다. 저희들도 전도의 사명이 있다면 우선 순결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사람을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사람 중에는 양같은 사람도 있지만 이리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도자의 파송에 대하여 “양을 이리에게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리는 포악한 사람을 뜻합니다. 전도자가 사람들을 삼가야 할 이유는
1) 사람들 중에 핍박자가 있고 거짓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진실치 못합니다. 여기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기서는 저렇게 말합니다. 또 말은 선하게 하나 실제 행동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다 틀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사람을 교제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2) 기독교의 대적자가 곧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총독들과 임금 앞에 끌려가게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사도행전에 성취된 사실이 기록됨). 또 가족도 믿기 어려울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고 자식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하고 전도자들을 미워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좋은 사람 만나기가 퍽 어렵습니다. 전도자가 사람을 삼갈 때 그의 성격과 문화적 특성을 잘 이해하고 전도자의 약점이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전도자가 이방인이나 임금들 앞에 끌려 갈 때는 “핍박을 받고 심문을 받는 중에도 복음의 증거가 되기 위함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핍박과 미움을 받는 기회도 전도의 기회란 사실을 알고 전도자의 품위를 잃어서는 안 될 것이요, “나는 이렇게 믿기 때문에 이 자리에 왔다”는 대답이 곧 증거가 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핍박받는 전도자에게 “성령님께서 말씀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말할까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핍박의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거기에 적응하는 대답을 하기 어려울 때 성령님께서 그때그때 지혜를 주셔서 필요 적절한 대답을 하도록 감동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항상 기도의 준비가 필요할 것입니다.
5.“나중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견딘다”는 것은 전도자를 보호하는 이적의 역사가 안 나타날 수도 있음을 전제한 것입니다. 무엇을 견뎌야 할 것인가 할 때 믿음 붙잡는 일을 잘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핍박 중에서 믿음 붙잡는 일을 견디려면 반드시 순교를 각오해야만 할 것입니다. 때리고 고문하여 고통을 주면서 “믿음을 포기하라”고 할 때에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성령님이 말씀을 주신다는 것은 그런 경우에 담력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거기에서 견디지 못하면 결국 믿음과 구원을 포기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행 17:13~15,21:13~14,23:11). 핍박 중에 피하는 것은 핍박의 세계에서는 전도의 효력이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가다라와 사마리아에서 배척을 받으실 때 그곳을 떠나셨습니다(막 5:17, 눅 9:52~56). 따라서 전도자가 핍박과 갈등을 피하는 것은 더 효과적인 전도를 지향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깨달으셔야 할 것은, ① 모든 성도들에게 전도의 사명이 있음과, ② 우선 이 사명을 빛과 소금역할로 해야 할 것과, ③ 사람 상대하는 일을 신중히 하여야 할 것과, ④ 핍박이 있을 때 순교적 사명을 가지고 믿음 지키는 일을 잘 견뎌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동리를 다 다니지 못하여 주님이 오신다”는 뜻은 주후 70년에 있을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세 재림의 예표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4과 예수님의 가족 개념 (마 12:46~5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가족”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예수님의 가족이란 개념은 우리하고는 퍽 달랐습니다.
1)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를 향하여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신 일이 없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① 예수님이 요셉에게 어떻게 하셨다는 말씀이 없어서 학자들은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짐작을 하였고 ② 또 마리아를 향하여 “여자”란 용어를 쓰시면서(요 2:4) 어머니라고 호칭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도 “여자여”하셨고, 사도요한에게는 “네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요 19:26~27). 이것은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2) 또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 간에 서로 피를 나눈 사이는 아니지만 분명히 한가족이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모친과 동생들이 왔을 때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가족적인 관계만으로는 모친, 동생(즉 권속)이 될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한집에 산다는 것만으로는 이웃은 될 수 있으나 가족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3) 그러면 어떤 경우를 가족이라고 하셨는가? 할 때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일 경우에만 그들이 형제, 자매, 모친(가족=권속)이 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4) 여기에서 예수님의 가족관을 뚜렷하게 말씀하셨으니 “누구든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천국 백성이 됐을 경우에만 예수님의 가족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나머지는 무엇입니까? 그 나머지는 육신의 혈육이건 친척이건을 막론하고 다 외인에 불과한 것입니다(고전 5:12~13).
5) 여기에서 저희들은 “형제”란 대상이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에 국한한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목숨을 버려 희생하는 것도 형제를 위하여 시행했을 때 유효하고(요 15:13~14) 사랑과 봉사에 대한 것도 믿음의 형제들에게 우선적으로 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딤전 4:10, 갈 6:10).
6) 그렇다면 믿음의 성도는 믿는 자에 대한 사랑과 가치관이 안 믿는 혈육에 대한 애착보다 더 많아야 할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즉 성도의 가치는 혈육을 초월한다 뜻이 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예수님이 원하시고 인정하며 복주시는 가족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가족은
1) 영적으로 거듭난 가족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을 인친 가족입니다. “믿음의 인을 쳤다(고후 1:22)”는 것은 확실한 믿음을 가진 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과거가 아무리 악하였다 하더라도 성령으로 거듭나면 믿음의 싹이 보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거듭난 가족은 ①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② 하나님을 두렵게 의식하며 ③ 성경을 진리로 믿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의 가족이 진짜 예수님의 가족인가?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가족 중에 거듭난 싹이 안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꼭 기도하시고 믿음을 갖도록 전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가족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만 하여도 믿음 자체를 잘못 인식하는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기도와 말씀과 능력을 타나내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마 9:22~23).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현실 교회의 생활도 엄밀하게 따져 보면 잘못하는 일들이 많이 있으니 한가지 예를 든다면 교회가 성경적으로 지도하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또 교회가 나타내야 할 영적 권위를 상실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3)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생활을 어떤 방법으로 점검할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① 자기 중심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를 부정하고 따르라(마 16:24)”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자기 생각, 자기 목적 심지어는 자기 취미까지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자기를 맡기는 자이어야 하고 ②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예수님과 바꿀 때 예수님의 인정하시는 권속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속만 되면 예수님이 책임져 주시는 행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꼭 예수님의 가족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5과 성도의 좋은 특성 (마 13:2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도의 좋은 특성”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 시간에 읽은 본문은 “씨 뿌리는 비유교훈의 결론” 말씀입니다. 열매가 100배, 60배, 30배가 되었다는 것은 영광의 결실, 즉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을 많이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좋은 땅에 씨를 뿌렸기 때문이요, “좋은 땅에 뿌렸다”는 뜻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영광의 결실을 많이 맺은 이유는 좋은 씨를 좋은 밭에 뿌렸기 때문입니다. 좋은 씨는 진리의 말씀이고 좋은 밭에 뿌린 것은 말씀을 깨닫는 것이요, 결실 그 자체는 생활의 열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실의 근거는 “말씀과 말씀의 깨달음과 실천” 세 가지에 있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리려면 세 가지 좋은 특성을 가져야 합니다.
1. 자기를 비우는 특성입니다. 마 5:3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상태가 바로 자기를 비운 것이고 그 속에 예수님과 진리가 거하여 천국을 실현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비어 있거나 자기를 비운 사람은 자신을 없는 것같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롬 7:9에서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하셨고, 또 고전 15:31에서도 “나는 날마다 죽는다”하셨습니다. 자기를 죽은 자나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주님을 영접하였을 때 주님이 그 마음에 좌정하시게 되고 친히 그 성도를 지배해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죽는 자처럼 생각하는 자는 겸손할 수 있게 되고 자기의 모든 것을 전폭적으로 주님께 맡기게 되며 주님은 그의 빈 마음을 속에 주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사상과 은혜를 채워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천국 생활인 것입니다. 그릇을 주인으로 하여금 쓸 수 있게 하려면 빈 그릇 자체로 대령하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성도의 마음과 계획도 빈 마음을 갖고 주님의 뜻만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2. 어린아이를 닮는 특성입니다. 어린아이는 지식이나 성숙에 미숙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신앙이 어린 성도를 어린아이에 비유하셨습니다(고전 3:1).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어린아이 같이 되는 것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1) 어린아이는 진실합니다. 어린아이는 거짓말을 꾸며 대는 재주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2) 또 어린아이는 포악하지 않고 순합니다. 다시 말하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음산한 골목길을 갈 때 어른을 만나면 무섭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를 만났을 때는 아무런 부담이 없습니다. 어린아이는 아무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가 어린아이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어린아이는 의존심이 강합니다. 자녀들도 다섯 살까지는 부모 품에 잘 안깁니다. 얼마나 귀엽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자라서 15,6세가 되면 부모 품에서 떠나려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어린아이처럼 자기의 품에 안기기를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막 10:14에서는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하셨고, 마 11:25~26에서는 “예수님이 진리의 비밀을 어린아이같은 자들에게 나타내 주신다”하셨으며, 마 18:4에서는 “천국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가 크다”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는 세상 물정에 속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순결과 겸손과 의뢰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은혜를 주시기에 합당한 상태란 것을 아셔서 어린이의 좋은 특성을 꼭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3. 죄인이란 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라야 의원이 쓸 데 있다(마 9:12)”하셨고, 죄인이 회개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 해 주신다(마 18:21)”하셨고, 또 세리가 기도하면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였을 때도 바리새인의 기도를 외면하시고 죄인의 기도를 들으셨으며(녹 18:13), 탕자의 회개를 기뻐하셨습니다(눅 15:23~24). 바울 사도는 자신을 “괴수 죄인(딤전 1:13,15)”이라 하면서 죄인이란 표현을 확실히 하셨습니다(롬 7:24). 주님은 그런 자를 기뻐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이단파에서 죄사함받고 의롭다함을 받은 것과 인간에게 죄의 부패성이 남아 있는 것을 옳게 이해를 못하여 “믿는 자는 의로워졌으니까 죄가 없고 회개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으나 아주 잘못된 무지한 주장인 것입니다. 의와 거룩을 구별할 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의’는 심판받을 죄가 없는 것이요, ‘거룩’은 범죄의 요소가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성도의 좋은 특성을 가지시되 ① 자기를 부정하는 특성 ② 어린아이를 닮는 특성 ③ 죄인의 의식을 가지고 겸손하게 사는 특성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제6과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 (마 14:22~33)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 오심”이란 주제로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1.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세 가지 이적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 자신이 물위로 걸어 오신 것이고 다음에는 베드로가 물위를 걸은 것이며, 또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친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이 이적과 관련한 교훈을 받는다면
1) 예수님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창조자인 예수님이 무엇을 못하시겠습니까?
2) 예수님이 이적의 은총을 주셔야 할 입장이면 주신다는 것입니다. 풍랑만난 제자들의 형편을 알고 이적으로 가까이 와 주신 것이나 베드로에게 자신이 예수님을 확신케 하기 위하여 그를 물에서 걷게 하신 것이나, 또 베드로가 물에 빠져갈 때 “주여…구원하소서”하니까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아 주신 것은 다 필요에 의하여 기적의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2. 이 시간에 배우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을 이 말씀에서 찾아보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① 예수님이 바쁘게 움직이시는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22절에 “즉시”란 말씀과 “제자들을 재촉하셨다”는 말씀과, 또 “무리들을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신 것”이 바로 주님이 바쁜 모습을 보이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도 바쁘게 살고 근면하여야 할 것을 교훈받게 됩니다. ② 무리들을 자기들의 갈 곳으로 보내시는 모습입니다. 무리들이 상당기간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반 성도들은 자기 집으로 가서 자기집 일을 하게 하기 위하여 보내신 것이고, 또 제자들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서 전도하게 하신 것이며 예수님 자신은 조용한 기도 시간을 가지시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일반 성도들과 제자들과 예수님 자신이 각각 할 일에 대하여 자기 책임을 다하게 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③ 예수님이 조용한 산으로 가셔서 혼자 기도하신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합심 기도도 귀한 일이지만 혼자 기도하는 것이 기도의 기본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혼자 은밀하게 기도하시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④ 제자들의 풍랑 위험을 아시고 제자들 곁으로 와 주셨고 ⑤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하셨으며 ⑥ 베드로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그를 물위로 걷게 하셨고 ⑦ 베드로가 의심과 두려움을 가질 때 물에 빠지도록 버려 두셨으며 ⑧ 또 베드로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하였을 때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아 주셨고 ⑨ 베드로의 믿음이 적은 것을 지적하셨으며 ⑩ 제자들이 탄 배에 함께 오르신 모습과 바람이 그치는 상태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모습을 낱낱이 헤아리시면서 믿음을 갖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① 그들은 바다에서 풍랑의 거슬림으로 고난을 당하면서도(24절)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현대 성도들이 시험을 받으면서도 기도를 게을리 함과 같은 것이요 ② 곁에 오신 예수님을 유령으로 착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유령으로 아는 것은 마귀로 착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착각을 일으킨 원인은 예수님을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5병 2어의 기적은 나타내셨어도 공간을 초월하여 물위에 서실 분으로는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지식의 부족이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요 ③ 무서워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무서움이 생기게 마련입니다(창 12:10~13). ④ 베드로의 변화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유령으로 착각했을 때 예수님이 “내니 두려워 말라”하시니까 “당신이 주시어든 나를 물위로 걸으라”하소서 하여 “오라”하셨을 때 베드로는 말씀을 믿고 물로 뛰어 내리는 순종을 하였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이적이 나타나서 물위로 걸은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바람을 보고 무서움을 갖자 다시 빠져들어 갔으니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무서움을 가진 것은 자기 신앙의 변화요 연약이었습니다. 이런 연약이 나타나면 주님의 간섭도 멀어지는 것입니다. 위기를 느낀 베드로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하였을 때 주님이 다시 손을 내밀어 붙들어 주셨으니 이것은 신앙의 강약과 은혜주시는 일에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⑤ 그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함께 배에 모셨고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바람이 잔잔해졌으며 ⑥ 바람이 잔잔하여 평온해졌을 때 예수님께 절을 하며 경배하였고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근면하게 사시는 예수님, 제자들 곁에 오시는 예수님, 믿음의 연약을 지적하시는 예수님, 평온케 하시는 예수님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제7과 착각에 빠진 교인들 (마 19:16~2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착각에 빠진 교인들”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착각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신은 바른 지식, 바른 생각, 바른 생활을 하고 있는 줄로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시급히 교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기독교 갱신협회라는 단체에서 성명을 발표하기를 “현실 기독교는 기독교의 진정한 본질을 상실하였다. 큰 교회는 작은 교회들을 잠식하면서 물량주의에 빠져 있고 현세에서도 잘 살고 내세에서도 잘 사는 식의 불합리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눅 16:25). 저희들은 기독교 전체를 생각하기 전에 저희들 자신이나 이웃이 착각에 빠져있는 일이 없는 지를 살피는 목적으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착각 속에 예수님을 따른 자들이 많았습니다.
1. 여러가지 잘못된 지식을 갖고 있는 경우입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청년은 부자요(22절), 관원(눅 18:18)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는 퍽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많은 잘못된 지식이 있었으니
1) 예수님을 도덕적 선생님으로 안 점(하나님의 아들)
2) 인간 중에 선한 자가 있는 줄로 안 점(없음)
3) 선한 일을 하여야 구원을 얻는 줄로 안 점(믿음으로)
4) 계명을 다 지킨 줄로 안 점(부자 상태에서는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한 것이 아님)
5) 예수님을 만났지만 근심하고 돌아간 점(희망을 가져야 하나 물욕에 사로잡혀 있었음)이 그의 착각이었습니다.
2. 성경에 예수님을 따른 자들의 착각 형태를 살펴보겠습니다. 혹 저희들은 그런 착각에 빠져 있지 않은 지를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1) 요 6:26에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하신 것처럼 오늘도 교회에서 대접을 받거나 구제를 받는 등 물질의 덕을 위하여 나오는 교인들이 있다면 반드시 진정한 의미의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6.25이후에 천주교에서 밀가루 구제로 많은 사람을 모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구제만 받고 떨어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죠. 교회 출석하는 목적을 그런데 두면 안 될 것입니다.
2) 기적을 보거나 기적을 체험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 5:30에 보시면 “믿게 하는 표적이 무엇입니까?” 하였고 예수님은 “너희가 기적이 아니면 도무지 믿지 않는다(요 5:48)”고 하셨습니다. 기적보다 믿음이 앞서야 하고 최고의 기적과 믿음의 힘을 주는 기적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행 17: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하고 음난한 세대와(눅 11:29) 유대인들과(고전 1:22) 바리새인들은(막 8:11~12) 기적을 앞세워 구한 것입니다.
3) 병고침을 위하여 나오는 경우입니다. 그 사례는 눅 17:11~19에 있습니다. 열 명이 문둥병을 고치려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다 고침을 받았으나 영광 돌린 사람은 한사람뿐이었으니 그 아홉은 병고치는 목적으로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목적을 두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죽을병이 들었을 때는 타락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4) 어떤 직분이나 돈 전대(회계사무)를 맡는 맛에 따르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돈궤를 맡았었고 또 도적질을 하다가 은 30에 예수님까지 팔았습니다(요 12:6,13:29, 마 26:15). “재정부장을 안하려면 장로할 필요 없다”는 말을 한사람도 있습니다. 또 교회의 어떤 직분이나 직임을 인하여 열심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 이런 것은 다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명예욕이나 직분욕에서 완전히 떠나야 합니다. 재정직무나 관리, 행정직은 신령한 직임에 비할 때 아무것도 아니며 그런 것은 불신자들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신령한 직임 즉 예배, 기도, 전도, 심방, 성례, 성경교육 등을 귀히 여기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제자들끼리 “누가 크냐”고 한 것이나(마 18:21) 주님 나라에 임할 때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한 일 등(마 20:21)은 다 권세, 명예 등에 미련을 가지고 주님을 따른 것입니다. 그 외에도
5) 예수님을 떼어 놓은채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간 예수님의 부모님들이나(눅 2:43, 미 6:8)
6) 예수님 무릎 앞에서 말씀듣는 것보다 음식 대접하는 것을 더 귀한 일로 착각한 마르다나(눅 10:38~42)
7) 주객이 전도된 상태에서 예수님을 종의 위치에 계시게 하고 자신이 주가 되고(요 13:13~15) 담임 목사가 나그네요 종이 되고 장로나 교인들이 주인이 되어 목사를 고용하는 것처럼 아는 사례는 한심스런 일이 아닐 수 없으며
8) 교회 부흥을 사랑보다 앞세워 사랑을 등한히 하는 일 등은 전부 성경에 위반이 되는 것입니다(고전 13:1~3, 마 12:20). 진정한 부흥의 열매는 반드시 사랑을 앞세워 성취한 열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갈 6:1).
결론적으로 진정 귀한 것은 잘못된 착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행하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시 40:8, 갈 1:10).
제8과 생명 바쳐 행할 일 (마 22:37~4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생명 바쳐 행할 일”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마 16:26을 보시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온 천하보다 자기 생명이 더 귀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재물을 얻고 지식을 얻고 명예, 권세를 얻었어도 건강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고, 목숨까지 떠나면 세상은 자기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생명을 귀히 알고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무진장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 세계에는 생명보다 귀한 것이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일반 사회에서 생명보다 귀한 것을 꼽으라면 자유와 국권을 꼽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와 국권을 위하여 생명 버린 사람들을 영웅시하는 것입니다. 신앙세계에서 생명보다 귀한 것을 꼽는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 영생 얻는 일, 성경 말씀을 지키는 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 진실과 순결을 지키는 일, 또 양심을 지키는 일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성도가 생명을 걸고 시행해야 할 것을 어떻게 말씀하셨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믿음 지키는 일을 위하여라면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순교자의 역사가 그래서 생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니엘의 신앙이 바로 순교적 신앙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가 이방나라인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에 절할 수 없지요. 그런데 그 왕은 왕권을 가지고 절하도록 강요하였고 절하지 않을 때는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넣겠다고 한 것입니다(단 3:17~18). 그러나 “풀무 불에 들어간 자신을 하나님이 건져주시지 않을지라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한 것은 믿음의 지조를 생명보다 귀히 여긴 일입니다. 이 말씀에서 성도는 믿음의 지조를 생명보다 귀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생명 바쳐 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목숨을 다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하는 일을 자기의 생명보존 보다 더 귀하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롬 14:7에 보시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하신 말씀도 주님을 위하는 일을 자기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 단연코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것입니다.
3. 이웃 사랑, 친구 사랑을 할 때도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 귀한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선 본문 39절에 보시면 “둘째는 그와 같으니”하셨는데 여기에 “그와 같다”는 뜻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야 하는 일이 같다”는 뜻이고, 그리고 “네 이웃 사랑하기를 그와 같이 하라”고 하신 것이니까 역시 이웃 사랑도 목숨을 걸고 해야 할 일이란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으로 요 15:13에 보시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다” 하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결국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 버려 희생하신 일이요, 한 알의 밀이 되신 것입니다. 물에 빠진 자를 구출해 주고 자신의 목숨을 버렸으면 역시 사회에서도 고귀한 일로 평가하지 않습니까?
4. 증거하는 일을 위하여서도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이나 스데반이 전도하다가 죽임을 당한 최초의 순교자요, 바울 사도도 행 20:24, 21:13에서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하셨고, 결국은 순교의 길로 가시게 된 것입니다. 복음 증거하는 일이 생명보다 귀한 것이었습니다. 계 6:9에 보시면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예수님의 심판대에서 신원하여 주기를 기다린다”고 하셨습니다.
5.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생명보다 귀히 여길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은혜를 받으면 죄 짓는 일이 싫어지고 두려워 집니다. 히 12:4에 보시면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않았다”하셨으니 피 흘리고 죽기까지 죄와 싸워 대항하고 이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죽음을 각오하고 죄를 멀리한다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로 가까워 질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을 걸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6. 마지막으로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죽을 때까지 충성하라”는 뜻도 있지만 “자기를 죽이는 방법으로 하나님께 충성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충성은 생명보다 귀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들에게는 목숨 걸고 시행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① 믿음 지키는 일, ②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 ③ 증거하는 일, ④ 죄짓지 않는 일, ⑤ 충성하는 일등입니다. 아무쪼록 목숨 걸고 믿음 생활을 잘하는 용사의 신앙을 가지셔야 하겠습니다.
제9과 화 있을진져 (마 23:13~33)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에는 “화 있을진져”란 말씀이 일곱번 나옵니다. 그래서 제목을 “화 있을진져”라고 정하였습니다.
1.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에게 “화 있을진져”라고 선포하셨습니다.
1) 이 말씀은 화를 선포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복과 저주를 아울러 선포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신 11:26). 복음 사역자들도 필요할 때는 저주를 선포할 수 있음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고전 16:22, 갈 1:8).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나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하셨고 복음 사역자를 대적하는 자에 대하여 “주께서 그 행한대로 갚으시리니”하신 말씀이 있음을 보아서(딤후 4:14) 신약의 사역자들도 필요에 따라 저주와 공의를 선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이런 선포를 하시게 된 대상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대적하여 죽인 죄도 있었지만 외식하는 죄, 종교를 거짓으로 행세하며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죄가 큰 것을 지적하여 화를 선포하신 것이 있고
3) 그 화의 내용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하여 멸망되므로 큰 화를 받을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2. 외식하는 죄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입니까? 일곱 번을 선포하시면서 외식하는 죄를 설명하셨습니다.
1) 힘들여 교인을 얻어서 지옥 자식을 배로 늘린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모인 단체나 기관에 구원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율법주의 이단자들이기 때문에 구원이 없지요. 그러나 단체원을 늘리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다니며 사람을 모으는 열심이 있지만 결국 그들도 지옥 자식으로 가담되게 하는 것입니다. 현실 교회가 순결은 도외시 하고 “사람만 모아서 단체만 커지면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 신앙보다 돈 사업에 치중하고 순결보다 물량주의를 내세워 사회 사업에 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에 사랑이 없으면 교인을 악하게 만들고 교회가 비진리를 주장하면 지옥 자식을 배출할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가 영적 생명과 사랑을 생산하는 기관인지 다른 것을 선호하는 기관인지를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2) 소경된 인도자처럼 잘못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소경은 자신의 길도 바로 갈 수 없는데 다른 사람까지 인도하니까 둘이 다 잘못가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못 가르치고 맹세의 법을 잘못 가르치는 것입니다(마 5:33~37). 큰 것과 작은 것을 구별 못합니다. 예를 들면 제단보다 제단에 드린 금이 더 중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지식과 판단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으니 화를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
3) 계명의 중요한 것은 통으로 삼키듯이 문제시하지 않고 그 보다 덜 중요한 물질 문제는 중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십일조를 엄격하게 드리면서 그 보다 더 중한 의와 인과 신은 버리는 것입니다. 의와 인과 신은 한마디로 표현할 때 사랑의 실천 법입니다. 적은 물질은 따지고 큰 계명인 사랑을 소홀히 하는 자는 우선 자신에게 사랑 실천이 부족한 것을 먼저 반성하고 그 다음에 다른 계명도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사회에서도 “높은 사람들의 엄청난 부정은 감추고 약한 백성들의 경미한 죄는 크게 다룬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 모순이 신앙 세계 안에 만행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4) 속은 더러우면서 겉만 깨끗이 나타내는 외식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깨끗한 그릇에 독을 담은 것처럼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한다”하셨고, 또 같은 내용으로 회칠한 무덤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더러운 시체가 들어 있는 것처럼 마음 속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하고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면서 겉으로는 깨끗하고 결백한 듯이 자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르고 생각과 나타내는 행동이 다른 것은 외식이요, 거짓이기 때문에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언제 포장이 너무 훌륭하나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빈약한 선물을 산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장사꾼들의 상술이었고 거기에 속아 넘어간 것이 퍽 분하였습니다. 사람의 외식도 꼭 그렇습니다.
5) 이율 배반적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순교한 선지자들의 무덤과 비석을 치장하면서 “자기들이 그 시대에 살았다면 의로운 선지자를 죽이는데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하여 자신들이 의인의 편에 선 것처럼 말하면서 실은 의로운 선지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었으니 그 행위가 이율배반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혹 성도들 세계에 입으로는 좋은 말을 하고 축복하면서 실제로는 해롭게 하는 이율배반적 행동은 없는지요. 항상 반성할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저희들 세계와 교회에 오셔서 우리의 부족을 지적하신다면 어떤 것을 말씀하실까요? 교역자의 자질 문제, 교회의 물량주의, 성도의 현실주의, 주여 주여 하면서 예수님을 닮지 않고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 자기를 못박지 못하며 명예주의에 민감하고 교회를 인기의 바탕으로 삼으려 하며 복음 사역자를 하나님의 사자로 여기지 않고 기복과 기분과 감정에 얽매여 생활하며 말씀을 멀리하는 부조리한 상황 등을 지적하시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어려운 중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모든 면에 주님의 지적을 받지 않도록 성실을 다하는 저희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10과 작은 일에 충성함 (마 25:21, 눅 16:1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작은 일에 충성함”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 말씀에 보시면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을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하시고 더 많은 것으로 맡겨 주시며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칭찬 받은 종은 적은 달란트(한 달란트)를 받아 가지고 거기에 충실한 종이었습니다. 그가 받은 한 달란트는 다른 사람이 받은 다섯 달란트에 비할 때 1/5밖에 안 되는 것이었고 또 그것으로 이득을 남긴 것도 역시 달란트 분량대로 적은 이득이었지만 많은 달란트에 충성한 사람과 똑같은 칭찬과 상급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대로 많던 적던 충성만 하면 된다는 뜻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으로 눅 16:10에 보시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충성자체를 칭찬하신 말씀으로 작은 것에 충성할 줄 알아야 큰 것에도 충성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저희들은 작은 일, 작은 것에서부터 충성하기를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2. 어떤 사람들은 큰 일만하기 위하여 작은 것을 거들떠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돈을 잘 벌고 출세를 하려면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쓰시는가? 에 대하여는 큰 일, 작은 일을 가리지 않아야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릇을 만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롬 9:21). 하나님은 자기의 교회에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 귀한 그릇, 천한 그릇을 두고 쓰신다(딤후 2:20)고 하셨습니다. 또 개인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도 “성령님이 자기의 뜻대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다(고전 12:11)”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하나님이 맡겨 주신대로 크던 작던 쉬운 일이건 어려운 일이건 또 귀한 일이건 천한 일이건 복종하며 충성하는 것이 자기의 본분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나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 될 때는 작은 일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성경에 보시면 예수님이 작은 일에 대하여 충성하신 말씀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자를 실족시키지 말아라. 소자를 실족시키는 죄는 연자 맷돌을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지우는 것이 낫다(마 18:6)”하신 말씀이나, 또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주는 자는…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2)”하신 것이나, 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다(마 12:20)”는 말씀이나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하시고 소경, 앉은뱅이, 문둥이, 귀머거리를 고쳐 주신 사실(마 11:5)”, 또 기적으로 수천 명에게 떡을 먹이신 예수님이 남은 것 열두 광주리와 일곱 광주리를 거두게 하신 일(14:20,15:37), 또 제자들과 전도 하실때 재촉하여 시간을 절약하신 일이 있고(마 14:22),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의 적은 헌금을 한 일에 대하여 부자보다 많이 하였다고 평하신 말씀(막 12:42)등을 살필 수 가 있습니다.
4. 또 성경에는 작은 일로 인하여 큰 복을 받는 사례가 많습니다. 성도의 기도는 밑천을 안 드리고 하는 작은 일이지만 그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의 관심과 능력을 힘입게 되는 것이고 인류의 시조가 하나님의 계율 한가지를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좌우된 것이나 아브라함이 손님을 접대한 것을 작은 일로 평할 수 있지만 그때에 하나님의 사자를 접대한 기회가 된 것이나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종에게 물을 제공한 것이 인연이 되어 이삭의 아내가 된 것이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선택받은 아브라함을 따라가므로 복을 받은 것이나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쉽게 포기하여 불행해진 일들은 다 작은 일에서부터 큰 일을 도출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작은 일에 유의하는 성도를 귀하게 보시는 줄로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5. 저희들은 어떤 작은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까요?
1) 우선 저희들은 부스러기 시간을 귀하게 선용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재촉하며 생활하셨고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실 때 배에서 주무실 정도로 시간을 아끼셨습니다.
2) 물질의 절약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넉넉하게 산다하여 쓸만한 것을 버리고 비싼 물건으로만 상대하여 허비하는 것도 역시 작은 일에 불충함이 될 것이요
3) 언어와 예절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면서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말 한마디 실수와 예절이 바르지 못한데서 자신의 인격에 큰 손해를 본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4) 은밀한 중에서 좋은 일하는 것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니요 주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줄로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골방에서의 기도, 은밀히 행하는 선행의 귀중함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말씀들이 항상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에 길에 못이 하나 떨어져 있어도 “작은 일에 충성한다”는 뜻으로 그 못을 집어야만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저희들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가 무엇인지를 파악하시고 그 달란트 은혜와 기술이 작은 것일지라도 또 사람이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귀하게 여기시고 충실하게 생활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11과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마 26:36~46)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의 마지막으로 기도하신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라고도 합니다. “겟세마네”는 감람산 서편의 골짜기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전날 저녁에 성만찬을 잡수시고 그 저녁으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기도를 하셨는데 내용을 살피면 보통 기도와 특별히 다른 점들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 다른 점이란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를 감당하실 일에 대하여 기도하셨고 제자들의 기도협조를 구하시지 않은 것이 특징인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다섯 가지 명령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 명령에 따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동안에 “여기 앉아 있으라”는 말씀은 분명코 기도의 명령이 아닙니다. 꼭 기도할 동안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요 19:25) 떨어진 장소로 가셔서 고민하시고 슬퍼하시면서 “내 마음이 심히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하시고 또 조금 나가셔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를 하셨습니다. 기도하신 내용은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은
1)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셨고
2) 인간의 괴로운 심정으로 기도하셨으며
3) 십자가를 피할 수 있으면 좋으나 자신의 소원대로는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간구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마지막 큰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그 고난도 하나님의 뜻이면 감수하실 것을 결심하시는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2. 그 다음에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앉아 있으라”는 뜻보다는 힘이 있지만 “기도하라”는 뜻과 같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깨어 있지 못하고 잠을 잤기 때문에 “저희가 나와 함께 한 시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섭섭하게 여기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역시 “깨어 있다”는 뜻은 “기도하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기도부탁을 하시지 않았을까요?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이 십자가로 구속사업을 하시는 문제에 대하여 부탁하시지 않은 것은 예수님이 누구의 협력도 없이 홀로 구속사업을 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적 관계와 영적 고난에 대하여 예수님만 홀로 지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3. 세 번째 명령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주신 말씀이고 그들로 기도하게 하신 이유는 자신들이 시험에 들지 않기를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들이 시험에 든다는 뜻은 예수님이 고난의 길로 가실 때 신앙의 낙망을 초래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뜻은 마음으로는 예수님의 뒤를 끝까지 따르고 싶지만 핍박과 고난과 죽음이 두려워서 주저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위로 걸어가던 베드로가 예수님 바라보던 시선을 바다로 돌렸을 때 무서움이 오고 무서움이 올 때 빠져 들어 갔던 것처럼 믿음도 예수님을 바라보던 마음에서 세상 염려와 고난을 생각하면 떨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시는 환난기에 제자들이 시험에 들지 않기는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기도하게 하시고 예수님은 또 같은 기도를 하고 오시니 제자들이 여전히 기도를 못한채 잠을 잤고 또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에는
4. 네 번째 명령으로 이제는 “자고 쉬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자고 쉬라고 하셨을까요? 긴장해야 할 기회를 지나쳤기 때문이고 또 미구에 예수님이 죄인의 손에 팔릴 것이기 때문에 졸며 잘 시간은 있어도 마음 잡고 기도할 기회는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한 제자들이 잠자야 할 것을 아셨습니다. 기도도 기도해야 좋을 요긴한 때가 있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유혹이 닥쳐 올 때입니다. 그 시기가 지났기 때문에 “자고 쉬라”고 하신 것처럼 기도도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5. 마지막 명령은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하신 것입니다. “자는 자여 일어나라. 나태한 자여 일어나라. 충성하지 못하는 자여 일어나라”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어디로 함께 가자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장소로 고난의 장소로 핍박이 있는 장소로 죽음이 있는 장소로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여기에 따라가실 용기가 없으면 믿음이 약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라(벧전 5:1)”고 하셨습니다. 나타날 영광에 참여하려면 고난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하라(벧전 4:13)”고 하셨습니다.
결론은 ① 예수님의 구속사업은 혼자 하신 것이고 ② 성도는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셔야 하며 ③ “일어나라 함께 가자” 하실 때 어디든지 따라가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12과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 (마 8:14~17)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앓아 누운 환자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고 금방 일어나서 예수님께 수종들 정도로 건강해졌습니다. 그 때 귀신들린 자들도 많이 데리고 왔는데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 주셨고 병든 자를 다 고쳐주셨습니다. 귀신의 역사와 육체의 질병을 정복하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우리의 약한 것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병고쳐 주신 사례가 15회 나타나 있고 죽은 자를 살리신 사실도 세 번이나 있었으며(마 9:25, 눅 7:15, 요 11:43) 나중에는 예수님 자신이 부활하셨으니까 병고침의 능력에 대하여 더 설명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고쳐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나 구약에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일을 같은 성질로 여기셔야 하고 또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우리와 떨어져 계실지라도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같은 방법으로 병을 고쳐 주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귀신병으로 시작하여 모든 사람의 모든 병을 고쳐 주실 수 있었으며 육신의 약한 것을 신속하게 회복시켜 정상인이 되도록 하시는 부분까지 역사 해 주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 장모가 열병에서 일어나 수종든 것이나 38년 된 병자가 자리를 들고 걸어간 것이나(요 5:8)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가 금방 일어서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한 사실은(행 3:8) 범상하지 않은 기적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 안 고쳐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요 5:6). 문제는 병자의 입장에서 고침을 받을 때 어떤 방법을 적용해야 되는가를 성경에 나타난 몇 가지 사례를 통해서 알아보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1. 구약에서 나만 장군의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왕하 5:1~14). 나만은 이방인으로 일찌기 하나님이나 선지자의 권위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명령을 순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완고한 자이면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지 않을 수도 있는데 결국 그가 고집을 꺾고 일곱 번 순종을 했을 때 병을 고쳐 주셨으니 결국 나만은 순종으로 병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히스기야 왕의 경우입니다(왕하 20:1~7). 히스기야는 죽을 병든 자로 선지자의 경고까지 받았었습니다. 그때에 히스기야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 앞에서 전심으로 행한 것을 기억해 주십시요 하고 심히 통곡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전심으로 행한 것은 그의 바른 생활이고 심히 통곡한 것은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참작하시고 그의 병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히스기야는 성실과 회개로 병고침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실과 회개로 병고쳤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혈루증 든 여인의 경우입니다(마 9:21~22). 그는 예수님 곁에 와서 “그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낫겠다”는 믿음을 가졌는데 그 때에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워하였다”고 하셨으니 이 경우는 “예수님이 고쳐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으로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막 9:23)”하신 말씀, “믿고 구하면 다 받으리라(막 11:22~24)”는 말씀이 이런 경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4. 가버나움의 중풍병자의 경우입니다(막 2:1~5). 이 경우에 병자는 예수님께 나갈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웃 사람들이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서 부탁을 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저희(이웃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을 고쳐 주셨으니 이웃 사람들의 사랑과 정성이 은혜받은 요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협력하라고 약 5:16에서 말씀하셨습니다.
5. 후견인의 믿음으로 고쳐주신 경우입니다. 마 8:13에서는 주인이 하인의 병을 청탁하였고 마 15:28에서는 어머니가 딸의 귀신 병을 청탁하였는데 이 경우에는 전부 후견인의 신앙을 보시고 고쳐 주신 것입니다.
6. 병고침의 은사를 주셔서 낫게 하시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고전 12:9에 보시면 병고침의 은사가 있고 또 이 은사를 열두 제자들에게도 주신 사실이 있었습니다(마 10:1). 그런데 또 약 5:13에 보시면 “병고침을 위하여 교회의 장로들(감독자, 지도자)을 청하고 그들로부터 믿음의 기도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지도자들의 기도를 통해서 은혜 베푸실 뜻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의료요법을 통해서 병고치는 것도 은사에 포함되는 것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를 하였을 때 병낫는 효과가 있으면 그는 병고침의 기도 은사를 받은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7. 마지막으로 또 한가지는 예수님이 강권적으로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요 5:8의 베데스다 못에서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쳐 주신 것이나 행 3:1에서 베드로 요한이 앉은뱅이를 성전 문전에서 고친 것은 그 병자나 어떤 이웃의 믿음을 보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직접 긍휼히 여기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사도가 로마 감옥에 계실 때도 “주께서 그의 곁에 계시사 강권함을 주셨다(딤후 4:17)”고 하셨는데 이것도 역시 주님이 붙들어 주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병고침에 대한 이런 여러 사례를 참작하셔서 건강의 은혜를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라는 것입니다.
제13과 예수님의 기도와 전도 (막 1:35~39)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에는 35절에서 “예수님이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나가셔서 기도하셨다”는 말씀이 있고, 36절에서는 “시몬과 함께 있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서 만났다”는 말씀이 있으며, 37절에서는 “모든 사람(일반 성도들)도 예수님을 찾는다”는 말씀과 38절에서는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서 전도하자.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하시고, 39절에서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전도하시고 귀신들도 쫓아내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은 다섯 대지로 되어 있으나 “예수님의 기도와 전도”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예수님의 새벽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1) 예수님은 새벽기도의 모범자이셨습니다. 목사들 세계에서 새벽 기도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어느(놈)이 새벽기도를 시작했느냐?”라고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초창기에 새벽기도를 시작하게 한 분은 “길선주”목사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최초의 시작은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3년간 하셨지만 저는 30년간 하고 잠깐 쉬는 기회에 이 글을 쓰는 중입니다. 저는 27세부터 주임 전도사로 시작하여 30세에 목사된 후 계속 담임 목사만 하다가 58세에 잠시 쉬었으니까 100%에 가까운 새벽기도를 31년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새벽이 평상시에 일어나는 시간처럼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새벽기도를 얼마나 꾸준히 해 보셨습니까? 저는 21세 때 “새벽기도를 해야 은혜를 받는다”는 전도사님의 권면을 받고 열심히 하던 중 약 2개월만에 성령님의 역사로 회개하는 체험과 성경으로 끌리는 체험과 죄가 두려워지면서 바르게만 살아야 한다는 강한 감동을 받고 새 생활을 시작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일반 성도들에게 “새벽기도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주장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것은 성직자들도 어렵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항상 기도의 정신으로 깨어 사는 것을 권장하려고 합니다. 새벽기도는 사명과 환경이 부합하는 성도들이 잘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신 것은 조용하고 은밀한 장소를 찾아 자유로운 기도를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예배당이나 산에 가야만 기도가 되는 줄로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산보다는 조용한 예배당이 기도하기 좋고, 또 예배당에 가서 기도하기 전에 자신의 집 조용한 골방에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심이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골방에서 은밀한 기도를 하라(마 6:6)”고 하셨습니다.
2. 기도하러 나가신 예수님의 뒤를 제자들이 따라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도 같이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담임 목사가 새벽에 나와서 기도할 때 부교역자가 안나올 때는 허전한 마음을 주고 또 장로들이 안나올 때는 “새벽기도에 협력하는 장로가 되야 하는데…”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평신도가 사명을 갖고 새벽 기도회에 나오는데 중직자가 안 나오면 잘 되는 교회로 기대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벽기도회를 없애지 않는 한 중직자들이 성실하게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3.“모든 사람들도 주를 찾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일반 성도들이 예수님을 가까이 따른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셔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어떻게 따를까요? 성경에 끌리는 생활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저는 21세 때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 말씀과 기도에 끌리는 체험을 한 후 또 목회 생활 30년만에 성경 강해와 설교문 정리에 끌리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끌리는 것보다 말씀에 그대로 끌려가기 위하여 목회를 사임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말씀에 끌리는 것을 포기했다면 기성 교회의 목회를 계속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한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눅 10:42). 말씀에 끌리는 것이 예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4.“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서 전도하자.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도의 사명을 제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가서 전도하자”고 하셨습니다. 또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자”고 하셨으니 예수님은 전도하실때 이방 지역에서부터 동리마다 모조리 하신 것입니다. 복음은 확실한 내용을 한번 일깨워 주는 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따라서 한번도 일깨움 받지 못한 모든 족속들에게 골고루 전파되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많으나 복음의 내용을 확실하게 전달해 주는 전도는 지금도 희귀하게 나타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5.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온 갈릴리에 다니시면서 전도하시고 귀신도 쫓으셨습니다. 귀신 쫓는 일은 예수님의 능력에만 의존해야 합니다. 귀신보다 더 큰 능력자는 예수님 뿐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귀신을 쫓든지 기도로 구하든지 예수님을 의지하여서만 가능한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대상 17:25에서 “하나님은 기도할 마음을 주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단 9:3에서는 다니엘이 기도를 결심하였습니다. 성령님은 기도를 도우십니다(롬 8:26). 기도와 전도에 힘쓰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14과 믿음 생활의 순서 (막 4:28~2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믿음 생활의 순서”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믿음 생활의 순서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자연은 순서에 대한 이치를 변하는 법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춘하추동이 변함 없고 열매를 맺을 때도 반드시 싹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이삭이요, 그 다음이 익은 열매의 순서를 뒤집는 법이 없습니다. 성도가 신앙 생활을 순서대로 하지 않으면 허송세월만 보내고 믿음은 자라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열 두살 되신 예수님과 예루살렘 성전에 다녀 올 때 예수님과 함께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지 않고 3일 후에 다시 돌아가서 확인을 하니까 그만한 손해를 본 것입니다. 옷을 입을 때도 순서가 있고 공부를 할 때도 순서가 있으며, 건축을 할 때도 순서가 있듯이 믿음 생활의 순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열매 맺는 일이 사람의 기술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맺게 하시는데 거기에도 순서가 있음 같이 성도의 믿음 성장에 있어서도 반드시 순서가 있어야 할 것을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순서대로 믿음 생활을 하여야 유익이 있을 것입니까?
1. 확신을 갖고 시작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1) 이 확신이란 믿음의 발동이 걸리는 것인데 이 믿음은 성령님께서 거듭나는 은혜와 함께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믿음의 불을 켤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믿음이 불이라면 성경 말씀은 가연성 물질과 같습니다. 믿을 힘이 있을 때 반드시 믿을 것을 믿어야 하겠지요. 그 믿음의 대상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그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확신이란 성경을 진리고 믿는 믿음의 확실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능력이 거듭나는 은혜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살후 1:10에서 “믿어졌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결국은 성경을 믿으려 할 것이 아니라 믿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2. 믿음이 확실해진 다음에는 출발이 확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출발이 확실해도 흔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출발이 확실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기잡는 이적을 체험하고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저희가(동료자들까지) 배들을 육지에 대로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확실하게 따른 것입니다(눅 5:11). 그 후에 삭개오도 확실하게 따랐습니다. 재산의 반을 없애서 가난한 사람들을 주고 또 토색한 것을 4배로 갚았으니 확실하지 않습니까?(눅 19:8~9) 에디오피아 내시는 “내가 메시야를 깨달았으니 세례를 받아야 하지 않느냐?”하면서 빌립에게 세례를 자청하여 받았고(행 8:35~36) “루디아”는 세례를 받은 후에 “나를 예수 믿는 자로 알진대 내 집에 와서 유하라(행 16:15)”할 정도로 확실하게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변화를 받자마자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행 22:10)”하고 나선 것입니다. 성도의 믿음 생활은 구경꾼 노릇하는 외식을 떠나서 확실하게 믿음 세계에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을 자기의 주로 자신을 예수님의 종으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천지의 주재시요 구세주요 심판자이신즉 당연히 자기의 주(왕)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요 13:13,16에서 “너희가 나를 주라 또는 선생이라 하니 너희 말이 옳다…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함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자기를 그의 종으로 만들어 놓고 믿음 생활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입으로는 “주여 주여”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예수님 앞에서 왕노릇 하는 사례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의 인간성을 죽이지 않으면 예수님이 자기에게 오셔서 왕노릇할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종이란 관계를 알지 못하면 자기가 자기의 주인으로 착각하게 되고 예수님의 뜻에 순종도 안하게 되며 결국은 자기 정욕대로 사는 십자가의 원수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자신은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하셨고, 갈 5:24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믿음 생활에는 자기 죽는 일이 이렇게 시급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4. 성경을 배워 신앙 지식을 갖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대상으로(요 17:17) 또 배움의 대상으로 주신 것입니다(딤후 3:14). 성경을 배워야 함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함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성도가 무엇을 하기 전에 먼저 알 것을 알아야 하니까 성경 배우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배울 때 잘못 배우면 모르는 것만도 못해 집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배울 것인가”를 주의하라고 하신 것입니다(딤후 3:14).
5.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생활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 속에 온유, 겸손이 있고 지혜가 있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사신 생활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변화되는 일을 힘쓰셔야 할 것이요,
6. 마지막으로 사명에 관한 일을 힘쓰셔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신앙 생활의 순서는 확신과 새 출발을 잘하셔야 하고 자신을 예수님의 종으로 삼아야 하며 진리를 배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예수님을 닮으면서 사명 생활로 나가는 것이 옳은 순서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15과 믿음이 없는 세대여 (막 9:17~24) 목록으로
예수님께서 자기의 시대를 가리켜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열두 제자가 있었고 많은 성도들이 있었는데 왜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하셨을까요? 또 오늘을 살아가는 저희들 세계는 “믿음이 있는 세대”라고 칭찬을 하시겠는지요?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벙어리 귀신병 들린 자기 아들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와서 고쳐 주기를 원하였으나 제자들이 고쳐주지 못하자 예수님에게 데리고 와서 그 사실을 아뢰었더니 예수님이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하시고 그 귀신병 들린 아들을 고쳐주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1. 여기에서 “믿음이 없는 세대”란 뜻은
1)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병을 쫓아내지 못한 연약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신유의 권능을 받고 파송되었는데(마 10:1) 왜 고치지 못하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29절에 보시면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권능을 받은 제자들이라도 기도를 통해서 병을 고칠 수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기도를 힘쓰지 않은 상태에서 능력을 나타내려고 하다가 성취되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없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요
2)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런 형편인 것을 볼 때 일반 성도들의 믿음도 연약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없는 세대”란 보편적으로 연약한 상태를 탄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믿음의 칭찬받은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았습니다. 말씀으로 하인의 병고침 받기를 원한 백부장의 믿음과(마 8:10) 세례요한에 대하여서와(마 11:11) 딸의 귀신병을 고친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과(마 15:28) 향유 옥합을 깨트려 드린 마리아를 칭찬하신 것(마 26:13)외에는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2. 귀신병 들린 아들의 아버지가 “믿음없는 것을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한 말씀이 24절에 기록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귀신병 들린 아들을 데리고 제자들에게 찾아왔다가 고침받지 못하자 예수님께 직접 찾아왔으나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은 것은 사실이지만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십시오”하였다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교훈을 받게 되었으므로 이 사람은 예수님의 전능하심과 믿음의 만능성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의 “믿음의 만능성”이란 믿음을 통하여 역사해 주시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귀신병자의 아버지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대신 그는 믿음을 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아비가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아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믿음과 함께 능력 나타내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좋은 믿음 갖기를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3. 믿음에 대하여 몇 가지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1) 믿음은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히 12:2).
2) 예수님은 그 믿음을 택한 자에 한하여 거듭나는 은총으로 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행 13:48, 요 3:3, 겔 36:2).
3) 이렇게 하여 거듭난 자는 말씀을 받을 때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벧전 1:23, 살후 1:10). 그리고 또 예수님은 성도의 믿음 보존을 위하여 기도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눅 22:32).
4) 믿음은 한 성령님이 주실지라도(고전 12:9) 구분되는 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구분이 되는가 하면 ① 구원받는 믿음과 역사하는 믿음으로 구분됩니다(롬 1:17). ② 또 초보적인 믿음과 진보적인 믿음으로 구분됩니다. 고전 3:2에서 “어린 아이 신앙”을 말씀하셨고, 히 5:14에서는 “장성한 자의 신앙”을 말씀하셨습니다. ③ 또 이것은 큰 믿음, 적은 믿음으로 표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 15:28에 “큰 믿음”이란 말씀이 있고, 롬 12:3에 “믿음의 분량”이란 말씀이 있으며, 빌 1:25에는 “믿음의 진보”란 말씀이 있고, 살전 1:3에서는 “믿음의 역사”란 말씀이 있고, 갈 5:6에서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있고, 히 10:22에는 “온전한 믿음”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또 살후 1:3에는 “믿음이 더욱 자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질적 가치의 분량을 갖는 것이요, 자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없는 세대”라고 하신 것은 바로 질적 가치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질적 가치의 신앙이란 어떤 것인가 할 때 구원받는 신앙, 진리를 고백하는 신앙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성도들의 신앙이 고백적인 신앙, 기복주의 신앙, 자기를 알아주어야 믿어주는 신앙, 자기 중심, 안일주의의 신앙을 갖고 있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칭찬하시려는 신앙은 범사에 감사하고 고난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 영광 중심으로 살고 자기의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는 신앙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희들이 갖고 있는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구원받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말씀으로 역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믿음입니까? 질적으로 장성하고 주님의 심정을 닮아 사는 분량 많은 믿음을 갖기 위하여 노력하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16과 전도의 모습과 교회상 (눅 8:1~3) 목록으로
본문 말씀을 살펴 보면 우선 예수님과 제자들의 전도하는 모습이 발견되고 또 예수님과 함께 하는 성도의 생활 모습이 나타나 있기 때문에 제목을 “전도의 모습과 교회상”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예수님의 전도하시는 모습을 살피면
1) 혼자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러 사람들이 함께 다니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혼자도 전도할 수 있는 담력이 있어야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함께 다니면 더 힘이 되고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데리고 다니신 사람들은 열두 제자와 여러 여인들이었습니다. 여러 여인들은 일곱 귀신 들렸다가 고침받고 따르게 된 막달라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함께 다닌 사람들은 가지각색이었습니다. 귀신병에서 고침받은 여인, 또 왕실에서 일하는 사람(관직)의 아내, 병고침 받은 여자들이 있고, 또 한가지 특수한 것은 열두 제자가 다 함께한 사실입니다.
2)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신 것입니다. 각 성과 촌이란 도성이나 농촌을 두루 다니신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러 다니신 것입니다. 요즈음은 사람모인 곳이 너무 많아서 다니지 않고도 전도할 수 있는 곳이 얼마든지 있지만 복음이 온 동리에 전파되기 위해서는 두루 다닐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긴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함께 하는 여인들이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사도들을 섬기면서 따랐다는 뜻입니다. 요즈음은 교회가 전도비를 예산해서 전도자들이 교회의 경비, 즉 예수님 돈으로 비용을 쓰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는 함께 다니는 성도들이 봉사하면서 섬겼습니다. 자기의 것으로 전도자들을 섬기는 것은 자신이 전도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또 복음 사역자들을 대접하는 것이므로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도가 자기의 소유로 섬기는 것을 기꺼이 여기셨습니다. 함께 다니는 전도, 각 성, 각 촌으로 다니는 전도, 사도들은 전도하고 여 성도들은 섬기는 전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참신한 교회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참신한 교회상
1)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1절에서 “열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하였다”는 말씀이 있고, 3절에서는 “여러 여자가 함께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참신한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뜻과 예수님의 생활과 예수님의 사명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마 12:19에 보시면 “예수님은 다투지도 않으시고 드러내지도 않으시며 아무도 그 길에서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조용하셨고 상한 갈대나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다”고 하셨으나 현실 교회는 그 반대로 행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부족함이나 거리끼는 것이 많은 사람은 잘 용납되지 않는 곳이 교회라고도 할 수 있으니 이런 일들이 속히 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과 생활에 보조를 맞추는 생활이 교회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변화가 있는 교회입니다. 우선 열두 제자들이 다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따를 만큼 변화된 사람들이며 귀신병을 고치고 다른 병을 고침받은 여인들도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쓸모없는 사람들이 고침을 받고 변화되어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의 가장 큰 문제는 육체의 질병보다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지식이 부족하고 예수님을 닮아 사는 생활이 부족하며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것이 교회에서 덕을 세우는 것인가? 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은 것입니다. 꼭 예수님을 닮는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요, 어려운 문제를 안고 온 성도들을 위하여 함께 기도하고 짐을 나누어지며 유익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봉사하는 교회상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목숨까지 대속물로 주신 분입니다(막 10:45). 본문에서도 예수님을 따르는 여자들은 자기들의 소유로 주님과 제자들을 섬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것은 물질만이 아닙니다. 건강한 몸도 주셨고 지혜도 주셨으며 생명도 주셨고 생명만큼 소중한 시간도 주셨습니다. 그 외에도 각 사람에게 특수한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기도 잘하는 은사, 권면, 위로 잘하는 은사, 전도 잘하는 은사, 화해를 잘 시키는 은사 등입니다. 이런 것들을 다 이용해서 주님의 일을 받드는 성도들이 되어 명실공히 봉사하는 교회상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① 주님과 함께 하는 교회 ② 변화있는 교회 ③ 전도하는 교회 ④ 봉사하는 교회가 되도록 노력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17과 이웃을 돕자 (눅 10:25~37) 목록으로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선한 사업을 하려고 애쓰는 중에 있지만 진정한 이웃, 즉 예수님이 도와주기를 바라시는 대상을 옳게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 중심에서 원하는 대상만을 도움받을 이웃으로 잘못 아는 예가 있어서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를 밝혀두려는 목적으로 이 말씀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1. 본문 말씀에 보시면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질문하기를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율법사란 율법을 잘 아는 사람이요, 그가 예수님을 시험한 것은 어떻게 대답하시는가? 를 듣고 지적하거나 항의하려는 태도로 질문한 것을 뜻하며 또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한 것은 율법주의자들의 행위 구원관을 나타낸 질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주의자들은 그들의 선행이나 공덕으로 구원(죄사함과 영생)을 받는 줄로 믿었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네가 율법을 아느냐?”고 하셨을 때 그는 신 6:5과 레 19:18의 말씀을 인용하여 전체 율법의 강령이 되는 사랑을 설명한 것입니다. 즉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라고 대답하였고 예수님은 “그 대답이 옳으니 그대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율법을 행하여 구원을 받으라”는 말씀은 그 율법사가 율법을 옳게 못 지킨 것을 깨닫고 다른 구원의 방도를 찾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사는 자신이 이웃 사랑을 많이 했다고 자신하였기 때문에 자기를 옳게 보이기 위하여 “내 이웃이 누구냐?”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 율법사는 자기의 이웃인 부모나 형제나 가족이나 친구같은 이웃, 즉 잘 아는 이웃을 도우면서 살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의 선행과 이웃 사랑이 율법이 요구하는 만큼 충분한 줄 알았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진정한 이웃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2. 진정한 이웃은 여행 중에 강도를 만나 물건을 뺏기고 몸을 상하여 어찌할 수 없이 죽게 된 처지의 사람을 돕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강도를 만난 피해자 옆으로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갔으나 그들은 성직자이면서도 피하여 지나갔고 어떤 사마리아인은 이방인이지만 그 피해자를 보았을 때 불쌍히 여기고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 주고 짐승에 태워 주막(길가에 주막밖에 없음)으로 데려가서 돌봐 주고 또 자기의 볼 일을 보고 올 동안 잘 살펴주면 그 비용을 주겠노라하였으니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고 하신 것입니다. 이때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받을 것이 못되고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이 받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힘입어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3. 그래서 저희들은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아셔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이웃은
1) 어려움 중에 있는 사람으로 스스로 회복하기 어려운 대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불시에 강도를 만나 피해를 당하였은즉 그는 스스로 회복할 수 없는 자였습니다.
2) 이런 대상들이 세계에 많이 있는데 누구를 먼저 도울 것이냐에 대하여는 가까운 곳에 있는 대상, 또는 곁에서 발견된 대상을 우선적으로 도와야 할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도 가까운데서 부터 먼 곳으로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행 1:8).
3) 도움을 필요로 하여 요청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마 5:42에 보시면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저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남을 도울 수 있는 형편에서 도움의 대상을 정할 때 편벽되지 않게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이 도움을 청할 때는 거절하고 달라고 하지 않는 먼데 사람에게 주는 경우가 있으니 이런 것이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우리의 이웃을 잘 발견하셔야 하겠습니다.
4. 마지막으로 이웃을 돕는 방법은
1) 어려움 당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요
2) 응급조치로 시작하여 완전조치에 이르도록 꾸준히 돕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런 방법으로 이웃을 도왔습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어떤 율법사처럼 예수님을 시험하거나 구원의 도리를 착각하거나 자기의 의가 있는 줄로 잘못 알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이웃이 바로 곁에 있는 어려운 사람이나 도움을 청하여 찾아오는 사람을 먼저 돕고 그 다음에 다른 이웃을 도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웃을 도우며 사는 복된 생활이 있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18과 깨어 있는 종 (눅 12:35~40)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깨어 있는 종”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1. 깨어 있는 종은
1) 허리띠를 띠고 등불을 켜들고 서 있는 자라 하셨고
2)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즉시 문을 열 수 있도록 기다리는 자라 하셨으며
3) 도적을 지키는 집주인처럼 예비하는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성도들의 경성하는 생활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도적이 오는 것처럼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실 수 있고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려면 항상 깨어 있어야 할 것이요, 또 재림 주를 맞이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문의 종이란 대상은 사역자들과 성도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그러면 깨어 있는 방법이 어떤 것입니까? 본문에는 허리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고 또 항시 문을 열 수 있도록 기다리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 사람이 허리띠를 띠지 않으면 행동이 불완전합니다. 따라서 허리띠를 띠는 것은 완전한 자세 또는 행위의 완전(시 119:1)을 의미하며
2) 등불을 밝히는 것은 진리 중심을 뜻하고
3) 서 있는 것은 파수꾼처럼 긴장하는 것이요
4) 기다리는 것은 심판자의 재림을 대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 말씀은 비유적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의 혼인집에 간 주인은 예수님을 비유하고 종들은 성도들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 문전에서 기다리던 종이 문을 열고 주인을 영접해야 하는 것처럼 성도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고 기다려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3. 이때에 잘 깨어 있는 종은 복이 있고 주인이 와서 그 종을 섬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7절에 보시면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을 것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충성된 성도가 내세에서 받을 상급이 있음을 의미할 뿐 아니라 현세에서도 충성된 종에 대하여는 주님이 직접 그를 보살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얼마큼 보살펴 주시는가? 할 때에 종이 주인을 섬기듯 주님이 충성된 성도를 보살펴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깨어 있는 종 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4. 만일 성도가 깨어 있지 않으면 믿음의 도적을 맞게 될 것이고(마 26:41) 믿음이 약해지면 여지없이 시험에 들고 영적 은혜가 무력해지는 것입니다. 성도의 영적 은혜가 무력해지면 하나님이 멀어지고 하나님 중심의 판단도 흐려지며 자신의 무능한 입장을 더욱 알지 못하게 되고 인간성과 현실성만 민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인간성과 현실성이 커질 때 사람들은 이것을 똑똑하고 지혜로운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은혜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신다”는 예수님의 말씀(마 11:25)을 기억하셔서 자신의 영적 위치가 바로 되어 있는지를 감지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저희들이 어떤 방법으로 깨어 있어야 할 것인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말씀과 기도를 꾸준히 붙잡고 나가셔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말씀과 기도에 끌리는 생활을 유지하셔야 할 것입니다(저는 95년도 9월 중순에 교회를 사임하고 무임 상태로 이사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삿짐 운반이 예상보다 몇 배 힘들었습니다. 꾸리는데도 몇일, 정리하는 데도 몇일이 걸렸습니다. 동료자들은 목사가 강단을 지키지 않을 때 영적 은혜가 쇠약할 것을 염려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사하는 기간에도 여전히 설교문 정리를 계속하였고 설교문 정리에 끌리는 것 때문에 영적 은사의 핍절과 공허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씀과 기도만 계속하면 심령이 든든하게 유지될 수 있습니다.
2)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성수주일과 예배가 신앙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난 후 첫번 수요일 저녁에는 세 가족이 첫번 주일에는 5인 가족이 집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역시 영적 공허감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유롭고 하나님이 더욱 가까이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거리끼는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법이나 불의나 사랑에 위배되는 것을 삼가므로 순결 보존에 힘쓰는 것이요
4) 항상 자기의 책임을 다하여 주어진 시간을 유익하게 활용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본문이 말씀한 깨어 있는 종처럼 경성하시고 또 말씀과 기도, 성수주일과 예배, 순결보존, 책임완수, 시간활용 및 사명에 충실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미래의 일은 주님께 맡기고 그날 그날 자기의 일에만 전념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제19과 믿음을 더하소서 (눅 17:5~1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믿음을 더하소서”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사도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하고 믿음의 보충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믿음은 분량이 있어서 적은 믿음을 크게 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막 9:23에서는 귀신 들린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도와주시요”했다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하시니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시요”하고 간청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히 12:2)이시기 때문에 믿음없는 자에게 믿음을 주실 수 있고 믿음이 적은 자에게 믿음을 더하실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 본문 말씀에서 제자들이 “믿음을 더하소서”한 것은 다른 복음서에 나타난 내용과 대조해 볼 때(마 17:20)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귀신 쫓는 권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마 10:1) 이를 시행하지 못하자 예수님이 그들의 믿음 없는 것을 책망하셨고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있어야 권능을 행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1. 믿음은 구원 받는 믿음과 역사하는 믿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구원 받는 믿음이란 쉽게 말씀드리면 신앙 고백을 바로 하는 믿음입니다. 구원은 고백하는 신앙으로 받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하셨고, 또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13)”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을 영접하므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요 1:12)”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기초가 되어서 역사하는 믿음으로 장성할 수 있음을 아셔야 하는데 그 말씀이 롬 1:17에 나타난대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이요, 또 엡 4:13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이른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 받는 신앙, 고백적 신앙을 기초로 한 다음에는
2) 역사하는 믿음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역사하는 믿음은 그 크기와 분량에 따라서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①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이 아닌 “장성한 자의 믿음이라(히 5:14)”할 수 있고 ②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닌 “신령한 자라(고전 3:1)”할 수 있으며 ③ 큰 믿음을 가진 자(마 15:28) ④ 말씀의 능력을 믿는 자(마 8:10) ⑤ 온전한 믿음을 가진 자(히 10:22) ⑥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가진 자(갈 5:6) ⑦ 또는 행함으로 나타내는 믿음을 가진 자(약 2:18)등으로 표현이 된 것입니다. 히 11:6에서 “믿음이 없으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이 믿음은 고백적인 신앙에 머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하는 믿음을 나타낼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항상 자신의 믿음이 어느 정도의 성장 단계에 있는 지를 점검하면서 믿음을 육성시켜야 할 것입니다.
2. 좋은 믿음, 값진 믿음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믿음이 값진 믿음일까요?
1) 하나님 아는 지식이 많은 것이니 곧 성경 지식으로 하나님을 잘 아는 믿음입니다. 잔치집 주인을 잘 모르면서 그 곳에 가는 것은 퍽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인을 잘 알아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 아는 지식이 상당한 믿음이어야 값진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벧후 3:18).
2) 예수님의 인격을 많이 닮은 자의 믿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을 의미합니다(엡 4:13, 롬 8:29). 예수님을 닮은 자의 믿음이 더 값지다는 뜻입니다.
3) 실천성 있는 믿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약 2:17에서 “실천성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요, 마 5:19에서 “계명 중 작은 것 하나라도 지키지 않고 가르치면 천국에서 작다 일컬음을 받는다”하셨고, 또 실천성 없는 믿음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마 7:21)”고 하셨습니다.
4) 값진 믿음은 말씀과 예수님을 분리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한 백부장이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주기 위하여 예수님을 만나 “말씀만 하옵소서 그리하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마 8:8)”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은 이 믿음이 희귀한 것이라 하시면서 칭찬하시고 기뻐하셨습니다. 말씀과 예수님은 서로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요 1:1, 행 20:32).
5) 귀한 신앙은 인내하며 꾸준히 버티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의 “기도를 응답하신다”고 마 15:28, 눅 18:7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응답이 더디면 “주님이 나를 시험하신다”,“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다”, 또 “기다리게 하신다”, “더디 주시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믿고 꾸준히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후손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을 약속 받았지만 약 500년 후에야 그것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세상을 떠났습니다(히 11:13).
6) 연단을 받은 신앙입니다. 욥은 연단을 받을 때 “정금같은 신앙인이 된다(23:10)”고 하였습니다. 연단받는 일에 인색하지 마십시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① 능력으로 역사하는 믿음 ② 명령을 다 순종하고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하며 겸손할 줄 아는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③ 신앙의 연조가 짧아도 순종과 겸손이 동반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제20과 항상 기도하자 (눅 18:1~8)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는 항상 기도하는 문제, 낙망하지 않는 문제, 응답하시는 은혜, 또 말세 성도의 신앙 문제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1절에 보시면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7,8절에 보시면 “밤 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 오래 참으시겠느냐?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하시므로 응답에 관한 말씀을 주셨고 끝에서는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시므로 말세에 옳은 신앙이 희귀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1. 저희들은 항상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살전 5:17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하셨는데 이 두 가지 표현은 같은 뜻입니다. 저희들은 항상 기도하는 것을 일정한 장소에 오래 앉아서 기도하는 것으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24시간 기도만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항상 기도한다”는 뜻은 기도를 생활과 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 기도하시고 식사할 때 기도하시고 출근할 때 차 안에서 기도하시고 운전하면서 기도하시고 기도하면서 업무를 보시고 또 조용하면 기도하시고 잠자리에 누울 때 기도하시고 자다가 엎드려 기도하시고 또 잠 안오면 앉아서 기도하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성도의 기도시간은 특별기도를 하는 사람 못지 않게 많은 분량의 기도를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자신의 생활에 어떤 변화와 문제가 있을 때 특별기도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평소의 기도가 부족하였다고 느꼈을 때 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의 기도가 항상 계속 되었다고 생각하는 성도는 특별기도를 안해도 하나님이 충분히 응답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저는 지금까지 특별기도라는 표현을 나타내 본 일이 없습니다. 30년 목회를 중단하고 가족들과 집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도 특별기도를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평안했고 희망적이었고 외롭지 않았습니다. 95년도 9월에 교회를 전격 사임하고 전세집을 얻어 나오려 할 때 적당한 위치에 적당한 집을 얻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임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 노아의 방주가 바람부는데 따라 도착한 것을 기억하고 어느 곳이나 방 얻어지는 장소가 나의 살 곳이라고 믿고 하나님께 맡긴 결과 얻게 된 집의 위치가 참으로 적당하고 유익한 위치가 된 것을 경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특별기도로 얻어진 결과가 아니요 항상 기도한 결과임을 확인한 것입니다.
2. 기도자는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죽음에서 생명을 만드시는 분이요 소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응답이 더디거나 자기의 소원이 성취되지 않는다 하여 낙망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보다 더 좋게 해 주시는 방법으로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억울한 옥살이를 할 때 그는 속히 석방되기를 기도하였을 것입니다(창 40:14). 그러나 그가 미리 석방이 되었다면 바로가 꿈을 꾸었을 때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참고 기다리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소망을 두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3. 응답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도 번거롭게 청탁하는 자의 소원을 들어 주었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시므로 응답의 확신을 갖게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응답에 관한 것은 하나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급한 것은 급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애굽군의 침략으로 홍해를 가르신 일, 마라의 쓴 물을 달게 하신 일(출 14:10~14,15:25), 아말렉을 물리치신 일(출 17:8~13)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하는 은혜는 40년 만에 주셨습니다. 40년 안에 불신앙의 백성들은 광야에서 다 죽게 하셨고 남은 백성들에게는 연단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매사에 때를 정하고 일을 하십니다(전3:1). 그러니까 당연히 늦게 응답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응답을 안하시는데도 뜻이 있습니다. 다윗이 성전 짖는 소원을 응답 안하신 대신 그 아들 솔로몬이 짖게 하셨고 다윗에게는 메시야를 보내실 약속을 하셨습니다. 또 바울 사도가 육체의 가시를 없애 주시기를 기도했을 때 그것을 응답하시지 않은 이유는 받은 은혜의 족함을 알고 자고(교만)를 방지하고 또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중에 머물게 하시기 위함이라(고후 12:8~9)고 하시므로 응답이 안 된 사실에도 은혜와 유익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응답과 상관없이 유익이 있는 줄로 믿으시면 될 것입니다.
4. 인자가 오실 때 (말세) 믿는 자를 보겠느냐? 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예수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주의, 물질주의, 기복주의가 팽배하는 것을 볼 때 진정한 믿음이 잠식 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아서 순수한 믿음을 소유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믿음을 보겠느냐”란 제목의 설교 참고).
제21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함 (요 4:20~26) 목록으로
이 시간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림”에 대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저희들은 예배를 자주 드리고 있습니다. 많이 드리는 사람은 새벽기도, 가정예배, 교회에서 드리는 공예배까지 한 주간에 10여 차례 드리는 분들도 계시고 또 주일에 드리는 공예배만 드리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본문 23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하셨고, 24절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1. 여기에서 저희들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이 어떻게 예배를 드렸는가에 대하여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1) 지금 본문에서 말씀하신 내용이 구약적 제사에 대하여 약간만 알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다”한 것은 여로보암 때 북방 이스라엘이 갈라지면서 그들의 지역인 단과 벧엘에 자율적 제단을 만들고 거기에 제사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예배할 곳이 있다”한 것은 구약 율법에 따른 성전 제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0절에 보시면 “우리 조상들이 이 산에서 예배하였다”하므로 제사드린 것을 예배로 표현을 하였기 때문에 예배란 제물이나 예물을 가지고 또는 기도나 헌신 등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배란 찬송, 기도, 헌금 등을 드리는 순서만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든 순서를 포함하여 하나님께 대한 경외, 은혜에 대한 응답과 감사, 복종과 헌신 등이 모두 포함된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구약 시대의 성도들이 예배를 드린 것은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키며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물을 드린 일들인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주일 낮예배만 드리는 성도들이 계신 것처럼 그 당시에도 1년에 한차례쯤 절기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 한번만 드리고 지나는 성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제사드리는 일이 많았거나 적었거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 행위가 된 것입니다.
3) 구약 시대의 예배와 신약 시대의 예배에 다른 점은 ① 구약 시대는 모형적 제물을 사용했고 신약 시대는 그 모형적 제물이 십자가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실제의 제물, 진정한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이 진정한 제물은 십자가에서 제물로 드려진 후 부활하신 예수님의 공로를 중보사역으로 내세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② 구약 시대는 모형적 제물을 드리는 시설과 제도가 있었지만 신약 시대에는 그것이 폐지되고 심령으로 통하는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 직접 나가는 것이요 ③ 구약의 제사는 인간 중보자인 제사장의 중보가 필요하였지만 신약의 예배는 그것을 예수님이 직접 해 주시기 때문에 필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 다른 점이 구약 제사에 비할 때 다른 점이요, 또 달라진 예배 그 자체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점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교훈하신 신령한 예배를 드리려면 어떤 요소들이 필요한가?에 대하여
1) 우선은 구약에 비할 때 장소에 구애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21절에서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라”하신 말씀이 장소의 초월을 교훈하신 것이기 때문이요,
2) 구약의 제사 제도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것은 동물로 드리는 모형 제사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3) 그러면 신령한 예배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① 믿음이 필요합니다. 21절에서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내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요, 성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 아는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22절에서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고…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내가 그로라(26절)”하신 말씀이 곧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③ 23절에서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이란 말씀이 있으니 이것은 진실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믿어보는 것을 의미함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믿고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구약식 제사와 대조되는 것으로 ① 성경을 믿는 신앙 ②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지식 ③ 진실하게 나타내는 생활, 이 세 가지가 참된 예배의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제22과 영생의 확신 (요 5:24~2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영생의 확신”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믿음이란 지식을 뜻하고 확신은 지식의 풍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믿음의 확신은 “힘있고 풍성하게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통 아는 지식을 갖고는 실천이나 남을 가르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풍성하고 익숙한 지식을 가지면 잘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 지식도 풍성해야 든든한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확신할 이유와 내용들을 말씀해 주십니다.
1. 하나님과 그의 말씀인 성경을 확실하게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참되시기 때문입니다(롬 3:4). 요 14:6에서는 “예수님을 진리라”하셨고, 히 6:13에서는 “거짓말하실 수 없는 분이라”, 약 1:17에서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24,25절에서 “진실로 진실로”란 말씀을 두 번 강조하셨고, 28절에서는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그의 말씀(성경)을 “의심없이 믿으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니까(롬 3:4) 거짓이 아니라 할 때는 증명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래 진실하시고 의로우시고 영원하시기 때문에 자기를 증명하실 필요가 없고 오직 그대로 믿을 것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는 마치 갓난아기가 무엇을 입에 넣어주면 무조건 삼키는 것처럼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만물의 존재와 생명체의 활성화와 우주의 통치와 상선벌악의 결과가 현실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이미 증명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성이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고 롬 1:20에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문제는 저희들이 하나님을 무조건 믿되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생각과 다를지라도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렘 12:1에서 예레미야는 “내가 주와 쟁변할지라도 주는 의로우시다”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믿으라”고 하셨습니까?
1) “심판에 이르지 않는 것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심판의 뜻은 정죄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믿는 자는 성경에서 말씀한 구원의 도리도 믿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 자는 정죄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롬 8:1). 이것을 “의로워지는 은혜”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의로워지고 정죄받지 않는 것을 자신의 순결 회복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순결회복(거룩)과 정죄의 심판을 안받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검찰에 고소된 죄가 없어도 “죄를 안 짓고 산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심판에 이르지 않음은 “지옥 갈 자로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뜻으로 아시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죄에서 멀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거룩한 생활로서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깨끗게 하여 육신의 장막을 벗고 모든 정욕을 없애기까지(갈 5:16)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입니다. 이 사망은 지옥을 뜻하고 생명은 영생을 뜻하기 때문에 성도가 영원한 길로 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육체의 죽음은 영혼과 육신의 분리 또는 성화의 완성으로 여기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난다”는 말씀을 25절에서 하셨습니다. 인생은 다 영적으로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입니다(엡 2:1). “죽은 자들이 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불신자들이 복음을 듣도다”는 뜻이요, 그 시기가 예수님이 오신 때부터란 것입니다. 또 “살아난다”는 것은 거듭남을 뜻합니다. “거듭나는 것”은 성령님의 신비한 사역이지만 그 결과를 아는 것은 “말씀을 받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벧전 1:23에서는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거듭난다”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25절 말씀은 “복음 전파의 시작”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4) 심판하는 권세가 예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27절에 보시면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인자되심(사람으로 오셔서 구속사업으로 십자가를 지심)을 인하여 심판권을 전부 넘겨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유일한 심판자는 예수님이십니다(계 19:15). 장차 끝날에 예수님은 많은 성도를 배석한 자리에서 먼저 성도에게 상급주는 심판을 하시고 다음에 악인들을 영벌에 처하는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실하심같이 그의 심판도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의롭게 살면서 고난 당하는 성도에게 큰 희망을 주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5) “무덤 속에 있는 자의 부활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는 모든 죽은 자를 의미합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가 생명의 부활로 나오는데 여기의 선한 일은 믿음가진 것을 뜻하고(계 14:13) 생명의 부활이란 심판을 받지 않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감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 악한 일을 행한 자는 믿지 않은 자요 “그가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는 것은 그의 죄악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죽으면 그 영혼이 천국에 가고 악인은 죽으면 지옥에 가는데 이 사람들의 선행과 악행에 대한 심판은 마지막에 하시는 것입니다(눅 16:22~25,23:43, 계 20:12~15,22:12). 구원과 영생과 심판에 대한 말씀을 굳게 믿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23과 외식자와 참신자 (요 6:60~7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외식자와 참신자”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61절에 보시면 “말씀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하셨고, 64절에서는 “너희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하셨으며, 66절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 있었으나 많이 물러갔다”하셨고, 70절에서 열두 제자 중 “가룟 유다는 마귀”라고 하셨으니 예수님 시대에도 많은 외식자가 색출되어 물러난 사실을 알 수 있고 참신자에 대하여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하셨을 때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줄 믿고 알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참신자의 특징은 예수님을 주로 호칭한 것과 주님의 말씀을 영생의 말씀으로 믿는 것과 예수님을 알되 지식을 앞세워 아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앞세워 알았다는 사실을 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 세계에도 상당수 외식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려 하기 전에 자기를 앞세우려 하고 현실의 복을 추구하여 교회에 다니는 듯한 느낌을 줄 때 “저 사람도 참신자인가?”하는 의심을 받게 합니다. 저희들도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하는 참된 신앙을 가지셔야 하겠습니다.
1. 외식자는 어떤 사람인가?
1) 하나님의 말씀이 걸림이 되는 사람입니다. 60절에 보시면 “이 말씀은 어렵도다”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의 수근거리는 것을 보시고 “내 말이 걸림이 되느냐”고 하셨습니다. “어렵다”는 뜻은 이해를 못함이고 “걸림이 됨”은 “거부감을 느낀다”는 뜻이므로 결국은 불신앙에 머무는 것입니다.
2) “생명의 떡”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48~59절)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비유하여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람의 육신이 양식을 먹어야 사는 것처럼 영적 구원의 은혜는 성도의 영혼이 예수님을 떡먹듯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의미는 성찬 예식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생명의 희생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교훈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을까요? 눅 8:10에서 비유를 베푸시는 목적이 “하나님의 백성은 깨닫게 하시고 비택자들은 깨닫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외식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걸림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이 불신앙을 표현했을 때 예수님은 “장차 인자가 부활하여 승천하는 것을 볼 때 어찌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한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자기 지식으로 믿으려는 장립니다. 믿음은 임의로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예수님께로 갈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65절). 그 때에 많은 제자들이 물러 간 것입니다. 여기에서 외식자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요, 말씀을 걸림으로 받는 자요, 자기 지식으로 믿으려 하는 자요, 부활진리(62절)를 소개할 때 믿지 못하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참신자는 어떤 사람인가?
1)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음을 믿는 자입니다. 68절에서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으매”라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① 예수님은 만유의 주이시고 ② 예수님의 말씀이 곧 진리이고 ③ 그 진리 안에 영생하는 구원의 도리가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참신자는 성경에 대한 신앙이 확고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뉘게로 가오리까”한 고백에서 예수님 외에는 다른 것에 구원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만 끝까지 의지하고 따르는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요즈음 성도들 중에는 예수님 외에 다른 것에 한 눈을 팔면서 믿음 생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항상 어디서나 예수님만 으뜸인 줄로 아셔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셔도 사람보다 예수님을 더 사모하고 예수님과 가까워지는 문제를 가장 중요시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신령하게 예배드리고 말씀 배우며 헌신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신앙 생활의 기본인 줄로 아셔서 다른 것에 마음을 뺏기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3) 참된 신앙은 믿고 아는 것입니다. 69절에서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줄 믿고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알아서 믿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고 믿음이 앞서고 믿어져서 믿는 것이 참신앙이요,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배웠을 때 더 잘 알아지는 것이 신앙의 순서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요, 또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은총에 의하여 믿음이 생겨지기 때문입니다. 알고 믿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믿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옳지 못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말씀 71절에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외식을 아시고 그를 마귀라고 하시면서 용납하신 것은 유다의 배신이 성경에 이미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요 13:18, 시 41:9). 진실한 성도는 성경을 진리로 믿고 예수님을 떠나지 않으며 자기 중심으로 생활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 따라가는 신자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24과 목자와 양의 비유 말씀 (요 10:1~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목자와 양의 비유 말씀”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시 23편을 보시면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란 주제로 시를 읊은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도 하나님과 성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서도 본문에서 예수님을 선한 목자로(11절) 또는 양의 문으로(7절) 성도를 양으로(4절) 또 목장은 신약 시대의 교회로 비유하여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1절의 “양의 우리”란 말씀이 교회를 비유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순서대로 살피면
1.“참 목자가 아닌 절도와 강도를 경계하라”고 하셨습니다. 양의 우리에서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참 목자가 아닌 절도요 강도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의 “문으로 들어오지 않는 자”란 예수님의 뜻대로 따르지 않는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7,9절에서 예수님 자신을 “문”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문”이란 뜻은 요 14:6 말씀처럼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목자장이시므로 예수님이 세우신 사역자들(예수님을 대리행사 할 수 있는 목사들)이 예수님의 종으로서의 목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목자는 예수님의 뜻과 교회의 바른 제도를 잘 지키면서 성도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일하는 사람이고(11절) 예수님의 뜻을 위반하고 교회의 바른 제도를 따르지 않으며 성도의 진정한 유익을 위하여 일하지도 않고 교회와 성도를 손해 보이면서 자기의 유익만 차린다면 이는 도적같은 자요(10절) 삯군 목자(12절)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이나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각별히 경계시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불법성을 지닌 사역자를 엄히 경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목자 밑에는 문지기가 있는데 이 문지기도 역시 목자의 지도에 따라 일하는 사역자입니다. 그가 문을 지키는 것은 불법자의 출입을 막고 양을 정한 시간에 드나들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목회자의 성도에 대한 신앙 양육에 속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도는 목회자의 지도를 받아야 함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문을 열 때 나가고 그의 음성을 분별하는 고로 그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기 양”이란 말씀과 “앞서간다”는 말씀과 양이 “목자의 음성만 듣고 따른다”는 말씀을 유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왜 양이 목자의 음성만 듣고 따라야 할까요? 그 이유 첫째는 예수님이 그 목자를 세워 그의 양을 인도하게 하셨기 때문이요, 둘째는 아무래도 목자가 양보다(목회자가 성도보다) 신앙의 전문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는 목회자보다 교인이 더 똑똑한 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격식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교인이 자기보다 더 유익한 목자를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6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저희는 “그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의 교회생활과 목회자와의 관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는 성도라야 은혜를 받을 수 있고 교회에서 덕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자신이 양의 문인 것을 두 번이나 강조하셨습니다(7,9절). 여기의 “문”이란 뜻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은 오직 예수님뿐”이란 뜻입니다. 문은 길을 뜻합니다. 특히 천국가는 길, 구원받는 길, 죄사함 받는 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로서 양들이 듣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구원자는 오직 예수님뿐이시니까 먼저 온 구원자가 있을 수 없고 나중에 올 구원자도 있을 수 없음이 확실한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칭 메시야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양들(즉 진정한 성도들)은 분별하여 듣기 때문에 거기에 따르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원칙상으로 거듭난 백성을 의미하고 거듭난 성도는 진리로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도리상 어긋나는 교훈은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하 인간 중 예수님 외에는 다른 이름으로 구원할 자가 없고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구원을 받으며(행 4:12) 들어가며 나가며 꼴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들어가며 나가며 꼴을 얻는다”는 말씀은 양이 목장 안에 들어와서도 복을 받고 목장을 떠나 초장으로 나가서도 복을 받는 것처럼 성도들이 예수님 중심으로 살면 교회 안에서도 복을 받고 세상(사회)에 나가서도 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4. 마지막으로 목자와 양이 어떠하여야 합니까? 목사는 목자다워야 하고 성도는 양을 닮아야 하겠지요. 참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도 버린다고 하셨으니까(11절) 참 목자의 자격은 예수님을 닮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를 양에 비유하셨으니까 양의 특징을 충분히 닮아야 할 것입니다. ① 양은 순한 동물입니다.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함이 양의 순함으로 비유된 것입니다. 성도는 우선 착하고 순해야 합니다. ② 양은 화목을 잘 합니다. 서로 싸우지 않습니다. 몸을 서로 접촉하고 잠을 잡니다. 성도가 화목할 줄 모르면 바른 성도가 아닐 것입니다(요일 5:1). ③ 양은 아둔한 동물이지만 그 대신 목자를 의지하고 목자의 음성을 분변하여 들으므로 보호를 받는 것처럼 성도들도 교회 중심, 교역자 중심으로 믿음 생활을 잘 하셔야 할 것입니다. 좋은 성도, 칭찬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25과 예수 믿는 세계 (행 2:42~4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수 믿는 세계”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예수 믿는 세계란 믿는 성도들이 모여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예수 믿는 세계도 되고 예수 안 믿는 세계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모여 친교와 사랑을 나눌 때 사회적인 성격과 세상 이야기를 전혀 멀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성격을 지나치게 나타낼 때는 예수 믿는 세계가 예수 안 믿는 세계처럼 되어 구별을 흐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진정 믿는 성도의 세계처럼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어떤 때는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정치하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낼 때도 있고, 또는 장사하는 이야기로, 물건을 싸게 사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는가 하면, 교회 안에서 사회적 음악을 모방하거나 사회적 지식 공급을 위하여 힘쓰는 경우가 있고, 또 어떤 성도는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생활이 믿음 생활의 목적인 것처럼 아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있을 때 표준을 옳게 이해하지 못하거나 표준적 생활을 떠나버리면 결국은 믿음 세계 밖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어떤 때는 교회가 장사하는 곳인가? 세상 지식을 공급하는 곳인가? 또는 성도와 성도 간에 교제를 나눌 때 불신 세계에서 교제하는 것처럼 교제하게 되는 경우를 볼 때 퍽 안타까울 때가 있는 것입니다.
1. 그러면 예수 믿는 세계가 어떠하였는지를 본문에서 살펴 보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의 근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1) 초대 교회 성도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2) 서로 교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친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들이 친교할 때 모이기를 힘썼고, 성찬 예식과 음식을 나누었으며,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고, 또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고, 순전한 마음으로 친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3) 그들은 또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으며,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들을 요약하면 말씀과 기도와 찬송과 서로 돕는 사랑을 나타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사도들을 통하여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고,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예수 믿는 세계는 어떠하여야 합니까? 예수 믿는 세계이니까 신령하고 은혜스러운 일들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은혜스러운 일들이 여러 가지이겠습니다만, 특별히 세 가지 만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1) 예배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예수 믿는 단체에 예배가 없다면 믿는 자의 표시를 나타낼 수 없고, 또 은혜받는 기회를 다양하게 힘입지 못할 것입니다. 예배에는 찬송과 기도와 말씀과 성례와 책망과 축복이 있으므로, 성도의 특권을 향유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2) 성경을 연구하는 열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행17:11에서 “베뢰아 지역의 성도들은…날마다 성경을 상고한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예수님과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성경을 떠나서는 구원의 도리를 알지 못하고, 또 성경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방도가 없고, 성경을 떠나서는 은혜를 충만히 받는 방도가 없으며, 또 성경은 배워서 터득하지 않으면 저절로 알아지는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딤후 3:4). 그런고로 성도의 세계는 정신없이 말씀에만 몰두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는 세계는 하나님과 멀어져 있는 세계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사랑이 실천되는 세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갈 5:6에서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하셨고, 요일 5:1~3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곧 하나님의 자녀는 사랑을 실천하는 자라”고 하셨으며, 또 계명의 으뜸이 곧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싶어도 교회라는 단체에서는 실천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사랑 실천의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세계에서는 사랑이 아닌 것은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힘이 없는 세계는 믿음의 세계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4) 믿음의 세계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세계”인 것입니다. 본문 43절에서는 “사람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히 2:2~3, 10:31). 악인의 3, 4대까지 갚으시고(출 20:25), 칼과 활과 죽일 기계를 만드시며(시7:12,13), 행한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두렵습니까(마 16:27)? 예수 믿는 세계에는 반드시 예배와 말씀과 사랑과 두려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26과 가말리엘 (행 5:33~4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본문에 ‘가말리엘’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가말리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과 사도 시대에 살던 사람으로, 종교적 계파는 바리새인에 속하고, 지식으로는 교법사(율법학자)요, 사회적 지위로는 공회원이었습니다. 본문 34절에서 “바리새인 가말리엘”이라 하였고, 또 “교법사”라 하였고, “공회 중에서 일어나 사도들을 명령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훌륭한 것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지만, 또 유명한 바울 사도가 이 사람의 제자였음을 보아(행 22:3) 더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핍박을 받을 때 대제사장과 공회와 이스라엘 원로들이 이들을 예루살렘 공회에 세우고 전도를 금지시켰습니다(행 5:21,27~28). 그러나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즉 저희들은 크게 노하며 사도들을 없이 하려고 하였습니다. 가말리엘이 공회 중에서 일어나 사도들을 퇴장케 한 후 모든 회원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자”, “과거에 ‘드다’란 사람이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약 400명이 따르더니 그가 죽은즉 따르던 사람들이 다 흩어졌고, 그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사람들이 다 흩어졌느니라. 이제 이 사람들을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무너뜨릴 수도 없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게 될 것이라” 하니까 다른 공회원들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 들여 채찍질만 하고 “전도를 금하라” 하고 놓아준 것입니다. 이때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을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주님이 여겨주시는 것을 기뻐하면서 공회를 떠났고,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가말리엘에 대한 것도 살필 수 있고, 또 제자들의 태도에 대하여서도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1.‘가말리엘’에 대한 것입니다. 그의 좋은 점은, 우선,
1) 교법사라는 지성인입니다. 여기의 교법사는 율법의 선생님으로, 훌륭한 학자에 속하는 것입니다.
2) 모든 백성의 존경을 받는 자였습니다. 존경을 받지 못하면 백성들을 설득하거나 지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데는 그만한 인격이 뛰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백성으로부터 존경 받는 것은 참 귀한 일입니다.
3)‘가말리엘’은 하나님의 공의를 믿은 사람입니다. “정의의 사람은 승리하고 불의의 사람은 망한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 실례로 ‘드다’와 ‘갈릴리의 유다’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한 때 인기를 얻었지만 그가 죽자 그의 사상도 없어졌고, 따르던 사람들도 없어졌습니다. “불의는 망하고 만다”는 원칙을 경험을 통하여 확신한 것입니다.
4) “어떤 사상이나 소행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는 것은 결국 성취되고, 사람의 소행으로 말미암는 것은 결국 무너진다”는 원리를 알고 있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이기도 합니다.
5) 또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함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함이라” 함은 참으로 무서운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아는 경우가 있겠지요. 그러나 말없이 뜻을 거역하는 것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다음에 그의 아쉬운 점은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 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비택자이기 때문에 심령이 열리지 못한 근본적 원인도 있겠지만, 예수님을 배격하는 바리새파에 속한 것과, 율법을 표면적으로만 해석하는 현실적 지식 때문에 예수님께 접근하지 못한 것이 아쉬운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지식은 있으나 신앙은 없었고, 도덕적 인정은 받았으나 복음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복음을 복음이라 하지 않고 일종의 사상과 소행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상과 소행은 사람의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2. 풀려나온 제자들의 신앙입니다. ‘가말리엘’의 역할이 아니었더라면 위험할 뻔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통하여서라도 사역자들을 보호하시고, 자기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1) 제자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핍박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인정해 주시는 것을 기쁘게 여겼으니, 그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당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2) 그리고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혀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가르치고 전도하는데 집중하는 것은 성령님의 은혜로 끌려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가말리엘’의 도덕성과 율법 지식과 사도들의 사명성에 관한 것을 배우고 본 받으려고 이 말씀을 상고한 것입니다.
제27과 고넬료 가족이 은혜받은 보고 (행 11:4~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고넬료 가족이 은혜받은 보고”에 대하여 상고하겠습니다. 고넬료 가족이 은혜받은 내용은 행 1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넬료’는 이방 사람이었는데,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문이 예루살렘에 퍼지자 예루살렘에 있는 할례자들(할례받은 유대인들만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 자들임)이 예루살렘에 온 베드로를 보고 힐란하였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 사도를 초청하였을 때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가서 설교하였기 때문입니다. 할례자들은 “구원도 받지 못할 이방인들에게 왜 사도 베드로가 그의 집에까지 가서 증언을 하였느냐고 힐란하니, 베드로는 하나님의 인도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해명한 것입니다.
1.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러 갈 때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갔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자기 집 ‘욥바’에서 기도하는 중 비몽사몽 간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보자기 같은 그릇에 부정한 생물들이 담겨져 내려 오더니 베드로에게 “그것을 잡아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에 베드로는 “속되고 깨끗지 못한 것은 먹은 일이 없다”(레 11:1~8) 한즉, “하나님께서 깨끗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느냐”는 말씀이 세 번 들린 후에 환상이 없어졌는데, 마침 가이사랴에서 고넬료가 보낸 하인 세 사람이 와서 자기를 초청하므로 하나님의 인도이심을 믿고 고넬료의 집에 온즉, 고넬료는 “베드로를 청하여 말씀을 들으라”는 천사의 계시를 받고 베드로를 모셔오게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은혜를 받게 하실 때 받을 자와 전할 자에게 지시를 하신 것입니다. 오늘 저희들은 이런 지시를 직접적인 계시를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복음 사역자들에게 증거의 사명감을 주시고, 또 은혜받을 성도들에게는 성경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셔서 고넬료처럼 은혜를 받게 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① 계시가 성경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이고,
② 베드로가 증거한 내용들이 성경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주실 때 여러 방도를 쓰시고(히 1:1), 또 비유나 상징으로도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보이신 부정한 생물들은 이방인을 비유하는 것이고, 또 “그것을 잡아 먹으라”는 뜻은 “그들과 교제하고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로 하여금 속된 것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또 하나님은 계시와 함께 만남의 기회를 주셔서 깨우치는 섭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계시를 받자 베드로를 초청한 사람들이 당도하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회를 섭리적으로 만드시는 분이심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2. 구원얻을 말씀을 증언할 때 성령님이 임하신 것입니다(14~15). 14~15절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이 많습니다.
1) “구원 얻을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원 얻을 말씀, 구원을 주시는 말씀 즉, 말씀으로 구원의 도리를 알려 주신 것이요, 말씀의 계시가 없으면 아무도 구원의 도리를 알 수 없으니까 구원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2) 말씀 증거를 시작할 때에 성령님이 저희에게 임하셨습니다.
① 여기에서 성령님은 말씀과 동반하시는 것을 알 수 있고,
② 시작부터 성령님이 강림하신 것은 그만큼 말씀을 사모하였기 때문이고,
③ 성령님이 강림하신 형편은 심령 속에 내주하신 사역이 아닌 오순절 때와 같은 가견적이고 풍성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령으로 세례 주리라” 하신 말씀이 생각 났다고 하였고, 또 “사도들이 믿을 때 받은 성령님과 같은 선물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령의 세례”란 뜻은 오순절 때 역사하신 형편을 이름한 것입니다.
④ 유대인 성도들에게와 사도들에게 주신 성령의 선물과 꼭같은 것을 이방인 성도들에게도 주셨으므로 오순절 이후부터는 이스라엘 선민이나 이방이나 신령한 은혜를 주심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3. 베드로는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막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하나님의 전적 주권에 달렸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절대자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감히 “하나님의 역사를 막을 수 없다” 하였을 때 다른 사람들은 듣고 잠잠하였고,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을 차별하던 마음을 일시에 무너뜨린 것입니다. 유대인이 이방인을 무시한 전통은 참으로 없애기 어려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받은 성도들은 이방인들이 자기와 같은 은혜를 받고, 같은 존귀에 임하는 것을 크게 감사하여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는 “생명얻는 회개”란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의 ‘생명’의 뜻은 ‘의나 구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력 있고 능력 있는 신앙 생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고, 회개의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구원을 얻게 하는 말씀을 사랑하는 중에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있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상고한 것입니다.
제28과 잘되는 교회 (행 11:18~2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잘되는 교회”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제가 어떤 개척 교회 설립 예배와 또 임직식을 하는 예식에서 축사의 부탁을 받고“잘되는 교회가 되라”는 축사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개척 교회의 시작 동기나 임직식이 다 교회가 잘되기 위함인데, ‘잘된다’는 뜻은 무엇이며, 잘되는 방법이 무엇이냐에 대하여 설명한 일이 있었습니다.
1.‘잘된다’는 뜻은,
1) 구원받을 백성이 많이 모이고,
2) 그들이 다 예수님을 닮고,
3) 그들이 다 예수님의 뜻대로 살면서 사명 생활을 잘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가 잘되는 것을 사람이 많고, 헌금이 많은 것으로만 평가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닮아 사는 성도가 얼마나 많으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2. 요즈음 교회가 잘되는 방법에 대하여서도 오해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어떤 물리적 방법이 유익이 없다는 뜻이 아니요,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기도를 중요시하지 않고 물리적 방법만을 앞세워 교회를 발전시키려는 것은 원리에 어긋나는 일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교회 이름이 좋아야 교회가 잘되는 줄로 안다든지, 간판이 커야 한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어떤 곳에는 집집마다 십자가가 있고, 교회의 이름도 ‘사랑 교회’, ‘초대 교회’ ‘예닮 교회’ 등 종류가 많지만, 하나님이 십자가나 이름을 보시고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출 33:19에 보시면, “하나님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고 하신 것을 보면 은혜받을 자 자신에게 은혜받을 만한 소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현실 교회 성도들 중에는 교회를 정할 때 우선 “가까운 교회가 좋다”고 합니다. 이것은 기도나 봉사의 편의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지만, 이 경우에 반드시 교회의 기능이 성경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또 많은 교인들이 건물이나 시설을 보고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만한 건물과 시설이 있기까지는 상당한 연륜이 있었겠지만, 건물과 시설은 신령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권위를 인정해서는 안될 것이요, 또 어떤 교인은 자동차로 편안하게 모셔 오고 모셔 가며, 또 음식 대접가지 받는 맛에 나가는 경우도 있으니, 성도가 예수님을 섬길 사명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이 성도를 섬기며 편의를 제공해 주셔서 성도가 따라가 주어야 함이 옳은 것인지를 판단하셔야 할 것입니다. 편의 제공에 의하여 따라가는 신앙이 과연 좁고 험한 길로 가는 것이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교회를 선택하는 성도는 교회의 거리나 시설이나 건물이나 편의 제공을 보기 전에 먼저 진리의 노선을 보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옛날에는 바리새인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 안에도 예수님의 사랑 정신에서 위배되는 일을 하는 성도와 단체가 도사리고 있음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족한 사람에 대하여 너그럽지 못하고, 어려운 성도를 형제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 세계나 단체는 속히 무너져야 할 것입니다.
4. 본문 말씀은 어떤 교훈을 주신 것입니까?
1) 18절 말씀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있는 동료자들에게 가이사랴에서 고넬료의 가족이 은혜받은 사실을 보고하였을 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생명얻는 회개를 주셨다”고 감탄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듣고 잠잠하였으며, 이방인에게까지 생명얻는 회개를 주신 일에 대하여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말씀 잘 드는 것과 잠잠한 것과 다른 사람들이 은혜받은 일을 축하하는 태도는 교회를 잘되게 하는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말씀이 풍성하고, 말은 잠잠하여야 하며, 생명 얻는 회개가 있어야 하고, 또 이방인(다른 사람들)이 은혜받는 것을 크게 감탄하며 축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자기 교회 영웅주의에 얽매여서 다른 교회를 헐뜯거나 시기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또 생명 얻는 회개를 감행하지 못하는 자신은 교회에 상당한 거침돌이 될 수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19~26절은 안디옥 교회의 부흥된 사실을 기록한 말씀인데, 예루살렘에서 스데반(순교)의 일로 흩어진 무리들이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파하였을 때 안디옥에 수다한 사람들이 모여 교회가 이룩되었고, 이때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나바 사도를 파송하였으며, 또 바나바는 사울을 데려다가 동사 목회와 교육을 1년 반을 실시하였을 때 큰 무리가 모이고 또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을 주게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3) 이 말씀에서 안디옥 교회가 잘된 이유는,
①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있는 사람들이 기본 교인이 된 것이니 다음에 온 사람들은 먼저 믿은 자를 본받을 것입니다.
② 바나바와 사울(바울) 두 사역자가 훌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성령 충만한 권위자였고, 영적 수준도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③ 그리고 안디옥 교회는 가르침과 배우는 일을 열심히 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최초의 선교 모범 교회가 된 것입니다. 교회가 잘 되려면 예수님 닮은 좋은 교인과 하나님의 뜻대로 사역하는 종들이 있고 항상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열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29과 여러 가지 은혜 (행 20:7~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여러 가지 은혜”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유두고’가 창문턱에서 졸다가 떨어져 죽었으나, 바울이 그를 살렸다는 내용은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살피면 여러 가지 좋은 은혜가 나타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이 말씀은 전도자 바울 사도 일행이 3차 전도 귀로시에 마게도냐 방면에서 소아시아 지방으로 건너와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에 ‘드로아’라는 항구에 머물러 7일을 유하시면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 때 바울 사도는 오순절 절기 이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셔야 하는 전도 일정에 쫓겨 바쁜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안식 후 첫날인 주일이 지나면 그곳을 떠나셔야 하기 때문에 주일날 밤을 새면서 말씀을 강론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윗 다락까지 불을 많이 켰고, 3층루에도 사람이 있었으니까요. 그 때에 ,유두고‘라는 청년이 3층루 창에 걸터 앉아서 설교를 듣다가 졸았고, 또 바울 사도는 말씀 강론을 길게 하였기 때문에 유두고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3층루에서 떨어져 죽으므로 은혜 있는 곳에 시험이 따른 것입니다. 은혜의 집회 중에 사람이 죽었으니 퍽 민망한 일이요, 비난하는 자들에게 비난거리를 주게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내려가서 그 시체를 끌어 앉고 “잠잠하라” 하였으니, 이것은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조용하라고 한 것입니다. 과연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유두고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을 받은 바울은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다시 집회소로 오셔서 말씀 증언과 떡을 떼는 성찬 예식과 다른 이야기로 밤을 새운 다음 그 곳을 떠나셨고, 다른 성도들은 살아난 유두고를 보면서 많은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2. 그러면 이상의 말씀에서 주신 여러 가지 은혜란 무엇입니까?
1) 성수 주일의 은혜입니다. 7절의 “안식 후 첫날”이 바로 주님의 날(계 1:10)이었습니다. 성도는 주님의 날에 주님께 영광돌리는 일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날 주님께 영광을 돌리시려면 세속의 일들을 멈추시고 믿음에 관한 일과 주님이 원하시는 주님의 일만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바울 사도 일행은 ‘드로아’의 성도들과 함께 예배와 말씀 공부와 성찬 예식을 가지므로 주일을 지키셨습니다. 이것이 곧 성수 주일의 은혜입니다.
2) 말씀 풍성의 은혜입니다.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을 때”(행 19:20) 교회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날 바울은 밤새도록 성경을 강론하였고, 성도들은 밤을 새며 말씀을 배웠으니 얼마나 좋은 은혜입니까? 기도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이야기를 드리는 것이고, 말씀 듣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모든 사정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말씀 듣는 것이 기도의 비중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3) 사랑의 은혜입니다. 성도가 모여 “떡을 뗀다”는 것은 성찬 예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성찬 예식은 믿음과 사랑을 아울러 성취하는 예식이 되는 것입니다. 유두고가 살아난 다음에도 날이 세기까지 이야기 한 것을 보면 사랑의 친교가 충만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은혜입니다. 집회 중에 사람이 죽었으니 얼마나 큰 어려움을 당한 것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해결이 된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사는 기적은 하나님이 초대 교회 당시에 복음의 능력을 입증하여 보이시기 위하여 주셨습니다(히 2:3~4). 하나님은 “지금도 문제를 해결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시 50:15, 마 11:28).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실 때 하나님의 뜻과 표준으로 해결해 주시는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 그 자체보다도 문제를 가진 성도의 신앙을 더 귀하게 보신다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5) 유두고가 살아난 일로 인하여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으니, 이 위로의 은혜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고후 1:3).
6) 유두고가 안 죽었던 것보다 죽었다가 다시 산 것이 복음의 명예를 더 유익하게 한 일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문제가 있을 때 문제가 잘 해결되면 더 유익해지는 경우가 많음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화위복의 은혜를 주시는 분이심을 꼭 믿으셔서(삼하 16:11~12)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반드시 소망을 갖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여섯 가지 은혜가 저희들에게도 있기를 사모하셔야 하겠습니다. 성수 주일, 말씀, 사랑, 해결, 위로, 더 유익하여지는 일들입니다.
제30과 성도의 특별한 신분 (고전 1: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도의 특별한 신분”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 제목을 선택한 근거는 2절 말씀에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은 고린도 전서 첫 부분의 말씀이기 때문에 고린도 전서 서론에 해당합니다. 고린도 전서의 개론에 대하여는 제가 집필한 <기독교 신앙백과>의 ‘고린도 전서’란 제목을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1. 본문 말씀은 3 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 말씀은 “편지를 보낸 자의 소개”이고, 2절은 “편지를 받는 대상의 설명”이고, 3절은 “축복의 말씀”입니다.
1) 편지를 보내신 분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소스데네는 바울의 동역자로, 바울이 1년 반 동안 고린도에 유하면서 가르치실 때 믿음에 귀도하였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고린도 지역의 회당장으로 있으면서 바울에게 집회소를 허용한 관계로 유대인들로부터 매를 맞은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행 18:17).
2) 그렇다면 이 편지를 두 사람이 같이 쓴 것인가 할 때, 바울 사도가 쓰시고 소스데네는 동참자였으니, 고전 16:21에서 바울 사도가 친필로 마지막 결론을 지은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그리고 이 편지를 보낸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이고, 소스데네는 바울의 믿음의 형제였습니다. 소스데네는 고린도에서 회당장을 하던 사람인데, 바울이 이 서신을 에베소에서 보낼 때 동참한 것을 보면 그가 바울의 선교를 돕기 위하여 따라나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편지를 받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편지를 고린도 교회(성도들)에 보내시면서,
1) “각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라”이라 하시므로 이 편지가 각처의 모든 성도들에게도 보내어진 것임을 나타내셨습니다. 저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 편지의 수신자에 해당이 됩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순결하여졌으므로 ‘성도’라고 부르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성도의 특별한 신분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3. 서신 서론의 격식에 따라 축복을 할 때 그 축복의 내용은 은혜와 평강이요, 이 복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시는 것을 사도의 축복을 통하여 전달해 주시게 됨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4. 그러면 성도의 특별한 신분이란 어떤 것입니까?
1)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입니다. 왕후로 간택이 되었거나 대통령으로 피택이 되어도 퍽 행복할 것입니다만, 성도는 하나님이 영광받을 대상으로 선택하신 것이니까 그보다 큰 행복을 느끼셔야 할 것입니다(요 15:16). 하나님의 특별한 영광 목적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자입니다.
2) 거듭나는 은혜를 주셔서 믿음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이 거듭나는 은혜는 영원한 영적 새생명을 주시는 은혜이고, 믿음은 하나님과의 신뢰적 관계를 맺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없으면 영원한 생명이 없고,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지 못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이 귀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구속의 은총을 힘입은 대상입니다. 2000년 전 십자가가 모든 인류의 죄를 다 대속하신 것이 아니요, 택한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심이므로 성도는 죄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4) 정죄의 심판을 면제받은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축복입니다. 성도 아닌 사람은 마지막 때에 다 정죄의 심판을 받고 지옥의 자리를 굳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미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심판을 받지 않으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이 말씀은 요5:24과 롬3:24에 나타나 있습니다. 정죄의 심판을 받지 않는 은혜입니다.
5)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주셨습니다. 요 1:12에서 “자녀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되게 하신 것입니다. ‘자녀의 권세’란 청탁과 영광 상속의 권세가 있고 또 유대 관계 불변의 특혜도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아버지로서의 자식에 대한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실 것입니다. 함께 하시고 보호하시며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일은 물론 영광의 대상으로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6) 예수님의 인격을 닮는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이 곧 거룩하여지는 것이요, 성도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거룩하지 못하면 불신자와 같고, 구별이 없으므로 성도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7) 성도는 영원한 천국의 시민입니다. 이처럼 성도의 특별한 신분은 선택된 자, 거듭남을 받은 자, 구속함을 받은 자, 정죄 심판을 면한 자, 자녀의 특권을 받은 자, 예수님을 닮은 자, 영생할 자이니 특별한 신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성도를 자기의 소유로 삼으시고(출 19:5) 싫어버리지 않으시며(사 41:9) 항상 눈동자처럼 지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신 17:8, 32:10). 성도는 존귀한 신분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사 49:5).
제31과 십자가의 도 (고전 1:18) 목록으로
이 말씀은 많이 증언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부분적으로 구상해 보는 목적으로 다시 증언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말씀의 뜻은 ‘십자가의 도’란 하나님의 구원 방도에 대하여 멸망받을 자들은 그것을 미련하게 혹은 허황한 것으로 생각하여 외면하지만, 구원받게 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십자가의 도를 구원의 방도로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은혜까지 받게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다섯 가지로 구분이 됩니다. ① 십자가의 도, ② 멸망하는 자들, ③ 미련하게 보인다는 뜻, ④ 구원을 얻는 우리, 그리고 ⑤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뜻으로 나누어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1. 십자가의 도란 무엇입니까?
1)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선택된 자)을 구원하실 구원의 방도요, 구원의 도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라 죄인들을 거저 용서하실 수 없으므로(살후 1:5~6) 죄책을 대신 받게 하실 방도로서 죄없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함으로써 속죄의 제물을 삼으시고, 그 사실을 믿게 하여(요 3:16) 구원해 주시는 구원의 도리(방도)인 것입니다.
2) 따라서 이 방법은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요, 또 독생자는 한 분의 예수님을 의미하기 때문에 유일한 방법입니다.
3) 흔히 십자가라는 ‘열십자 형틀’이 큰 의미를 갖는 것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지만 문제는 하나님이 세우신 중보자가 택한 백성들의 죄책을 대신 받으셨다는데 십자가의 큰 뜻이 있는 것입니다.
2. 멸망하는 자들은,
1) 구원받지 못할 자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죄사함 받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야할 자들입니다.
2) 이들이 멸망을 받게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구원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선택하여 주심과 거듭나게 하심과 진리의 말씀과 믿음을 주시므로 되는 것이요, 멸망받는 자들은 선택에서 제외되므로 믿음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구원 못받는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타락하므로 멸망할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반대를 유기(遺棄), 곧 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선택과 유기를 임의로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으로 시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피조물은 아무런 불평을 할 수 없습니다(롬 9:13, 19~23).
3. 미련하게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1) 이것은 믿음을 갖지 못하는 비택자들이 십자가 구원의 도리로 전도를 받았을 때 인간의 생각으로 그것을 허황하게 여겨 외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보다 나은 능력의 대상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생각과 판단을 포기하지 못하고 자기의 어리석은 지혜로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를 비판하려고 하니까 더욱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2) 십자가의 도리는 하나님의 신령한 진리이고 신령한 구원의 방도인데, 거듭나지 못하였으니까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있으면 말씀을 통해서라도 창조자를 기억할 수 있지만, 지혜가 없으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를 대속하시고 영생을 주신다는 사실에 대하여도 미련한 말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4. 구원을 얻는 우리란 말씀입니다.
1) 구원얻는 우리는 선민(택한 백성)을 의미하지요. 십자가의 도를 믿고 있는 모든 성도들입니다.
2) 그런데 이 말씀에서 “구원을 얻는”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구원을 사람이 만들어 갖거나 인간의 공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받는다는 뜻이지요. 하나님은 인류 전부를 구원하시려 한 것이 아니고 일부분만, 그것도 소수의 생명들만 구원하실 것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찾는 이가 적다고 하신 것입니다(마 7:14). 저희들이 구원얻는 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무조건 선택에 의한 것임을 믿으시고(롬 9:11) 큰 감사와 행복을 느끼셔야 할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구원을 얻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데, 어떤 능력이 되는가를 알아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1) 죄사함의 확신을 갖는 믿음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는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셨고, 우리는 심판을 면했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크게 사랑하시지 않았으면 독생자의 희생을 주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3) 십자가 정신에 따라 생활할 수 있는 실천의 능력을 힘입는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공의가 포함되어 있고, 또 십자가는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과 희생과 인내와 봉사의 결집인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구원의 방도로 믿는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겸손, 순종, 인내, 희생, 봉사를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중심의 생활이 무엇인지를 꼭 이해하시고 실천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32과 결실의 삼 요소 (고전 3:6~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결시의 삼 요소”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여기의 ‘결실’이란 성도의 믿음이 자라고, 교회가 부흥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이 많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농사 짓는 사람이 열매를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성도의 신앙 생활은 자신의 신앙 성장과 교회의 부흥과 하나님께 대한 영광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6절에서 성도의 신앙 생활을 농사 짓는 일로 비유하시는 중에 결실의 3 요소는 “심는 것과 물 주는 것과 자라게 하시는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심는 것과 물 주는 일은 복음 사역자들이 하는 것이고, 자라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고, 하나님은 자라게 하셔서 고린도 교회가 부흥되었다는 것입니다. 행 18장에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에 가셔서 전도한 사실이 기록되었고, 행 18:24~19:1에서는 아볼로가 고린도에서 가르친 사실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전도 사역을, 아볼로는 교육 사역을 감당한 것이고, 결국 자라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자라게 하실 때에 잘 심고 잘 가꾸는 정성에 따라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겸손한 뜻으로 “심는 자나 물 주는 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사역자들도 심고 물을 주지만 아무 것도 아닌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심는 자나 물 주는 자는 하나님의 사역자로 일하고 자기의 일한대로 상을 받을 뿐이요, 자라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처럼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9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 하시므로 복음 사역자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자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라” 하시므로 일반 성도는 농사 결실의 토양 역할을 해야 하며, 성도 자신이 하나님의 권속(집;가족)됨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받아야 할 교훈이 무엇입니까?
1. 믿음의 양육을 농사짓듯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농사는 결코 속임수나 수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의 성실한 노력과 하나님의 자연 혜택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와 같이 성도의 신앙 생활도 수단에 의존하지 말고 진실한 생활과 노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므로 성취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교회의 부흥 요소는 반드시 교역자의 분업(分業)과 성도의 토양 역할에 있음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1) 교역자의 분업이란 받은 은사에 따라 일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은사를 받았으면 말씀 사역으로, 기도의 은사를 받았으면 기도의 은사로, 행정이나 권위의 은사를 받았으면 그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은사는 한 사람이 다 받을 수도 없는 것이고(고전 12:30) 성령님께서 그 뜻대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고전 12:11) 사역자는 받은대로 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 교회가 한 목회자에게 모든 것을 다하라고 하면 안되고, 마치 바울이 심고 아볼로가 물 주는 것처럼 다양한 은사를 나타내도록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사역자들이 농사의 기술자라면 성도는 하나님의 밭이니까 토양 역할을 잘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밭이 좋아야 곡식이 잘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좋은 밭이란 교회의 좋은 전통을 의미할 수도 있고, 그 교회의 기본 성도들의 좋은 자질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성도 개인도 그 신앙 인격이 변화된 새사람이어야 하지만 그 교회의 생활을 지도해 나가는 기본 교인들의 신앙이 좋아야 하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스데반이 순교할 때 그 사실을 목격하고 사마리아와 안디옥으로 나가서 전도하고 교회의 주역이 된 것처럼, 기본 성도의 토양이 좋은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성도는 농사꾼의 인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장사꾼과 농사꾼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장사꾼은 사람을 설득하는 업이지만, 농사꾼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하는 직이기 때문에 순리대로 사는 생활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속이는 농사는 있을 수가 없고, 사람을 속인 것이 농사에 도움이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땅과 씨를 주시고 물과 햇빛과 결실기를 주시므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농사는 오직 하나님과 사람의 합작 사업입니다. 그래서 농사꾼의 마음에는 자연미가 있고 순수함이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각각 자기의 일한대로 상을 주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대가와 상을 주시기 때문에 성도는 일한대로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상을 안받고 일을 하면 사람의 공로를 내세울 수 있지만, 자기의 일한대로 상을 받기 때문에 공로를 내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를 심고 물을 주어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믿음의 좋은 결실을 맺어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성도의 마음이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착하고 진실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다음에는 좋은 씨(말씀)를 간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농사짓는 농부처럼 근면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은사의 소질을 따라 자기의 사명을 다 하셔야 하겠습니다.
제33과 세 가지 성전 (고전 3:16~17, 6:19~2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세 가지 성전”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첫째는 구약 시대의 성전이요, 다음에는 신약 시대의 예배당이며, 또 하나는 성도의 몸을 성전이라고 말씀하신 일에 대하여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1. 구약의 성전에 대하여 살피겠습니다. ‘성전’이란 명칭은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웅장한 성전을 지은 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이전에는 ‘제단’(단)이란 용어를 사용하였고(창 8:10, 12:8, 22:9, 35:7), 모세 때에 율법으로 성막 제도를 말씀하여 성막을 짓고, 이것을 ‘성막’, ‘장막’, 또는 ‘여호와의 장막’이라고 명칭하다가(출 40:35, 레 17:4) 솔로몬 성전을 짓게 된 것입니다(왕상 9:1). 그후 바벨론 침략으로 그 성전이 훼파되었다가 또 70년 후에 스룹바벨 총독이 훼파된 성전을 재건하였고, 그 재건된 성전이 예수님 시대까지 보수되고 보존되었으며 주후 70년에 로마의 침략으로 다 헐리게 되었습니다(마 24:2). 문제는 이 구약 성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전의 의미는 대체적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1) 계시적 의미입니다. 요 2:21에서 “성전된 자기 육체”란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이 곧 계시적 의미를 나타낸 말씀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꼭 하나님의 지시대로 지어진 것이고(출 36:1, 39:42, 43). 그 성전과 제사 제도가 예수님과 그의 속죄 사역을 계시한 것입니다.
2) 제사 자체로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경건의 의미가 있었고,
3) 구약 성전의 마당이 기도의 처소로 사용이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이 예수님을 완전히 계시한 것이고, 또 예수님의 십자가가 제사의 완성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구약 성전의 목적은 끝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의 성전을 기도와 교육의 처소로만 쓰셨고(눅 2:46,마 21:13), 주후 70년에 로마 군사들에 의하여 훼파되고 끝난 것입니다.
2. 신약 시대의 예배당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큰 예배당을 지었다”는 말씀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 당시는 선교의 초기였으므로 큰 예배당을 지을 시기가 못되었을 것이며, 또 성전이란 구약적 개념을 떠나서 모임의 장소를 의미하는 것 뿐이었고, 따라서 “예배할 처소는 그리심 산이나 예루살렘 같은 곳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하신 것입니다(요 4:20~24). “신약의 성전” 하면 예배당을 떠 올릴 수 있지만 이것이 구약의 성전처럼 거룩하게 구별되거나 계시적 의미를 갖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의 예배당은 하나님의 것으로 드려 구별되게 사용하여도 좋고, 구별되지 않은 사람의 집이나 또는 자연의 어떤 장소에서 예배를 드린다 하여도 예배와 신앙적 교육과 친교의 목적만 잘 행사한다면 신앙 생활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의 성전은 예배의 처소를 중요시하는 것 뿐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강조하는 이유는 예배당을 구약의 성전처럼 신성시하거나 건물을 은혜의 방편으로 여기거나 또는 예배당 건물 가진 것이 신앙 생활의 상징인양 생각해서는 안될 것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을 지나치게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3. 또 한 가지 성전은 성도의 육체가 성령님이 거주하시는 성전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이 바로 그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진리의 씨앗은 마음에 심기고(약 1:21), 마음은 육체와 연합되어 있으니까 마음에 계시며 역사하시는 성령님도 역시 육체 안에 거하심이 되는 것입니다(요 3:3,엡 3:17). 본문 3:16~17에서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계심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이 계신 몸을 더럽히면(즉, 육체를 죄의 도구로 쓰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실 것이라. 따라서 하나님 계신 곳이 거룩한 만큼 성도의 인격과 육체도 거룩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떤 손님이 와도 집 청소를 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자신을 순결하게 지켜야 함은 더 말씀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또 중요한 것은 성도 자신의 영혼과 육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인 줄로 알아야 하고, 몸과 영혼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창조적 견지에서 허락해 주셨고, 또 구속적인 면에서도 마귀에게 사로 잡힌 것을 십자가의 은혜로 속량하여 건져내 주심으로써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되돌려 받은 자신과 자신의 몸이기 때문에 “몸으로(몸을 지배하는 인격으로) 영광을 돌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이 세 가지 성전의 의미를 잘 깨닫는 지식을 가지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롬 12:1, 14:8, 빌 1:20). 구약의 성전은 계시적 의미로 받고, 신약의 예배당은 장소 또는 물질적 의미로 여기며, 몸은 거룩한 도구로만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34과 신뢰와 충성과 판단 (고전 4:1~5)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세 대지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1절은 “복음 사역자들에 대한 신뢰”를 구하는 말씀이요, 2절은 “사역자들에게 충성”을 요구하시는 말씀이며, 3~5절은 “주님만 판단하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신뢰와 충성과 판단”이라고 정한 것입니다.
1. 바울 사도는 자신과 자신의 일행을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겨 달라”고 하셨습니다.
1) 바울 사도가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동기는 두 가지입니다.
① 고린도 교회 안에 네 가지 종류의 계파가 생겨서 바울을 그리스도의 참된 일꾼으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이방 전도의 그릇으로 불러 쓰신 자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쓰시는 일꾼”이란 점을 믿어 달라고 하신 것이고,
② 또 한 가지는 복음 사역자를 하나님의 쓰시는 사역자로 믿지 않으면 성도가 하나님의 사역자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바울 사도 일행이 증거하는 복음은 하나님이 나타내 주신 비밀로서, ① 이 복음이 비밀이 되었던 것은 구약 시대에 예언만 하시고 감취어 있던 것이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고,
② 비밀 자체는 복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독생자의 구속 사업을 실현시켜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에서 성도는 복음 사역자를 하나님의 사자로 믿고, 그의 증거하는 도리를 잘 받아야 할 것입니다.
2. 맡은 자들(즉, 복음의 증인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맡은 자들은 마땅히 하나님께 충성하셔야 하는데, 하나님의 비밀인 복음을 맡았으니까 무엇보다도 복음 진리에 대하여 충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비밀의 복음은 성경입니다. 따라서 충성자들은,
1) 진리 파수에 충성하여야 합니다. 성경을 보존하고, 성경의 권위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번역상으로 왜곡시키거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는 증거”라는 식으로 권위를 훼손하는 역사가 항상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명자는 성경 내용의 보존과 권위의 손상을 막는 일에 충성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해석에 충성하여야 합니다. 성경 해석을 하나님이 나타내신 뜻에 따라 모순되지 않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를 인하여 신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학이 바르지 못하거나 해석이 잘못되면 이단에 빠지기 쉽습니다.
3) 진리 전파에 충성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마 4:4에 보시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하셨고, 계 1:2에서 “다 증거하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증언자가 “성경을 다 증거하는데 주력하라”는 뜻입니다. 증거의 사명을 가진 사역자들이 성경 66권을 다 연구하고 증언하려고 한다면 굉장히 바빠야 할 것입니다.
4) 진리 시행에 충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믿을 것과 시행할 것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보다 실천을 중요시하는 시대로 바꾸어져야 할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또 충성할 것은 자신의 받은 은사와 직책과 시간에 충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도마다 받은 은사가 있습니다. 저는 말씀 해설과 요약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그 은사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가정 책임, 교회 책임, 사회 책임이 있으며, 거기에도 충성하여야 할 것이요, 특히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시간에 대하여 충실하게 활용하는 충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판단에 관한 말씀입니다. 판단이란 “좋다 나쁘다, 잘한다 못한다” 하는 것인데,
1)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 사도를 어떻게 판단하든지 그것은 작은 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의 판단은 정확하지도 않고, 인간의 판단이 큰 유익을 주거나 큰 손해를 줄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하고, 하나님이 인정하여 은혜를 주시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2) 바울 자신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더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것이 더 명확하기 때문에 자기를 판단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3) 인간은 스스로 “자책할 것이 없다” 하여도 그것이 결백한 것도 아니며, 그것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의로워질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통하여 예수님의 의를 힘입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4) 따라서 판단하실 분은 주님 뿐이요,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주님이 오셔서 공의롭게 판단하실 때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마음에 감추인 죄악도 다 드러날 것이고, 사람마다 마음에 가졌던 뜻도 드러날 것이며, 이런 것들을 다 종합하여 칭찬과 상급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복음 사역자에 대한 신뢰를 가지시고, 복음 사역자들의 충성을 위하여 기도하시며, 주님의 최종적인 심판만을 기다리면서 정의를 지키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35과 우상의 제물과 관련된 교훈들 (고전8:1~13) 목록으로
본문에는 “우상 제물과 관련된 교훈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우상의 제물과 관련된 교훈은,
1)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하는데,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다”는 지식을 갖는 것입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들어 놓고 섬기는 것일 뿐 그것에 어떤 신이 붙어 있거나 권위가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저는 이 신앙을 어릴 때부터 갖고 있었습니다. 음력 정월이나 2월 경에 성황(城隍)단 사거리에 나가면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가 여기 저기 버려져 있었고, 그 허수아비 속에 동전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 허수아비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에서 그 돈을 다 빼어낸 것입니다(4).
2) 따라서 그 우상 앞에 제물로 놓여진 음식도 그와 꼭같이 취급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물건 앞에 놓은 음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음식이 정결한 것이면 먹어도 된다는 지식을 가진 것입니다.
3) 이런 지식을 가질 때 절대자(絶對者)는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에 모든 잡신들이 어떤 우상과 관련되어 있다 하더라도 성도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기 때문에 모든 잡신들의 역사를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지식이 있을 때 우상이나 우상의 제물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할 수 있는 것입니다(4~6).
4) 그러나 이런 지식을 다 갖지 못할 경우가 있습니다(7). 이 지식이 없는 성도이면 우상이나 우상의 제물 앞에서 약함과 거리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거리끼고 약한 마음이 있을 때는 우상의 제물을 임의로 취급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5) 그런데 믿음있는 성도가 믿음약한 성도(우상의 지식이 부족한 성도) 앞에서 자기의 신앙 표준으로 우상의 제물을 먹었을 때 약한 성도가 자기의 양심을 상하면서 그대로 끌려갔다면 결국은 약한 자들의 양심에 상처를 주게 되기 때문에 삼가는 것이 덕을 세우는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6) 여기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성도가 식물을 잘먹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못되므로 잘먹지 않았을 때도 부족이 없고(예수님도 가난하게 사신 분인즉) 잘 먹었어도 풍족함이 없은즉(가난한 자들에게 본이 되는 것이 아니므로 ; 롬 14:17), 형제의 실족을 방지하기 위하여서라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우상이 많은 고린도 지역의 성도들에게, ①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② 하나님만 절대자이시다. ③ 이 지식을 가진 자는 우상에 대하여 구애받지 않지만, 이 지식이 없으면 거리낌을 받는다. ④ 믿음이 있는 자는 믿음이 약한 자의 양심에 상처를 주지 않도록 덕을 세워야 한다. ⑤ 예를 들면, 영원히 고기를 안 먹을지언정 약한 양심에 상처를 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⑥ 이런 일들이 꼭 우상의 제물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유교 전통에 의한 길흉대사와 민속 전통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지식이 부족한 성도는 잘 깨닫고 확신한 다음에 양심에 상처받지 않는 상태에서 시행하도록 지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2. 본문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 몇 가지를 더 상고해 보면,
1) 지식은 좋은 것이나 그것으로 인하여 자기를 교만하게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우상에 대한 지식을 바로 가졌을 때 우상에 제재를 받지 않을 수 있듯이, 모든 지식은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고 하셨으니, 성도가 지식을 갖고 교만하여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지식을 가질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흔히 지식이 많은 분들은 겸손하지만 지식을 적게 가졌으면서도 교만한 경우가 있고, 또 어떤 성도들은 지식이 많은(즉, 학벌이 많은) 성직자만 존경하고 선호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것도 주의함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세상 지식을 통하여 성취하시는 것이 아니며, 믿음의 조상으로 세움받은 아브라함이나 예수님의 열 두 제자 대부분도 학벌이 없는 분들이지만, 또 그 분들의 미련한 전도 방식을 통하여 전도되게 하신 것과(고전 1:21, 27), 어린아이 같은 자들에게 복음의 비밀을 알게 하신 은혜를(마 12:25)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덕을 세우는 성도를 알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2절에 보시면,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사랑할 때 먼저 덕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분하게 하거나, 민망하게 하거나, 낙망하게 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이 사랑 실천의 원리인 것을 아셔서(요일 4:20) 사랑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에 하나님이 알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알아 준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꼭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 아는 지식을 바로 갖는 것입니다. 호 6:6에서도 “하나님은 번제보다 인애와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본문 4~7절에 보시면,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창조자 하나님, 창조자 예수님”을 알고 만물과 성도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아무쪼록 우상의 제물과 관련하여 좋은 지식, 좋은 신앙, 덕을 세우는 일과 하나님 사랑하는 일을 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36과 사랑에 대한 지식 (고전13:1~7, 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사랑에 대한 지식”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위의 본문 말씀은 아주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설명이 중요하기 보다는 “사랑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 중에서 사랑에 관한 지식이 부족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1. 위의 본문 말씀은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1~3절은 “사랑의 중요성”이고, 4~7절은 “사랑을 실천하는 자의 행동”이며, 13절은 “사랑에 대한 비교”입니다.
1) 사랑은 사람의 방언(외국어를 잘하는 것)이나 천사의 말(하나님의 계시 또는 말을 잘하는 것)이나 예언하는 능력이나(설교를 잘하는 것)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통달하는 것이나 산을 옮기는 능력(큰 역사를 이루는 힘)이나 사랑을 따른 것이 아닌 물질적 봉사나 헌신적 희생(사랑 없이 명예적 타산으로 희생하는 경우) 보다도 더 귀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의 실천은 교회 부흥보다도 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방언, 천사의 말, 지식, 비밀 통달, 예언, 산을 옮기는 능력, 구제, 희생은 모두 교회 부흥의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어도 위의 여덟 가지만 있으면 교회는 외적(양적) 부흥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부흥은 양적 단체가 아니고 믿음과 사랑의 단체이어야 하며, 사랑이 핍절한 교회를 부흥된 교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섬기는 성도들은 반드시 사랑을 앞세워 섬길 것이요, 사랑을 외면하면서 교회의 부흥을 기대하거나 양적 교회를 부흥된 교회로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2)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는 여덟 가지 말 것과 일곱 가지 할 것을 시행하여야 하는데, 말 것은, ① 투기, ② 자랑, ③ 교만, ④ 무례, ⑤ 자기 유익, ⑥ 성냄, ⑦ 악한 생각, ⑧ 불의를 기뻐하는 것이고, 할 것은, ① 오래 참음, ② 온유, ③ 진리와 함께 기뻐함, ④ 모든 것을 참고, ⑤ 믿고, ⑥ 바라고, ⑦ 견디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두 합하면 열 다섯 가지입니다. 누가 이 사랑 실천의 자신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피나는 노력을 하여야만 어느 정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승리자는 곧 신앙 생활의 승리자일 것입니다.
3) 믿음, 소망보다 사랑이 더 귀하다는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믿어서 구원받았으니 되었습니다. 또 소망은 마음으로 미래를 내다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래의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당연히 소망하여야 하고, 또 그 소망대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믿음이나 소망처럼 마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며, 또 내세의 상급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구원을 성취하였고, 소망은 성취할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다른 상급이 따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만은 내세에 상급이 따르게 됩니다. 마 25:31~40에 보시면, “주린 자, 나그네 된 자, 병든 자, 갇힌 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에게 한 것이기 때문에 오른 편에 앉게 하여 상을 주신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곧 사랑 실천에 상급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나 사람을 사랑하나 복받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동물도 사랑하면 덕을 주고, 식물도 사랑하면 덕을 주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겠습니까?
2. 사랑의 지식 몇 가지를 더 말씀드리면,
1)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성도가 아니지요.
2) 요삼3:10에서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3) 형제와 화목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못나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형제와 화목하고 제단에 나가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마5:24). 화목을 청하였는데도 상대방이 완악하여 거절할 때는 내가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형제의 잘못을 일깨우거나 공의를 시행하였는데 완악한 자가 자기에 대한 공의 시행(지적 또는 재판)에 불만을 품고 회목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경우가 있으나, 이런 일은 성도에게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공의 시행은 유익한 것이요 상대방의 양심 시행으로 알아야 하고 법적 공의 문제와 사랑의 친교를 혼돈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사랑은 모든 은사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고전 12:28~31).
5) 사랑을 성취하는 순서는 원수 상태에서(본래 인간들도 하나님과 원수 상태였습니다 ; 롬 5:10) 불화(약간 덜 좋은 상태)의 상태로, 불화의 상태에서 화목의 상태로, 화목의 상태에서 사랑의 상태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전쟁한 나라끼리도 전쟁, 휴전, 평화 조약, 교류의 단계로 발전하는 것처럼 인간의 사랑도 원수, 불화, 화목, 사랑의 단계로 실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누구 한 사람과도 불화의 관계를 갖지 않는 사랑의 승리자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37과 항상 간직하고 시행할 일 (살전 5:16~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항상 간직하고 시행할 일”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항상…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항상 찬송하라”(시 34:1, 71:6), “하나님을 항상 앙망하라”(시 25:15), “하나님을 항상 앞에 모셔라”(시 16:8), “항상 주와 함께 하며”(시 73:23), “항상 주의 일을 구하라”(시 105:4), “항상 담대하고”(고후 5:6), “항상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잠 6:21)는 말씀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함께 모아서 나타낸 말씀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란 말씀과, “항상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고(눅1 8:1), 항상 범사에 감사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실 때(엡 5:20, 살전 1:2) 하나로 묶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기억하기 좋게 하기 위하여 “믿음, 소망, 사랑, 기쁨, 기도, 감사” 이 여섯 가지에 대하여서만 상고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여섯 가지 중에 믿음과 소망과 기쁨은 항상 간직하는 것이고, 사랑과 기도와 감사는 항상 시행하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목을 “항상 간직하고 시행할 일”이라고 정하게 된 것입니다.
1. 그러면 먼저 항상 간직할 것부터 살펴 보겠습니다.
1) 항상 간직할 것 첫째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마음 속에 간직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마음 속에 모시므로 간직하는 것이고, 믿음의 근거인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겨 항상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모하는 마음을 쉬지 않고 갖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읽는 순간에 하나님을 생각하십니까? 또 평소의 모든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고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고 의지하며 두려워 하고 순종하며 사는 것이 바로 믿음을 항상 간직하는 것입니다.
2) 소망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롬 15:13). 또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생명의 하나님, 창조의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경우에서라도 소망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란 뜻입니다. 이것을 아는 성도는 항상 어떤 경우에서라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어간에 기성 교회에서 사임을 하고, 교인이 없는 상태에서 목회를 중단한 휴식의 기간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이 목회자들에게 충격과 부정적 사고를 주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 마음에 소망만 주셨습니다. 우선 휴식을 하니까 건강에 좋고, 자유의 시간을 가지니까 글을 쓸 수 있고, 속박이 없는 상태에서 마음껏 양심의 자유를 발휘할 수 있고, 자동차가 없어서 불편은 있지만 자신에게 차가 없는 기간은 하나님이 차량 사고를 건너 뛰게 하시는 기간이라고 믿으니까 오히려 소망이 더해지는 마음이었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임지를 떠나고 이사를 하면서 치통의 고난과 함께 체중이 4Kg이나 줄었는데, 이것 또한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 방식이 저로 하여금 항상 소망을 갖게 한 것입니다.
3) 기쁨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기쁨은 큰 소리로 웃으며 나타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요, 마음 속으로 간직하면 됩니다. 보람있게 살아야만 기쁨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보화를 발견하고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산 사람처럼 가장 귀한 것을 간직할 때 마음 속에 기쁨과 만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보람은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생활인데, “얼마나 보람있게 살면서 예수님을 모시고 사느냐”에 따라 기쁨이 더하고 덜해지는 것입니다. 겉으로 속상한 일이 있어도 그것은 일시 지나가는 것이요, 자신이 간직한 기쁨의 근거는 항상 있는 것이기 때문에 속에 있는 기쁨은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2. 항상 시행할 일에 대하여 상고하겠습니다. 항상 시행할 일들은,
1) 사랑입니다. 사랑은 계명의 강령(綱領)이고, 성도의 표식입니다(마 22:39~40, 요일 4:11,16). 그런데 “사랑은 항상 시행하여야 한다”고 하셨으니, 이 항상이란 모든 때, 모든 대상을 포괄하는 말씀입니다. 마귀와 죄를 제하고는 다 사랑의 대상입니다. 이 말씀을 읽는 순간에 혹 귀하가 사랑하지 않는 대상이 있습니까? 미워하고 경계하는 인물은 없습니까? 사랑은 모든 때(언제나)와 모든 대상을 포괄한다는 것을 아셔서 원수를 초청하여 화목을 시도하는 일에까지 발전하는 사랑의 실천자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항상 기도할 수 있을까요? 아침에 일어날 때 기도하고, 조용한 시간이 있을 때 기도하며, 차를 타고 조용히 출근할 때도 기도하고, 골방에 혼자 있을 때 또 기도하고, 주무시다가 잠이 안 오면 또 엎드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항상 기도하는 생활이며, 특별 기도를 안해도 충분할 만큼 넉넉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항상 또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에 감사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려운 일이나 환난에서도 반드시 감사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징계받는 것을 감사하세요. 그러면 더 큰 징계를 면해 주실 것입니다. 고난을 연단으로 받으면 반드시 그 고난의 연단이 큰 담력과 용기를 더하여 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고, 우리같은 불충한 종들을 싫어 버리시지 않으시고 구원해 주시니(시 41:9) 얼마나 감사합니까? 변할 수 없는 은혜는 변할 수 없는 감사를 동반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항상 믿음, 소망, 기쁨을 간직하시고 항상 사랑, 기도, 감사를 시행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38과 교회에서 알아줄 사람 (고전 16:15~2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교회에서 알아줄 사람”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있었는데, 이 세 사람을 위시하여 함께 수고하고 일하는 자들을 알아 주라고 바울 사도가 권면한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알아 주라’는 뜻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며, 또 그들을 왜 알아 주어야 하는지를 살펴 보셔야 하겠습니다.
1. 여기의 ‘알아 주라’는 뜻은 그들의 봉사와 충성을 다른 성도들이 인정하고 존경하며, 그에게 복종하고 합력하라는 뜻입니다. 추호도 시기하거나 비난하거나 비협조자가 되지 말고, 순수한 동기와 방법으로 충성하는 자들을 존경하며 협력하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순수하지 않은 상태로 어떤 명예나 사람의 칭찬을 받기 위하여 충성하는 경우가 있고, 또 성도들 중에는 다른 사람을 시기하여 헐뜯거나 경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다 성도의 할 일이 아닙니다. 성도는 반드시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충성하고 또 그렇게 충성하는 사람들을 칭찬하며 격려하고 협력하는 성도들이 되셔야만 그 교회는 희망과 발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알아 주어야 할 대상은 여러 사람들인데,
1) 우선은 ‘스데바나의 집’을 알아 주라고 하였습니다. 스데바나의 집을 알아 주어야 할 이유는, 그 집이 ‘아가야’에서의 첫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가 성읍이라면 ‘아가야’는 도(道)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바울 사도가 헬라 북쪽 마게도냐에서 데살로니가, 빌립보, 베뢰아를 거쳐 남쪽의 아덴과 고린도가 있는 지역으로 가셨을 때 그 곳에서 처음 믿음을 가진 열매란 뜻입니다.
‘스데바나의 집’이란 뜻은 그 가족이 다 예수를 믿었다는 뜻도 있고, 더 나가서는 그의 집에서 고린도 교회가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데바나의 집’은 성도를 섬기기로 작정한 집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복음 초에도 어떤 동리에 복음이 들어오면 부자집이 예수를 믿고 주일마다 그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그 집에서 식사를 하고, 모임을 계속 하다가 나중에 예배당을 짓고 큰 교회로 발전한 사례가 많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할을 고린도에서 ‘스데바나의 집’이 감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자들을 알아 주라”고 하셨습니다. “함께 일하며 수고한다”는 것은 묵묵히 협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앞장 서야만 일하고, 두 번째나 세 번째가 되면 안하려는 사람이 있고, 또 자기를 앞세워 주기를 몹시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작은 단체 기관에서도 회장되기를 바라고 운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 유치한 신앙 세계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에 끌리고 말씀에 끌려 보세요. 은을 주고 금을 주며 명예를 준다 하여도 거들떠 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생활 뿐이기 때문입니다. 순결한 성도는 명예나 칭찬에 관계없이 함께 일하고 수고만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어야 할 것입니다.
3)‘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를 알아 주라고 하셨는데,
① 이 세 사람은 고린도 교회에서 충성한 인물들로, 당시 에베소에 계셨던 바울 사도를 방문하여 큰 기쁨을 주었고,
② 또 성도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준 사람들이며,
③ 바울과 성도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여준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목회자가 다른 교회로 전임을 했을 때 전임지 교회 성도들이 특별하게 방문하는 일이 있으면 대단히 반가움을 느끼게 됩니다. 멀리 헬라 지역에서 소아시아 지역까지 바울을 방문한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뻐하셨다” 하였고, 또 이 세 사람은 성도의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었을 뿐 아니라 바울과 성도들의 마음을 시원케 해준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 중에 복음 사역자를 시원케 해주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섭섭했다” 하고 “은혜없다” 하고, “설교 시간에 졸았다” 하면서 이유없이 원망하고 배척하는 사람들도 있는 중에 복음 사역자를 시원케 해주는 성도는 특별한 은혜의 성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회개를 쉽게 하고, 화해를 잘하고, 봉사에 앞장 서면 모든 사람을 시원케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노회에서 두 장로님이 서로 혈기를 부리며 언쟁을 하여 덕을 세우지 못하였는데, 금방 화해하고 대중 앞에 사과를 하였을 때 박수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시원한 일입니까? 필자가 한남 교회‘에 있을 때 권사 이상의 직분자가 별세하면 조화를 증정하기로 하였는데, 권사님의 부군이 별세하자 조화를 증정한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 그 조화 대금을 청구하였으나 권사 당사자의 별세가 아니란 이유로 거절되자 모르고 잘못한 책임을 깨닫고 조화를 제공한 두 사람이 기쁜 마음으로 웃으면서 그 값을 변상하니 참으로 보기가 좋았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지 웃으면서 원망없이 자원하는 심정으로 충성하며, 많은 사람을 시원케 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열분, 믿음을 육성시키면서 교회를 섬기는 방법에 많은 연단을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말없이 봉사하는 성도가 되어 봅시다. 형제의 부족을 보충해 주는 성도가 됩시다. 무엇이 부족하다 하여 거부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그 부족을 보충하여 주며, 모든 사람들을 편안하게 또 시원하게 만들어 주는 냉수의 역할을 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39과 성도의 관심 (고후 5:14~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도의 관심”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권면하는 말씀 속에서 몇 가지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1.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하셨는데, 여기의 ‘강권’이란 말은 ‘끌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 마음이 끌리는 관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마음이 끌려야 합니까? 그는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시고, 자기를 대속물로 내어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실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 뿐이십니다. 그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 가셨으니 어찌 거기에 마음이 끌리지 않겠습니까? 항상 주님께 마음이 끌려야 할 것입니다.
저희 집에 어떤 아이가 개에게 마음이 끌려서 오랫동안 고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개를 자신이 집에 가지고 왔으나 가족들은 반겨 주지 않았습니다. 자기 혼자 개를 좋아 하다가 이사를 갈 때 다른 사람에게 인계해 주었습니다. 그는 가족들에게 “개를 배신하였다” 하면서 여러 날 동안 고민한 것입니다. 사람이 개의 인정을 생각하여 마음이 끌리는 것을 생각한다면 성도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항상 울어야 할 것입니다.
2. 자신이 죽은 자임을 각성하는 것입니다. 14절에 보시면,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을 위하여는 자신이 죽은 자처럼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가 인간적으로 죽어야 함에 대하여 “계명으로 심판을 받을 때 죽은 자라”(롬 7:9) 하셨고, 또 옛 사람 없애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고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뜻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죽은 자를 살려 주셨으니까 생명의 은인인 그리스도 앞에서는 자기 것이 없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입니다. 15절에 보시면, “죽었다가 다신 산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목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목적은 구속함을 받은 성도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그의 뜻대로 살게 하기 위함이라 하셨으니, 꼭 그 마음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롬 14:7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도다…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으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앞에서 바울이나 세례 요한처럼(요 1:23) 자신의 인격을 부정한 후에 자신이 주님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시고 또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그 뜻에 자기의 생애를 바쳐야 할 것입니다.
4. 모든 사람을 육체대로만 보아서는 안되고 반드시 영적으로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육체대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나사렛 사람 요셉의 아들이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따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으로, 천지의 주재자로 보았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부활하시므로 그 실상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우리 사람도 육체대로 보면 인물과 건강과 지식과 세상적 배경을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16절에서 “아무라도 육체대로 알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아는 것은 무엇입니까? 거듭난 생명, 신앙, 하나님의 아들, 영생할 자, 하늘의 상급을 받을 자, 빛을 따라 사는 자라는 면에서 성도의 자격을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부활이 있는 것은 그가 영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는 영적으로 영생할 하나님의 자녀란 사실에 큰 권위를 인정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5. 내가 과연 새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시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전 것(옛 사람)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셨는데, 성도인 저희들이 과연 새로운 피조물인가? 관념적으로만 “나는 거듭난 자다” 할 것이 아니라, 변화된 생활에 큰 관심을 가지고 변화를 나타내어야 할 것입니다. 롬 12:2에서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관심은 자기의 변화된 생활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거듭남의 확신을 갖고 새로운 지식을 많이 갖고, 가치관을 하나님의 영광 목적에 두고, 생활 목표를 그리스도의 모범에 두어서 변화된 생활을 하는데 관심을 기울이셔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성도의 관심이란 제목 아래 다섯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①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끌리고 있는가? 항상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② 나 자신을 주 앞에서 죽이고 있는가? 주님 앞에서 자신의 인격을 부정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③ 내가 온전히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있는가? ④ 모든 사람을 육체대로만 보는 것은 아닌가? ⑤ 그리고 내가 과연 변화된 새 사람인가? 하는데 관심을 두셔야 할 것입니다.
제40과 고린도 교회의 좋은 점 (고후 9:1~5) 목록으로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로 나타났습니다. 고린도 전서를 살펴 보면, 어린아이 같은 육신에 속한 자가 있었고(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 인간 중심의 파벌이 있었으며, 교역자에 대한 불신도 있었고, 형제간의 송사가 있었으며, 도덕적인 질서 문란 등 여러 문제들이 있었습니다(고전 3:1, 5, 4:21, 5:1, 6:6). 그러나 본문에서는 좋은 점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좋은 점이 성도를 섬기는 일이요, 좋은 일에 열심내는 일이며, 그 다음에는 준비를 잘하는 일입니다. 저희들도 이 세 가지 좋은 점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바울 사도가 안디옥에 계실 때 ‘아가보’란 선지자를 통하여 흉년이 들 것을 예고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 예언대로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흉년이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글라우디오’ 황제는 주후 41년부터 54년까지 재임하였고, 바울 사도는 그 어간에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을 전도 다니시면서 구제 의연금을 모금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게도냐 지역으로 가시면서 먼저 고린도 교회에 연보를 부탁하고 떠나셨습니다(고전 8:10). 1년의 세월이 지난 후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를 거두고, 고린도로 오시기 전에 1년 전에 부탁하신 연보를 미리 준비할 것을 부탁하신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에서 연보를 거둘 때 고린도 교회가 있는 아가야 지역의 교회들에게 1년 전부터 준비를 시켰다고 하니까 마게도냐 지역의 성도들이 크게 감동을 받고 거액의 연보를 하였습니다(고후 8:20).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후서를 쓰실 때 본문에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1년 전부터 구제 연보를 준비한다는 말을 듣고 마게도냐 성도들이 듣고 격동을 받아 많은 헌금을 하였는데, 이제는 고린도 교회의 헌금을 거두러 가니 그 동안 자랑한 것이 헛되지 않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준비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연보는 미리 준비하는 것이 참 연보답고, 억지로 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에서는 보통 ‘헌금’이란 용어를 씁니다. 헌금(獻金)이란 말은 물질을 드리는 목적이나 종류에 관계없이 하나님께 헌납하는 것을 뜻합니다. 헌금을 종류별로 나누면 감사 예물, 십일조, 특별 헌금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보(捐補)라는 말은 “덜어서 보충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원문의 의미를 떠나서 구제 헌금을 말할 때 사용하는 용어라고 생각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1. 우선 저희들은 고린도 교회의 봉사 정성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의 봉사란 1절 말씀의 “성도를 섬기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성도들을 도우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권면으로 유럽에 속한 나라가 중동에 속한 나라를 도운 것이요, 특히 성도를 도와준 것입니다. 갈6:10에 보시면, “기회 있는데로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가까운 이웃을 돕는 사명도 있지만(눅 10:30), 먼 곳의 성도를 우선 도와야 합니다. 성도 섬기는 일에 대하여 “다시 부탁할 필요가 없을 만큼 그들이 원하고 있는 일이라”고 하셨으니, 봉사적 사명이 대단한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2. 열심입니다. 2절에 보시면, “과연 너희의 열심히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다”고 하셨습니다. 이 열심은 구제, 봉사의 열심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열심은 기도의 열심, 성경 연구의 열심, 찬송의 열심, 봉사 전도의 열심이 다 함께 있어야 합니다.
3. 그리고 그들은 연보를 1년 전부터 준비하는 정성이 있었습니다. 헌금을 준비할 수 있는 성도이면 신앙이 많이 정착된 성도일 것입니다. 십일조를 분별하고, 새 돈을 가리고, 봉투를 예비하고, 각종 봉사 헌금을 예산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특히 준비한 헌금은 참 연보다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준비를 할 때 헌금만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성수 주일을 준비하셔야 하고, 기도의 준비가 있어야 하고, 찬송도 연습이 있어야 좋으며, 특히 세상 떠날 일을 위하여 준비하고, 예수님 만날 준비를 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세 가지 좋은 점 외에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지나갈 것 두 가지가 또 있습니다. 하나는 2절 말씀에서 “과연 너희의 열심히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구제 헌금을 1년 전부터 하고 있다는 사실로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구제 헌금을 1년 전부터 하고 있다는 자랑을 마게도냐 성도들이 들었을 때 좋은 자랑에 대하여 감동과 격동을 받고, 자기들도 힘을 쓴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도들은 좋은 자랑거리를 만들어야 하고, 그 자랑을 듣는 성도들은 자랑을 비웃기 전에 모범을 받는 미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4절 말씀에서 “우리가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 한다”는 말씀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일이 없도록 힘쓰는 정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봉사와 열심을 자랑하셨고, 그 자랑 때문에 마게도냐 성도들은 감화를 받고 힘을 낸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자랑한 고린도 교회의 헌금이 수준에 못 미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런 부끄러움을 두렵게 여기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좋은 열심, 좋은 봉사, 좋은 준비가 있고, 감동거리를 만들며, 부끄러움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41과 세 가지 큰 선물 (갈 5: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세 가지 큰 선물”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피면, 첫째는 ‘자유의 선물’이 있고, 둘째는 ‘의의 선물’이 있으며, 셋째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선물’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 사도께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신 말씀으로, “사람이 의로워지고 구원을 받은 것은 율법의 제도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성취되는 것”임을 특별히 강조하신 내용입니다. 그 당시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주의 신앙에 유혹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는 것이 구원받는 방도인 줄 알았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임을 인치는 의식일 뿐(창 17:10, 출 12:48) 그 의식이 의로워지는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할례를 구원의 방편으로 선전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2절에서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그는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자가 아니고) 할례를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라” 하셨고, 또 3절에서 “할례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할례를 받는)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이므로 할례와 함께 율법을 다 지키고 율법 안에서(율법으로 심사할 때) 의로워지기를 바랄진대 가능성이 없고 오히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질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할례 의식이나 율법 실천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거나 안 받았거나 아무런 효력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율법이 말씀한 할례를 안 받아도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 일에 아무 지장이 없음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말씀한 세 가지 큰 선물에 대하여 상고하겠습니다.
1. 자유의 선물입니다. 1절에 보시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자유가 무슨 자유입니까?
1) 율법 의식에서의 자유입니다. 예를 들면, 할례 의식, 제사 의식, 절기 의식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의식들은 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예표한 것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를 나타내시고 또 십자가를 지시고, 또 교훈하신 내용으로 성취되고 포괄되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의 의식에서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2) 율법을 지킬 의무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의무란 율법을 다 지켜야만 하는 속박적 의무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율법을 안 지켜도 된다는 뜻이 아니고, 속박적 의무에서의 자유와, 자원하는 실천으로서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종은 시간을 지키면서 자기의 할 의무를 다하지만, 주인은 자기를 위한 일이니까 성실하되 자유롭게 성실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죄책에서의 해방이고 또 양심 생활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책에서의 해방은 의의 선물에서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양심의 자유란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 아닌 다른 것의 속박을 받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혹이라도 양심 생활을 하려고 하는데 어떤 이웃이 그것을 훼방하는 경우가 있으면 무조건 탈피하셔도 하나님의 법에는 아무 잘못됨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양심의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롬 2:14).
4) 그 다음에 정치적 자유나 경제, 인권상의 자유도 이 말씀에 포함이 됩니다. 주님은 저희들에게 참으로 귀한 선물인 자유를 주셨음을 아셔서 이를 감사하고 요긴하게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의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5절에 보시면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믿음과 의와 소망이란 말씀이 나옵니다. 믿음은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심을 통하여 받은 선물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롬 3:22). 이 믿음은 십자가의 신앙을 뜻하고, 십자가의 신앙을 통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죄책에서 벗어나는 의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기 때문에 소망스럽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의 선물은 믿음으로 받고, 영생의 소망까지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하여 의의 선물을 주셨고,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 심판을 면하기 때문에 소망스럽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을 면하기 때문에 영생하는 것입니다.
3.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율법에 따른 의식(할례)이 효력이 있거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뿐이라”(6절)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주님이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를 통하여 주신 선물입니다.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으니까 믿음은 곧 구원 영생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반드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사랑이 동반되지 않는 믿음은 헛 것이요 잘못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약 2:17)고 하셨을 때 행함 그 자체는 사랑을 중심으로 하는 것입니다(마 22:39). 또 요일 3:10에서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이 받은 믿음의 선물이 과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인지를 확인하셔야 할 것입니다. 자유와 의와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반드시 자유의 의미와 의의 의미와 믿음의 본질을 확인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42과 성령으로 사는 생활 (갈 5:16~2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령으로 사는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성도가 성령으로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셨고, 성령으로 사는 생활과 육체를 따라 사는 생활을 말씀하셨으며, 또 이 두 가지 즉,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은 서로 적대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적대 관계란 성도가 성령의 소욕에 끌리면 육체의 소욕을 멀리하게 되고, 육체의 소욕에 끌리면 성령의 소욕을 멀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은혜를 받고 성령으로 사는 생활을 잘 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함에 대하여 16절에서 말씀하셨고, 17절에서는 “성령의 소욕”이란 말씀이 있고, 18절에는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란 말씀이 있으며, 21절에는 “성령의 열매”란 말씀이 있고, 25절에서는 “성령으로 산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상 네 가지 표현을 하나로 종합하면 성령님의 인도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로 사는 생활이 어떤 것입니까?
1. 하나님의 말씀에 끌리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고(요 14:17),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진리이기 때문에(요 17:17) 예수님과 진리와 성령님과 성경을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보이지 않으나 우리 눈 앞에 보이는 진리는 성경 뿐입니다. 그래서 성령에 이끌리는 것은 곧 성경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얼마나 이끌립니까?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 목회를 중단할 만큼 끌린 적이 있었습니다. 심방이나 교인들과 친교하는 시간은 말씀 연구하는 시간에 비할 때 너무도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결국 교회를 사임하고 성경 강해서와 설교문 정리 등에 몰두한 때가 있었습니다. 95,9,17). 반드시 성령으로 사는 생활은 말씀 연구에 끌리는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시 42:1, 119:103).
2. 기도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조용한 시간만 있으면 하나님을 생각하고, 의지하며, 묵상하고, 기도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이 될 때는 사람들이 오는 것보다 고독이 더 좋고, 잡다한 세상 일에 신경을 쓰기 싫어집니다. 그리고 항상 엎드리고 싶은 충동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이 아니고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이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살전 5:17).
3. 사랑에 이끌립니다. 사랑은 계명의 요약이요 목표이기 때문에 사랑하려고 애쓰는 노력이 바로 성경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은 곧 실천입니다. 사랑에 위배됨이 곧 마귀의 시험인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성령에 이끌림도 역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4. 전도에 끌립니다. 누구든지 만나는 대로 전도의 대상으로 삼고, 그에게 빛이 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전도의 대상에게는 먼저 말로 증언하기 전에 사랑으로 감화를 끼치고, 그 다음에 전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5.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육체의 소욕을 멀리할 수 있게 됩니다(16절). 음행, 호색, 우상 숭배, 술수, 원수맺는 것, 분쟁, 시기, 분내는 일, 당짓는 일, 분리하는 일, 이단, 투기, 술취함, 방탕 같은 것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됩니다. 성령의 소욕은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기 때문입니다.
6. 그 대신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데,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를 살펴 보면 믿음은 없고 전부 도덕적, 인격적 은사만 말씀하였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 아홉가지가 전부 도덕적 은사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성령에 이끌림에는 믿음을 제외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은 바로 말씀에 끌리는 것임을 전제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은 믿음과 함께 도덕적으로 탁월한 인격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7. 자기의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결코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헛된 영광, 현실적 특권, 사람이 알아 주는 것, 그런 것들 때문에 격동하거나 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 세상에 대하여 어린아이처럼 무능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격과 생활이 예수님을 닮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과연 그렇게 살 수 있는가 할 때,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으면 가능해집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되고, 성령으로 살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보화를 발견하였을 때 자기의 전 재산을 팔 수 있었던 것처럼(마 13:44), 신령한 큰 은혜를 받아야만 현실 정욕을 멀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보화를 발견하고 가까이 하며 체험하는데 있습니다. 성령으로 사는 생활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43과 선택의 진리 (엡 1:3~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선택의 진리”에 대하여 공부를 하겠습니다. 선택의 진리는 선택의 교리란 뜻으로 이해하셔도 될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의 조류 중에 두 조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칼빈주의’란 것이고, 또 하나는 ‘알미니안주의’란 것입니다. 칼빈주의는 칼빈이 주장하고 정립한 것으로, 장로 교회가 채택한 기독교 사상을 뜻하고, 알미나안주의는 알미니안이 주장한 교리적 사상입니다. 이 두 가지 신학 사상이 전래된 과정으로 보면, 15세기의 사람이요 스위스의 신학자인 칼빈 선생님은 4세기의 성자 어거스틴의 사상을 본받아 신학을 정립한 사람으로, “하나님은 인류 중에 구원의 대상을 부분적으로 선택하여 그 선택된 자들만 구원하신다”는 교리를 주장하였고, 또 15세기의 화란 사람 ‘알미니안’은 4세기의 영국 사람이요 자유주의자인 ‘펠라기우스’의 신학 사상 부분을 본받아서 “하나님은 사랑이 넓으신 분이니까 모든 인류를 다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만인구원설’을 주장하였는데, 오늘날도 장로 교회 계파에서는 칼빈주의의 선택설을 믿고, 감리교계파(알미니안주의 계파란 뜻) 중에서는 만인구원설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성경대로 “선택의 교리”를 믿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살핀다면,
1. 선택이란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구원 문제와 관련한 선택은 “하나님이 세상에 태어날 인류 중에서 구원하실 대상을 부분적으로 구별하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선택의 결과는 택한 백성만 구원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만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구속 사업도 택한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또 구원받은 자만을 위하여 영원한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2. 선택의 과정을 살펴 보시면,
1) 선택의 주체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3절에 보시면,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라고 하셨습니다.
2) 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우리를 택하사” 하셨으니, 여기에 “그리스도 안에서”란 하나님이 선택하실 때 예수님이 함께 계셨고, 또 예수님의 구속 사업(십자가)을 조건으로 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시면 하나님이 구원하실 수 없기에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서 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3) 이 선택의 시기는 창조보다 앞섭니다. 그래서 4절 말씀에서 ‘창세 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부분의 대상을 선택하여 구원하실 것을 창세 전에 미리 계획하시고, 계획하신대로 시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획하신 것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5절과 11절에 “예정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정이란 계획을 뜻하므로 창조나 선택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이 구원의 대상을 선택하실 때 “기쁘신 뜻대로 하셨다”(5절) 하셨고, 또 “모든 일을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하셨다”(11절)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자의에 따른 것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토기장이가 임의로 그릇을 만드는 것”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롬 9:21).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마땅하게 여기는 것이 성도의 도리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여 선택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여 버리셨다”(롬 9:13) 할지라도 마땅하게 여기는 신앙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모든 자의 것이 아니니까요(살후 3:2).
5) 그리고 하나님이 선택의 대상을 고르실 때 대상자의 선이나 악을 예견하여 고르신 것이 아니요, 무조건 선택하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롬9:11을 보시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셨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택함을 받은 성도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만일 선을 보고 택하신다면 한 사람도 택함받을 자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한 말씀은 요 6:16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노니” 하신 말씀과, 엡 2:1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는 말씀을(죽은 자는 선택을 못함) 참고하실 수 있고, 또 예수님이 택한 백성만을 위하여 중보하신다는 교리는 두 가지로 설명을 드릴 수 있는데, 하나는 요 17:9의 예수님의 중보 기도 내용 중에서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근거는 구약 시대의 제사장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자입니다(히 6:20, 9:7). 제물도 역시 그리스도의 희생의 모형입니다. 이때에 제물을 가지고 온 자(개인 성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제물에 안수(죄의 전가의 뜻)하고 드리는 것이며(레 3:1~2), 단체의 죄를 속하는 것도 역시 선민에 한하는 것입니다(레4:13~21). 따라서 제사장의 사역이나 제물의 효력이 이방인에게는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3. 그렇다면 선택의 대상은 얼마나 될까요? 여기에 대하여 수는 헤아릴 수 없지만 버린 자에 비할 때 적은 것이 사실입니다. “구원얻을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질문하였을 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생명의 문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하셨습니다(눅 13:22~24). 노아 홍수 때나 가나안 땅 입국 때는 아주 적은 수가 믿음을 지킨 것을 알 수 있고, 더군다나 “인자가 올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눅 18:8) 하셨으니, 말세에 믿는 자가 더 희귀할 것이 사실입니다. 택하심을 굳게 하는 믿음을 꼭 가지십시오(벧후 1:10).
제44과 교회의 목표 (엡 5:26~2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교회의 목표”란 제목으로 세 가지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는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교회의 목표요, 또 하나는 어떤 교회(분당의 ‘만나 교회’ 이송신 목사님)가 내세운 목표요, 또 하나는 필자가 제시한 교회 목표입니다. 여기에서 제시한 목표는 다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니까 잘 참고하셔야 하겠습니다.
1. 본문에서 말씀한 교회의 목표는 순결한 교회를 말씀하셨습니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또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셔서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 전체의 뜻은 신랑이 깨끗한 신부를 맞이한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가 순결(거룩, 흠없음)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순결하지 않으면 영광스러운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순결이란 죄를 멀리하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1) 본문에 보시면, 깨끗해지는 방법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곧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① 여기의 “물로 씻는다”는 뜻은 거듭나게 하는 은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딛3:5). 요 13:10에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하셨는데, 여기에 목욕이나 발 씻는 것은 다 물로 하는 것이요, 물로 씻음은 십자가의 은혜로 죄사함 받음을 뜻하고,
② 또 말씀으로 깨끗게 하심은 성경대로 행하여 순결을 유지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성경대로 살면 거룩하여지고 영광스러운 교회를 이루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시 119:9).
2. 어떤 교회 목사님은 교회의 목표를 다섯 가지로 내세우셨는데, 그것이 곧 말씀 중심의 교회, 가족 중심의 교회, 예배 중심의 교회, 교육 중심의 교회, 선교 중심의 교회라고 한 것입니다.
1) 말씀 중심으로 나가는 교회의 성도들은 성경을 열심히 배워야 하고, 열심히 실천하셔야 하며, 항상 성경에 끌려가는 생활을 하여야 할 것이요,
2) 가족 중심의 교회가 되려면 교인들끼리의 사랑이 가족적인 사랑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교역자도 가족처럼 여기지 않고 남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에 출입하는 모든 성도를 자기의 가족이나 친척처럼 여길 수 있는 사랑이 실천되어야만 가족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예배 중심의 교회는 예배를 자주 드리고, 경건하게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기도원에서 예배를 세 시간마다 한 번씩 드리는 것을 보았는데, 예배 우상에 빠지고 형식에 빠져드는 느낌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자주 드리는 것은 좋으나 예배 우상과 형식에는 빠져들지 말아야 할 것이요, 예배에는 어떤 외부적 분위기보다 예배드리는 자의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 감사드리는 마음, 회개하는 마음, 사모하는 마음, 헌신하는 마음 등으로 정성을 쏟아 합당한 믿음의 자세를 취함이 중요하고,
4) 교육 중심의 교회는 교육의 제도나 행정보다 중요한 진리를 성도 개개인이 깨닫도록 가르쳐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듣기만 하고 자기의 양식을 삼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자기가 깨닫고 그 깨달은 바를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신 6:5~7).
5) 선교 중심의 교회인데, 현재 선교 사명은 교회마다 최고에 달하였습니다. 선교 강조를 안하고 선교비를 내지 않으면 교회로 인정을 못받을 만큼 붐이 일어났습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여기의 선교 방법이 물량주의로 흐르지 말고(돈만 주면 되는식), 성도의 빛된 생활을 앞세우는 것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3. 본인은 어떤 목표를 세웠는가 하면, 성경의 권위를 높이는 교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교회, 성경 공부와 기도를 힘쓰는 교회, 사랑과 봉사를 힘쓰는 교회, 상회를 받들며 전진하는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의 권위를 높이는 성도는 성경만 믿음과 본분의 유일 법칙으로 믿으며, 인간의 방도나 체험은 중요시 하지 않습니다. 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는 최대한의 경건이 필요하고, 자기 흥분에 도취하는 태도를 지양하여야 하는 것이요, 상회를 잘 받든다는 것은 개교회 중심을 떠나서 연합 사업에 협력하고 노회나 총회의 지도를 잘 순종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상회가 공의를 상실하거나 지교회에 과중하고 번거롭게 짐을 지우는 것도 문제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상회도 각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흠없고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기 위하여 교회의 목표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았습니다.
제45과 기도의 과제들 (엡 6:18~20) 목록으로
바울 사도는 본문 말씀에서 “기도의 과제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본문 18절을 보시면, “모든 기도”란 말씀과 “간구”가 있고, “무시로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 하셨으며, 또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고, 또 기도의 대상으로서 여러 성도와 바울(복음 사역자)을 위하여 기도하되 바울을 위한 기도가 세 대목으로 나뉘어서 “말씀을 주시라”는 것과 “복음의 비밀(감추인 것)을 아는 것”과 “담대히 증언하는 능력”을 받도록 기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런 능력을 받고 담대히 증거하시다가 쇠사슬에 매이는 신세까지 되셨던 것입니다. 기도의 과제 중,
1. 모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기도란 내용별, 사건별, 대상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내용별은 감사, 회개, 소원을 아뢰는 것이고,
2) 사건별은 신앙 생활, 가정 생활, 직장 생활, 사회 생활 등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며,
3) 대상별이란 나와 이웃과 성도와 교회와 복음 사역자와 환난 중에 있는 자들과 국가와 민족 등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광범위한 내용을 주밀하게 아뢰는 것이 “모든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2. 간구를 하는 것입니다. 이 간구를 18절에 “힘쓰라”는 말씀과 함께 설명드리겠습니다. 간구란 간절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밤중에 온 손님에게 저녁 대접할 양식이 없어서 이웃집으로 양식을 꾸러간 사람이 식구들 잠자는 중에 문을 두드리고, 사정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눅 11:8). 또 힘쓰는 기도를 하시면 더 유익합니다. 힘쓰는 기도란 노력을 뜻하고, 또 땀흘리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도 가장 어려울 때 땀흘리는 기도를 하셨습니다(눅 22:44). 여러분들도 땀흘린 기도에 은혜가 더 크게 따르는 것을 체험해 보십시오.
3. 무시로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살전 5:17에서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무시로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기도를 호흡하듯 생활화하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앉아도, 누워도, 서도, 성경을 보다가도, 자동차를 타고도, 특히 마음에 번민이 있으면 언제든지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 성도들은 새벽 기도회에 나오는 것을 기도의 최고 실천으로 압니다. 그러나 새벽 기도란 예수님의 모범이요(막 1:35) 명령은 아니며, 또 다니엘도 하루 세 번 기도하였고(단 6:10), 사도들이나 고넬료도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였는데(행 3:1, 10:3), 이런 것은 다 좋은 일이기 때문에 모범할 일이 됩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새벽 기도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령되어진 것은 “항상 무시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다 무시로 기도한다면 특정 기도회를 안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 못하면서 기도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성도가 많기 때문에 새벽 기도회 등을 단체로 하게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기도가 생활화되시기를 바랍니다.
4.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롬8:26에서 “성령님은 연약을 도우시고 기도를 대신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할 때, 이것은 잘하는 기도, 바른 기도, 하나님의 뜻(성경적으로)대로 하는 기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기도를 하게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기 전에 먼저 성경을 배워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맞도록 기도하는 것이 성령 안에서의 기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들은 방언처럼 저절로 터져 나오는 것만 성령의 도우시는 기도로 아시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성도의 인격과 지식과 생각에 감동을 주셔서 기도하게 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5. 여러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여러 성도를 자기 가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처럼 할 수 있도록 기도 대상을 분담하여 맡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수백명을 위하여 기도해 주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6. 복음 사역자의 말씀 준비와 진리의 비밀을 탐구하는 지혜와 누구에게나 담대하게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설교자에게는 항상 설교 재료가 떠올라야 합니다. 또 항상 설교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묘한 비밀을 발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이 인간을 의식하지 말고 담대히 증언하는 것인데, 이것이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누구의 잘못이나 부조리를 책망하면 대항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것을 피하려고 침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바리새인들이 싫어하는 복음을 전하였고, 사두개인들이 싫어하는 부활을 전하였기 때문에 핍박을 받아 감옥에 가시고, 거기서 순교를 하신 것입니다.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진리대로 증언하는 담력이 모든 사역자들에게 있도록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 설교는 자신의 기도로 준비하여 돌려받는 것이라고 아셔야 할 것입니다(자기를 위한 설교도 된다는 뜻입니다).
이 시간에는 기도의 과제들이란 제목 아래 여섯 가지의 대목을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내용의 기도, 기도로 힘쓸 일, 무시로 할 일, 성령 안에서 기도할 일, 여러 성도를 위하여, 복음 사역자의 증언을 위하여 할 것입니다.
제46과 생사의 갈림길 (빌 1:20~26) 목록으로
본문 말씀 20절에는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 관한 것”을 말씀하셨고, 21절에서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 하셨고, 22~26절에서는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사는 것이 좋을까 죽는 것이 좋을까를 생각하시다가 자신을 위하여는 죽는 것이 좋으나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는 사는 것이 좋기 때문에 살아서 성도들을 만나기를 확신하다” 하시므로 더 살기를 소원하는 편으로 마음을 돌리는 내용이 기록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편지를 쓰실 때 로마 감옥에 계셨고, 그곳에서 돌아가실 것인지 혹은 풀려나실 것인지에 대한 갈림길에 처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생사의 갈림길”이란 제목으로 본문 내용과 함께 교훈을 받겠습니다.
1. 20절에서 말씀한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또 여러분들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유지환 양(삼풍 백화점 붕괴로 13일 만에 구출된 소녀)은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하니까 “커피 점포를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1) 무슨 일에나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사람이 부끄럽지 않게 살려면,
① 의롭게 살고,
② 자기의 책임을 다하여야 하겠지요.
2) “담대한 생활을 꾸준히 이어나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전과 같이 오늘도”란 말씀은 자유로울 때나 속박되었을 때나, 생명의 여유가 있을 때나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나 “여전히 담대함을 유지하는 것이라” 하셨고,
3) “살든지 죽든지 자기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존귀가 드러났으면” 하는 소원을 가지셨으니, 이 얼마나 고상한 소원입니까? 저희들도 꼭 그런 소원과 기대를 갖고 기도하며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2. 21절 말씀에서 “자기에게 사시는 이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1) 우리 자신에게 살아 주시는 이가 예수님이심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생명도 주님의 것이고, 삶의 목적과 방법과 감화도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아셔서 “나는 주님의 것이다”란 믿음을 확고하게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2) 그러면 왜 죽는 것이 유익할까요? 그것은,
① 내 생명이 아니니까 죽어도 손해가 없고,
② 또 예수님은 생의 이편과 죽음의 저편을 다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③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에 손해를 보시도록 다스리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한번 세상을 떠나기로 작정된 성도들은 꼭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생사의 갈림길”이란 삶과 죽음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고, 따라서 환경상의 큰 변화를 뜻하는 것이지만, 그런 중에서도 바울 사도는 한결같은 소망을 가지신 것입니다.
3. 생사의 갈림길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위기에 처한 성도라면 “살게 해 달라”든지, “내 영혼을 받으소서” 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 사도도 생사의 기도에서 “더 사는 것이 좋겠나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좋겠나”를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23절에서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다”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이때에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로 가서 유익할 것과 육체로 세상에 더 살아서 유익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시니,
1) 하나님께로 가서 유익한 것은,
① 자신이 안식하게 되니까 유익하고,
② 자기의 주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얼굴을 마주 보며 있을 것이므로 유익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욕망도 가져 보셨다고 하였습니다.
2) 그런데 또 더 산다면 무슨 유익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니, 24절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분명히 유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은 바울 사도 만큼 성숙되어 있지 못하니까 바울의 신앙적 지도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5절에 보시면, “내가 살 것과 너희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함께 거할 것을 확실히 안다” 하셨으니, 이 말씀대로 바울이 로마 감옥에 계시다가 한 번 석방되어 나오셨고, 재차 구금되어 순교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살 것”이란 것은 바울 자신의 신앙의 발전을 뜻하는 것이고, “믿음의 진보와 기쁨”이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성숙을 뜻하며, 26절에서 “너희의 자랑”이란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적 자랑으로 그 자랑거리들이 바울로 인하여 더 풍성하여지기를 소원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① 바울의 간절한 소망을 저희들도 가져야 할 것과, ②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을 할 때만 세상에 더 있음이 유익하다는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이웃에 유익을 준다 하여 임의로 더 살거나, 유익을 못준다 하여 임의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지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되 유익한 일에만 자기의 인생을 기울이라는 뜻입니다.
제47과 천국 시민의 자세 (빌 3:17~2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천국 시민의 자세”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 사도가 로마 감옥에 계시면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세 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17절에서 본받음의 생활을, 다음은 부패한 세계를 탄식하신 말씀이며(18~19), 마지막 말씀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성도의 자세에 대한 말씀입니다(20~21).
1. 바울 사도는 17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1) 바울 자신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모든 성도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을 만큼 본을 보이셨습니다. 고전 11:1에 보시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도입니다. 모범이 없이 가르치는 자는 “적다 일컬음을 받는다”고 하셨는데(마 5:19),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모범자였습니다.
2) “우리로(사도들) 본을 삼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사도들로 믿음 생활의 본을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엡 2:20에서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자라” 하신 말씀이 그 뜻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생활을 본받고, 사도 후시대 사람들은 사도들의 생활을 본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 성경 전부가 사도들의 역사를 기록한 말씀인 것입니다.
3) “사도들처럼 행하는 자들을 (사람 앞에)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목사가 예수님과 사도들처럼 살고, 교인들이 목사의 생활을 닮고, 또 많은 교인들이 예수님을 닮은 생활을 하므로 전도의 빛을 밝혀야 하는데 너무도 멀게 느껴지는 감정을 금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나는 언제 나를 본받으라”고 할 수 있게 될 것입니까? 하는 탄식의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2. 바울 사도의 탄식입니다. 18절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셨다”는 내용과, 당시 사회의(또는 교회 내부의) 죄악상을 말씀하신 것이 곧 탄식의 표현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를 본받고,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본받으며 따르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믿는 성도에게는 적어도 조금씩의 성자 기질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욕심, 교만, 이기주의가 없어져야 하는데 성도들 세계에 그것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1) 오히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신자의 소행일까요? 신자의 소행일까요? 불신자의 소행에 무슨 십자가의 원수란 용어를 사용하시겠으며, 신자의 소행이라면 어찌 감히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겠습니까? 이것은 아마 교회 안에 있는 외식자들의 소행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 주님의 뜻을 따르고 사랑을 실천하여야 할 식구들이 십자가 정신에 반대되는 일만 감행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정신이라면 겸손과 순종과 사랑과 희생과 봉사일 것입니다. 그런데 교만과 불순종과 미움과 이기주의에서 탈피를 못한다면 결국 교회 안에서도 십자가의 원수 행위가 있다고보아야 할 것입니다.
2) 본문에서는 “배(인간 정욕)를 신처럼 섬기고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으며 땅의 일만 생각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육신주의, 현실주의, 물질, 명예, 이기주의 같은 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너무 떠나는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안 모이고 싫어하니까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현실 설교, 기복 설교를 많이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대화 속에 하나님과 말씀에 끌려 들어가는 대화는 거의 없고, 세상 이야기나 인간 비판에 급급하는 일이 너무도 많은 것입니다. 이것이 곧 땅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땅의 일만 생각하고 사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땅의 일은 믿지 않는 세계에서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는다”는 말씀에 대하여, 죄를 짓고도 떳떳하고, 불법 행한 것을 자랑하기도 하고, 어떤 성직자가 7계를 범하고도 회개의 증표 하나도 나타내지 않은채 교회를 분립 개척한다“는 것으로 노여움을 표하는 성도를 보았습니다. 말세에는 더욱 죄와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아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일들을 인하여 눈물을 흘리시고 탄식을 하신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성도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인 만큼 천국 시민의 자세를 잘 취하셔야 할 것입니다. 죄인이 성도가 되니까 그 신분에 큰 변화를 갖게된 것입니다. 죄인이 죄사함 받은 자가 되었고, 하나님을 모르던 자가 아는 자가 되었으며, 마귀의 종되었던 자가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었고, 지옥갈 수밖에 없었던 자가 천국 시민이 되었으니 그 존귀함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시민권을 가진 자의 할 일은,
1) 항상 사도들과 예수님을 본받는 일이며,
2) 성도로서의 모범을 나타내는 일이며,
3)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실 것을 기다리는 일이며,
4) 예수님이 만물을 복종시키는 능력으로 성도를 예수님의 부활의 형체처럼 변하게 하여 주실 것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천국 시민의 자세는, ① 예수님을 잘 본받고, ② 예수님의 모범을 드러내며, ③ 예수님의 재림과 자신의 영화(신령한 몸의 부활)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자세를 취하여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제48과 은혜로운 골로새 교회 (골 1:3~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은혜로운 골로새 교회”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계2~3장에 보시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소개되는데 그 중에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가 칭찬의 대상에 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그 일곱 교회 주의에 있는 교회로서 칭찬받은 교회에 속할 수 있습니다. 일곱 교회 중 하나인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동남쪽으로 약 13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지역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곳에 가셔서 전도하신 기사가 없으므로 다른 방도로 전도되었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순절(행 2:10) 당시에 골로새 지역이 포함된 ‘브루기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다녀간 일이 있기 때문에 그 경로를 통하여 복음이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그 교회와의 인연을 갖고 계셨고, 복음의 초창기에 ‘에바브라’가 그 교회에서 복음 사역을 하였습니다. 에바브라는 나중에 로마에 갇힌 바울을 방문한 일이 있었고, 또 골로새 교회의 소식을 에바브라가 전달하였으며, 바울 사도가 로마 감옥에서 골로새서를 써 보낼 때는 에바브라가 바울과 함께 머문 상태에서 안부를 전하였습니다(골 4:12, 13). 본문 말씀을 보시면, 골로새 교회는 복음의 초창기부터 퍽 은혜로운 교회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실 때 감사한 사실과 또 칭찬하신 일이 있으므로 저희들도 골로새 교회의 좋은 모범들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1. 바울 사도가 로마 감옥에 계셨지만 골로새 교회 성도들과 관련하여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와 기도를 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는 장벽이 있을 수 없고, 복음 사역자와 성도와의 관계에 대하여도 장벽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바울이 먼 외국 로마 감옥에 계실지라도 기도의 상통함과 소식의 전달과 서신으로 전달하는 하나님의 말씀 공급에 지장이 없은 것입니다. 이것은 교역자와 거리감이 있어도 서신으로 말씀을 받고 믿음 생활한 실례를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2.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모범적 신앙 생활을 인하여 감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계시므로 골로새 교회를 가보지 못하였지만, 같은 동역자인 에바브라가 교회의 소식을 전하였기 때문에 잘 아실 수 있었습니다(8). 그러면 골로새 교회의 은혜로운 점과 감사할 일들이 무엇이었습니까?
1) 복음이 이르렀을 때 들은 것입니다. 6절에 보시면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들었다” 하셨고, 5절 말씀에서도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전에’라는 말씀과 ‘이미’란 말씀은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파하시기 전에 다른 방도로 복음을 받았다는 뜻일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여도 들을 귀가 없는 자는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골로새 성도들은 복음의 말씀을 잘 들었기 때문에 믿음을 선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롬 10:17). 성경은 믿음의 근거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많이 듣고 배우는 것이 믿음의 폭을 넓히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2) 그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도 감격할 줄 모르는 성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도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 정신에 감동되지 못한 성도가 많은 줄 압니다. “은혜를 깨달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을 뼈 아프게 간직하는 확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깨달은 날부터 큰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3)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그들 중에서와 온 천하에서 열매를 맺으며 자란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진리를 깨달은 즉시 성도들 중에서나 온 천하 즉, 이방 세계에서 영광의 열매를 맺으며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생명 있는 씨가 물을 만나면 싹이 나고 자라는 것처럼 믿음의 확신은 그 날부터 증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맺은 열매가 바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① 4절에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하셨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 밖에는 믿음의 대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진리를 믿는 확고한 신앙이 생긴 것입니다.
②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국경도 없다고 합니다. 하물며 모든 성도이겠습니까?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어찌 모든 성도가 서로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현실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한 단체가 되지 못하고 겉으로는 사랑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경계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런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③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라” 하시므로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생활과 충성 목표가 내세의 소망에 있었습니다. 현실 기복주의가 아니고 내세에 가서 상급을 받도록 준비하는 방법으로 충성을 한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었고, 듣고 깨달았으며, 깨달은 날부터 성도의 세계에서와 온 천하에서 열매를 맺고 성장하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열매를 많이 맺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신실한 사역자 ‘에바브라’의 복음적 사역이 있었습니다. 골로새 교회의 좋은 점들을 본받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49과 무엇에 확실할까요? (히 3: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무엇에 확실할까요”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의 “시작한다”는 뜻은 믿음 생활을 뜻하지요. 그러니까 “믿음 생활을 시작할 때 확실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확실함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아야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된다” 하셨으니까 믿음은 시작도 확실하여야 하고 끝도 확실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확실해야 될 이유는 하나님이 확실하시고 진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며, 하나님도 한 분, 구세주 예수님도 한 분, 성령님도 한 분, 말씀도 한 말씀, 구원의 도리와 천국도 하나 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가는 길은 지름길이 없고, 요행수나 짐작으로 가지는 길도 없기 때문에 반드시 알 것을 알고, 믿을 것을 믿으며, 행할 것을 행하여야만 되는 것입니다.
1. 믿음을 시작할 때 확실하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작은 거듭남을 받음으로 시작되고, 구경하다가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구경하고, 병 고치고, 떡 얻어 먹는 기분으로 시작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예수님이 현실적 영화로 나가지 않을 때 그들은 다 떨어졌습니다(눅 12:1,32). 따라서 거듭난 심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벧전 1:23, 살후 1:10). 이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없이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판단으로 의심이 갈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인간의 지식으로 어찌 다 알겠느냐 하면서 더욱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이 없이 믿음 생활을 시작할 때는 자주 회의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출현하셨을 때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처음에 소개한 분은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성령님이 비둘기 형상으로 예수님의 머리 위에 임하시는 징조를 보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안드레는 자기의 스승인 세례 요한의 소개를 받아 예수님을 알았고, 베드로는 형제 안드레의 소개로 예수님 계신데를 찾아 가서 하룻 밤을 유하였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확실하게 알지 못하였다가 고기잡는 기적을 체험하므로 더욱 확신하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 역시 다메섹 노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확신있는 개종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저희들도 확신을 갖기 위하여 그런 체험을 하여야만 하는가 할 때 사도들 후시대 성도들의 기초가 되어(엡 2:20) 복음을 확신하도록 하신 것입니다(히 2:4). 그런고로 후시대의 성도들은 사도들이 믿은 것을 그대로 본받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감찰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그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과 심판주 되심, 성령님의 역사와 성경이 진리됨, 행한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 교회와 성도의 교제, 계명의 강령은 사랑이란 사실 등을 확실하게 믿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믿음 생활을 확실하게 시작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길을 물어 가다가 바른 길을 알았으면 지체없이 돌이켜서 바른 길로 가는 것처럼, 신앙 생활도 그렇게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천지의 주재자란 사실을 알았을 때 예수님의 소명을 받고 배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며(눅 5:11), 나중에 예수님이 핍박의 대상이 되시면서 “너희도 가려느냐” 하시니 베드로가 말하기를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 6:68)라고 하면서 확실한 태도를 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눅19:8에 보시면 삭개오도 그런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관심을 받게 되었을 때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토색한 것을 사배로 갚겠다” 하였고, 행8:36에서 에디오피아 내시는 메시야 관에 대한 확신을 가졌을 때 스스로 세례 받을 것을 자청하였으며, 행 16:15에서 ‘루디아’는 구원의 확신을 가졌을 때 “나를 주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와서 유하라”고 하였으니 이 얼마나 박력있고 확신있는 변화입니까? 수백년 내려오던 신주 단지를 깨뜨리고, 부적을 떼고, 제사를 금하면서 믿음 생활을 시작한 한국 초대 교회 성도들의 모범도 역시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확신있는 믿음은 확실한 생활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3. 증거의 확실함을 나타내야 합니다. 막 16:20에 보시면,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하게 증거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과 성령님이 증언자와 함께 하여 확실한 증언을 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진리의 확신과 생활의 확실함이 있을 때 증거의 확실함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알고 행하도록 확실하게 증언해야 할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신앙고백에 대한 믿음 지식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믿어야 하나 하는 성경 교리와 해석에 관한 것입니다.
2) 죄가 되고 안되는 것에 대한 확실함입니다. 여기에는 각자의 양심상 자유에 따르는 문제도 있겠지만 일단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죄가 되고 안되는 것을 확실하게 증언하여야 하며,
3) 시행을 하여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증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성도가 믿음 지식의 확신을 갖고 행동 실천을 확실하게 하여야 하며, 더 나가서는 증언도 확실하게 하시되 진리의 증언, 죄와 의에 대한 증언, 행동 실천에 대한 증언을 확실하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50과 말씀과 화합하는 신앙 (히 3:15~4:3) 목록으로
이 시간은 ‘말씀과 화합하는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2절에 보시면 “믿음과 화합하지 않음이라” 하셨고, 믿음을 화합하지 않는 자는 강퍅한 자요(15), 하나님의 격노의 대상이며(16),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하고(2) 안식 세계에도 들어가지 못한다(18)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믿음을 화합하지 못하는 것은 불신앙과 같은 것입니다. 믿음의 근거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화합하지 않는 것은 곧 말씀과 화합하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과 화합하지 않는 것이므로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사람이 의합을 못해도 동행하기 어렵다”(암3:3) 하셨고, 욥22:21에서는 “하나님과 화목해야만 평안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방금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믿음의 화합”은 말씀과의 화합이고 또 말씀과의 화합은 하나님과의 화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훈을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본문 해석은 제가 쓴 히브리서 강해서를 참고하십시오). 이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은,
1. 말씀을 받을 때 강퍅한 마음으로 받지 마셔야 합니다. 15절에서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임할 때 마음을 강퍅하게 가지면 하나님의 노하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교만한 자세로 듣거나, 불평스런 자세 또는 자기 부족을 지적받으면서 회개하지 않는 자세가 바로 강퍅한 것입니다. 현실 교인 중에 이런 성도가 많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덜 깨어진 증표란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팍 죽으면 어떤 설교를 들어도 은혜롭게 받아질 것입니다.
2. 강퍅한 마음은 불신앙과 불순종과 멸망을 가져 옵니다. 19절에 보시면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믿지 아니함”이란 강퍅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요,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은 안식 세계인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으로 구원에서 제외된 영적 멸망을 뜻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이 40년 동안 불신앙하고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려졌는데, 이들이 광야에서 죽은 것은 약속의 땅인 안식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요,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강퍅한 마음은 말씀이 임할 때 신앙으로 받지 않게 되고, 신앙으로 받지 않으면 순종에 이르지 못하며, 따라서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천국을 사모할지라도 말씀을 믿지 못하면 안되니까 믿음으로 말씀과 화합하도록 바르고 든든한 신앙을 영원히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3. 말씀과 화합하지 못하면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배탈난 속에 음식을 먹으면 몸에 유익을 줄 수 있습니까? 없겠지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도 믿음으로 받을 때만 유익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였을 때 하나님의 자녀되는 특권을 얻는 것이고(요 1:12), 십자가의 도리도 구원을 얻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 주시듯이(고전 1:18), 말씀과 화합하는 신앙을 가져야만 유익을 힘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중에는 설교를 들었는데도 유익을 못 얻고 오히려 “시험이 되었다”는 등 꼭 “자기를 치는 설교만 한다”는 등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거꾸러지기 싫으면 무엇 하러 예수 믿습니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도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티끌같은 존재”라고 하면서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나 복음 사역자 앞에서 겸손할 줄도 모르면서 무슨 은혜와 축복을 기대합니까? 불신자와 대등한 은혜를 받으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특수한 은혜로 착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익을 힘입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 말씀을 누가 증언하든지 관계없이 은혜를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혹이라도 말씀이 유익되지 않았다면 그 책임은 반드시 자신이 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증언자에게 “왜 나를 치는 설교를 하느냐” 하기 전에 “내가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4. 말씀과 화합하는 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1) 말씀과 말씀의 성질을 잘 아는 것입니다. 말씀은 성경의 내용을 앎이고, 말씀의 성질은 성경관에 대한 바른 신학적 지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요 1:1). 또 말씀은 예수님이십니다(요 1:14). 또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요(행 20:27), 인격이며(행 20:32), 창조력을 나타내시고(행 1:3), 믿음을 든든히 세우시며(행 20:32), 살아서 역사하시는 능력이 있고(히 4:12), 심령을 찔러 쪼개며(히 4:12), 영원히 존재하며(벧전 1:25), 치료의 역사를 나타내신다고 하신 것입니다(시 107:20).
2) 결론적으로 말씀과 화합하는 신앙은,
① 우선 성경을 사모합니다. 성경 연구에 이끌립니다. 성경 공부를 취미와 낙으로 삼게 됩니다(시 119:81~87).
② 두 주인을 섬기지 않습니다. 마 6:24에서 물질과 하나님, 현실과 하나님을 분명히 구별하여야 할 것입니다.
③ 순종입니다.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신뢰와 지식과 바른 성경관과 순종이 곧 말씀과 화합하는 신앙이요 구원받을 신앙임을 아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51과 성경에 대한 신앙 (히 4:12~13)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성경에 대한 신앙”을 일깨워 주시는 말씀입니다. 믿음 생활은 성경의 기초 위에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어떻게 믿느냐? 성경을 우리의 생활에 어떻게 적용하느냐? 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경에 대한 신앙이 바르지 못하여 신앙의 본질을 바로 갖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른 성경관을 가지셔야 하겠습니다.
1.“하나님의 말씀”이란 주제를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다 성도에게 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말씀을 성도에게 주신 것은 성경 66권 뿐입니다. 요 21:25에 보시면 “예수님의 행하신 일(예수님의 행적이요 말씀임)이 이외에도 많으나 만이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감당하고 수용할 만큼 필요한 말씀만 기록하여 주신 것이 성경 66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많이 계시되었을지라도 주신 말씀은 성경 뿐임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말씀은 살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말씀의 주이신 하나님과 함께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개인의 명령이나 말은 그 사람이 죽으면 죽은 자의 말로 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니까 그의 말씀도 생명력을 보존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왕이 바뀌었으면 옛날의 왕명을 받들 자는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새 왕의 말을 받들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계시니까 그 말씀도 영원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3.“운동력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살았다”는 뜻이 하나님의 존재에 근거한 설명이라면, “운동력이 있다”는 뜻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근거한 설명입니다. 하나님이 얼마큼 능력이 있으신가 하면, 말씀만 발하시면 천지가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시고 붙드시는 것입니다(히 1:3). 이 말씀은 성도에게도 운동력을 주십니다. 믿음의 운동력, 지혜의 운동력, 의로운 생활의 운동력, 회개의 운동력, 사랑의 능력, 치료의 능력, 소망의 힘 등이 말씀의 운동력에서 주어지는 줄로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4.“하나님의 말씀이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을 예리한 칼로 비유한 것입니다. 여기의 칼은 악한데 사용하는 칼이 아니고 육체의 질병을 수술하는 칼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사람의 몸에 불순물이 들었으면 수술하는 칼로 째고 헤쳐서 없애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심령 즉, 마음에 있는 병적 요인은 어떻게 수술할 것입니까? 이것은 말씀의 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술하는 칼로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듯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혼과 영과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고 찔러 쪼갠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육체에는 고름이나 불순물 외에는 들어 있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심령에는 교만, 추악, 욕심, 거짓, 궤계, 간사함, 방탕하는 마음 등 얼마든지 더러운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일깨워 수술할 수 있는 도구는 하나님의 능력있는 말씀 뿐이란 것입니다.
5. 그리고 이 말씀에서 “살았다” “운동력이 있다” “마음의 뜻과 생각을 감찰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영과 인격이 동반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성경을 문자와 내용으로만 받을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인격을 포함하여 받아야 함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편지를 받았을 때 그 편지 보낸 사람을 생각하면서 읽는 것처럼 성경과 하나님을 동시에 인식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6. 13절에서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모든 피조물이 말씀의 심판대에 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심판의 척도는 말씀 뿐이란 것입니다. “우리를 심판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게 된다”는 말씀도 말씀과 예수님을 하나의 심판주로 나타낸 말씀입니다. 성도가 심판을 받을 때 정죄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고 행위의 심판을 받습니다. 계 20:13에서는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 하셨고, 계 22:12에서는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에 심판주는 예수님이시고, 심판의 척도는 성경입니다. 성경에 많이 부합되면 상을 받을 것이고, 성경을 떠나 사람의 말만 많이 들었으면 아무 공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경대로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66권만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은 같은 것이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능력이 있으신 만큼 성경 말씀도 살아 있고 능력이 있는 것이며 따라서 성경에 하나님의 영과 인격이 동반하심을 믿어 성경을 하나님과 함께 받으시고, 성경은 성도의 심령을 쪼개는 역할을 하고, 마지막에는 성경이 심판의 척도가 됨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과 생동감을 느끼지 못하면 그만큼 심령이 시들어 있음을 자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52과 시험에 대한 지식 (약 1:2~3, 12~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시험에 대한 지식”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마 4장에 보시면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일이 있고, 창 22:1에 보시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하여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고 명하신 일이 있었으며,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가르치실 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마 6:13) 하라 하셨고, 또 성경의 다른 여러 곳에서 시험에 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시험’이란 용어는 ‘페이라조’(πειράζω)란 말로 ‘시험해 보다’, ‘시도해 본다’, ‘유혹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시험하실 때는 ‘시험해 보신다’는 뜻이고, 마귀가 할 때는 ‘넘어뜨리기 위하여 유혹한다’는 뜻으로 아시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시험은 마치 공부하는 학생에게 실력 배양을 위하여 시험을 치는 것과 같고, 마귀가 시험하는 것은 짐승을 잡기 위하여 덫을 놓는 것과 같습니다.
1. 그러면 우선 본문 말씀을 살펴 보겠습니다.
1)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① 시험은 여러 가지로 만날 수 있는데, ② 어떤 시험이든 넘어가서는 안될 것이요, ③ 시험을 만날 때 온전히 기뻐해야 할 이유는 혹 마귀의 시험을 이긴 것이면 승리자가 되니까 기뻐할 일이고, 하나님의 시험을 잘 통과하였으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고 그만큼 신앙의 연단과 발전을 기함이 되기 때문입니다. ④ 그러니까 성도가 시험을 받을 때 온전히 기쁘게 여김은 승리를 전제할 때이므로, 늘 이긴다는 확신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시험을 잘 견디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요, 시험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인내로 견디는 것입니다. 바다의 조개가 진주를 물고 오래 견딜 때 값진 진주를 생산하는 것처럼 성도가 시험을 오래 참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옳다는 인정을 받고 그것으로 생명의 면류관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받는 시험이 유혹일 때는 말씀대로 시행하여야 하고, 고난일 때는 잘 견디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대소사에 인내를 많이 할 수 있는 성도이면 죽기까지 참으신 예수님을 많이 닮은 자라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3) 유혹의 원인은 대부분 자기의 욕심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죄의 유혹을 받았을 때 그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으로 착각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의 모양도 싫어하실 터인데 하물며 성도를 유혹하겠습니까? 당연히 마귀가 주는 유혹이지요. 그런데 마귀는 깨끗한 마음에는 범접을 못합니다. 깨끗한 마음 그 자체는 성령님께서 감싸고 계신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습기가 있을 때 곰팡이가 끼고, 악취가 있을 때 파리가 오는 것처럼 자신에게 인간 정욕이 있기 때문에 마귀가 거기에 고리를 거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의 욕심에 끌려 미혹되는 것”이고, 욕심이 자라서 죄가 되고 죄의 결과로 멸망을 받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시험에 대한 지식을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시험이란 무엇인가? 시험은 하나님이 연단으로 주시는 것과 마귀가 유혹으로 주는 것이 있는데, 대체적으로 어려운 과제를 만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연단과 건설적인 목적이 있고, 마귀가 주는 시험은 믿음에서 넘어뜨리고 죄를 짓게 하는 멸망의 목적으로 주는 것입니다. 마치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일 뿐이라”(요 10:10)고 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대체로 시험은 유혹의 과제로 만나는 것이 있고 고난으로 만나는 것이 있는데, 과제를 만났을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 목적을 위하여 말씀대로 시행하는 것을 선택하여야 하고, 고난을 만났을 때는 약 1:2~3과 롬 5:3에서 교훈하신 것처럼 기쁨과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인내로 대처하면서 범죄하지 않을 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시험이 오는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본문 2절에도 보시면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난다”고 하셨습니다.
① 신앙적 시험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적 시험이란 신앙과 관계되는 시험이지요.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후손을 번성케 하신다”고 약속하신 후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으니, 이 때에 이삭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당황하게 되는 것이나, 다니엘이 믿음의 지조를 지키려면 생명을 걸어야 하는 문제와 같은 것이지요. 오늘의 성도들에게는 신앙 생활의 정통성과 참신함을 위하여 현실적 욕구를 많이 포기하고 살아야 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② 육체적, 현실적으로 오는 유혹이 있는데, 예를 들면 물질의 욕심, 명예의 욕심, 가난과 질병, 억울함과 슬픔, 전쟁, 대인 관계의 갈등, 도덕적 타락상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롯이 소돔성의 도덕적 타락상 때문에 갈등을 겪었고(벧후 2:7), 아브라함도 흉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이런 때에도 성도들은 시험의 원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가 아니면 마귀로부터 온 것인가를 분별하시고 또 자신의 죄와 정욕에 관련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를 잘 따져서 분별과 선택을 잘하고 인내로 견디며 죄를 짓지 않으며 믿음의 정절을 잘 지켜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기도 부탁처럼 시험에 들지 않기를 위하여 늘 깨어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53과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라 (약 2:14~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믿음은 성도의 심령의 상태이기 때문에 믿음 자체를 보일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말로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보여 주는 것은 아닌데, 하나님께서는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 주는 문제를 연구하시면서,
1. 우선 본문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을 살피면,
1) 믿음만 있고 행함이 없으면 “아무 이익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하신 것은 이익이 없다는 뜻이며, 따라서 구원도 영광도 없다는 뜻입니다.
2)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하신 말씀이 자신의 영혼도 구원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실천력을 보유한 믿음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3)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죽었다는 뜻은 아무 힘도 없다는 뜻입니다. 헐벗은 자에게 의복을 주지 않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자에게 양식을 주지 않으면서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였다면 그 말은 안한 것만도 못한 것입니다. 죽은 믿음은 그와 같이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4) 18절에서 “믿음은 행함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① 이 믿음을 누구에게 보이는 것입니까? 이것은 사람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믿음이 있다는 증거를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증거가 없어도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잘 아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영적 상태의 믿음을 그대로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행동으로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② 사람에게 믿음을 보이는 것은 바로 전도입니다. “예수 믿는 믿음은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 최선의 전도 방법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만 하시고 행하지 않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바로 전파함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2. 현실적 전도 방법은 어떻습니까?
1) 너무 열심있고, 구체적이고, 기술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생활로 나타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효과적일 것입니다.
2) 현실 전도는 십자가 불빛으로 하고 있고, 예배당 건물이나 간판으로 하고 있으며, 돈으로 하고 있고, 말과 지식으로 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감정이나 기분으로 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도의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3.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는 방법이 바로 빛된 생활이요 소금의 역할입니다(마 5:13,14). 현실 기독교가 얼마나 빛과 소금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말하고 주장하는 기독교에서 실행하는 기독교로 변화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가장 말이 많고 설교가 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긴 설교를 하여야만 하는가? 그 이유 중에는 실천이 따르지 못하는 것 때문일 것입니다. 오랫동안 사랑을 강조하여도 사랑의 실천이 미약한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미국 교회를 가 보시니 주일 대예배 설교를 10분, 15분 하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본국에 오셔서는 자기도 설교를 짧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진국의 기독교 성도는 설교가 짧아도 실천을 많이 하니까 설교를 길게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설교가 길어도 고아를 입양하며 키우는 성도가 드물고, 미국이나 다른 선진국 교회는 설교가 짧아도 한국의 고아를 입양해 가지 않습니까?(약 1:27) 이런데서 행함이 있는 신앙과 없는 신앙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행함은 곧 빛을 비취는 것입니다. 빛이 없으면 어두움이 있습니다. 어두움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면 무지와 절망과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빛은 이 세 가지를 물리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밝히 드러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빛은 예수님이요, 진실이요,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예수님과 진실과 정의가 없으면 세상에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꼭 빛의 행위를 나타내셔야 할 것입니다.
2) 소금 역할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① 소금은 변하지 않습니다. 소금은 그 자체가 짠 맛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나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신앙과 진실과 바른 생활에 변함이 없어야 하고,
② 소금이 자기를 녹여서 다른 물질의 부패를 막는 것처럼 성도들에게도 믿음과 정의가 넘쳐서 부패되어가는 이웃에 소금이 되어야만 그것이 바로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현실 교회는 행함보다 말이 많고, 현실주의, 물량주의에 엄습되어 기독교의 본질을 상실하였다고 이미 보도되었습니다. 따라서 믿음과 말과 실천을 일치하므로 믿음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제54과 애통하며 울지어다 (약 4: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슬퍼하며 울지어다”,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바꿀지어다” 하신 말씀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도에게 애통을 권유하신 말씀이 다른 곳에도 있습니다. 마 5:4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하셨고, 눅 6:21에서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이 왜 애통하라고 하셨을까요?
1) 이 애통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약한 자의 표현이고,
2) 깊은 마음, 뜨거운 감정의 표현이며,
3) 방종을 떠난 자의 표현이고,
4) 회개하는 표현이요,
5) 때로는 탄식(근심)의 표현과 사명의 표현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쁠 때도 눈물이 나지만 대부분 슬픔의 표현으로 울게되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말하기를 “슬픔과 근심이 마음을 좋게 하므로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고, 따라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전 7:3)고 하셨습니다.
2. 성도에게는 울어야 할 일이 많고, 눈물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1) 감사의 눈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성전을 새로 건축하였을 때 감사의 눈물을 흘렸고(슥 3:12), 또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눈물과 머리털로 씻긴 여인도 역시 감사의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눅 7:38). 저희들에게도 이런 감사의 눈물이 많아져야 하겠습니다.
2) 회개의 눈물입니다. 여기에는 민족적인 회개의 눈물(통곡)도 있고(삿 2:5, 느 1:4, 에 10:1), 다윗이 침상이 젓기까지 회개한 것이나(시 6:6), 세리가 가슴을 치며 기도한 것이나(눅 18:13), 베드로가 통곡하며 회개한 일(마 26:25) 등 개인적인 회개의 눈물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통회하는 자의 기도를 멸시하시지 않는다”(시 51:17)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반드시 회개의 눈물과 통곡을 체험하셔야 은혜받는 좋은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기도로 은혜를 사모하면 그런 은혜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성도에게 회개하는 은사를 주실 때는 참으로 죄라면 두려워지고, 기도할 때마다 눈물로 회개하는 기도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3) 기도의 눈물이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기도는 간절한 표현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런 기도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나의 기도(삼상 1:10), 다윗의 기도(삼하 1:12, 12:22), 호세아의 기도(호 12:4), 엘리사의 기도(왕하 8:12), 예레미야의 기도(렘 13:17, 애 1:6)에서 간절한 호소의 눈물 기도가 기록된 것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왕하 20:5에 보시면 “하나님이 히스기야 왕의 눈물을 보시고 은혜를 베푸셨다”고 하셨습니다.
4) 동정의 울음입니다.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심정으로 함께 울어주는 것입니다. 롬12:15에서도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하셨고,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었을 때 울어주신 일이나(요 11:35),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 보시고 우신 일이나(눅 19:41), 겟세마네 동산에서 중보의 기도를 하시면서 우신 일(히 5:7) 등입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눅 23:28) 하신 말씀이나, 약 5:1에서 “부한 자들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애통하라” 하신 것이 다 이웃을 사랑하며 동정해 주는 눈물인 것입니다. 그런 눈물을 흘릴 수만 있다면 그 눈물은 반드시 사랑의 능력을 일으켜 줄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울 일이 있다면 사명 성취를 위한 애통일 것입니다.
① 시 126:6에서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간 자는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올 것이라” 하셨고,
② 바울 사도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는 일을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신다 하였으니, 이 해산하는 수고는 눈물 뿐만 아니라 피와 땀을 아울러 흘리는 고통인 것입니다.
③ 또 계 5:4에 보시면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계시의 책을 보았을 때 그 책을 받아서 펴 볼 자가 없기 때문에 크게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눈물과 애통이 바로 사명을 위한 애통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의 마음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하여서는 새로 각성하는 은혜를 받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애통하는 체험을 한 성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마음이 눈물 나는 마음이 아닐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깨닫고, 십자가의 은혜를 더 실감하며 자신의 죄의식을 강하게 가지시고 겸손한 마음과 사명적인 마음을 가지셔야만 값진 눈물을 흘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55과 믿음의 기도 (약 5:14~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응답받을 만한 믿음의 기도”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병 기도’와 관계되는 교훈으로서의 해석은 제가 집필한 <야고보서 강해>를 참고하시고, 이 시간에는 기도의 교훈으로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15절에 보시면 “믿음의 기도”란 말씀이 있고, 그 믿음의 기도가 “병든 자를 구원한다”는 것은 응답을 잘해 주신다는 뜻이며, 16절에서 “의인의 간구가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것도 역시 의인의 간구를 잘 응답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의인의 간구의 실예로서 엘리야의 기도 응답을 그 증거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최고의 수단입니다. 반드시 믿음의 기도를 잘 드리는 성도가 되셔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1. 인간 성도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을 보시면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 하셨고, 그가 하나님 앞에 비오지 않기를 기도하여 응답을 받았고, 또 비를 구하는 기도도 응답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우리와 성정이 같다”는 뜻은 인간의 위치에서 기도하였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거듭난 은혜를 받고 성령의 충만을 힘입어도 인간일 뿐 인간보다 더 높아진 것은 없습니다. 초능력자의 입장에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인간의 사고 방식과 인간의 믿음과 지혜를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인간이 기도하는 것은 자기의 입장을 지키는 분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14절에서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주의 이름’이란 예수님의 중보 사역에 힘입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 아버지게로 나갈 수도 없고, 기도 상달도 되지 않습니다(요 14:6).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나가는 유일한 길이요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였을 때는 반드시 주님의 중보 사역을 통해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3.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는 것입니다(14). 여기의 기름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기도를 도우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빌 바를 알지 못할 때도 성령님이 연약함을 도와 주시고, 성도를 위하여 탄식하시며 대신 기도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롬 8:26). 이 말씀은 성령님께서 인간 성도가 기도할 때 또는 기도하도록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인간의 기도“란 사람의 입장에서 기도하라는 뜻이고, 성령님의 도움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은 성령님께서 기도를 도와주시는 사역적 은총에 의지하여 실 수 없는 기도를 잘하라는 뜻입니다.
4. 회개하는 기도가 믿음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을 것이니…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죄를 서로 고한다”는 뜻이 기도할 때 반드시 회개의 기도와 회개의 태도를 동반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사 1:15). 그러니까 무엇을 구할 때 우선적으로 회개를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회개없는 기도를 믿음의 기도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5. 믿음의 기도는 합심하는 기도입니다. 16절에 보시면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위한 기도도 서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기도하여야 합니다. 기도할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기도할 책임이 있으니까 합심하여 서로 기도하는 것이 믿음의 기도요, 응답에 더 유력한 것입니다. 마 18:19에서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며 구할 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서로 서로 기도의 힘을 모으는 것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6. 믿음의 기도는 의인의 기도입니다. 16절에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의인의 간구란 앞에서 말씀드린 회개하는 자의 기도보다 더 순결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기도는 통로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격이고, 의인의 간구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자의 기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시 1:1의 말씀처럼 성도가 악인의 길을 쫓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주야로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한다면 하나님은 그런 자를 가까이 하시고 그런 자의 기도를 더 잘 응답하실 것입니다. 본문에서 의인의 실례로 교회의 장로들과 엘리야 선지자를 들었습니다. 교회의 감독자들은 반드시 의인으로 인정받는 반열 위에 서야할 것입니다.
7. 마지막으로 믿음의 기도는 꾸준히 계속하는 기도입니다. 18절에 보시면 “다시 기도한즉”이란 말씀이 나옵니다. 또 기도하였다는 뜻입니다. 기도는 항상 계속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눅 18:1, 살전 5:17). 응답이 더딜 때는 “기도를 더하라”는 뜻으로 받고 더하면 좋습니다. 기도는 응답에만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연단에도 있고 하나님과의 대화에도 있으며 하나님은 기도의 시간을 섭리로 이용하시는 예도 있습니다. 아사 왕이 1년 기도하였을 때 여로보암이 죽었습니다(왕상 15:6, 7, 9, 25). 본문에서 말씀한 믿음의 기도 일곱 가지를 꼭 기억하시고 좋은 기도를 힘쓰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56과 마귀를 대적하라 (벧전 5:8~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마귀를 대적하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 하시므로 마귀는 성도를 대적하는 자요, 두루 다니는 자요, 우는 사자가 삼킬 것을 찾는 것처럼 성도의 신앙을 삼키기 위하여 어떻게 활약하는 것을 설명하셨고, 또 성도가 마귀를 대적하는 방법은 “근신하고 깨어 있고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9절 하반에 보시면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로 안다”고 하셨는데, 여기의 “세상에 있는 형제”들은 교회의 감독자들이나(벧전 5:1) 젊음이 넘치는 청년들만(벧전 5:5) 유혹의 대상이 되거나 마귀를 대적할 사명이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가 다 유혹의 대상이요 마귀를 대적하는 고난을 함께 받는 입장에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신앙 생활에 후퇴하거나 죄를 짓게 되면 마귀에게 피한 것이 되고, 말씀 순종에 승리하면 하나님 편에 서서 마귀를 이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를 대적하여야 할 저희들이 먼저 마귀의 특성을 이해하고, 다음에 마귀를 대적하는 방법을 교훈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마귀에 대한 말씀은 <기독교 신앙백과> 720p. 참조).
1. 마귀의 특성은,
1) 명칭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마귀의 명칭은 살인자, 파괴자, 우는 사자, 악한 자, 큰 용, 참소자, 대적, 무저갱의 사자, 거짓의 아비, 귀신의 왕(바알세불), 이 세상의 임금, 공중의 권세잡은 자, 사단, 아바돈, 벨리알, 군대, 불법자, 유혹자, 넘어뜨리는 자 등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마귀가 이렇게 이름이 많은 것은 명예를 좋아하고 하는 일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2) 마귀의 특성은 두루 돌아다니며 안가는 데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천국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도 간다고 하였습니다(욥 1:6). 하나님의 보좌 앞에 가는 영물이 어디는 못 가겠으며, 특히 성도의 마음 속을 자기 집처럼 출입하고 성도의 마음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아담을 유혹하였을 때 아담이 넘어갔지만 예수님은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두루 다닌다’는 말씀을 기억하시고,
3) “삼킬 자를 찾아 다닌다”는 말씀도 유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베드로가 은혜를 많이 받고 예수님을 접근하여 따르니까 사단은 베드로를 밀 까부르듯 하였고, 예수님은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다는 말씀이 눅 22:21에 기록되었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한 성도는 가만 두어도 믿음이 약해집니다. 그러나 은혜받은 자는 흔들어 떨구어야 떨어지니까 그렇게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4) 사단은 악하고 추한 것이 특징입니다. 고후 6:15에서 마귀를 ‘벨리알’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악하다’는 뜻이요, 또 막 3:22의 귀신의 왕(바알세불)이란 말이 더럽고 추한 뜻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악한 마음, 덕이 안되는 말, 음모, 술수, 부정, 부패 등이 다 마귀의 생산품이 되는 것입니다.
5) 마귀는 거짓의 아비로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것으로 하며,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요 8:44), 참소자라고 하였습니다(계 12:10). 따라서 진실치 못한 것과 살인, 미움, 혈기, 폭력이 다 마귀의 것이며, 서로 이간하여 불화를 만드는 참소도 마귀에게 속한 것인 만큼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6) 마귀는 위장을 잘한다고 하였습니다. 고후 11:14에 보시면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하셨으니 마귀는 천사같으나 천사로 알면 안되는 자들입니다. 사람들 보는 데서는 천사같으나, 비밀이 보장되는 세계에서는 마귀의 근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마귀의 특성을 잘 아셔서 그런 유혹에 빠져들지 않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2. 마귀를 따돌리는 방법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1) 본문 말씀대로 “근신하는 것”입니다. 근신이란 자신의 취약점을 알아서 충분히 주의하고 보완하는 것입니다. 기도에 약합니까? 돈에 약합니까? 명예에 약합니까? 그 약한 것을 보충하시고,
2) 깨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로 깨어 있고, 정의로운 입장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믿음을 굳게 하는 것이니, 이것은 하나님을 든든히 의지하면서 성경 말씀에 붙잡히는 것입니다(마 4:4). 말씀에 붙잡히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이 곧 믿음이 약하여지는 것입니다.
4) 대적하는 것인데, 이것은 마귀의 역사나 현실적 불행을 겁내지 말고 담대하고 용기있게 맞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승리자이심을 믿고 겁없이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런 네 가지 방법을 과감하게 시도하면 마귀의 유혹과 죄는 넉넉히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마귀를 반드시 이기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57과 성도의 지킬 법 (요일 3: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도의 지킬 법”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하셨고, 또 마 24:12에 보시면 “말세에는 불법이 성하며 사랑이 식는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을 성취하지 않는 자는 바로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한다”(마 7:23)고 하셨습니다. 옛말에도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하였는데 과연 성도가 지켜야 할 법이 어떤 것들인가를 살펴 보겠습니다.
1.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법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1)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신 법입니다.
2) 이 법은 하나님이 사람과 의논해서 만드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타협할 수 없이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자기 뜻대로 만드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에게(특히 성도에게) 주신 법은 어떤 것입니까?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첫째가 성경이고, 다음이 양심 작용입니다.
① 성경은 하나님의 엄위하신 말씀이고, 그 성경대로 시행하지 않거나 성경을 의심, 불신하는 것은 다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신 26:16에서 “오늘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 하셨고, 또 신 27:1에서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켜 행하라” 하셨으며, 수1:7에서는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하셨고, 고후 13:8에서는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따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정도로(길 가운데로 행함 ; 잠 8:20) 지킬 것과 무조건 지킬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② 하나님이 주신 법은 양심의 법입니다. 양심의 법이란 선악에 대한 어느 정도의 분별과 실천과 거리낌을 갖도록 인간의 본성에 남겨 주신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만물을 보고 하나님의 신성을 깨달을 만한 양심이 있기 때문에 핑계할 수 없는 것이요(롬 1:20),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거나 율법의 규례가 밝히지 않는 것은 양심 표준으로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롬 2:14,15). 그리고 이 양심은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서 판단하는 것일 뿐 타인의 판단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고전 10:28, 29). 다시 말하면 양심은 그 자신의 환경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정하는 것이요, 다른 이의 지도를 받을 수는 있어도 다른 이의 양심을 침해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2. 또 중요한 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이 만든 법이 있습니다.
1) 이것은 교회법이고 또 성경에 위반되지 않는 경우에는 나라의 법도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2) 교회라는 단체를 운영하기 위하여 주일 성수법이나 헌금 취급법이나 예배 모범이나 권징조례 같은 것이 다 필요한 법이고, 이런 법은 다 성경에 근거하여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교인이 될 때는 이 법을 지킬 것을 서약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지킬 의무가 생기는 것입니다. 또 나라의 법을 지켜야 할 이유는 롬 13:1~7에서 “나라의 권세나 관원을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니까 그들이 악을 견제하고 선을 도모할 때 세금을 바치며 복종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기독교가 국교로 되어 있는 나라는 국법을 성경에 근거하여 만들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이 만든 법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3. 성도가 하나님께 대하여 약속한 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서원한다”는 뜻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야곱이 서원을 하고 잘 지킨 일이 있었고(창 28:20, 35:3~7), 입다도 그렇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삿 11:30, 39).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말라”(시 15:4)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맹세’와 ‘서원’이 어떻게 다른가 할 때, 이 두 가지가 다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사용이 되었는데(습 1:5, 마 26:63, 마 5:3), 약속보다 강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꼭 지켜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서원은 개인이 하나님께 하는 것이고, 맹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약속하는 것인데, 만일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께 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금지시키신 것입니다(약 5:12). 성도는 모든 약속의 법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4. 사람과의 사이에서 협의하여 만든 약속의 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주식의 법이라든지, 계 모임의 법이라든지, 보험의 법이라든지, 부동산 계약법 등입니다. 그런 법을 지키지 않으면 당장 모순이 오고, 부조리한 문제, 화목을 깨는 문제 등 어려움이 많아지니까 잘 지켜야 하고, 또 부정의 소지가 있는 계약은 하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는 도덕적 불문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법조항이 없어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어른에게 인사드리는 것, 노인을 경대하는 것, 이웃을 청소하는 것, 양보의 미덕, 봉사의 미덕 등인데, 여기에 주의할 것은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는 전통을 함부로 따르는 일입니다. 성도는 그런 것을 분별하여 지킬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지킬 법들은 첫째가 하나님이 주신 성경과 양심의 법이고, 그 다음이 성경에 근거한 교회의 법이며, 또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 인간과의 계약법 등인 것을 꼭 기억하여서 잘 지키시므로 평안의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58과 요한이 받은 계시 (계 1:8~16)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사도 요한이 받은 계시의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 일, 이, 삼서도 기록하였습니다. 본문 9절을 보시면 사도 요한이 자기의 입장과 계시를 받게된 경위를 먼저 말씀하셨고, 그가 받은 계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계시로서, 들은 것과 본 것으로 나눌 수 있으며, 또 그가 시행하여야 할 사명에 대하여서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1. 사도 요한의 입장은 “너희의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1) “너희의 형제”란 소아시아 일곱 교회 즉,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들의 성도들과 형제된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형제 관계는 모든 성도와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다 한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한 천국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니까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형제간은 육체의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귀한 것이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사 자녀삼으신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현실 교회의 성도들이 꼭 형제처럼 우애하고 사랑하여야 할 것입니다. 특히 복음 사역자들은 천사처럼은 대하지 못하여도 형제처럼은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의 환난이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받는 핍박을 뜻하고, ‘나라’란 주님을 모신 천국을 현실에서부터 살고 있음을 뜻하며, ‘참음’이란 신앙의 덕을 위하여 모든 일에 인내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받는 핍박과 인내를 감수하면서 항상 주님과 함께 사는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게된 경위를 말씀하셨는데, 같은 9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 섬에 있을 때 주의 날에 성령의 감동으로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란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결하게 살려 하였고, 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증거한 것 때문에 당시에 기독교를 핍박하는 로마 황제 ‘도미시안’(81~96)의 핍박으로 밧모 섬에 귀양을 간 것입니다. 요한이 그렇게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계시를 주셨으니 핍박을 받고 계시를 받는 것은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요한은 주의 날에 성령의 감동으로 계시를 받았습니다. 주의 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주일을 주의 날로 알고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주의 날에 가만히 있다가 감동을 받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주의 날에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저희들도 주의 날에 예수님을 더 사모하고 말씀으로 은혜받는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사도 요한이 받은 계시에 대한 것입니다. 이 계시는 들은 것과 본 것으로 나누어 집니다. 들은 것은 하나님에 대한 말씀과(9) 사명에 관한 말씀이고(11), 본 것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11~16).
1)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 들었습니까?
①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셨습니다. 알파는 헬라어의 첫 글자이고, 오메가는 끝 글자입니다. 그래서 이 뜻은 하나님이 처음과 나중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존재하시며 만유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②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며 장차 오실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무소부재(無所不在)를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또 주님이 재림하실 것을 믿고 기다리셔야 할 것입니다.
③ 그 분은 전능하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만물과 생명체에서 충분히 나타납니다.
4. 전능하심을 밝히 믿는 성도일수록 전능하신 은혜를 더욱 체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외롭게 귀양살이 하는 요한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5. 들은 계시 중에서 요한에게 사명의 말씀을 주셨으니 곧 보고, 들은 것을 책에 써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에게는 “편지를 써서 보내라”(골 4:16~17) 하셨는데, 요한에게는 “책을 써서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문서 전도와 출판 보급으로 나타나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목회도 중요하지만 출판 보급 사업이 더 큰 역사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그 모습이 영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인자같으신 이”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발에 끌리는 옷과 가슴에 금띠를 띤 것은 중보자 대제사장의 모습을 나타내 주심이요, 머리가 눈 같고 양털처럼 흰 것은 순결하신 모습이며, 불꽃같은 눈은 주밀한 감찰력을 뜻하고, 발이 풀무에 단련한 주석 같음은 기동성을 나타내심이요, 음성이 물소리 같음은 큰 위엄을 나타내심이요, 오른 손에 일곱 별을 잡으심은 교회의 사역자들을 주관하심이요(1:20), 입에서 날선 검이 나오는 것은 말씀으로 심판의 사역을 하심이요(히 4:12), 얼굴에 햇빛 같은 광채가 있음은 영광스러운 모습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요한이 받은 계시를 통하여 예수님을 더 밝히 아시고, 사도 요한처럼 살기를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제59과 예수님을 발견함 (계 2: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수님을 발견함”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삭개오’란 사람은 그 직업이 세리장이었는데,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여리고 지방으로 지나가실 때 보려고 하였는데, 사람이 많고 자기는 키가 작아서 볼 수 없게 되자 앞으로 달려가 길 가에 있는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만족하였습니다. 그때 주님이 삭개오를 부르시고 그의 집까지 가셔서 하룻 밤을 유하셨습니다(눅 19:1~7). 또 예수님 당시에 세례 요한은 말하기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런 기쁨이 충만하였노라”(요 3:29) 하면서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 보는 것으로 큰 기쁨을 삼았습니다. 예수님 탄생 직후에 시므온이란 제사장과 안나라는 할머니도 아기 예수님을 만나 보게된 것을 큰 영광으로 알았습니다(눅 2:28~32, 36~38). 저희들의 소망도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모습이라도 보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의 집이나 동리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한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아마 이 지구상에서 가장 먼 곳에라도 예수님이 오신다면 집이 있는 자는 그것이라도 팔아서 여비를 장만하여 예수님을 보러 가려고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이런 서론을 말씀드렸을까요? 예수님은 성경 속에 계십니다. 성경이 예수님의 말씀이고,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한 것이로라”고 하신 요 5:39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희들은 지금 계2:1~7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소아시아에 있는 에베소 교회의 형편을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많은 증언자들이 그렇게 설교할 줄 압니다.
1. 에베소 교회는 소아시아 서쪽 항구 도시요, 당시에 로마의 통치를 받던 곳입니다(지금은 터키 영지임). 바울 사도가 2차 전도 여행 때 그곳에 가셔서 전도하셨습니다(행 16:6). 그곳에 사역자로는 사도 요한도 계셨고, 요한의 제자 폴리갑도 그곳에서 목회를 하셨다고 합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신앙 형편을 보면 좋은 점이 많았으나 가장 비중이 큰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에 참으로 생명없는 교회처럼 전락할 위기에 있었습니다. 수고와 인내가 있었고, 거짓 선지자를 시험하여 색출하는 능력도 있었으며, 핍박을 견디며 게으르지 않은 장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 줏어 올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처음 사랑을 버린 것 조차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처음 사랑을 가지라. 그리하지 않으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고 하셨습니다. 대체로 이런 내용들이 본문에 나타난 증언의 핵심입니다.
2. 그런데 저는 지금 이 말씀에서 예수님을 보여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잘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1) 자기의 뜻을 글로 서서 편지 형식으로 에베소 교회 사역자에게 주시면서 모든 성도들에게 전달하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글로 쓰셔서 사역자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 보시라는 것입니다. 바라 보았으면 또 다음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2) 오른 손에 일곱 교회 사역자를 별처럼 잡으시고, 일곱 촛대처럼 여기시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왔다 갔다 두루 다니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꼭 바라 보시라는 것입니다.
3) 성도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와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는 것과 니골라 당을 미워하는 것과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않은 것까지 다 아시면서 살피시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세세히 익히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4)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지적하시고 “회개하라”고 책망하시며, 회개하지 않으면 교회를 옮기겠다(문닫게 하겠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책망하시는 모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이 없다. 처음 믿을 때 사랑하던 순수한 친교가 다 어디로 갔느냐. 회개하라. 원인을 찾아 규명하고 다시 회복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교회를 문닫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뚜렷하게 바라 보셔야 할 것입니다.
5) “내 말은 귀 있는 자만 들어라. 거듭나지 못한 심령은 이해를 못할 것이다. 또 예수님이 혼자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도 함께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고, 들을 대상은 교회라”고 하시면서 말씀을 잘듣고 믿음 생활에 승리하면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안 보여져서 답답하신 분들이 계십니까?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는 연구의 습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나타내 주신 교훈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먼저 말씀을 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믿음과 영안을 떠서 발견하시고, 바라 보시며, 그 예수님을 마음껏 사모하시고, 즐거워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60과 가인의 죄 (창 4:3~9) 목록으로
가인은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태어난 인류 최초의 소생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도 있었지만 죄의 계승자인 가인의 죄와 문제는 무엇인지 살펴 보시고, 가인처럼 멸망에 처하는 일을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유 11절에 보시면, “가인의 길로 행하였음이여 화 있을진져 이 사람들이여”라고 하셨습니다.
1. 가인의 문제점 첫째는, 열납되는 제사를 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일단 그의 제물이 열납되지 않은데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1) 열납되지 않는 제사 첫째는, 믿음이 없는 제사입니다. 예수님이 중보해 주시지 않는 제사는 열납되지 않습니다. 가인은 비택자이기 때문에 제사드릴 자격도 없는 차에 십자가를 모형하는 희생의 제사를 드려야 함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2) 회개가 없는 제사는 받지 않으십니다. 혹 믿음이 있다 하여도 회개가 없으면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라.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라”(사 1:13)고 하셨습니다. 회개없는 예배, 회개없는 기도, 회개 없는 헌신 모두가 문제스러운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3) 정성이 없는 제사도 응답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눈먼 짐승의 제물이나 비루먹은 것도 가져 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레 22:22). 따라서 제사와 예배를 드릴 때는 반드시 믿음과 회개와 정성을 드려야 할 것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2. 심히 분한 마음으로 안색을 변한 것입니다. 이 분한 마음은 제물을 열납하지 않으신 하나님께 대한 태도였습니다. 피조물이 어찌 하나님께 대한 분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분한 마음을 갖고 안색을 변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항하여 거스리는 악한 태도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직접 분함을 나타내지 않아도 사람 앞에서 분함을 참지 못하면 역시 인내의 연단이 부족하다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분내는 문제를 다툼과 시기와 당을 짓는 행위와 일치하여 금지를 시켰습니다(고후 12:20). ‘분’이란 성격의 결함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아무쪼록 분내는 일이 죄의 싹이 됨을 아셔서 크게 삼가야 할 것입니다.
3. “가인은 죄의 소원을 갖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책망하시는 말씀에서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악한 사람들의 세계에서는 죄짓는 것을 소원하며, 그것을 영광과 자랑으로 아는 경향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4. 결국 가인은 동생을 죽였습니다. 인간이 믿음과 선의 경향이 없으면 불신앙과 죄의 경향으로 기울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다툼질 하는 것이 죄의 소원이요, 이웃 사랑을 등지고 자기 중심이나 자신의 이기주의 만을 위하여 살려는 것이 바로 죄의 소원인 것입니다. 불신앙, 자기 중심, 이기주의 이 세 가지를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가인의 살인은 자기의 동생을 죽인 것이기 때문에 살인 중에도 악한 죄를 범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랑의 힘을 잃고 형제를 미워하고, 비난하며, 배척하고, 대적하다 보면 살인이나 살인에 가까운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마음에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면 자신이 악한 자인 줄 알고 회개하셔야 합니다. 자신이 좀 더 선해지면 악한 자라 할지라도 미워하는 마음까지는 갖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불쌍한 인간으로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거나 욕(라가)하거나 미련한 놈이라 하면 살인자와 같은 심판을 면치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마 5:21~22). 성도는 반드시 미움과 살인을 하나로 생각하여 경계하고 회개하셔야 할 것입니다.
5. 가인은 거짓말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까, “내가 알지 못한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 거짓말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한 것이고, 또 자신의 살인죄를 숨긴 것이며, 동생을 죽이고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 대답이었습니다. 가인은 살인죄의 조상도 되고 거짓말의 조상도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진실을 지키되 자기의 죄를 사실대로 말할 수 있을 만큼 진실을 나타내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6. 책임을 회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양심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자유인에게는 반드시 자발적인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인은 동생과 우애하여야 할 윤리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하였으니, 그는 사회적, 인륜적 책임을 망각한 것입니다. 결국 가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멸망자의 첫 조상이 된 것입니다. 불신앙, 분한 성격, 죄와 불법의 소원, 미움과 시기와 살인, 거짓말, 책임 회피, 하나님께 대한 항의, 이런 것들이 다 불신앙에서 오는 죄악임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제61과 물 심판과 구원 (창 6:13~2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물 심판과 구원”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인류 창조 후 약 1,000년 만에 물 심판으로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1) 하나님이 땅을 심판하신 이유는 “그 땅에 사는 모든 혈육있는 자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가득 찼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창 6:11, 12). 여기의 강포와 패괴는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죄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류의 죄악이 하나님께 대하여 강포하고 패괴하면 하나님은 심판하실 분임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2) 이와 흡사한 심판을 하나님은 드문 드문 또 나타내셨습니다. 노아 홍수 후 약 1,000년이 지난 아브라함 때에 소돔과 고모라 도성을 유황 불로 심판하신 사례가 있었고, 그 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패괴해졌을 때 주전 600년 경에 바벨론에 의한 심판과, 또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심판을 단행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역사를 재연시켜 주신 것은 후세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두렵게 여기면서 구원의 은총을 갈망하게 하시기 위함이요, 또 말세 심판의 예표로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 노아의 여덟 식구만은 구원을 해 주셨습니다.
1) 노아의 가족들이 구원 대상이 된 이유를 살펴 보면, 9절과 10절 말씀에서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한 자였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노아가 하나님께 패괴한 자가 아니었으며, 상당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랐음을 칭찬하시고 인정하신 말씀입니다.
2) 그러나 8절 말씀에서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하신 것을 보면 노아의 의로운 공로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상당하게 의로운 자를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해 주셨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패괴하지 않은 자까지 심판하여 없애실 분이 아닌 것입니다.
3.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을 구원하시는 방법으로 방주를 짓게 하셨고, 방주가 예비된 다음 홍수가 임하기 전에 육축의 암수와 기는 것의 암수와 나는 것의 암수를 그 생명 보존을 위하여 식물과 함께 방주에 함께 수용하게 하신 것입니다.
1) 여기에서 노아의 가족은 노아의 부인과 세 아들과 세 자부였는데, 이들이 다함께 방주에 들어가므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창 7:7). 믿음의 칭찬은 노아가 받았지만 노아의 뜻에 복종하며 사는 가족들을 하나님께서는 함께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선민 집에서 함께 사는 종들도 가장의 뜻에 순종할 때 할례를 베풀게 하신 것이나, 한 가장이 예수님을 영접하였을 때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신 뜻과 같은 것입니다(창 17:10~14, 행 16:31). 이것은 신앙있는 가장에게 구원이 의존된다는 뜻이 아니고, 날 장작이라도 더운 아궁에 들어가면 잘탈 수 있는 것처럼 약한 신앙이라도 은혜받은 성도와 함께 있을 때 은혜를 나누어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노아의 가족들도 함께 순종하는 믿음이 있었음).
2) 하나님은 세계의 만물을 인류 중심으로 다스리시기 때문에 살아남은 인류가 살아갈 때 필요한 생물들을 보존하여 살려주시게 된 것입니다.
3) 그리고 노아의 가족이 홍수에서 구원받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순종에 있었던 것입니다. 즉, 방주를 만들고 거기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물에서 구원받는 방법은 방주로 들어가야 하고, 불에서 구원받는 방법은 롯의 딸들처럼 그 장소를 탈출하여야 하며, 영원한 지옥의 심판에서 구원받는 방법은 복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노아가 방주를 짓고 들어가므로 구원을 받은 것은 택한 백성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을 것을 예표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심판과 구원의 예표인 것입니다.
4. 방주는 어떻게 지으라고 하셨습니까? 잣나무로 짓되, 장광고를 300규빗, 50규빗, 30규빗으로 하고, 안팎을 역청으로 발라 3층으로 만들어 칸을 막고, 창은 위에서 한규빗 밑에 내고 문은 옆으로 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잣나무는 물에 잘 견디는 나무이고, 장광고 넓이에 3층을 만든 것은 짐승과 새들을 종류별로 수용하기 위함이며, 창문을 위로, 출입문을 옆으로 낸 것은 건축법의 당연한 방법인 것입니다. 그런데 움직이는 시설과 방향을 잡는 시설이 없었습니다.
5. 노아에게 만들게 하신 방주를 생각하면서 몇 가지 신령한 교훈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1) 방주는 물을 등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세상에 접촉하여 살지만 세상을 등에 대고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시는 것이요,
2) 틈을 막기 위하여 역청을 바른 것은 신앙의 나쁜 사상이나 세속적인 것이나 나쁜 습관과 전통들을 버려 미연에 방지케 하시는 교훈이요,
3) 1, 2, 3층을 만들어 칸을 막은 것은 종류별로 수용케 함이니, 하나님이 성도를 구별하심 같이 거룩한 성도가 구별된 생활을 하게 하시는 교훈이요,
4) 상당한 용적을 만들게 하신 것은 모든 생물의 암수를 실어도 가라앉지 않아야 하므로, 이는 분수와 절제와 균형을 맞추어 살게 하시는 교훈이며,
5) 마지막으로 가는 시설과 방향 시설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바람으로 인도하시는대로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라는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제62과 복을 받은 아브라함 (창 12:1~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복을 받은 아브라함”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설교를 많이 들으셨겠지만 지금 읽으신 본문에 어떤 복이 나타나 있는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1. 아브라함이 받은 복.
1) 아브라함은 선민(選民)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본문 7절에서도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셨는데, ‘이 땅’이란 가나안 땅이요,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합니다(계 11:8, 21:2).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천국을 주신다는 것은 아브라함을 선민의 조상으로 세우신 뜻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선민의 조상으로 세우신 더 확실한 내용은 눅 16:22에서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간 것을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 하셨고, 또 눅 19:9에서 삭개오가 회개하였을 때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신 말씀에서 더 확실하여지는 것입니다(롬 4:16). 성경에서 선민의 조상으로 택함받은 자는 아브라함 뿐이었습니다.
2) 기업의 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이삭과 야곱의 후손)에게 주신 가나안 땅은 우리나라의 경상북도 만한 넓이의 땅입니다. 한 가장에게 이만한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땅의 소유자는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이기 때문에 그 후손들이 그 땅을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지키기 위하여 많은 전쟁을 하였습니다. 행 17:26에서도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시며) 인류에게 거주의 경계를 한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기업의 땅 뿐만 아니라 재물과 존귀도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잠 8:18).
3) 아브라함은 그 후손이 창대하여지는 복을 받았습니다. 본문 2절에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하셨고, 13:16에서는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하시므로 아브라함의 후손을 크게 번성케 하시되 하늘의 별처럼(창 15:5, 22:17) 번성시켜 주신 것입니다. 종족 보존이나 번성은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실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4)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것은 세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① 아브라함을 위하여 축복하면 그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혹 아브라함을 밉게 여겨서 저주를 하면 하나님이 그 저주한 자를 저주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면 어떤 역경이나 저주 아래서도 복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② 또 한 가지 “복의 근원” 된다는 말씀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 것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은 세계 인류를 뜻합니다. “세계의 인류가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받는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에서 메시야가 출현하여 세계의 선민들을 구원하실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③ 그리고 이 구원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에게 허락하시는 은혜입니다(롬 4:16). 따라서 복의 근원이 된다는 뜻은 아브라함을 복되게 하시는 은혜와 메시야적 구원의 은혜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갖고 구원받게 하시는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 아브라함은 이 은혜를 75세 때에 받았습니다. 저희들 생각으로 70세이면 은혜와 복을 다받은 다음의 나이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늙었으니까 더 받을 복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75세에도 은혜를 주셨고, 모세는 80세에 쓰셨으며, 욥에게는 노년에 복을 주셨으니 나이가 많다 하여 은혜를 못받을 이유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늙어도 소망을 갖고 더욱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이 복을 받은 자로서 어떤 신앙의 특징이 있었는가를 살펴 보면,
1) 말씀을 쫓아가는 생활이었습니다. 4절 말씀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갔다”는 것은 무조건적 순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뜻이나 풍속이나 유행을 따라가지 않고 앞과 뒤를 재 보지도 않고 말씀이 떨어지면 무조건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도 인간 생각으로 타산을 하면 순종 못할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말씀만 믿고 따라가는 순종을 하였습니다.
2) 제단을 쌓는 것입니다(7, 8장). 구약 시대의 제사는 신약 시대의 예배입니다. 예배는 의식 자체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취하는 경건한 태도입니다. 찬송, 기도, 설교가 있으면 무조건 예배라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예배는 드리는 자의 신앙과 정성에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아브라함처럼 무조건 순종하는 신앙을 갖고 또 신령한 예배의 역군이 되셔서 많은 복을 받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님 제일주의로 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63과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 (창 17:1~8)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웠다”는 말씀이 네 번 나옵니다. 2절과 4절에서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운다” 하셨고, 7절에서는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언약을 삼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언약을 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히 이행된다는 사실을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언약을 하실 수 있는 이유는 전능하시고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지 않으면 언약을 이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유한하시거나 영원히 존재하시지 않아도 역시 언약 실천을 영원히 지속하시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능하시기 때문에 언약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언약을 주신 대상은 아브라함이었고, 아브라함의 후손과 영원한 언약을 하셨습니다.
1) 여기에서 언약의 대상을 정하신 이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으로 대상을 정하셨는데, 그 대상이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대상을 정하실 때도 같은 방법으로 시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무조건 선택받은 것이 저희들이었음을 생각할 때 큰 행복을 느끼셔야 할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은 선민의 조상이 되는 언약을 받았습니다. “너와 네 후손 사이에 언약을 삼는다”(7절)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후손이란 모든 혈통을 다 포함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적자 이삭의 후손으로 선민적 계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그리고 그 언약이 영원한 것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현실적 축복에서만 멎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신령한 천국의 복을 약속하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복이 아니고서는 영원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축복의 내용이 현실에서 영원까지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2. 어떤 언약을 주셨습니까?
1) 2절에서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그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많이 번성하였습니다.
2) 4절에서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열국의 아비”란 열국이 아브라함을 아버지처럼 섬긴다는 뜻이므로, 아브라함의 후손의 나라가 강성하여질 것을 언약한 것입니다. 이 언약은 다윗 왕국 때에 성취되었습니다. 다윗이 많은 이방 나라들을 정복하여 나라를 든든히 세웠기 때문입니다(대상 18:1~13).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본래 아브람(큰 아버지)이란 이름을 아브라함(열국의 아비)으로 개명하여 주셨습니다. 이름까지 개명하여 주신 것은 언약의 의미를 더 확실케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3) 나라들과 열왕들도 네게로 좇아 나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나라들은 비택자 계열도 포함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큰 아들 이스마엘에게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창21:8). 그러니까 많은 나라와 열왕은 선민 계열을 초월하여 혈통의 번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4)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특히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뜻은 선민에 한하여 특별 취급하여 주시는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 언약은 바로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를 특별 취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절에 보시면 “나와 너 사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1대 1로 상관해 주시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하나님이 나와 직접 상대하여 주시는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성도의 하나님도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8절).
5) 가나안 일경을 주어서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일경이란 현실 기업도 되고 또 그것이 영원한 기업을 상징하는 뜻으로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때(창 12:4)와 또 99세 때에도 같은 의미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는데, 24년 만에 또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나이가 많아져도 나와 후손에 대한 축복의 은혜가 있을 것을 기대하셔야 할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언약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여지는 것이 중요한 사명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는 것은 믿음과 순종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이삭의 후손이 번성할 약속을 믿었고,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셨을 때 죽은 자도 다시 살려 주실 줄로까지 믿었으며,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도 순종할 정도였으니 그 믿음과 순종의 정도가 완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들도 영원한 언약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처럼 믿음과 순종의 완전을 이루도록 노력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64과 연단 과정의 모세 (출 2:11~2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연단 과정의 모세”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하나님이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들어 쓰시기 전에 모세는 세 가지 연단 기간을 거쳤는데, 하나는 신앙적 연단 기간이고 또 하나는 사회적 연단 기간이요 또 하나는 도덕적 연단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은 80년이란 긴 세월이었습니다.
1) 모세의 신앙적 연단 기간은 그의 어릴 때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란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의 딸 공주에게 발견되자 즉시 유모에게 맡겨졌고, 그 유모는 바로 자기 어머니요 자기 가족이었습니다(출 2:5~10). 그리고 히브리인들은 애굽의 바로 왕 밑에서 노예 생활을 하며, 남자 아이는 출생하면 죽여야 하는 어려운 환경에서 살고 있었습니다(출 1:15~16). 누구나 어려울 때이면 없던 종교도 갖게 되고, 기독교인이면 신앙이 더 자라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그 부모 밑에서 받은 교육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 의식을 갖도록 강하게 교육시킨 것입니다. 잠 22:6에 보시면 “아이 때 가르친 것은 늙어도 떠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결국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란 입장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더 귀히 여겼으니(히 11:24) 이런 신앙으로 교육받은 기간은 그의 어릴 때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저희들도 자녀들의 신앙이 어릴 때 얼마나 든든히 박히는가를 감찰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사회적 연단의 기간입니다. 모세는 어머니 품에서 젖을 뗀 후부터 40세까지 애굽의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애굽 왕궁에서 자라는 동안 “애굽의 학술을 다 배워 말과 행사에 능하였다”(행 7:22) 하였으니 그의 사회적 연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연단이라고 한다면 세상 학문과 정치적 지식을 의미할 것인데, 모세는 그 부분에 상당하였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쓰시지 않고, 또
3) 도덕적 연단의 세계로 보내신 것입니다. 모세가 도덕적 연단을 받아야 할 이유가 그의 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양자라는 명분을 갖고 살인을 하였습니다. 살인이란 미움에서 시작되고(마 5:22), 혈기와 불법을 일삼을 때 저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모세에게 공주의 아들이란 명분이 없었거나 애굽 왕실의 배경이 없었다면 그는 혈기를 부리거나 살인까지 저지르지 못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인간적 폭력을 나타낸 것은 그의 사회적 배경이 큰 힘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인간적 혈기와 폭력을 꺾으시기 위하여 미디안 광야의 40년 생활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모세에게 동족애가 있는 것은 좋은 일이었습니다. 모세는 그 동족애로 자기 민족의 학대받는 것을 구출해 주었고, 또 모세에게는 정의심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정의심으로 잘못한 형제에게 “동포간이니 싸우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싸우는 히브리 동포가 모세의 살인 사건을 광포하면서 반항할 줄은 몰랐습니다. 모세의 살인 사건 즉, 애굽인을 죽인 사실이 바로의 귀에 들어가자 바로는 모세의 생명을 찾게 되었고, 모세는 도망을 하게된 것입니다. 모세는 이런 과정을 통하여 미디안 광야로 갔지만 하나님은 배후에서 모세를 연단시키시되 “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도록”(민 12:3)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세는 도덕적인 면에서 다른 연단도 받았겠지만 혈기를 온유로 바꾸는 일을 위하여 40년의 기간을 보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의 나이 80에 그를 불러 쓰신 것입니다. 성도가 연단만 잘받고 있다면 그 나이 늙은 때라도 하나님이 얼마든지 크게 쓰실 수 있음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이 유익하게 쓰임받지 못하는데는 아직도 실력으로나 연단상으로 부족한 점이 있기 때문임을 아셔서 더욱 인정받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선민의 출애굽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80년 전부터 모세를 예비하신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모세가 봉사적 생활에서 크게 형통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살인자로 쫓길 형편이라 가진 것이 없이 도망하였을 것입니다. 미디안 광야 우물 곁에서 이드로의 딸들이 양에게 물을 먹일 때 도와줄 만한 일이 생겨서 봉사를 한 것입니다. 왕국에서 살던 자가 양치는 일을 도와준 것입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봉사적인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잠시 봉사를 잘한 것 때문에 이드로의 집에 가게 되었고, 거기서 먹고 쉬고 또 그 집의 일을 도와 주다가 그 집에서 살게 되었으며, 그 집의 딸 ‘십보라’에게 장가들었고, ‘게르솜’이란 아들까지 낳았으니 하나님은 연단의 기간에도 연단은 연단대로, 축복은 축복대로 주시는 분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저희들도 모든 부족한 부분에 연단을 받아 더 좋은 성도되기를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65과 마라와 엘림 (출 15:22~2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마라와 엘림”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에는 네 개의 지명이 나옵니다. 홍해, 수르, 마라 그리고 엘림입니다. 성경을 읽으실 때 두 줄을 그은 것은 지명(地名)이고, 한 줄을 그은 것은 사람 이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22절에 보시면 이스라엘‘에도 두 줄이 쳐져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하신 말씀에서 그 뜻은 이스라엘 단체를 의미하지만 야곱 개인을 말씀할 때는 한 줄을 쳤습니다(16:1, 10 등). 본문에 나타난 네 지명 중 홍해는 애굽에서 시내산으로 나오는 통로로 수에즈 운하가 있는 바다이고(그 바다의 폭이 넓지 않음), 수르 광야는 홍해를 건너자 동쪽 시내산으로 오면서 있는 사막이요, 마라는 그 다음 지역이며, 엘림 역시 그 다음 지역이 됩니다. 버스를 타면 두 시간 이내의 거리이지만 군중이 도보로 사막을 여행할 때는 3일 이상 걸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22절).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여행을 하는 중에 수르 광야에 와서 물을 얻지 못한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광야의 길목에 꼭 샘물이 있을 것은 희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욥 2:10에서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않겠느냐” 하면서 재앙을 예사의 일로 생각하였습니다. 광야에 물이 없는 것은 예사이듯이 성도는 웬만한 고생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2. 마라에 왔는데 그곳의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1) 이 물이 쓴 이유는 홍해 바다 물이 스며 들었든지 아니면 지하에 불순물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이 좋지 않으면 모든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2) 이때에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16:8을 보시면 “너희 원망은 하나님께 함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사역자)를 원망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고전 10:10에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으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원망하는 마음과 습관을 버리고 어려운 일에서 반드시 유익을 찾고 소망하는 믿음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제가 목회 30년 만에 임지없이 사임을 하였을 때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 어려움을 여러 가지로 유익하게 생각한 일이 있었습니다. ① 나의 어려움이 교회에 유익을 주는 기회가 되고, ② 나는 자유로워졌으니 작은 교회, 강해서 집필 등 하고 싶은 일을 하고, ③ 이사하는 괴로움에서 집없는 예수님을 생각하였고, ④ 이삿짐을 운반하는 노동에서 운동을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⑤ 생활의 위협을 느낄 때 자녀들의 각성을 촉구하였고, ⑥ 상당 기간 시달리면서 체중이 줄어든 것을 다행으로 여긴 일이 있었습니다. 혹 누가 나를 무시하면 그 기회에 자신의 약점을 깨닫고 더 겸손하여져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누가 실수를 했어도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로 믿으셔야 합니다(삼 16:9~12).
3) 백성의 원망을 들은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 나무를 지시하여 그것을 쓴 물에 던져서 달게 하였습니다. 나무를 물에 던져 달게 한 것은,
① 순종에 의한 하나님의 기적으로 정화되었다고 믿을 수도 있고,
② 물을 정화시킬 때 한 나무를 넣게 하신 것이 여과 시설을 통하게 하는 해독 작용일 수도 있으며,
③ 이 사실을 영적으로 해석하여 십자가(한 나무)로 죄(쓴 물)를 해결하시는 예표라고도 합니다. 여하튼 하나님은 고쳐주시는 분이요, 해결해 주시는 분임을 믿으시고 기도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3. 그 때에 하나님은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법도와 율례란 시내산에서 주실 모든 계명을 미리 정하시고 계명을 잘 지키나 안지키나를 시험하시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신다면 우리는 잘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건설적인 교육과 연단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청종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하며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규례를 지키면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악성 질병)의 하나도 내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또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쓴 물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은 육체의 질병과 영혼의 질병도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4. 마지막으로 엘림에 이르니 그곳에는 물 샘 열 둘과 종려 70주가 있어서 백성들이 장막을 치고 휴식할 수 있었으니 하나님은 좋은 오아시스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특히 열 두 샘물은 열두 지파가 하나씩 나누어 쓰도록 준비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상의 말씀을 통하여 저희들이 교훈받아야 할 것은,
① 광야에 물이 없듯이 광야같은 세상은 고생이 많고 사랑이 적은 줄로 아셔야 하고(시 90:10),
② 어떤 경우에도 원망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섭리로 믿을 것이요,
③ 괴로울 때 기도하여 하나님의 치료의 은총을 힘입으시고,
④ 하나님이 주신 계명은 성도가 그것을 지키나 안지키나를 시험하시는 줄로 아시고 성실하게 지키실 것이요,
⑤ 하나님은 질병을 안주실 수도 있고 치료해 주실 수도 있으며,
⑥ 마라를 지난 후에는 엘림을 주시는 것을 꼭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제66과 반석을 쳐서 물을 주심 (출 17: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반석을 쳐서 물을 주심”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광야를 통과할 때에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서 건너가게 하신 일이 있었고(출 14:21), 마라의 쓴 물을 고쳐 마시게 하였으며, 엘림의 오아시스로도 인도를 하셨습니다(출 15:22~27). 그리고 엘림과 시내산 사이인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 만나와 메추라기로 양식을 주셨습니다(출 16:13~20). 광야에서 주신 이같은 은혜는 모두 큰 기적의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온 회중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신 광야를 지나 르비딤에 장막을 쳤을 때 또 마실 물이 없었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물의 갈증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일 것입니다.
1. 그런데 그 백성들은 모세와 다투면서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고 하면서 모세를 원망한 것입니다(17:2~3). 과연 모세가 다툼의 대상이 되며 원망의 대상이 될 사람인가 할 때 절대로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왜 우리를 이렇게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자녀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하면서 모세에게 돌질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4절). 이 말씀을 살피면서 현실 교회를 생각해 봅니다. 물론 은혜로운 교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우환을 당하든지 심령에 기쁨이 없으면 무조건 교역자를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례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교역자와 아무런 사연이나 불화나 충돌이 없는 성도가 무근하게 교역자를 원망하고 비방하는 것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교역자는 그를 위하여 가르치고 축복하였을 뿐인데 오히려 원망하고 비방하며 배척하는 경우를 당할 때는 꼭 본문의 모세의 입장과 같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백성들이 모세와 다투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2절). 이와 같이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봉행하는 하나님의 사역자를 거스리는 것은 곧 하나님을 시험하는 잘못임을 아셔서 깊이 삼가셔야 할 것입니다.
2. 모세는 이 어려운 일을 당하였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였습니다. “내가 이 백성을 어찌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하겠나이다” 하였더니, 하나님이 “백성 앞을 지나가서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지팡이를 손에 잡고 호렙산 반석에 서서 그 반석을 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대로 행하였더니 물이 나온 것입니다.
1) 여기에서 모세는 기도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고,
2) 순종의 모험을 한 사람입니다. 돌질하려고 하는 백성들의 앞을 하나님의 말씀 시행을 인하여 지나간 것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순종하는 모세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3) 어떤 이는 지팡이로 반석을 친 일에 대하여 모세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율법이고, 반석은 그리스도를 의미하는데, 반석이 지팡이에 맞은 것은 그리스도가 율법에 맞아 은혜의 생수(구원의 복)를 주시게 된 것을 상징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민감하게 해석하면 그런 추측도 나올 수 있지만 모든 성경을 다 그런 식으로 해석하다 보면 실수할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영적 해석이나 비유적 해석이 말씀하시는 원뜻을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① 모세를 원망하는 백성들의 완악과 무지를 경계하셔야 하며,
② 모세의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해결책을 믿으셔야 하며,
③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에게 때를 따라 필요한 은혜를 주신 분임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4) 그 백성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가 아니 계신가를 시험하였다고 하였습니다(7절).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물을 주실 것이고, 함께 하시지 않으면 물을 주지 않을 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의심하는 신앙과 시험하는 신앙은 불신앙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을 해결하여 주시고,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하여 하나님이 계시고, 그렇지 않다 하여 계시지 않는다고 믿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무엇이 기갈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들은 물의 귀함을 모르고 삽니다. 너무 흔하니까요. 또 양식의 주림도 느끼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암 8:11에 보시면 “내가 땅에 기근을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물의 기갈을 당한 것처럼 오늘의 성도들은 말씀의 기갈을 당한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는 성경 말씀이 있고 설교가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마음 판에 새겨서 실천하는 성도가 많지 않고 또 스스로 성경에 이끌리는 성도가 많지 않은 것이 곧 말씀의 기갈인 줄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늘 성경 공부가 취미로워지도록 이끌리는 은혜를 받을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결코 복음 사역자를 불평하거나 원망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어려운 문제는 꼭 극복하는 방도가 있음을 아시고 기도로 해결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67과 은혜받는 방법 (출 33:19) 목록으로
1. 이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은 은혜줄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무에게나 복을 남발하시지 않고 꼭 주실만한 자에게 주신다는 뜻이니까 저희들이 은혜를 받으려면 꼭 은혜받을 수 있는 입장을 취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19절 앞에 보시면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신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시니까 여기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선한 형상은 도덕적 형상 즉, 하나님의 속성을 계시로 나타내 주실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기 때문에 이 선과 의와 거룩을 계시의 말씀으로 나타내 주신다는 뜻이요,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는 뜻은 하나님 자신(여호와 이름)을 모세에게 말씀의 계시로 나타내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과 본질을 나누시지 못합니다(요 1:1). 그래서 계명의 말씀을 주신 것이 곧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34:1). 그러면 어떤 자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가 할 때 우선 방법론에 앞서 은혜의 개념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영적 은혜와 현실적 은혜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영적 은혜는 믿음, 말씀, 구원, 영생, 상급 등일 것이요, 현실적 은혜는 물질, 지식, 건강, 명예, 장수 등일 것입니다. 여기에서 영적, 신령한 은혜는 받을수록 유익이 크지만, 현실적 은혜는 지식이나 재물이나 건강이나 명예가 죄짓는 불행의 요소로 사용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은혜가 복이 안되고 오히려 화가 되겠지요. 그래서 현실적 은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사용될 때만 은혜가 되고 복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 자체를 한 마디로 정의하려면 성도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관심 하에 있게 되는 상태”라고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라”는 말씀도 있고(시 73:28), 또 “하나님이 눈동자같이 지켜 주신다”는 말씀(신 32:10, 시 17:8)도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하나님이 자기를 눈동자같이 지켜 주신다면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2.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까?
1)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이 말씀은 믿음 안에 있는 성도에게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벧전 5:5을 보시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사울 왕이 겸손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왕권을 주셨습니다(삼상 9:21, 10:21~22). 그러나 그가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을 때(삼상 15:23) 왕에서도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삼상 16:1). 문제는 현실의 성도들이 은혜를 받기 위하여 겸손을 연습하고 모험적으로 겸손을 시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성도들로부터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은 퍽 아쉬운 일입니다.
2) 회개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행 11:18에서는 “생명얻는 회개”라고 하셨고, 행 2:38에서는 회개로 성령의 충만을 받았으며, 삭개오는 회개를 철저히 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칭찬을 받았습니다(눅 19:9). 요 9:31에서는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회개와 돌이킴이 없이는 은혜받기 어려운 것입니다. 은혜의 관문은 회개란 것을 꼭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사모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 107:9에 보시면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을 채워 주신다” 하셨고, 애 3:25에서는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선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은혜를 사모하고 기다리는 마음이 꼭 있어야 합니다. 은혜는 말씀으로 주십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사모하고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을 멸시하는 재판관이라도 늘 번거롭게 청탁하면 들어주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주시지 않겠느냐(눅 18:5)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기필코 구하고 사모하며 노력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순종하는 것입니다. 신 28:1~14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면 현실의 복도 넘치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장소에 구애없이 직업에 구애없이 들어가나 나가나 자녀와 재물에 복을 주시고, 나가서는 전쟁도 이기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행 5:32에는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이란 말씀도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잘 지키는 것이 은혜를 받는 방법입니다. 또 순종은 기적을 힘입는 방법도 됩니다(왕하 5:14, 요 2:1~11).
5) “예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엡 6:24). 또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11:6). 예수님이 좋은데 가시든지 어려운데 가시든지 따라가고, 예수님이 복을 주시든지 안주시든지 그런 것에 관계없이 사랑하고, 어떤 역경에서라도 변함없이 예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꼭 주님의 관심 대상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겸손하고 회개하고 사모하며 기다리고 순종 잘하고 주님을 변함없이 사랑하여 반드시 은혜와 긍휼을 힘입는 대상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68과 특혜 받은대로 행함 ( 민32:16~2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특혜 받은 대로 행함”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를 받아 요단강 동편인 길르앗 땅에 왔을 때에 르우벤 자손과 각 자손이 모세에게 특혜를 청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 특혜란 것은 자기들 지파에는 가축이 많고 또 요단강 동편 땅은 가축 사육에 적당한 땅인 만큼 “그 땅을 자기 부족의 기업으로 먼저 주면 유아들과 짐승들을 정착시킨 후에 다른 지파들과 합력하고, 앞장서서 싸우고, 그리고 요단강 서편 땅에서는 기업을 받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 두 지파가 기업의 특혜를 청하였을 때 모세는 다른 지파와의 공평성을 생각하였고, 또 다른 지파들이 낙망할 것을 생각하였습니다(5~7절). 그런데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러 가나안 땅 정탐 보고를 받았을 때 바로 그들의 열조(너희 열조;8절)가 가나안 입국을 심히 반대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낙심케 한즉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애굽에서 나온 20세 이상으로는(11절) 한 사람도 그 땅을 보지 못할 것이라“ 하신 말씀을 기억한 것입니다. 이 내용의 뜻은 백성들이 합력하여 순종하지 않은 것 때문에 40년을 유리하게 되었고(13절), 20세 이상은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인데 그 중에도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의 조상들이 다른 사람들을 낙심케 하였는데, 결국은 그 후손들이 요단강 동편에 머물게 된 사실을 기억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요 민족의 대사이며, 영적으로는 죄악의 세계를 정복하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에는 합력과 순종이 필요하였고, 조상들이 하나님의 일을 훼방한 만큼 그 후손들이 기업은 받았지만 가나안 땅의 기업이 아닌 요단 동편 길르앗 땅에 정착하므로 약속의 땅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또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벗어난 이유는 조상들의 불신앙에도 기인하였지만, 그 자신들은 짐승의 떼와 유아들의 평안을 돌보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신령한 복으로 비유할 때 신령한 복은 현실적 특혜를 외면하고(마 6:24, 갈 5:17) 무조건 순종을 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특혜를 받은 르우벤 지파와 각 지파가 특혜 받은 대가를 어떻게 보답하여야 합니까?
1. 다른 지파와 합력하여 다른 지파의 기업을 취하여 줄 때까지 같이 싸워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얻을 때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현실적 기업을 먼저 받은 자는 다른 형제들이 기업을 차지할 때까지 합력해 준 것입니다. 빈부 차이에 대하여 정부에서는 어느 정도 가난한 자에게 도움을 주지만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스스로 협력해 주는 미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특혜를 받은 두 지파가 특혜 받은 책임을 이행할 때 어떻게 행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너희가 만일 이 일을 행하여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 가서 싸우되 너희가 다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서 여호와께서 그 원수를 자기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복종케 하시기까지 싸우면…이 땅은 너희 앞에서 산업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1) 여기에 보시면 “너희가 다 무장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군인이 무장하여야 하는 것처럼 마귀와 싸우는 성도들도 다 무장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무장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은 의와 죄를 가려 주고, 기도로는 죄를 걷어 차는 힘을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여호와 앞에서”란 말씀이 21절과 22절에서 네 번이나 강조되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는 것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엄위하신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자기를 감찰하신다는 사실을 의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경건을 차리게 됩니다. 특별히 성경을 살필 때 하나님을 의식하고, 복음 사역자를 대할 때 하나님을 의식하며, 소자를 대할 때와 교회를 대할 때와 죄의 유혹을 받을 때 하나님을 의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 앞에서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은채 또는 목사를 형제로도 의식하지 않은채 행동하는 장로들을 본 일이 있습니다. 이런 장로들이 있는 교회는 바로 육성될 수 없는 것입니다.
3) 17절에서 “그들의 앞에서 행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은혜의 특혜를 받은 자가 건설적인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이고,
4) 20절에서 “여호와 앞에서 가서 싸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서 싸운다“는 것은 요단강을 건너가서(21절) 적진에 들어가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를 받은 자가 솔선과 모범을 보여 보답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5) “하나님께서 그 원수를 자기 앞에서 복종하게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할 일을 다할 때 하나님이 그 원수를 복종케 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은 하나님의 원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원수이면 성도의 원수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심판자이시기 때문에 그 족속을 원수로 삼으셔도 되지만 성도의 원수는 마귀와 죄란 사실을 아셔야 하며, 성도가 자기의 할 일을 잘할 때 하나님은 성도의 원수도 물리쳐 주심을 말씀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은혜를 받은 성도는, ① 항상 신앙 무장을 잘하고 하나님 앞에서 행하며, ② 솔선 모범을 나타내고, ③ 승리의 생활을 더욱 잘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제69과 이웃을 돕는 제도 (레 19:9~10, 신 15:1~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이웃을 돕는 제도”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구제하는 제도”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세계 선교의 붐이 오를만큼 올랐고 구제를 위하여서도 교회가 힘은 쓰지만 그 분량이 너무 미흡한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교회의 어떤 기관에서 가난한 사람이나 장애인을 돕는 계획을 1년에 한 두 번 세워 행사를 하지만 실제로 자기 곁에 있는 어려운 사람이나 또 교회에 찾아와서 동정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인색하다 할 만큼 형식적으로 구제하여 보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의 구제 대상인가 할 때, 가까운데 있는 사람, 구제를 청하는 사람, 눈에 보이는 사람들로부터 먼 곳으로 나가면서 도움의 손 길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 5:42에서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이웃을 돕기 위하여 준비를 하였다가 구하는 자가 있을 때 주고, 꾸고저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복된 실천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서와 준비가 부족하든지 또는 과대한 것을 요청할 때는 거절할 수밖에 없겠지요. 여기에서 구제의 한도는 배고픈 상태, 헐벗은 상태, 집이 없어 유리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구제에 대한 규례를 교회가 실천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표방한 기관이고, 교회에서 사용되는 돈은 바로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도움을 구하는 자가 예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교회에 와서 도움을 요청하는데 예수님의 돈을 사람이 쥐고 있으면서 주지 않는 경우가 있고, 이럴 때에 도움을 못받고 가는 사람은 교회에 욕을 하고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잘못하여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의 제도만이라도 구제의 손을 늦추지 않도록 개선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이스라엘 선민들에게 구제하는 방법을 어떻게 명하셨습니까?
1) 우선 본문 말씀에서 곡물을 거둘 때 모퉁이에 있는 것과 떨어진 이삭을 그대로 두고 포도원의 열매도 다 따지 말고 떨어진 것도 그대로 두어서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지나가는 나그네를 뜻함, 23:22)을 도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인심으로 말하면 농촌 인심이고, 조금씩 덜어서 한 사람을 돕는 십시일반(十匙一飯)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은 이런 제도가 돼지 저금통을 사용하여 활용이 되는줄 압니다. 아무쪼록 성도는 자기가 잘사는 일에만 관심을 쓸 것이 아니라 못사는 사람에 대한 관심도 함께 가지시고 지나친 세상 욕심이나 사치나 과소비에 흐르지 않도록 노력하시고,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 섭섭하게 해주지 않기 위하여 준비하며 살도록 지혜를 써야 할 것입니다. 레 19:13, 신 24:14에 보시면 “곤궁하고 빈한한 품군을 학대하지 말고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이는 그가 그 품삯을 사모함이라” 하셨고, 만일 품삯을 속히 안 주었을 때 “두렵건대 그가 하나님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의 품삯을 고의로 체불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상대방의 사정과 관계없이 “주어야 할 의무가 있으면 속히 주는 습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2) 신 15:1~11을 살펴 보겠습니다.
① 앞에 있는 신 14:28을 보시면 “3년에 한 번씩 소산의 십일조를 떼어서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배부르게 하라” 하셨고,
② 또 신 15:1에서는 “7년에 한 번씩 면제년을 두어서 꾸어준 돈을 면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인에게는 독촉할 수 있지만 선민에게는 독촉하지 않다가 7년이 되도록 회수되지 않으면 면제하게 하셨고, 이 규례를 잘지킬 때 그들 중에 가난한 자가 없게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꾸어줄지언정 꾸이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에게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고 그들 앞에서 “손을 움켜 쥐지 말고(욕심부리지 말라는 뜻) 요구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고, 악심을 품지 말고, 면제년이 다가오는 것을 예고해 주고, 항상 도움의 손을 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꼭 부모가 자식 잘살기를 바라는 입장과 같은 것입니다. 반드시 재물이 있는 성도는 적게 가진 자에게 넓은 마음을 써야 할 것이요, 교회가 가난한 복음 사역자를 도울 때도 꼭 이런 마음으로 협력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③ 또 레25장에 보시면 ‘희년’의 제도가 있어서 50년째 되는 해에는 종에서도 해방되고, 토지를 잡힌 것도 되돌려 받는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이런 제도를 나라에서도 실시하면 많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웃을 구제하고 돕는 문제와 관련하여 성도들이 취할 태도는,
1) 성도는 물욕에서 떠나되 적당한 것으로 사는 것을 표준 생활로 아셔야 합니다. 잠 30:8에서 그렇게 교훈하셨습니다.
2) 사치성 있는 과소비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것이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3) 구제와 덕을 베풀면서 살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예수님도 “주는 자를 후히 주시겠다” 하셨고(눅 6:38), 바울 사도께서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시면서(행 20:35) 자신이 돈을 벌어서 동료들의 쓸 것을 공급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저희들 개인이나 교회에서 구제하는 사명이 고취되고 구제의 미비한 제도를 잘 개선해 보자는 뜻으로 이 말씀을 상고한 것입니다.
제70과 하나님이 써주신 십계명 (신 10: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써주신 십계명”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초신자가 아니면 십계명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 십계명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시내산 아래 머물렀을 때에 하나님이 모세만 시내산에 오르게 하시고 십계명과 다른 율법들을 선포하여 주셨는데(출 20:1~14:2), 그 선포해 주신 말씀 중에 십계명은 하나님이 두 돌판에 직접 기록하여 주셨고, 다른 율법은 모세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셨습니다(출 24:4). 그리고 또 이 십계명은 하나님이 두 번이나 기록해 주셨습니다. 출 24:12에서 “하나님이 친히 돌판에 기록해 주시리라” 하셨고, 출 32:5에 보시면 “모세가 내려올 때 증거의 두 돌판이 그 손에 있었다”고 하시므로 처음에 주신 십계명도 하나님이 직접 써주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계명판을 들고 내려오다가 산 아래에서 백성들이 금 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그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린 것입니다. 성경에는 “돌판으로 금 송아지를 때려 부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렇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금 송아지도 불살라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먹여 없앴다고 하였습니다(출 32:19~20). 여기에서 저희들은 모세가 하나님이 써주신 십계명판을 내던진 것은 잘한 일이 아니나, 금 송아지를 부수어 없앤 것은 잘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다시 처음 것처럼 돌을 깎아 만들라(출 34:1) 하여 시내산에 오르게 하신 후 40일 40야를 금식 기도하게 하신 다음에 다시 기록하여 주셨고, 이것을 법궤 안에 보관하게 하신 것입니다(신 10:5).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받아야 할 것은,
1. 하나님이 친히 써주신 계명이란 것입니다. 다른 율법은 모세가 기록하여 언약서라는 이름을 남겼지만(출 24:4~7) 십계명만큼은 모든 율법의 강령으로, 중요한 것이요 그것의 중요함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친히 기록하신 것입니다. 모든 성경도 기록으로 주셨고, 특히 친히 써주신 계명을 생각하시면서 글로된 말씀을 읽으며 은혜를 받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십계명의 의미에 대하여 예수님이 설명하신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마 22:35~40에 보시면,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어느 것이 큰 계명이냐”고 물었을 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십계명을 두 가지로 나누면 1계명과 4계명까지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고, 5계명에서 10계명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 해설해 주신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 실천”이 계명의 강령임을 꼭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복되기 위하여 이 계명을 주신 것임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3. 어떤 설교자가 십계명을 네 가지로 구분하는 일을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1~3계명은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말씀하신 것이요, 5~7계명은 이웃과 이웃과의 관계를 말씀하신 것이요, 8~10계명은 인간과 만물과의 관계를 말씀하신 것이요, 중간의 4계명은 모든 부조화 즉, 하나님과 이웃과 만물과의 관계에서 잘못된 것들을 정상화시키고 회복시키는 관계를 해결해 주시는 계명이라고 한 것입니다. 저희들은 십계명을 잘 실천하고 적용하기 위하여 이런 교훈도 참고하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숭상한다든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한다든지(우상 숭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잘못된 언행이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임을 아셔서 각별히 주의하셔야 할 것이요,
2) 부모에게 효도하고, 이웃을 미워하지 않으며(살인 금지), 해하지도 말고 또 이성 간에 이웃의 몸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간음 금지) 이웃과의 관계를 바로 갖는 것입니다. 이것을 할줄 알아야만 은혜받은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3) 만물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셔야 하는데, 만물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이 빌려주신 것이며, 또 분복에 따라 넉넉하게 쓸 특권을 가진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부자의 경우). 이때에 성도는 받은 것을 감사할 줄 알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으며 손해보이지 않는 것으로 정당한 관계를 유지하셔야 하고,
4) 이런 대신, 대인, 대물 관계에서 잘못되었거나 어그러진 것을 안식일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충분히 회개하고 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나님과 화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이 성격은 다르나 목적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수주일은 하나님과의 멀어졌던 관계를 가깝게 만드는 기회로 주신 날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71과 약속과 명령 (수 1:5~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약속과 명령”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모세의 생애가 끝나고 여호수아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모세는 출애굽부터 약속의 땅 앞에까지 도착하는 40년 간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고, 모세가 죽자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하여 요단강을 건너고 가나안 족과 싸워 그 땅을 정복하여야 하는 과제를 감당할 때가 된 것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약속과 명령을 주셨습니다.
1. 하나님의 약속은 두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무조건적인 약속이고, 또 하나는 조건적인 약속이었습니다.
1) 본문 말씀 5절에서는 무조건적인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너를 평생에 당할 자가 없을 것이요,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시던 것같이 여호수아와 함께 할 것이며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참으로 복된 약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를 당할 자 없을 것이라” 즉, 강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함께해 주시고, 떠나지 않으시며, 버리지 않으심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조건 없이도 사랑하시고 복주실 약속을 하셨으니 더 큰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2) 조건적인 약속이란 7절과 9절에서 “무엇 무엇을 하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고 너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무조건적인 약속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시지만 조건적인 약속은 더 힘이 있으니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켰을 때는 일한 자가 대가를 받아야 하는 것만큼 성취력이 강한 것입니다. 기도와 순종은 이 두 가지를 다 받게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그 백성들에게 주신 명령이 어떤 것입니까?
1)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기있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퍽 어려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40년간의 여행에 지쳤고, 애굽에서 나온 세대는 두 사람 뿐이었으며, 모세도 세상을 떠났고, 앞 길에 요단 강이 가로 놓였으며, 가나안 백성은 견고한 성을 갖고 있는 중에 그 땅을 진격하여 점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큰 일을 헤쳐 나가려면 강하고 담대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저희들은 죄많은 현실 속에서 승리하며 살아가려면 담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① 믿음에 담대하여야 합니다. 믿음의 담대함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추호도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믿음을 가진 자를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마 11:6에 보시면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② 온유, 겸손에 담대하여야 합니다. 겸손하고저 할 때 과감하게 자기를 낮추는 담대함이 있어야 할 것이요,
③ 순종에 담대하여야 합니다. 요단 강에 발을 디디는 순종, 아브라함이 이삭의 몸에 칼을 대는 순종은 참으로 담대한 순종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였을 때 희생을 무릅쓰고 하는 순종은 담대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④ 사랑과 봉사와 양보에도 담대하여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먼저 주는 양보는 담대한 사랑과 봉사 정신에 기인한 것입니다.
⑤ 세상 욕심을 멀리 하고 신령한 은혜를 추구하는 일에 담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죄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른 길로만 가라는 뜻입니다. 길에도 중앙이 있고 노견이 있습니다. 잠 8:20을 보시면 “하나님은 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평한 길 가운데로 다니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가운데로 다닌다”는 뜻은 공정하고 합법하며 명분있게 행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믿는 성도가 상식적인 일을 못 행하고 상식 이하의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것이 다 치우치는 행위입니다. 성도는 항상 공정하게 바르게 사는 방법을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율법책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주야로 묵상하며 그 가운데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8절)는 것입니다. ① 율법책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함은 성경을 읽고 증언하는 것이며, ② 주야로 묵상함은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것이요(연구함), ③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함은 최대한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성경과 가까워지라는 것입니다. 성경과 가까워지는 것은 곧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요, 성경을 가까이 하려면 읽고 뜻을 깨닫고 그대로 실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혹이라도 우리의 신앙 생활 중에 성경과의 관계가 밀접하지 못하다면 이번 기회에 그것을 반드시 시정하고 회복하셔야만 할 것입니다. 마 4:4에 보시면 “말씀을 떡이요 양식”이라고 하셨습니다. 육신의 양식은 한끼만 굶어도 시장함을 느끼고 또 입맛대로 먹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는 것과 자신이 말씀의 맛을 느껴 스스로 말씀을 요리해 먹을 수 있는 믿음을 꼭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관심이 있으나 말씀 연구에 힘이 없는 성도들은 교회를 덕되게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교회는 반드시 말씀에 끌리는 성도들이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약속은 믿고, 명령은 시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72과 여리고 성을 정복함 (수 6:1~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여리고 성을 정복함”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여리고 성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의 최초 관문이기 때문에 이 성을 정복하는 것은 곧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많은 연단을 받았고,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지도자 모세도 죽고 후계자인 여호수아의 인도로 최종 종착지인 가나안 땅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는 여리고 성을 정복하는 방법을 주신 말씀이고, 12~21절에서는 그것이 시행된 내용을 기록하였습니다.
1. 여리고 성을 정복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땅 주실 것을 약속하였습니다(창 13:14~15). 아브라함은 그 땅을 자기의 것으로 받지 못하였지만 약 500년 후에 그 자손들이 받았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심을 입증하여 주신 것입니다.
2) 현실의 복을 주시는 의미가 있습니다. 땅은 곧 기업입니다. 땅이 있어야 정착을 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 것이 아닙니까?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땅으로 현실 기업의 복을 주시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3) 불신앙의 죄를 타파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때 가나안 땅에 살던 사람들은 다 우상주의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을 쫓아내 진멸시킴은 곧 죄악과 우상주의를 타파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4)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 또는 천국을 상징하는 땅으로 비유하셨기 때문에(계 21:2) 그 땅의 정복은 곧 신앙의 확립이요 천국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계 11:8).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구별된 백성에게 주신 구별된 땅이요, 그곳에 거룩한 성전을 세우신 의미로 볼 때 신령한 은혜를 힘입는 복이며,
5)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뺏는다(마 11:2)는 말씀의 모형적 역사이기도 합니다. 여리고 성을 정복하는 의미는 한 마디로 신앙의 승리를 나타낸 좋은 실례입니다.
2. 그러면 정복의 과정이 어떠하였습니까?
1) 1절에서 “여리고는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굳게 닫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을 접근할 때 그들은 더 완고해지고 반항의 태세를 취하는 악의 역사와 같은 것인데, 이때에 강한 은혜의 역사가 아니면 정복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곳의 왕과 용사들을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신다(2절)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시면 그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붙이시기 위하여 방법을 명하셨으니, 그 방법은,
① 그 성을 매일 한 번씩 6일을 돌고, 7일 되는 날에는 일곱 번을 돌며, 또 일곱 제사장이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하는 것이요,
②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되 길게 불어서 모든 백성들에게 들리게 하라는 것이요,
③ 무장한 군인들은 법궤 앞에서 행하고 음성을 들레지 말다가 “외치라” 할 때 외치라고 한 것입니다. 이때에 백성들이 그대로 시행한즉 성벽이 무너져 내리므로 쉽게 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20~21절).
3. 이 정복 과정에서 명령으로 주신 내용들을 모아 교훈을 받는다면,
1) 그들이 법궤를 들고 나간 것은 하나님 중심 및 영광 중심을 뜻하고,
2) 법궤 앞에 무장한 군인들이 선 것은 법궤를 호위, 보존한다는 뜻이 있으니, 법궤의 보존은 곧 하나님의 명예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명예를 높여드릴 사명이 있습니다.
3) 제사장들이 나팔을 분 것은 백성들을 단결시키고 경성하게 하며 질서있게 통솔하는 목적에서였고,
4) 6일을 돌되 7일째에 일곱 바퀴를 돌린 것은 온전한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성이 무너지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나아만 장군이 몸을 일곱 번 씻는 것과 같은 것으로, 꾸준한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5) 크게 외치기 전에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라”(10절) 하신 것은 침묵을 뜻하는데, 이 침묵은 지도자를 통하여 전달되는 명령을 잘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침묵하지 않고 제각기 떠들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세계에 접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교역자가 심방을 갔을 때 분위기가 소란하면 설교를 못하고 중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침묵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깝게 하는 환경 조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살고저 하는 성도에게는 사람의 잡다한 말이 필요가 없고 오히려 부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침묵의 세계, 조용한 세계를 만드셔야 합니다.
6) 일제히 외치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입으로 시인하는 고백이요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신앙 고백은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므로(마 16:16, 롬 10:9) 믿음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여리고 성 정복의 의미를 아시고 정복하는 방법에서 주시는 교훈을 받아서 저희들의 신앙 생활을 승리롭게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노력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신앙 생활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제73과 포도나무의 교훈 (삿 9:8~13)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사사 시대에 있었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하여 사사 시대는 어느 때 해당하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 약 1,000년, 노아부터 아브라함까지 약 1,000년, 아브라함부터 출애굽까지 약 500년, 출애굽의 광야 40년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초대 임금 사울을 세우기 전까지 약 400년, 그리고 왕조 시대 약 500년, 바벨론 포로부터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약 600년을 계산하여 구약 시대를 4,000년으로 계산하게 됩니다. 이 중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사울 왕을 세우기 전까지의 300여년의 기간을 사사 시대라고 합니다. ‘사사’란 뜻은 왕이 아닌 임시 통치자를 의미합니다. 15명의 사사 중에 다섯 번째 사사가 기드온인데, 그가 “바알 신과 다투었다”는 뜻으로 ‘여룹바알’이란 별명을 가졌고, 그가 40년을 통치하면서 70명의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났는데(삿 8:29~32) 그의 아들 ‘아비멜렉’이 70명의 형제를 다 죽이고 외가의 족속이 사는 세겜에 가서 왕이 되었습니다. 이때 막내 동생 ‘요담’이 피하여 죽지 않았는데, 그가 세겜 족을 일깨우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올라가서 외친 말씀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나무들이 한 나무로 자기들의 왕을 삼기 위하여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청하였지만 그들은 다 자기의 열매맺는 일에 충실하고 나무들 앞에 나서서 자기를 나타내는 것이 싫다고 사양을 하였지만 열매도 없이 사람만 찌르는 가시나무는 왕이 되라 하자 선 듯 기다렸다는 듯이 수락을 하고, 그늘도 많지 않으면서 “자기의 그늘에 피하라”고 하였으니 가당치 않다고 외친 것입니다. 이것은 약점을 가진 자(열매없이 사람을 찌르는 자)가 명예를 좋아하는 잘못된 처신을 깨우치는 내용입니다. 감람나무는 감람유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고(감람유는 성전의 등불, 성령님의 은혜를 상징, 사람에게 유용함), 무화과는 단 열매를 주고, 포도나무 역시 좋은 나무인 것을 아셔서 저희들도 유익한 열매를 많이 맺는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포도나무 교훈을 받자는 것이 목적입니다.
1. 포도나무 재배의 역사는 노아 시대부터 성경에 나타납니다(창 9:20). 노아가 포도 농사를 지어 술을 먹고 취하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2. 포도는 사람에게 많은 용도를 제공합니다. 단 맛과 영양도 있고(삿 9:13) 음료로도 사용하며(요 2:3) 제물과 약용으로도 사용합니다. 13절에서 “포도나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그것이 제물로 드려지기 때문입니다(출 29:40, 민 15:4~10). 이스라엘 나라는 물이 귀하기 때문에 포도주를 음료수처럼 사용하였고(애 1:7, 5:6, 요 2:3, 단 5:1~4), 의약품으로도 사용한 사례가 있으며(눅 10:34, 딤전 5:23),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신경안정제로도 적당하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삿 9:13, 시 104:15).
3. 저희들은 포도나무의 특징에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1) 참 포도나무가 있습니다(사 5:2). 이는 참신자를 뜻합니다. 참신자는 얼마나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성경에 복종하는가에서 확인하여야 합니다.
2) 포도나무의 특성은 나무가 볼 모양이 없습니다. 포도나무는 기둥감도 안되고 작대기도 안되며 심지어는 부지깽이도 안될 만큼 그 나무의 외모가 볼품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생활에 외부적 치장이 중요하지 않음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이 좋고 시설이 좋아도 그것이 신령한 은혜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며, 사람은 혹 지위가 높고 학벌이 있어도 그것이 신령한 은혜와 상관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외양주의를 선호하는 시대에 포도나무가 볼 모양이 없음은 마치 세례 요한이 약대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산 생활과 흡사한 것으로 대조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3) 그러나 포도나무는 나무에 비할 때 열매를 과도하게 맺습니다. 그래서 그 나무를 버텨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무화과 잎이 무성하나 열매가 없는 것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겉으로는 유력해 보이는 것이 없으나 속으로는 열매있는 생활이 맺어져야 할 것입니다. 시 128:3에서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다” 하셨는데, 이 말씀은 외모보다 실속을 차리며, 자녀 양육에 덕행있는 주부를 칭찬하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모든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열매가 많아야 할 것입니다.
4. 포도나무와 관련한 비유가 있는데,
1) 이스라엘 선민을 참 포도나무로 비유하셨습니다(사 5:2, 7). 이것은 성도에게 외식성이 없어야 할 것을 교훈하시기 위함이요,
2)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로 비유하셨습니다. 요 15장에서 예수님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셨을 때는 가지가 나무에 연합되므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성도가 예수님과 착실하게 연합되어 좋은 생활을 나타내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이요,
3) 포도원은 선민 단체를 비유하기 때문에 신약 시대의 교회를 비유하기도 합니다. 구약에서는 아 2:15에서 “포도원을 허는 여우를 잡으라” 하셨고, 신약에서는 마 20:1~16에서 포도원의 품군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4) 포도주는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찬식에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마 26:27~29). 이처럼 포도나무를 통하여 주시는 교훈이 많음을 아셔서 이런 말씀을 상고하실 때마다 단 맛을 주는 사람, 기쁨을 주는 성도, 교회와 보혈을 생각하는 성도, 외모보다 내실을 기하는 성도가 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74과 삼손으로 구원하심 (삿 16:28~3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삼손으로 구원하심”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삼손은 이스라엘 나라 열 다섯 명의 사사 중 열 세 번째에 속하는 사사입니다. 사사는 선지자가 아니고 이방인의 침략에서 전쟁으로 나라를 구출한 통치자라고 아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사를 통하여 나라를 구출하실 때도 성령의 감동과 능력을 주셔서 사역하게 하셨습니다(삿 13:25). 삼손의 기사는 삿13장에서 16장까지입니다. 13장에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악을 행하여 40년 동안 블레셋의 손에 붙이셨다”는 말씀과, 하나님이 단 지파 사람 마노아의 처에게 삼손이란 아들을 주시고, 나실인처럼(13:4, 5) 키우게 하셨는데, 그가 자라면서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말씀이요, 14장에서는 삼손이 성장하여 이방 블레셋 여자를 좋아하여 부모의 승낙을 받으려 하였을 때 부모는 반대를 하였으나 그 일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고, 삼손은 블레셋 여인과 교제를 하면서 틈을 타서 블레셋을 치려한 것인데 그 부모는 그 뜻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삼손이 블레셋 여자와 교제하기 위하여 딤나에 가다가 어린 사자를 만나서 맨 손으로 죽이고 찢은 일이 있는데, 그 후에 또 그곳에 가다 보니 그 죽은 사자의 몸에 벌떼와 꿀이 있어서 그것을 먹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다가 여인의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는데 거기서 블레셋 사람들과 베옷 30벌, 겉옷 30벌을 걸고 수수께끼를 하였습니다. 이때 삼손은 사자의 몸에서 꿀을 먹은 것을 기억하고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 뜻이 무엇이냐”고 하였을 때 그들이 대답할 수 없게 되자 삼손의 아내에게 공갈을 쳐서 “그 뜻을 알아 오지 않으면 집을 불사르겠다” 하니까, 여인이 삼손으로부터 그 뜻을 알아서 알려 주었는데, 결국은 여인을 꾀어서 알아낸 것이 잘못이므로 삼손이 그것을 구실 삼아 블레셋 사람 30명을 죽이고 그들의 옷을 벗겨 수수께끼를 푼 자들에게 주고 말없이 돌아가니까 그 여인의 아버지가 그의 딸을 삼손의 친구인 다른 남자에게 또 시집을 보낸 것입니다. 그 다음 15장에서는 삼손이 다시 그 여인을 만나러 갔다가 장인이 임의로 다른 남자에게 준 것을 알았고, 장인이 더 아름다운 동생을 주겠다고 하였지만 이를 마다하고 그것을 구실로 하여 여우 300마리를 잡아 꼬리를 매고 꼬리 사이에 횃불을 달아 블레셋 사람의 농장으로 넣어 많은 농작물을 태웠습니다. 이로 인하여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 되니 이때에 삼손은 나귀의 턱뼈로 1,000명을 죽이고, 20년간 나라를 지켰습니다. 16장에서는 삼손이 블레셋 지경인 가사에 가서 기생의 집에 들어갔을 때 블레셋 사람들이 새벽에 기습하여 죽이려고 하였는데, 삼손이 새벽 전에 일어나서 성문 짝과 설주를 뽑아 들고 나온 일이 있었고, 그 후에 ‘소렉’이란 곳에서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하자 블레셋 사람은 그녀를 꾀어서 삼손의 힘이 어디에서 나는지를 탐지하게 한 것입니다. 들릴라가 삼손을 어거하는 방법을 물었을 때 머리털의 크기에 따라 하나님이 힘주시는 사실을 숨기고 “칡으로 얽어매면 된다, 새줄로 매면 된다, 머리털을 매면 된다”는 말로 거짓말을 하다가 결국은 여인의 꾀임에 빠져서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은 일로 힘이 있게 된다”는 비밀을 말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이 잠들었을 때 머리를 깎였고, 힘이 빠지자 눈을 뽑혔으며, 감옥에 들어가 있으면서 연극장에서 재주부리는 구경거리가 되었는데, 그 사이에 그의 머리가 자란 것입니다. 삼손에게 새로운 힘이 주어지자 연극장에서 기둥을 잡게해 달라고 부탁하여 두 기둥을 잡고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 하면서 두 기둥을 뽑으니 연극장이 무너지면서 그 안에 있던 블레셋 사람 3,000명 가량과 함께 죽은 것입니다. 이런 과정으로 20년 이상 삼손을 통하여 나라가 지켜지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이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합니까?
1.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성도들)은 하나님을 잘 경외하면 복을 받고 평안하며, 하나님을 떠나면 화를 받게된다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회개를 하거나 징계의 기간이 끝나면 다시 권고해 주시는데, 그 권고의 방법이 여러 가지이겠지만 특별한 인물을 내세워서 구원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요셉, 모세, 사사, 사무엘, 다윗 등을 내세워 백성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3. 어떤 지도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사역을 할 때 실수없이 다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삼손도 여자를 무질서하게 교제한 것이나,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거짓말을 한 것은 잘못이지만, 그 잘못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일을 자기의 통치 섭리에 유익하도록 이용하시는 분임을(잠 16:4)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삼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한 도구로 쓰셨지만 자기의 실수로 몰락의 길을 걷게된 것이요, 특히 대적이 알면 안될 중대한 비밀을 여인에게 누설시킨 것은 그가 조심하지 않은 행위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5.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삼손에게 능력이 주어진 이유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나실인이 된 것입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고, 부정한 것을 먹지 않으면서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은 것입니다. 나실인의 규례(민 6:2~22)는 성별을 뜻하고, 하나님은 성별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만큼 거기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그를 쓰셨고 또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의 쓰임을 받되 결함을 나타내면서 쓰임 받는 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75과 한나의 기도 (삼상 1:12~20) 목록으로
사사 시대 말기에 한나란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사 시대 말기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약 300년간 사사들의 통치를 받던 말기를 의미합니다. 사무엘이 마지막 사사요 최초의 선지자인데 사무엘이 출생하는 시기에 해당하고, 사무엘이 성장하였을 때 사울 왕이 세워져서 열왕 시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한나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 엘가나의 본처인데, 그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남편이 첩을 얻어 자녀를 낳으니 자녀를 생산한 첩이 본처를 멸시하여 상당한 격동과 번민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한나는 이에 대한 괴로움 때문에 하나님의 성소에 와서 기도를 하게된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아들을 주시면 그를 성별되게 키워서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바치겠다” 하여 아들을 구하되 “자신이 아들을 낳았다”는 명분만 취하고 다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한 것이요, 이 기도를 드릴 때 슬프고 괴로운 심정으로 통곡하되 음성은 들리지 않도록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늙은 엘리 제사장은 그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술취한 여인으로 착각하였다가 나중에 한나의 설명을 듣고 “너의 기도가 허락되기를 원한다”는 축복을 하였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그녀를 생각하여 기도의 응답으로 아들을 주시니,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고, 젖을 떼자 하나님의 성소로 데리고 와서 서원한대로 제사장에게 맡겨 하나님의 일을 수종들도록 헌신하게 한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와 관련하여 저희들이 교훈받아야 할 것은,
1. 한나의 기도하게 된 동기가 번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번민을 하고 격동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나의 번민은 아들 생산을 못하여 첩으로부터 멸시를 받는 일이었습니다(7절). 이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은혜를 구한 것입니다. 저희들도 살다 보면 사람의 멸시를 받을 때가 있을 것이고, 외로워질 때가 있고, 궁색할 때가 있으며, 위험이 있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반드시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시 50:15에 보시면,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하셨고, 약 5:13에서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한나는 기도의 목적이 뚜렷하였습니다. 11절에서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아들을 주시면…그의 평생을 성별되게 키워(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음 ; 민 6:13~20)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음미하면 아들 욕심에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번민과 고통을 덜기 위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아들을 필요로 하는 기도가 하나님께 욕심으로 보여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통이 더 컸던 것입니다. 아들을 구하는 것은 현실 복에 해당하는 것이요, 성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풍성하게 모시는 일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한나가 그 아들을 받아서 하나님께로 되돌려 드린 것을 보면 자신은 고통을 덜고 아들을 낳았다는 명분만 취하려는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들은 뚜렷한 목적을 두고 기도하되 인간의 정욕에 끌리는 기도를 자제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를 하시도록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3. 한나의 기도 방법은 마음의 간절함을 길게 묵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12절과 13절을 보시면 “오래 기도하되 속으로 말하여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는 기도자의 마음 자세와 시간과 표현 모습이 기록된 것인데, 마음 자세에 슬픔과 격동과 통곡이 있음을 보아서 간절함이 있었고, 12절에서 오래 기도하였으며, 표현 모습은 입술만 동하는 묵상 기도를 한 것입니다. 저희들도 어디서 기도를 하든지 간절한 마음과 오랜 기도와 묵상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소리내어 하는 기도만 좋은 기도로 믿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묵상 기도를 잘 하시고, “나도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는 확신을 가지면 별차이가 없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4. 한나는 기도의 응답을 받은 후에 서원을 이행하였습니다. 젖을 떼기까지 사랑스럽게 키우다가 가장 귀여움을 느끼게 하는 나이에 하나님의 성소에 데리고 가서 제사장에게 맡기고 오는 어머니의 심정을 생각할 때 한나의 서원 이행이 얼마나 용기있는 실천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약속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것을 늘 반성하면서 실천을 잘하셔야 할 것입니다. 저희들은 무엇을 구할 때 “내가 현실 정욕에 치우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과 “나의 간구가 다른 사람을 피해롭게 하는 것이 아닌가”를 참작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신령한 은혜를 구하였을 때 이것은 누구에게나 유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한된 현실적 특권은 내가 그것을 취할 때 다른 사람이 뺏기는 것을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사울 왕이 죄를 지어도 다윗은 그 왕위를 넘겨다 보거나 구한 일이 없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사울을 죽게 하셨고 백성들이 다윗을 추대하여 왕이된 것입니다. 어떤 전도사님이 딸만 낳고 아들을 필요로 하여 고민하는 것을 보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하지 아들이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더 좋다”고 권면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한나의 기도에서 본받되 현실 정욕을 배제하고 격동을 면하기 위한 기도와, 간절한 묵상 기도와 서원을 이행하는 참신성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제76과 대적을 물리치심 (삼상 7:5~12) 목록으로
지금 읽은 말씀을 구분하면 다섯 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1~2절에서 블레셋 나라에 빼앗긴 법궤를 잘 지키므로 20년간 평화와 하나님을 사모하는 일이 있은 것이요, ② 3~4절에서는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권면하는 말씀이요, ③ 5~6절은 “백성들이 회개하는 내용이요, ④ 7~12절은 블레셋의 침략이 있을 때 사무엘 선지자의 기도 응답으로 대적을 패하게 하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순서대로 요약하면 블레셋의 침략, 20년간의 평화, 선지자의 권면, 백성들의 회개, 대적을 물리침이 되는 것입니다. 순서대로 살펴 보겠습니다.
1. 사무엘 시대에 왜 블레셋이 침략을 했을까요?
1) 그 당시에 엘리 제사장의 아들의 타락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의 아들들은 역시 제사장의 후계자들입니다. 그들이,
① 성전에 바쳐진 제물과 예물을 부당하게 취급하였고,
②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음행하는 악을 범하였습니다(삼상 2:12).
2) 그런 중에 늙은 엘리 제사장은 자기 아들들을 중히 여겨 하나님께 드릴 제물로 자기를 살지게 하고(삼상 2:29), 그 악행을 금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삼상 3:13). 그래서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를 하나님도 경멸히 취급하여 그 집 안에 노인이 없게 하고…두 아들이 한 날에 죽으리라”(삼상 2:30) 하시고 블레셋의 침략을 허용하신 것입니다(삼상 4:1).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백성들과 제사장(성직자)들의 죄로 전쟁이나 재난이 올 수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20년 동안 좋은 세월이 있었습니다. 블레셋 적에게 빼앗긴 법궤를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 놓고, 그 아들 엘르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법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그날부터 20년 동안 온 족속이 하나님을 사모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의 “법궤를 잘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을 잘 모시고 섬기는 것을 의미하며, 20년 동안 온 족속이 하나님을 사모한 것은 평화와 신앙 생활의 은혜가 있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를 잘 유지하기만 하면 모든 면에 평강이 온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사무엘 선지자가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으로,
1)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이요,
2) 이방신들을 제하라는 것이며,
3)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마음을 얼마나 하나님께로 집중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님께로 집중하는 것은 자기나 세상 일을 적당하게 바라 보고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말씀을 사모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신을 제하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섬기거나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섬기라고 한 것입니다. 성도가 자칫하면 자기의 건강이나 지식이나 경험이나 특히 물질, 권세를 의지하기 쉽습니다. 이럴 때마다 그 생각을 잊어버리시고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맨 밑에서부터 맨 손으로 시작하는 사람이라”는 심정으로 살아갈 결심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4. 백성들의 회개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백성들을 한 곳(미스바)에 모이게 하였고, 물을 길어 하나님 앞에(제단) 부어 드리며, 금식하고 자복하며 사무엘의 다스림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의 물을 부은 의미는 마음을 물 쏟듯 하는 회개의 상징이요(애 2:19), 또 물은 그 지역에서 귀히 여기는 것이기 때문에 예물의 일종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물 쏟듯 하며 금식하며 자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회개가 바로 선지자의 다스림을 받는 순종인 것입니다. 복음 사역자의 뜻을 거역한 성도가 있다면 이 말씀으로 꼭 깨달으셔야 할 것입니다.
5. 블레셋의 침략이 있었을 때 선지자의 기도로 물리친 것입니다.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선지자의 기도를 의지하였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무엘이 어린 양의 제사로 온전한 번제(전체를 다 태워드린 제사, 곧 속죄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기도한즉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뢰를 발하여 대적을 어지럽게 하셔서 패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대적이 패한 데는 백성들의 회개와 선지자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나라의 흥망과 전쟁의 승패가 성직자의 죄나 백성들의 죄 때문에 오는 것이고, 또 환난에서 건짐받는 은혜는 오직 회개와 기도 뿐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죄와 불법을 두렵게 아는 성도가 되신다면 하나님은 평화를 유지시켜 주실 것입니다.
제77과 세 사람의 입장 (삼상 19: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세 사람의 입장”이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세 사람과의 관계된 일이 기록되었는데, 한 사람은 사울 왕이고, 또 한 사람은 사울의 아들 요나단 왕자이며, 또 한 사람은 나라를 대적의 침략에서 붙든 장군이자 사울 왕의 사위인 다윗입니다. 이 세 사람의 입장이 각각 어떠하였는가를 살펴 보겠습니다.
1. 사울 왕의 입장입니다.
1)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라”고 신하에게 명하였습니다.
2) 그 이유는 다윗을 시기하였고(18:7~8), 또 백성들의 민심이 다윗에게로 돌아가서 왕위를 뺏길 것이라는 염려와(20:31), 다윗의 무용(武勇)에 대하여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18:29). 사울이 한 나라의 왕으로서 너무나도 미개인다운 죄를 범한 것입니다. 시기심과 욕심이 많고, 다른 사람을 의심하며, 죄없는 자를 죽이고라도 자기의 위치를 굳히려는 악한 사람이요, 또 다윗은 구국 공신인 만큼 그를 배신한 것이며, 또 사위에 대한 인정도 없는 악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인간성을 증오하여야 할 것입니다. 결국 그의 말로는 어두움 뿐이었고 또 역사에 남은 불행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2. 요나단의 입장입니다.
1) 요나단은 다윗을 심히 기뻐하였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기뻐한 이유는 자기와 비슷한 친구요, 아버지의 나라를 붙잡아 준 자요, 무사요, 매부요, 또 다윗이 착한 사람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희들도 이 요나단처럼 이웃을 기뻐하여야 할 것입니다. 꼭 좋은 사람만 기뻐하려고 한다면 좋은 사람이 없어질 때 실망할 것이므로 모든 사람을 기뻐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의인의 편에 선 것입니다. 자기의 아버지 사울 왕은 악을 행하려 하고, 친구 다윗은 그 표적이 되었을 때 악한 아버지 편에 서지 않고 의로운 친구 편에 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 하는 음모를 알리고 다윗을 은밀한 곳에 숨긴 후 아버지의 정보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요나단은 아버지의 인정을 버릴 만큼 정의에 선 사람입니다.
3) 의로운 다윗을 포장해준 사람입니다. “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그 대상을 싫어하는 사람이 권세자인 왕일 때는 주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다윗을 칭찬하면서 구명 운동을 그치지 않은 것입니다. “다윗은 선행자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대적을 죽여 큰 구원을 이룬 사람입니다” 하면서 다윗을 칭찬한 것입니다. 성도는 이웃의 나쁜 점은 감추어 주고 좋은 점을 들어 칭찬을 많이 하는 미덕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4)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을 감화시켰습니다. “원컨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옵소서. 그는 득죄한 일이 없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하였을 때 사울 왕이 감동을 받고 맹세하며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렇게 악하고 욕심많은 왕을 감동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화목의 사자 역할을 한 것입니다.
5) 요나단에게는 성자의 기질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살아있으면 자기가 왕을 계승하지 못할 것이란 불리함도 있지만 성자는 그런 것을 염두에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성도의 모범자입니다. 성도에게는 반드시 요나단과 같은 성자의 기질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3. 다윗의 입장은 어떠하였습니까?
1) 본문 4절에서 다윗은 사울 왕의 신하였습니다. 신하는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는 것인데, 다윗은 왕에게 득죄한 일이 없고 선한 일만 행하였습니다. 다윗이 왕을 위하여 행한 선한 일은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운 일이며, 또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18:21) 사위 삼을 것을 내세우고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을 요청하였을 때 그 음모가 자기를 죽이기 위함임을 짐작하였을 것이지만 역시 구국 일념에서 생명을 걸고 싸워 그 일을 성취한 사람이요,
2)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울을 미워하거나 대적하지 않고 여전히 신하로서의 사명을 다한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고 따라 다니는 사울 왕을 반격하여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를 치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일이라”(삼상 24:6)고 하면서 추호도 사울 왕을 해롭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윗은 사냥꾼을 만난 노루처럼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오랜 기간 수난을 당하면서도 죄를 짓지 않은 의의 용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울 왕은 자기의 죄값으로 죽었고, 요나단은 충성된 장군으로 죽었으며, 다윗은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로 왕이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① 사울 왕은 타락자의 모형이고, 사탄과 악의 상징이며, 그 결과 역시 악의 열매를 거두었고, ② 요나단은 정의의 사람이요 화해의 사람으로 성령님의 역사를 나타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③ 다윗은 그리스도의 모형자로서(시 22:1) 원수를 사랑하고 역경에서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의 사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78과 사울과 다윗 (삼상 26:21~25) 목록으로
사울이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발탁될 때는 겸손하고(삼상 9:1~10) 예절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된 후 점점 명예욕과 권세욕에 사로 잡혔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을 뿐 아니라(삼상 15:23), 나라를 블레셋의 침략에서 구원한 다윗을 시기하여 다윗을 죽이려는 음모에 급급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다윗은 하나님은 사울 왕을 버리시고(삼상 16:1) 다윗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16:13). 지금 읽으신 말씀은 사울 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다윗을 잡으려고 수색을 하다가 십 황무지의 하길라 산 길가에 진을 치고 누웠을 때 다윗과 아비새 장군이 사울의 진까지 가까이 갔으나 그들은 잠든 상태였습니다. 이때에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고 또 아비새가 사울을 죽이려 하였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치실 때가 있을 것이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서 망할 것인즉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지 말자” 하여 죽이지 않고 창과 물병만 가지고 와서 사울에게 그 사실을 알린 것입니다(삼상 26:6~15). 이때에 다윗이 그 곁에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삼상 26:12). 사울 왕 자신은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 하였지만 다윗은 자기를 죽일 기회를 갖고도 죽이지 않은 사실을 알았을 때 뉘우치는 태도를 나타내면서 다윗을 축복한 내용이 본문에 기록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울은 왜 망하였으며, 다윗은 왜 승리하였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1. 사울이 망한 원인은,
1) 그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버린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이라 하셨고(삼상 15:23),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자는 하나님도 그를 버리신다(삼상 15:23)고 하셨습니다.
2) 사울은 사랑과 의리를 상실하였습니다. 나라를 구출한 공신인 다윗을 배신하였고, 또 다윗은 자기의 사위였지만 역시 인정을 버리고 명예와 지위 보존을 위하여 다윗을 죽이려 하였으니 사랑과 의리를 떠난 것이 분명합니다.
3) 사울은 외식적인 회개를 하였습니다. 자신이 다윗을 죽이려 한 것이 잘못임을 말로 고백하였으면서도 다윗을 포용하지 않고 멀리 떠나게 하였고(삼상 27:1), 그 이전에도 다윗이 사울의 옷자락만 베고 죽이지 않았을 때 사울이 뉘우친 일이 있었지만(삼상 24:17~22) 역시 일시적 회개요 외식적인 회개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버리고 사랑을 버리고 외식적인 회개를 하는 사람은 결국 버림을 받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의 입을 통하여 다윗이 왕될 것과 승리할 것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삼상 24:20). 본문 25절에서도 사울은 다윗에게 축복을 하면서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함으로써 다윗의 미래를 예언한 것입니다.
2.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다윗이 왕이 되고 큰 일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그만한 신앙과 선행과 용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생명을 귀히 여기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자의 생명을 귀히 여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생명을 귀히 여겨 해하지 않았고,
2) 하나님이 의와 신실을 갚아 주시는 분으로 믿었습니다(23절). 성도가 이런 신앙을 갖지 않으면 의와 신실을 지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기름부으심 받은 자를 해하려 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는 왕뿐 아니라 제사장과 선지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다 하나님이 세우신 종들입니다. 왕이 불의를 행하였거나 다른 성직자가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에 맡길지언정 사람이 스스로 해하려는 잘못을 범하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4) 다윗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여러 차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또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 것을 구실 삼아 반격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치실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삼상 26:10). 이것은 인위적 수단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를 믿는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사람의 생각이나 노력과 관계없이 그보다 큰 일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다 하나님이 섭리적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때를 정하고 시행하시니까 그런 때를 믿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전 3:1).
5) 자기의 길을 꾸준히 시행한 사람입니다. 끝 절에 보시면 “다윗은 자기의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의 곳으로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곳으로 돌아간 것”은 본래의 상태로 갔다는 뜻이요, “자기의 길로 간 것”은 자기의 할 일과 목적을 향하여 계속 진행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울처럼 말씀과 사랑과 의리를 버리고 외식적 회개를 한 자는 망하였고, 다윗처럼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믿고 생명과 기름부음 받은 종을 귀히 여기며 때를 기다리고 자기의 길을 꾸준히 행하는 자는 큰 일을 행하였음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제79과 피난 중에 있은 일 (삼하 16:5~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피난 중에 있은 일”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난리를 진압하기 위하여 정책상 피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의 피난 행렬은 대단히 초라해 보였습니다. 삼하 15:30에 보시면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 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 발로 울며 행하고 저와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각 그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15:14,23). 여기에서 다윗의 도망은 피해를 줄이고 압살롬의 생명을 동정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생명을 대신 주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래서 압살롬과 대항하는 전쟁을 할 때에도 군장들에게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18:5)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의 격습을 당한 것은 사실이나 그를 직접 왕궁에서 대항하지 않고 도망을 한데는 아들의 생명을 비롯하여 상당한 피해를 줄이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1. 다윗이 초라하게 피난 도주를 할 때 사울 왕가의 남은 자손 시므이가 돌을 던지며 저주를 한 것입니다.
1) 여기에서 몰락한 사울 왕가의 남은 자가 감히 피난가는 왕을 저주한다는 것은 너무도 엄청난 반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말과 태도가 참으로 오만하였습니다. 돌을 던지면서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 왕가의 피흘린 죄를 하나님이 네게 갚으시는구나” 하였으니 참으로 경악할 일일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해롭게 한 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의 어떤 가족은 “다윗이 사울 왕의 위를 빼앗고 다윗이 그 왕실을 몰락시켰다”고 하면서 저주를 퍼부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 이웃에도 시므이 같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리를 옳게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손해를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사람들, 그리고 막연하게 원망하는 사람들이 바로 시므이같은 사람들입니다.
2) 목회 중에 느끼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목사가 어떤 개인에게 아무런 피해도 준 일 없이 축복만 하였는데 그가 목사를 불평하며 반기를 드는 사례가 있고, 또 한 경우는 적당히 보고 관리하는 교인이 목회자가 외로울 때 의외로 위로하고 협력하는 경우입니다. 하나는 너무 유감스러운 일이고, 또 하나는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시므이는 근거없이 불평과 저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 역겨운 것을 못참는 신자들의 태도입니다. 시므이의 저주를 본 아비새가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역겨운 것을 못참는 급하고 격동된 성품입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는 다윗의 자매의 아들입니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 3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비새의 성격이 베드로보다는 나은 편입니다.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잡으려는 군병 말고의 귀를 허락도 안받고 쳤습니다. 그러나 아비새는 “죽이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하였으니 퍽 자중한 셈입니다. 저희들은 급한 성격과 과격한 일이라고 판단하는 사실이 큰 실수를 범한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사실을 따진다면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한 것이니까 먼저 분해할 사람은 다윗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침착하였고 그 신하 아비새가 분개한 것입니다. 부조리가 많고 격동될 일이 많은 환경에서 저희들은 되도록 침착한 마음을 갖고 천천히 살피며 이해를 폭 넓게 하므로 실수를 방지하는 생활의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3. 시므이의 저주에 대하여 다윗이 베푼 태도입니다.
1) 아비새의 과격 행위를 철저하게 만류시켰습니다. 성도는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분노나 혈기를 자제하고 사리에 따라 의논하고 연구하여 처리하는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시므이를 통하여 자신을 저주하도록 시키신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수난이 자기의 죄값으로 오는 하나님의 징계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자기를 저주하시는 줄로 믿은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가운데 이만큼 민감하게 느끼는 분들이 계실까요? 징계라 하면 무조건 배격하는 성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3) 그래서 다윗은 그 징계를 순하게 받으면 하나님이 그 까닭에 자기에게 은혜를 주실 것으로 믿은 것입니다(12). 부모의 매를 맞으며 복종하는 자식이면 부모의 인정과 사랑을 받지만, 부모의 매를 꺾거나 도망하는 자식은 부모의 곁을 영원히 떠나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시는 고난이 혹 징계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억울함이나 고난을 잘 참으면 반드시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취지에서 다윗은 시므이의 죄를 문제시하지 않은 것입니다.
4.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시므이가 회개하고 돌아와 충성을 한 것입니다. 사람은 함부로 지조를 변하면 안됩니다. 삽시간에 환경이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므이도 다윗이 곧 왕위를 회복할 줄 알았으면 저주를 자제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급하게 저주하였다가 다윗이 다시 회복되는 바람에 자기가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다윗이 자기를 너그럽게 대한 것을 생각하고 제일 먼저 찾아와서 회개하고 충성을 맹세한 것입니다(삼하 19:17~23). 아비새는 그 때도 시므이를 죽이려 하였지만 다윗이 엄하게 만류하여 생명을 살려 주었습니다. 좋은 교훈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제80과 아히도벨의 모략을 폐하심 (삼하 15:30~37) 목록으로
본문 34절을 보시면 “나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아히도벨의 모략을 폐하심”이라고 정하였습니다. 삼하15장~18장까지는 “다윗이 왕노릇하는 중에 아들 압살롬이 군사를 동원하여 왕궁을 점령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을 진압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읽으신 본문에는 다윗이 궁궐을 떠나 신하들과 도망을 할 때 다윗의 모사(고문관)였던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에 있다는 말을 듣고 염려하던 차 친구 후새란 사람이 자기를 추종하는 것을 보고 “너는 나를 따르지 말고 압살롬의 종으로 자청해 들어가서 압살롬의 모사 아히도벨이 그대로 해로운 모략을 꾸밀 때에 그 모략을 패하게 하여 나를 이롭게 하고 그 소식을 제사장의 아들들을 통하여 전하게 하라”고 부탁한 내용입니다.
1.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다윗의 왕위가 견고해졌는데 왜 아들 압살롬의 난리를 만나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이 좋은 세월에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범죄란 삼상11장과 12장에 나타난 내용으로, 충신 우리야의 아내를 취하고 우리야를 죽인 죄입니다. 이 죄로 말미암아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않으리라” 하셨고, 또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네 처들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백주에 동침케 하리라”(삼상 12:10~11)고 하신 말씀이 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음행의 씨앗인 아들이 죽었고(삼하 12:15), 아들과 딸(암논과 다말)이 불륜죄를 범하였고(삼하 12:14), 또 형제 간에 살인을 하는 일이 있었으며(삼하 13:29),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있다가 압살롬이 반역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이 때 다윗은 그것이 자기의 죄값으로 오는 환난인 줄 깨달았습니다(삼하 15:25~26, 16:10).
2. 다윗이 피난을 갈 때 사독과 아비아달이란 제사장이 법궤를 메고 따라오려고 하는 것을 거절하고 예루살렘에 있도록 하였습니다. 삼하 15:25~26을 보시면 “내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얻으면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사 그 법궤가 계신 데를 보이실 것이라(즉,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그러나 기뻐하시지 않으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옵소서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자세를 취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권고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며, 또 자기의 길을 하나님께 맡긴 태도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로 하여금 성소를 지키고 그 아들들을 통하여 정보를 전달하게 한 것입니다(35~36절). 다윗 시대에 사독은 훌륭한 제사장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사두개파가 이 사독 제사장의 이름을 계승한 단체인데, 나중에 잘못된 신앙으로 빠지게 된 것입니다.
3. 다윗이 신하들과 피난을 할 때 사울 왕가의 남은 족속 중 시므이란 자가 다윗을 저주하며 신복들에게 돌을 던지고 “피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사울 왕가의 피흘린 죄를 네가 받는다” 하면서 조롱과 저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에 누구인들 분개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을 호위하는 아비새가 “저 죽은 개같은 자를 당장 베도록 명하십시오” 하였을 때 다윗은 말하기를 “저가 나를 저주하는데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나를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이 저로 하여금 나를 저주하게 하심이니 네가 그를 해롭게 하여서는 안된다.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는데 하물며 베냐민 사람이겠느냐(사울이 베냐민 지파임) 하나님이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사 저의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였으니, 여기에서 다윗이 자기의 죄로 벌받는 줄을 알고 충분히 회개하는 태도를 나타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징계를 순순히 받고 회개할 때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주실 것을 믿는 신앙이요 또 하나님의 징계는 시므이같은 자를 통해서 나타내 주신다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성도가 자기에 대한 저주를 선으로 갚는 태도를 취한다면 크게 복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4. 하나님이 다윗을 보호하시려고 다윗을 해롭게 하려는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시는 섭리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다윗은 도망 중에 있고, 압살롬은 모사꾼 아히도벨을 영입하였는데(삼하 15:12) 또 다윗의 친구였던 후새도 돌아온 것입니다. 이 때에 압살롬은 아히도벨에게 “다윗을 파하는 모략을 베풀라”고 하니까 “다윗은 피난 중에 지쳐 있으므로 12,000의 군사로 추격하여 피곤하고 약할 때 다윗만 죽이면 백성은 다 돌아올 것이라”(삼하 17:1~4)고 하였을 때 이스라엘 장로들도 다 옳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 마음에 “후새의 모략도 들어보자”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후새에게 물었더니 “다윗은 병법에 익숙한 용사이기 때문에 벌써 추격해 올 것을 알고 은밀한 동굴에 숨어 있을 것인즉 무조건 추격하면 안되고 더 많은 군인들을 모집하여 땅의 이슬처럼 고루 엄습하여야 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후새가 다윗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모략이었는데, 문제는 압살롬이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다윗을 살게 하고 자기가 죽는 모략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가 살고 다윗을 죽이는 모략을 선택할 것인가. 여기에 대하여 모략은 사람이 베풀지라도 선택은 하나님께서 하시는데(잠 16:33), 결국 압살롬은 다윗을 살리고 자기가 죽는 모략을 선택한 것입니다(삼하 17:1~14).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 작용이고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해달라”는 다윗의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삼하 15:31, 34). 하나님은 인간이 결정하는 일에 이렇게 역사하여 자기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제81과 아마사의 죽음 (삼하 20:4~10)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에는 다윗의 군대 장관인 아마사가 전직 군대 장관인(삼하 8:16)인 요압에게 죽임을 당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두 사람의 자매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스루야이고, 또 한 사람은 스루야의 동생 아비가일이었습니다. 큰 자매인 스루야에게서 낳은 아들로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 3형제가 있었는데, 이들이 다 용사였고, 다윗이 왕이 될 당시에 공을 세운 사람들이어서(대상 11:6) 다윗이 왕이 되자 고종 사촌 큰 형인 요압에게 군대 장관의 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요압은 왕 앞에서 순종을 잘 안하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어서 신하로서의 품위를 잃었습니다. 그 실예로는 압살롬의 반역이 있어서 그것을 진압할 때 왕이 “압살롬을 선대하라”고 간절히 당부하였지만(삼하 18:5,12~15) 결국은 반역자라 하여 왕의 뜻을 거역하고 죽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퍽 슬퍼하였고, 나중에 솔로몬 왕에게 유언을 할 때도 “요압을 주의하고, 그가 평화로운 때에 사람을 죽인자인즉 그를 경계하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습니다(왕상 2:5, 32). 그 결과로 요압은 솔로몬 때에 처형되었습니다(왕상 2:28~34). 그 다음 자매인 아비가일이 있었는데, 이 아비가일은 다윗의 자매이면서(대상 2:16~17) 나하스의 딸(삼하 17:25)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결국은 다윗의 어머니가 다른 남편을 만나서 낳은 이성 동복 자매라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비가일에게서(남편은 이드라 ; 에델은 같은 이름임, 삼하 17:25, 대상 2:17) 아마사가 출생한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다윗과 관계되는 문제의 인물은 처음 군대 장관을 한 요압과 압살롬의 난을 평정하고 난 다음에 군대 장관을 한(삼하 19:13) 아마사와의 관계에서 요압이 아마사를 죽인 것입니다.
1. 왜 죽였을까요? 반역자란 이유도 있었지만 시기하여 죽인 것입니다. 반역자란 뜻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서 왕궁을 점령하였을 때 압살롬이 아마사에게 군대 장관 직을 준 일이 있었습니다(삼하 17:25). 또 압살롬이 다윗을 추격하는 일에 가담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전쟁에 패하였을 때 요압이 다윗 왕의 지시를 무시하고 압살롬을 무조건 죽이므로 반란을 진압한 후 다윗이 제사장과 장로들을 시켜서 반란군의 주동자인 아마사를 귀순케 하고, 다윗 왕의 도읍을 주선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기의 명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인 요압 장관을 폐하고 귀순하여 돌아온 아마사에게 군대 장관직을 준 것입니다(왕하 19:13). 다윗은 아마사가 자매의 아들이고, 귀순하여 왔고, 고집이 센 요압보다 신하로 두기에 나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2. 어떻게 죽었습니까? 다윗 왕이 겨우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하고 도읍을 위하여 오는 중에(삼하 20:1~3) 세바의 반란 소식을 또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궁궐에 도착하자 아마사에게 명하기를 “3일 내에 유다 사람(의병)을 소집해 오고 너도 여기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전시에 시간과 장소를 지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의병을 소집하러 가서 3일 내에 오지 못하고 지체한 것입니다. 아마사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지만 지체할 수 없는 다윗은 요압의 동생인 아비새에게 명하여 “네 신복들을 거느리고 가서 세바를 진압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비새는 요압의 신복들과 함께 세바의 무리를 쫓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 때에 의병을 인도하여 오는 아마사와 만난 것입니다. 아마사는 요압이 자기의 이종 형이고 또 전직 군대장관이니까 맞이하러 가까이 가는데, 군복을 입은 요압의 허리띠에 꽃힌 칼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 칼 떨어지는 것을 아마사가 눈여겨 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손에는 또 다른 칼이 있었습니다. 요압이 반갑게 포옹을 하는 척 하며 손에 있는 단칼로 아마사를 찔러 죽인 것입니다. 아마사는 그래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요압은 계속 세바를 추격하여 평정을 하고 돌아와서 다시 군대 장관이 되었습니다(삼하 20:23).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 속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거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결론적으로 교훈을 정리하여 보면, ①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전쟁에 협력할 때 조카 등 골육의 덕을 많이 보았습니다. ② 요압은 공로를 많이 세웠지만 다윗 왕의 말을 잘듣지 않는 버거운 존재였기 때문에 신하로 쓰기에는 합당치 않았습니다. ③ 요압은 왕이 반역한 아들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당부하였지만, 인륜을 저버리고 정치적 규범만 내세워 임의로 죽이므로 덕을 잃었습니다. ④ 아마사는 반역자 밑에서 군대 장관한 것이 흠이었는데, 6.25 당시에 반장이나 부역을 안할 수 없는 어려운 시험의 때가 있었습니다. ⑤ 아마사는 패배하였을 때 왕의 귀순 종용으로 다행히 살 길을 얻고 충성하려 하였으나 또 요압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⑥ 그런데 전시에 시간을 못 맞춘 것이 자신의 불행을 자초한 원인이 된 것입니다. 시간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⑦ 요압은 불만과 야심과 시기로 아마사를 죽인 후 자기도 죽었습니다. ⑧ 아마사는 요압의 허리띠에서 칼 떨어뜨리는 것만 보고 손에 있는 칼을 의식하지 못하였습니다. 왕이라도 사람 다스리는 일이 이렇게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순진하게 살고, 겸손하게 살며, 또 공평하고 명분있게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다.
제82과 말씀따라 사는 생활 (창 12:4, 행 18: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말씀따라 사는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창 12:4에 보시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명령)을 따라 본토 고향을 떠나 수천리 타향으로 이주하였고, 신약 시대에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수님은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아브라함의 경우는 하나님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한 것을 뜻하고, 바울 사도의 경우는 말씀의 능력에 깊이 감화되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자신의 감정이 이끌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성도들도 아브라함처럼 무슨 일이든지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면 무조건 순종하여야 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 도취되어 말씀에 끌리며 강한 충격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따라 생활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심지어는 말씀아닌 것을 또는 세속에 관한 것들을 더 잘따르는 것을 볼 때도 있는 것입니다. 고후 13:8에 보시면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지 진리를 위할 뿐이라” 하셨고, 고전7:9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라” 하시므로 말씀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을 강조하셨습니다. 제가 “말씀따라 사는 생활”을 강조드리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1. 성도들 중에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절대 권위의 말씀으로 느끼지 않는 경우가 있음을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는 “성경 말씀이 이렇다” 하여도 느낌이 강하지 않으며 역시 실천할 의지와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 없는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는 성도는 신앙의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2. 성도들 중에는 진리 실천을 생활 목표로 하지 않고 자기의 생활 목표를 더 앞세우는 경우가 있으니, 이것도 역시 말씀따라 사는 생활이라고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자기 생활의 목표나 취미가 하나님의 뜻 과 말씀을 따돌려서는 안되겠지요. 성경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하셨지만 그 반대로 행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직업 선택을 할 때부터 그런 경향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자신의 취미 생활이나 목표보다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즐기는 것이(시 40:8) 더 귀한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성도 자신이 말씀에 굴복하는 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해 보지 않고 무관심하게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후 13:5에 보시면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계셔서 자신이 주님께 굴복당하지 않을 때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요 또 버리운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쉽게 말씀드려서 말씀에 굴복당하는 자가 성도요, 굴복당하지 않을 때는 마귀의 자식이란 뜻입니다. 반드시 말씀으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해야 할 것입니다. 계획을 세울 때, 억울함을 당했을 때, 감정과 언어를 나타낼 때, 특히 사람들을 친교할 때 “주님은 이 경우에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성경이 어떻게 지도하셨습니까?” 하며 반드시 여쭈어야 할 것입니다. 눅 22:51에 보시면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군병들에게 잡히실 때 베드로가 분을 참지 못하여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치니까 예수님이 “이것까지 참으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반드시 참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하지 않을 때 자기 정욕을 앞세우고 말씀을 무시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물질, 사람, 의식, 조직, 인간적 도움 같은 것을 더 중요시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요 6:68에 보시면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영생의 말씀은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성도들도 성경이 있고,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가 있으며, 예수님을 대리하여 축복하고 지도하는 목사가 있으면 그것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는 줄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대부분의 성도들이 말씀만으로 만조하지 않고 말씀에 잘 끌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배당 건물에 끌리고, 사람의 수에 끌리고, 예배 의식에 끌리며, 인간적 친교에 끌리는 것이 말씀에 끌리는 힘보다 더 강한 것이 현실적 믿음 상태인 것입니다. 만일 어떤 성도가 “외롭게 혼자 있다”고 가상하여 보십시오. 무엇으로 위로를 받으며 믿음을 지켜 나갈 것입니까? 그때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 뿐일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하시면서 우리 자신들이 말씀따라 사는 생활을 잘하고 있는지를 점검하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①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는 일, ② 진리 실천을 먼저 생활 목표로 세우는 일, ③ 자신이 말씀에 복종하는 성향을 갖고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시는 일, ④ 말씀보다 다른 것을 앞세워 따르거나 말씀보다 외형상의 것들에 먼저 끌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하여 반성하셔야 할 것이며, ⑤ 성경 하나만으로 만족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83과 하나님께 나가는 자 (시 24:3~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 나가는 자”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자가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 나가는 자란 구약적인 사고로서 제물을 갖고 성전에 나가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항상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드린다든지, 주일 공예배에 참석할 때는 하나님 앞에 더욱 가까이 나가는 뜻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구약 시대에도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에 나가는 것을 하나님을 가까이 뵈러 나가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면 저희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할 때 어떤 자세를 취하여야 할까요?
1. 깨끗함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여호와의 산(예루살렘을 뜻함)에 오를 자나 그 거룩한 곳에 설 자는 곧 성전에 나가는 자를 의미하는데, 그들은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손이 깨끗하다는 뜻은 하는 일이나 생활이 순결하여야 함을 뜻하고, “마음이 청결함”은 생각이 깨끗하고 옳아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거나 예배를 드릴 때는 마음을 깨끗하게 가다듬고 부정한 생활을 정리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뜻을 허탄한데 두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허탄”이란 허무한 것 즉, 가치없는 것, 영원하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현실은 유한하기 때문에 신령한 복에 비할 때 허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셨고(마 6:33),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영원한 축복에 비할 때 다 허탄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갈 때 되도록 현실적인 복을 외면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과 신령한 복을 강하게 추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 진실함을 보유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서 “거짓 맹세치 않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진실한 마음과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가끔 자기를 속일 때도 있습니다(갈 6:3). 하나님은 진실을 좋아하십니다. 믿음이란 용어 자체도 진실(피스토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속임을 행하지 않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진실을 외식으로 표현하였다면 얼마나 부끄러울까요?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갈 6:7) 아셔서 진실한 마음과 태도만을 나타낼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세로 나가야 합니다. 시100:2에서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큰 사모의 대상이시기 때문에 기뻐하고 그에게 소망을 두는 것이 당연합니다. 느 8:10에서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 하셨고, 시 37:4에서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의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 하셨으며, 또 시 146:5에서는 “그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잠시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할 때도 큰 소망을 갖고 아뢰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찬송하는 것이 기쁨의 표현이기 때문에 “찬송하며 그 궁정에 들어가라”(시 100:4)고 하셨습니다.
5.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시 100:4에 보시면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 화목제나 예물드리는 규례가 다 감사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빌 4:6에 보시면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해롭게 하신 일이 한 번도 없으시고 은혜만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영원히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감사한 마음을 안가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감사 없이는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6. 회개, 자복이 있어야 합니다. “제물을 드리러 가다가 이웃과 불화한 일이 있으면 먼저 용서하고 화해한 후에 드리라”는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마 5:23~24). 자신을 억울하게 한 사람일지라도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주기도문). 혹 형제와 갈등이 있을 때 합법, 불법 또는 옳고 그른 것을 가름하는 것과 상대방을 보복하는 것과는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잘잘못을 가름하는 것은 원수갚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7. 하나님 앞에 나가는 자가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함을 요구하신다”(미 6:6) 하셨고, 또,
8. 히 11:6에서는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평소에 하나님을 두렵게 생각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겸손하며, 공의롭게(모든 사리에 합리적으로) 행하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소원하는 성도가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에 대하여 교훈을 받았습니다.
제84과 부르심의 대비책 (히 9:27~2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부르심의 대비책”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 인간이 한 번 죽어야 한다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 유한한 피조물이기 때문이요,
2) 죄 값으로 죽게된 것이고(롬 6:23),
3) 천국가는 과정과 지옥가는 과정에서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임을 아는 사람은 거의가 죽음을 하나님의 뜻으로, 또 불신자들은 숙명적으로 받아들입니다. 특히 예수 믿는 성도는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천국으로 부르시는 것이 죽음이므로 이를 사모하고 감사하며 준비된 자세로 부르심에 응하여야 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생명의 주관자도 모르고 또 현실에만 소망이 있으므로 죽음을 슬퍼하지만, 성도는 천국가는 믿음의 목적이 성취되는 일인만큼 사후 세계에 큰 소망을 기대하면서 부르심에 응하여야 함이 신앙적인데도 그 반대로 행하거나 지나치게 세상 인정에 끌려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역하려고 하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질병에서 회생할 가망이 없음을 알면서도 끝까지 기적만 추구하고 부르심에 복종하려는 자세를 갖추지 않는 성도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사람이 자기의 인생을 잘 산다는 뜻은 잘 사는 데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잘 죽는데도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을 동등하게 중요시 하셨습니다. 롬 14:7~8에서 “우리 중에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살아도…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한다” 하셨고, 또 빌 1:21~26에 보시면 “바울 사도가 살면 현실인들에게 유익하고 하나님께로 가면 자신의 안식과 하나님의 뜻에 응하는 것이므로 다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세상에 더 사는 것과 하나님께 가는 것을 꼭같이 필요한 것으로 믿고 주님의 뜻만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3. 그런데 문제는 반드시 부르심을 받을 때가 있다는 사실과 그때가 언제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인이 올 때를 모르는 종이 항상 대문 앞에 나가서 기다리는 것처럼(눅 12:40) 성도들도 자신의 부르심에 대하여 신앙적으로 또는 생활적으로 대비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1) 신앙적 대비에 대하여 상고해 보겠습니다.
① 우선 영생을 확보하는 구원적 신앙을 가져야 하겠지요(요 3:16).
② 하나님이 어느 때 부르셔도 세상살이에 미련을 떠나서 천국 또는 하나님 보좌 곁으로 간다는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하겠지요.
③ 영생과 함께 하나님을 뵙게 되고 또 하나님의 상급과 칭찬을 받아야 하니까 늘 사모하고, 좋은 일, 좋은 목표를 많이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④ 또 무슨 일을 계속하다가 중간에 부름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남은 일에 대하여 다음 사람이 계승할 수 있도록 부탁하는 일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⑤ 죽음에 대한 의미가 성도에게는 안식도 되고, 주님 곁으로 가는 것이며, 마귀와의 투쟁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또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도 불행 아닌 유익을 준다는 사실을 믿고 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생활적으로 대비하는 것이 있습니다.
① 죽음을 당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인데,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이삭처럼 기운이 진하여 죽는 경우도 있고(창 25:8, 35:29, 49:33), 엘리사나 아사 왕처럼 병으로 죽는 경우(왕하 13:14, 대하 16:12)와 또 사고로 죽는 경우 등이 있습니다. 이때가 언제일지 아무도 모르며, 또 어떤 상태로 가게 될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성도는 죽음 또는 죽음의 고통과 관련하여 시험에 들지 않기를 미리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마26:41). 저희 조모님은 “하나님이 이 늙은 여종을 세상에 오래 두지 마시고 좋은 계절에 사흘만 앓고 데려가 주십시오” 하셨는데, 83세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오랫동안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런 것을 볼 때마다 부르심의 대비책으로 고통하지 않고 부름받을 수 있기를 기도로 준비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② 혹 성도가 고통을 맛보며 부르심에 응하게 될 경우에는 첫째로, 내게 주시는 고통을 채찍으로 알고 회개하지 못한 부분들을 살펴야 할 것이요, 둘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고통과 비교해 볼 것이요, 셋째는 죄값으로 고통과 사망이 온 것인즉 죄사함 받지 않을 때는 그 고통이 지옥으로 영원히 계속됨을 깨달을 것이요, 넷째는 주님의 대속으로 그런 고통이 없게될 것을 감사할 것이요, 다섯째는 육체의 고통으로 고통많은 현실적 욕구를 끊게 하심이요, 여섯째는 천국의 안식을 맞이할 때 고통에서 안식으로 바뀌어짐이 더 큰 행복을 느끼게 됨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③ 자녀들에게 앞으로 살아가는 방법이나 장례식 절차까지 잘 알려두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임박하게 믿으면서 부지런히 살고 부지런히 준비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언제 끝날는지 알지 못하므로 항상 바쁘게 살고 깨끗하게 살며 봉사적으로 살면서 앞에 말씀드린 내용대로 죽음에 대한 대비를 잘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85과 죽음의 고통 (대하 21:18~2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죽음의 고통”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시면 “하나님이 여호람 왕을 치사 그 창자에 고치지 못할 병이 들게 하셔서 2년을 앓다가 아끼는 자 없이 죽으니, 그 시신을 다윗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조의 묘실에는 두지 않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생명을 하나님이 주관하시고(신 30:15, 행 17:36), 죄값으로 질병을 주신다는 말씀이 성경에 있습니다(신 28:60, 고전 11:30, 계 2:22). 목회를 하는 중에 많은 성도가 질병으로 고생하고 세상 떠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왜 저런 고통을 당하게 하시고 데려가셔야만 하는가? 십자가의 공로로 저 고통을 면제해 주실 수는 없을까?”하고 연구하던 차 “하나님이 세상 떠날 성도에게 고난을 주시면서 시간을 끄시는 것은 환자로 하여금 충분히 자신의 죄를 회개케 하시는 기회를 주심일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또 “열심히 회개를 많이 하여 하나님의 노여우심을 풀어드리라”고 권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어머니도 돌아가실 때 약 20일간 큰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제가 아는 대로 저의 어머니는 천사처럼 착한 분이요, 또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런데도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죽음에 앞서 고난 주시는 이유”를 또 연구하게 되었습니다(창 25:7, 35:28, 47:28, 50:22, 신 34:7, 수 24:29). 그리고 근대에 와서는 70~80이 평균 나이이지만 사람의 수명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이고, 오래 살아도 의미 없이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적게 살아도 의미 있게 살면 귀한 일이란 것을 예수님이나 세례요한이 증명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신앙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날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기운이 진하여 세상을 떠났고(창 25:8, 35:29, 49:33), 엘리사는 죽을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으며(왕하 13:14), 사울 왕은 범죄 하여 하나님이 죽게 하셨고(대상 10:13~14), 아사왕도 발에 병이 들어 죽었으며(대하 16:12~13),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이 죽을 병을 주셨다가 그의 회개하는 것을 보시고 병을 낫게 하여 15년을 더 살게 하셨습니다(대하 32:24, 왕하 20:2~7). 또 “범죄 하는 자를 질병으로 징계하여 침상에 눕게 하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고전 11:30, 약 5:15, 계 2:22). 이렇게 인간의 생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죽는 방법도 여러 가지인데, 성도가 장기간 병으로 고생하거나, 그 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며, 권면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죽기 전의 고난은 징계와 연단과 경고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수고와 고통을 명하셨습니다(창 3:16, 17). 또 욥 23:10에서 “고난은 연단을 준다”하셨으며, 또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의미도 역시 연단과 경고에 있었습니다(고후 12:7~9). 그런 뜻에서 죽음 전의 고난은 믿음의 연단과 회개의 기회를 주심인줄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2. 세상의 미련을 끊는 채찍인줄로 믿는 것입니다. 사람이 늙으면 세상의 낙이 없어집니다. 또 병이 들어 아플 때는 낫기를 바라고 더 살기를 바라지만 고통이 계속 될 때는 속히 세상을 떠나기를 사모하게 됩니다. 아무리 세상의 애착이 있는 자라도 아픔이 계속 될 때는 현실의 애착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큰 풍파 일어나는 것, 세상줄 끊음일세”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몹시 아프시기 전부터 세상의 애착은 없으신 것 같았는데, 내세의 즐거움을 열망하는 표현을 하시지 않아서 제가 찬송으로 일깨워 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임종시의 고난은 세상을 등지라는 섭리입니다.
3. 십자가의 고난을 상기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죽어 가는 고생을 할 때,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여섯 시간을 매달려 고난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신호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죽는 고통을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고통과 비교하면서, 십자가를 생각하셔야 할 것이요,
4. 예수님이 대속해 주시지 않았으면 이런 고통이 지옥에까지 연결되어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의 안식을 주시기 전에 지옥의 고통이 어떤 것을 맛보게 하셔서 예수님의 큰 은혜를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지옥은 그런 고통이 연속되는 곳입니다.
5. 그런데 주님은 십자가로 그런 고난을 영원히 면제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면 죽음의 고통을 당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6. 임종에 있지 않은 성도들에게 고통 없는 죽음을 힘입기 위하여 미리 기도하라는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죽음의 고통도 일종의 시험이니까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특별히 깨닫고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마 26:41). 제가 죽음에 대비하는 설교를 자주 하였지만, “고통 없는 죽음을 위한 기도를 하여야 하겠다”는 교훈은 어머니 별세하실 때에야 깨달았습니다. 저의 할머니는 83세 때 별세하셨는데, “3일만 앓고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고, 꼭 그대로 응답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7. 고난이 많은 만큼 천국에서의 위로가 클 것이기 때문에 고난 당한 것 자체를 후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눅 16:25에서 “세상에서 고난을 받은 나사로가 위로를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을 순종으로 받으면 그 고난이 은혜와 위로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교훈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시 126:5~6).
결론적으로 모든 성도들은 임종시의 고통에 대하여 이를 면제하여 주시도록 기도하시고, 고통 주시는 이유를 깨달아 믿음으로 대비하며 용기있게 소망을 갖고 주님을 영접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86과 신앙과 절기 (민 29:1~12)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 중에서 세 가지 절기를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는 ‘나팔절’이요(1~6), 또 하나는 ‘큰 안식일’이며(7~11), 마지막 12절 이하에는 ‘초막절’에 대한 말씀이 기록된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절기는 이 말씀 외에도 많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음력 구정이나 8월 한가위를 아주 큰 명절로 지킵니다. 이 명절은 분명히 민속 절기입니다. 성도들이 이런 명절에 동화되면서, 한국의 민속 명절은 어떤 것이 있으며, 또 이스라엘 선민들에게 어떤 신앙적 절기를 주셨는가? 또 우리는 왜 구약 성경에 나타난 절기를 지키지 않으며, 신약의 성도가 참되이 지켜야 할 신앙적 명절은 무엇인가? 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1. 우리 조상들은 많은 민속 명절을 지켜 왔습니다. 음력 1월에는 초하루, 보름을 지켰고, 2월에는 초하루와 한식날(동지 지난 105일)을 지켰으며, 3월에는 3일 삼진날을 지켰고, 4월에는 초파일, 석가 탄신일을 지켰고, 5월에는 단오, 6월에는 유두, 7월에는 칠석, 8월에는 한가위, 그리고 11월에는 동짓날을 지켰습니다. 이런 민속 전통 중에 구정과 추석이 가장 큰 명절인데, 이때에 조상들은 돌아가신 조상들에게 제사드리는 일을 큰 일로 여겼습니다. 이런 일들에 대하여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할 때,
1) 죄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상 숭배나 방종, 나태 같은 것을 삼가야 하고,
2) 신앙에 손해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명절이 주일과 겸했거나 신령한 은혜받는 기회를 민속절로 인하여 손해되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요,
3) 믿지 않는 사람들과 모임을 가질 때 성도의 기본 자세를 잃지 않도록 힘을 써서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선민들에게 여러 종류의 절기를 주셨습니다.
1) 선민의 출애굽 때를 1월 1일로 시작하여 1월 14일~21일까지 ‘유월절’을 지키게 하셨습니다(출 12:1~27, 레 23:4~14, 민 9:1~14, 신 16:1~8). 이 유월절은 출애굽과 어린 양의 희생의 피로 구원받게 된 것을 예언 또는 기념하는 절기로, 신약 시대의 성찬 예식과 상통함이 있는 것입니다.
2) 안식일 계명을 십계명 중 4계명으로 주셨습니다(출 20:8~11).
3) 매월 초하루에 지키는 ‘월삭’이라는 것이 있었고(민 10:10),
4) 매년 7월 중에 세 번의 절기가 있는데, 1일에는 ‘나팔절’로 성회를 갖게 하셨고(민 29:1~6), 10일에는 ‘큰 안식일’이라고도 하고 ‘대 속죄제일’이라고도 하는 절기가 있었으니, 이날은 대제사장이 민족 전체의 속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고, 그 희생의 피를 지성소에 1년에 한 번 들어가서 드리는 것입니다(민 29:7~11, 레 16:26~32, 25:9). 그리고 15일부터 8일 동안 드리는 ‘초막절’ 행사가 있는데(민 29:12~38), 이것은 광야에서 초막 생활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5) ‘칠칠절’이 있습니다(민 28:26, 출 23:16). 이 칠칠절은 유월절을 지난 후 일곱 주간을 지난 때로서 맥추의 초실절과 비슷한 시기에 해당되기 때문에 칠칠절, 맥추절, 초실절을 같은 절기로 지키게 되었고,
6) ‘수장절’은 년종(年終)에 지키는 감사절이며(출 23:16),
7) 또 ‘안식년’(7년마다 1년을 쉬는 것)이 있고(민 25:4),
8) 일곱 번 안식년을 지난 다음 해 즉, 50년 되는 해를 ‘희년’이라 하여 그 해도 안식을 하면서(레 25:11) 종들을 해방시키고, 부채를 회복시키는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9) 그후 바벨론 포로 이후 바사 시대에 하만의 흉계에서 민족이 살게된 것을 기념하는 ‘부림절’을 12월 14~15일에 지킨 일이 있었습니다(에 3:7, 9:15~52).
3. 중요한 것은 이렇게 많은 절기를 신약의 성도들이 지키지 않는 이유는,
1) 우리가 당시의 이스라엘 왕국같은 선민국이 아니기 때문이요,
2) 구약 계시나 제사 제도 및 절기 행사 등을 주신 목적이 예수님을 나타내기 위함인데, 예수님이 친히 오셔서 모든 것을 성취하셨고,
3) 신약의 성도는 계명의 주되신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모범을 따르면 되기 때문입니다(마 17:1~6, 엡 2:20).
4) 또 신약 시대에 지키는 절기는 주일을 지킬 것이 성경에 계시되었고(고전 16:1~2, 계 1:10, 요 20:19), 그 이외의 고난주간과 부활절, 성령강림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은 모두 성도의 신앙의 유익을 위하여 교회가 정하여 지키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가 지켜야 할 관심있는 절기는 신약 교회의 절기들이며, 그 중에도 중요한 것이 성수 주일이고, 다른 것은 다 신앙의 덕을 위하여 지키되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님과 영생의 은혜와 모든 은혜에 관한 것을 그 해당 절기에만 상기할 것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항상 절기를 지키는 심정으로 생각하며, 기도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것임을 아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87과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음 (시31:14~16) 목록으로
신년을 맞이하여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음”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 15절에서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내 시대”(이토타이)란 “나의 날들” 또는 “나의 한 평생”이란 뜻이기 때문에 “나의 한 평생에 당할 모든 사건들”을 의미합니다. 대상29:30에도 보시면 “온 세상 열국의 지난 시사(時事)가 다 기록되니라” 하셨는데, 이 말씀의 시사란 뜻도 ‘이토타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한 평생의 당할 모든 일들이 다 주의 손에(주님의 장중에, 주님의 주관과 인도하심에)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길을 지도하심에 있어서 “내가 너를 손바닥에 새겼고 너희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으며”(사 49:16),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라”(사 48:17) 하셨고, 또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신다”, 또 때로는 “고난스러운 일도 당사자의 유익을 위하여 주신다”(히 12:10, 시 119:71)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은 물론 우주의 모든 생명체와 심지어는 머리털 하나의 희고 검은 것까지 하나님의 통치와 주관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인간의 모든 일을 “운명에 달렸다”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하면 된다”는 신념만 내세워 인간의 노력과 수단에 달린줄 알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잠 16:9과 33절에 보시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하나님이시라. 일은 하나님이 작정하셨을지라도 사람으로 하여금 제비를 뽑게 하신다” 하셨고, 빌 2:13에서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만사가 하나님의 뜻에 달렸음은 하나님이 만사를 계획하시고 주관하시며 인간에게 소원과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2. 인간의 시대가 주님의 손에 있으면 성도가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1) 자신의 미래에 있어서 부정적 생각을 갖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온갖 좋은 것으로 주시며, 유익하게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며(약 1:17, 사 48:17), 또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이 다르니까(사 55:9) 하나님의 높고 거룩하신 뜻에 자신의 길을 맡기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일들 중에 “안됐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혼여행 중에 교통 사고로 죽는 일, 목사되자 세상을 떠나거나 또 교회 부임 사흘 만에 떠난 목사님도 계셨고, 선교사를 꿈꾸다가 못가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고 믿을 때는 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야 되니까 크게 위안도 되고 또 미래의 유익을 기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며 의지하게 됩니다. 어린아이들은 돈이나 먹을 것을 잘주는 사람을 가까이 따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이 성도의 생활과 미래를 주관해 주시니까 그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자기를 가까이 하는 것을 좋아하시고 그것을 복이라”고 하셨습니다(시 73:28). 오늘은 물론 금년 한 해도 하나님이 붙드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가까이 하셔야 할 것입니다.
3) 마음의 평안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만일 인간의 일들이 악의 지배를 따라 좌우된다거나, 무능한 인간들에게만 맡겨진다면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하겠습니까? 그런데 인자하신 하나님이 만유를 지배하시고 성도를 다스리시기 때문에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가 하나님께 대한 신뢰로 든든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믿음의 보람이 없을 것입니다.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한 등반대장 ‘김영탁’ 씨는 영하 30~40도의 추위와 눈사태와 산소의 핍절 속에서 시편121편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등반을 하였는데, 눈이 온다는 기상 예보에도 불구하고 눈이 오지 않았고, 산소통을 받게 되어 호흡을 견디며 무난히 정복한 후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라”라는 말씀을 실감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르는 버스에서도 툭 튀어나와 산 사람이 있었고, 1948년 10월 6일에 소련의 ‘이스챠바드’에서 큰 지진이 있었는데 기독교의 탄압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20명의 기숙사가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이런 사례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지하는 성도가 안연히 거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신 것입니다(시 27:3). “천만인이 네 곁에서 쓰러질지라도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이르지 못하리로다”(시 91:7) 하신 말씀을 실감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4) 무한한 자유와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진리는 자유를 보장하십니다(요 8:32).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이 없었어도 믿음과 소망이 약하여지지 않았으니 이것도 성도의 시대가 하나님께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셨습니다(히 11:1). 성도의 시대를 특별한 은총으로 지도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시고 기대하시며 소망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소망을 주시는 분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도의 길을 지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이 여러분들의 미래를 든든하게 또 발전있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든든하게 믿으시고 새 해의 새생활을 내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88과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 목록으로
1. 신년 새출발부터 “날마다 죽는 일”을 하셔야 하겠습니다. 바울 사도의 날마다 죽는 생활은 그리스도 안에서 갖게 되었고 또 그런 생활을 “자랑스러운 일로 단언한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진리를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스런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의 “날마다 죽는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우선 이 말씀을 살핌에 있어서 날마다 죽는다는 뜻은 자기를 완전히 부정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16:24~25에 보시면,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라”는 교훈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위하여 순교적 신앙을 갖고 사는 생활이 바로 날마다 죽는 생활입니다. 죽음이란 용어는 여러 가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죄와 허물로 죽은 영적 죽음”(엡 2:1, 5), “육신의 죽음”(엡 1:20, 히 9:27), “영원히 벌받는 멸망”(계 20:14 ; 둘째 사망), “완전한 타락 상태”(눅 15:24, 히 6:1)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이 말씀하는 죽음은 자기 부정이요 순교적 각오(고후 1:9)를 뜻하는 것입니다.
2. 바울은 날마다 죽는 생활을 예수님 안에서 얻었고 또 자랑하셨습니다.
1) 예수님 안에서 얻었다는 뜻은 바울이 예수님을 알게되었을 때 그 분이 생명의 주요 구세주란 사실을 알았고, 그동안 자신이 죄인인 줄을 몰랐다가 죄인임을 알게 되면서 자신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된 것입니다. 피조물이요 부패성을 지닌 죄인인 자기가 살면 안되고 거듭나게 하신 생명의 주, 능력의 주님이 자기 속에서 살아주셔야 한다(롬 7:9)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2) 바울이 자기를 죽여 없는 것처럼 여기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았을 때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되어 신앙 생활의 보람을 느꼈기 때문에 자기를 죽이는 생활을 자랑거리로 아신 것입니다. 오늘날 자기를 죽이면서 그것으로 보람을 느끼는 성도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3. 자기를 죽이는 방법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1) 겸손입니다. 겸손을 복된 은혜로 여기지 않으면 자기를 죽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시다고 하셨습니다(마 11:29). 그 겸손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빌2:6에서 “하나님과 동등하시나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 하시므로 겸손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이 하나님 앞에서의 낮추심이라면 성도의 겸손은 성도의 세계에서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자기를 낮출 수 있어야 자기를 죽이는 단계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2) 자기의 정과 욕심을 못박는 것입니다. 갈 5:24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자기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육체와 현실의 소욕을 없애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롬 8:13). 재물이나 출세나 현실적 발전에 대하여 크게 여기지 않으며, 좋게 여기지도 않으며 따라서 사람들과 경쟁하지도 않고 항상 양보하고 자기 일에 충실하며, 사치와 향락을 싫어하고, 신령한 은혜에 집착하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가능한 것 같아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함을 알 때에는 가능하다”고 빌 3:8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현실주의의 욕심을 저버리지 못하면 자기를 죽이는 일은 가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날마다 죽는 생활은 죄에 대하여 자기를 죽은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롬 6:2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하셨고, 또 6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죄를 외면하는 것이 자기를 죽이는 생활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힘쓰는 것이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4. 이렇게 자기를 죽이는 생활을 잘하면 어떤 결과가 옵니까?
1) 예수님의 인격을 닮게 됩니다. 자기를 없이 하였으니까 그 빈 마음에 예수님의 영이 들어오셔서 자기 대신 살아 주실 것이므로 예수님의 인격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다스리셔야 하는데 만일 성도가 자기 부정을 못하면 진리되시는 예수님을 왕노릇하시지 못하게 합니다. 롬 6:5에서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하시므로 자기를 죽이는 것이 곧 주님과의 연합임을 말씀하셨습니다.
2)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앞세우기 위하여 자기를 부정한 것이니까 당연히 자기 뜻과 욕심은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복종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죽은 나무라야만 마음대로 가공하여 재목에 쓸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성령의 충만을 받게됩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자기를 죽일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셨으므로, 성령님의 역사가 더 활성화되는 것입니다(갈 5:16, 17).
4) 주님을 위하여 사는 자가 되어 칭찬과 상급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자가 되려면(롬 14:8) 자기를 죽이는 자이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자기 부정을 강조하셨는데도 많은 성도들이 자기 중심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깊이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과연 “날마다 죽는 생활을 잘 하시는지” 순간 순간 점검하시면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89과 십자가 주위의 사람들 (눅 23:26~4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십자가 주위의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빌라도의 명령이 떨어지자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워 골고다까지 가서 사형 집행을 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어떤 사람들이 십자가 곁에 있었는지를 살피고, 저희들이 주님의 십자가를 신앙적으로 가까이 할 수 있기 위하여 이 말씀을 상고하려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군병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빌라도의 명령에 복종하여야 할 형리들이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만(롬 13:1) 그들도 예수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을 것이요, 따라서 예수님께 포악을 가한 점이 악한 것입니다. 그 당시의 군병들이 포악하였다고 하셨습니다(눅 3:14). 그 증거로서 예수님을 희롱하고 비웃었으며(35절), 가시관을 씌웠고(막 15:17), 예수님의 옷을 네 깃에 나누어 제비를 뽑아 가졌으며(요 19:23), “목마르다” 하셨을 때에도 물이 아닌 신 포도주를 드려 더 괴롭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이 알지 못하여 그러하므로 용서해 달라”(34절)는 기도를 하셨으니 모르고 지은 죄가 정상은 참작되나(행 17:30) 죄가 아닐 수 없음을 알 수 있고, 또 여기서 용서의 대상은 택한 백성이 아닐진대 일반적 사랑의 표현일 것입니다(마 27:54). 군병들의 포악으로 예수님은 더 어려운 고난을 당하셔야만 했으니 예수님 앞에서의 포악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발걸음이 더디자 군병들은 곁에서 구경하며 서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을 시켜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마 27:32). ‘구레네’는 아프리카 북쪽 지중해변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가 외국에 와서 사형 집행의 광경을 보게된 것은 무리가 아니지만 군병들의 강요를 받고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된 것입니다. 잠시나마 예수님을 쉬시게 하였으니 좋은 일을 한 것입니다. 시몬이 좋은 일을 할 바에는 억지로 하지 않았으면 더욱 좋을뻔 하였습니다. 십자가 중심으로 사는 성도들은 무슨 일이나 하나님 앞에서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행함이 원칙입니다. 예수님이 지시는 십자가가 억지였다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속죄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나 순종과 자원함으로 지셨기 때문에(요 10:18) 열납이 된 것을 생각하면서 저희들은 억지로 십자가를 따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이 일부분이지만 속죄 사역에 보탬을 준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그것은 억측에 불과합니다. 구속 사업은 예수님만이 홀로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임명을 받은 중보자만 하는 것입니다(요 14:6, 사 63:1~6, 히 5:4~7).
3. 멀리 서서 슬피 울며 따라오는 여자의 큰 무리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27~31절). 그들은 십자가 곁에 있던 예수님의 모친과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막달라 마리아 외의 여러 여인들이었고(요 19:25~26), 그들이 슬피운 이유는 동정하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셨으니(눅 23:24) 이것은 주후 70년에 있을 예루살렘 심판을 염두에 두시고 경고해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성도들이 예수님을 동정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차라리 자신과 자녀들의 죄를 인하여 울어야 할 것입니다.
4. 백성은 서서 구경하였다고 하였습니다(35절). 의로운 예수님이 죄인이 되어 사형 집행장으로 나가는 사건은 예사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무감각한 많은 백성들은 구경만 하였습니다. 아무런 비판의 소리도, 성원의 소리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구경거리입니까? 신앙 생활은 구경하는 것이 아니지요.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명에 집착하면 구경하는 일을 손해보는 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운동이나 친교나 육체적, 정신적 휴식으로 잠시 소일하는 것 외에는 구경으로 시간 낭비를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 교회에도 구경꾼처럼 다니는 사람이 되지 말고 반드시 봉사적인 일에 힘을 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5. 십자가 곁에는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한 강도는 이유없이 반항하며 예수님을 비방하고 원망하였지만, 또 한 강도는 비방하는 강도를 꾸짖으면서 자신들이 받는 벌은 당연하고 그 반대로 예수님은 죄지은 일이 없이 사형을 받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구원을 호소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변호한 사람은 그 강도 뿐이었습니다. 그는 외치기를 “이 사람은 죄없이 돌아가시는 분이라” 하였으니 이런 외침이 의로운 백성들의 입에서도 나왔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회개와 변호와 간청을 받으시고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 하시므로 구원을 선포해 주시므로,
1) 구원은 행위로 받지 않는다는 사실과,
2) 강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과,
3) 또 죽기 직전에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이렇게 십자가 주위의 인물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저희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성도들입니다(고전 2:2).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십자가, 고난과 희생의 십자가, 겸손과 복종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항상 기억하시고 또 항상 주님의 십자가 곁을 떠나지 않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 곁을 떠났던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마 26:35, 막 14:31, 요 6:28, 요 11:16).
제90과 십자가의 정신과 생활 (고전 2:2, 갈 5:24) 목록으로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십자가와 관련있는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1. 본문 말씀은 바울 사도께서 하신 말씀으로서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말씀과 “십자가를 믿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십자가의 자랑은 정신적(신앙) 상태요, “정과 욕심을 못박는 것”은 생활적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십자가를 항상 매일 생각하고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믿음과 생활로 실천하여야 할 자들인 만큼 이번 고난 주간에도 그 교훈에 주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구상할 때 십자가 중심의 생활을 본 보이는 ‘김종수’ 목사님의 생활을 소개하려고 계획하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젊어서부터 사랑의 사도였지만 저는 그 목사님의 나이 78세 때에 만나 뵈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영세 교회를 개척하여 큰 교회로 키우시고, 아들 목사님에게 인계하신 후 은퇴하여 많은 후배들을 교육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의 교훈의 특징은 오직 사랑이었고, 사랑의 실천자이었습니다. 그 분이 시무하는 교회에는 거지들이 떼로 몰려오는데, 올 때마다 구제금을 주고, 주정뱅이와 거지와 얼굴을 맞대는 사랑의 포옹을 하신다고 합니다. 왜 술주정뱅이를 책망하여 쫓지 않느냐고 질문하면, “나도 15년이나 술주정뱅이로 방탕하며 어머니 속을 썩인 사람이었으므로 그보다 더한 죄인이었기에 자신보다 나은 그 사람을 책망할 수 없음이 당연하다”고 대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그 목사님이 거지와 포옹하는 사진을 찍어준 일이 있었는데, 그 사진을 가진 거지가 다른 교회에 구걸하러 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하자 그 사진을 내보이며 “김 목사님은 나를 이렇게 사랑하여 포옹까지 하시고, 자기 교인들은 소찬을 먹으면서도 우리들에게는 고기 국을 끓여 주시는데 당신의 교회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항의를 하여 그 교회 목사님을 크게 부끄럽게 하였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 목사님의 선친은 ‘김영구’ 목사님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아들로 15년을 방탕하고, 어머니 ‘박세라’ 사모님의 기도로 변화되었고, 그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회개하고 목사가 되셔서 사랑 중심의 목회로 일생을 사시는 분이셨습니다. 그 분에게는 사랑의 천국 방언이란 17개의 구호가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반갑습니다, 사랑합니다, 잘했습니다, 얘야 괜찮다 다 모르고 그랬는걸, 얘야 괜찮다 너 나와 같이 살자, 얘야 괜찮다 다 나 때문이다, 내가 썩어야지, 얘야 괜찮다 내가 썩어야지, 얘야 걱정마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만 봐라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얘야 잘 믿어야 한다, 얘야 잘 살아야 한다, 얘야 잘 죽어야 한다, 얘야 영원히 천국에서 더 잘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은 김 목사님이 어머니의 임종을 보시기 위하여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임종시에 아들과의 대화에서 주신 말씀인데, 그때 김 목사님은 임종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생각하였고, 자신을 돌아온 탕자와 회개하는 강도로 비유하여 큰 교훈을 받고 변화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의 열일곱개의 사랑의 천국 방언을 노래로 부르고 그렇게 실천하시는 것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2. 십자가의 정신은 다른 사람의 죄를 짊어지는 사랑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요일 4:10에 보시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을 본받아 사랑을 강조하신 말씀이요, 바울 사도는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딤전 1:13,15에서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하셨고, 본문에서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를 작정하였다“ 하셨으며, 또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고도 하셨습니다. 또 롬 14:7~8에서는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 하시고 그대로 생활하신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정신과 생활에 대한 말씀을 결론짓는다면,
1) 십자가의 정신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에게 돌리셨고, 죄인들에게는 사랑만 주신 것입니다. 그 사랑의 강도(强度)는 독생자를 고난과 죽음에 내어주시기까지 하신 것이요, 사랑의 성질은 죄인에 대한 용서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정신은 사랑의 실천이며, 십자가 중심의 생활은 죄인에 대한 용서입니다.
2)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믿고 천국가면 그만인 줄로 압니다. 그러나 진정한 십자가의 신앙은 사랑을 동반하여야 하는 것이 믿음과 행위를 나눌 수 없음과 같은 것입니다. 저희들은 지금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믿을 때부터 알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십자가 정신과 생활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지가 술을 먹고 열 번을 와도 마다하지 않는 ‘김종수’ 목사님의 사랑 실천과, 모든 것이 나 때문이란 책임 실천이 바로 고난 주간을 보내는 성도들이 시행할 바라는 것을 강조하려고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91과 부활의 종류 (행 24:14~16) 목록으로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의 종류”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부활은 다시 살았다는 뜻이며, 죽은 생명을 되돌려 받았거나 새 생명을 다시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뜻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니, 예를 들면 영적 부활, 육적 부활, 의인의 부활, 악인의 부활, 첫째 부활, 더 좋은 부활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부활의 종류를 말씀드리고, 저희들이 추구하는 부활에 대하여 강조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영적 부활이 있습니다. 요 3:3에서 “거듭난다”는 말씀이 있고, 엡 2:1에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는 말씀이 있으며, 딛3:5에서 “중생의 씻음”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타락하므로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에 포함된 죽음으로 영적 생명 즉, 신앙의 생명이 죽은 것을(창 2:17, 3:8) 다시 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죽은 영적 생명을 다시 받은 것입니다. 영적 새 생명의 창조를 받으면 믿음이 생기고, 성경을 믿게 되며, 새 마음을 갖게 되고(롬 7:6, 겔 11:9),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벧후 1:4) 인격에 큰 변화를 일으키며, 그리스도를 닮고, 하나님을 알며, 죄를 미워하게 되고, 세상을 이기는 힘도 갖게 되어(롬 2:29, 골 3:10, 요일 3:9,5:4) 크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영적 부활을 받아야만 성도가 되고 진실된 신앙 생활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2. 육체적 부활이 있습니다. 이것은 요 11:44과 행 9:40에 나타난 말씀에서 나사로와 다비다가 죽음에서 다시 산 것을 의미합니다. 이 육체적 부활은 죽음의 병을 다시 고친 것처럼 얼마 더 살다가 다시 죽게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적은 하나님의 특별 섭리에 의하여 복음이 진리인 사실을 증명하거나(히 2: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요 11:4) 나타내 주셨던 것입니다.
3. 예수님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것인데, 이 부활은 특수한 부활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처럼 부활하는 것이고, 다시 고난을 당하거나 죽을 수 없는 몸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 부활의 시범을 예수님만 보여주셨고, 장차 성도들도 그런 부활을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고전 15:20). 성경에 보시면 “예수님의 부활”(마 27:53, 벧전 3:21), “그리스도의 부활”(행 2:31)이란 말씀이 있고, 이 권능으로 성도를 거듭나게 하시고 부활과 영생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빌 3:10). 이 부활의 특징은
1) 다시 죽을 수 없고,
2) 천국과 지상을 왕래하며(예수님의 입장),
3) 지상에서 볼 수 있고, 만질 수도 있으며, 음식을 먹을 수 있고, 거리와 공간 장애물에 제한없이 움직이며 변형할 수 있는 등 다양한 모습이었고,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은 더욱 영광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눅 24:16, 43, 마 26:32, 계 4:3, 요 20:19, 행 1:9). 이와 같은 예수님의 부활이 세상 끝날 주 재림시에 성도들에게도 있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고전 15:20).
4. 부활의 대상인 인간의 형편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으니 그것이 곧 첫째 부활과 마지막 부활이며(요 5:29), 더 좋은 부활과 그렇지 못한 부활로(히 11:35, 유 1:23, 고전 3:15) 용어상 표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1) 첫째 부활은 성도의 부활입니다. “예수님 재림 때 살아있는 성도가 먼저 변화되고 이어서 죽은 성도의 몸이 부활하여 공중에 재림하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 부활이요(살전 4:16~17),
2) 의인과 악인의 부활입니다. 악인의 부활은 사탄을 영원히 가둘 때 부활케 하셔서 심판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고전 15:26). 성경을 잘 모르시면 의인만 부활하는 줄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악인도 부활한다”고 하셨습니다(행 24:15). 악인들도 부활하여 지옥에 가야 영육이 아울러 고통을 받게될 것입니다.
3)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도 역시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을 구별하시는 말씀이요(요 5:29),
4) 더 좋은 부활이란 말씀이 히 11:3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더 좋은 부활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하늘의 상급을 많이 예비한 성도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히 11장에서 믿음의 역사와 순교자의 역사를 말씀하시고, “그들이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하여 악형을 구차히 면하지 않았다” 하셨으니, 영광의 큰 상급을 받을 성도들의 부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더 좋은 부활이 있는가 하면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사람(고전 3:15), 불 가운데서 건짐 받는 사람처럼 겨우 구원만 받는 사람들도(유 1:23) 있다 하셨으니, 이들은 천국에서 상급 받을 것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부활절을 지키는 저희들이 어떤 각성을 하여야 할 것입니까?
① 부활의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음을 기억하셔서 영적 부활, 육체 부활, 영화로운 부활을 사모하셔야 하고,
② 이 부활의 은혜가 대단히 큰 것을 실감하시면서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거듭난 생명과 영생의 복이 주어짐을 깨달으셔야 하며,
③ 의인의 부활 중에도 더 좋은 부활이 있다 하셨으니, 그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하여 힘써야 할 것입니다. 더 좋은 부활은 “그리스도를 인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않는 자가 받는다” 하였으니, 믿음과 사명을 위하여 받는 고난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 영생의 소망, 상급의 소망을 성취하셔야 하겠습니다.
제92과 부활과 바울의 신앙 고백 (고전 15:8~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부활과 바울의 신앙 고백”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과 중대한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하시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울에게 나타나셨고, 그 때를 계기로 하여 바울은 큰 변화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행 9:3에 보시면 바울(사울)이 기독 성도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다메섹 쪽으로 갈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빛 가운데 그에게 나타나셔서 바울(사울)을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변화의 은총을 주셨을 때 바울은 유대주의적 이단 종교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변화되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었고, 기독교인에 대한 살기 등등한 감정도 사랑으로 변화되었으며, 더 나가서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는 사명자로 변화되어 주님이 쓰시는 귀한 그릇이 되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바울에게 나타나 주신 것을 바꾸어 표현하면,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의 종교와 인생관과 사명관이 혁신을 받게된 것입니다.
1. 부활절을 맞이한 성도들도 바울처럼 변화된 모습을 나타내야 합니다.
1) 바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므로 예수님을 생명의 주로 믿게 되었고,
2) 예수님과 성도들에 대한 적대감이 사랑으로 변화되었으며,
3) 사도적인 자격을 얻고 충성하는 전도자로 변화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것과(고전 9:1) 영감의 은총을 받은 것이(엡 2:2~3) 사도의 조건입니다. 만일 저희들이 부활절을 지키면서 신앙 인격과 생활과 사명 생활에 좋은 변화를 갖지 못하면 부활절을 지키는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2. 바울 사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변화된 상태를 더 살핀다면,
1) 유대주의 이단자가 복음 신앙을 받아 들였고,
2) 성도를 핍박하던 자가 오히려 복음 전하는 자로 변화했으며(행 9:22),
3) 율법지킨 것을 자랑하다가 죄인 중의 괴수가 되었고(딤전 1:15),
4)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던 자가 오히려 배설물처럼 여겼고(빌 3:8),
5) 살든지 죽든지 주님만을 위하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롬 14:7, 8, 고전 2:2). 이 모든 것이 다 부활의 주님을 봄으로 시작되고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가 생명자요 승리자요 영생자요 구세주란 사실을 일시에 일깨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바울은 대단히 겸손해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결하신 분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자신의 부정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바로 그런 체험을 하였습니다. 사 6:1, 5에서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였다” 하였고,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보자 마자 엎드러졌고(행 9:4), 자신의 죄가 드러나므로 자기를 “괴수 죄인”이라고까지 고백하셨습니다(딤전 1:15). 또 자기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여 예수님을 핍박한 사실도 깊이 회개하였습니다(행 9:4, 딤전 1:13). 본문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1) 자기를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 하였고,
2)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하였으며,
3) 과거에 알지 못하고 행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기 때문에 사도라는 호칭을 받는 일까지도 감당할 수 없다” 하셨고,
4) 자신이 변화의 사람이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셨으며,
5)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려고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지만 그 수고의 열매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요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 하셨으니, 먼저 자기의 인격을 강하게 낮추셨고, 다음에는 성직자의 입장에서 모든 성직자들보다 자기를 더 낮추셨으며, 또 그 다음에는 사명으로 시행한 공로에 있어서 “자기가 한 것은 없다”는 식으로 모든 공로를 부인한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자기의 인격을 과시하려 하였다거나 또 자기의 직분을 추켜 세워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 하였거나 또 “나는 무엇을 하였다” 하면서 공로자의 대접을 받으려고 하였다면 바울 사도의 겸손 앞에서 크게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4. 부활의 예수님을 본 바울은 그 즉시 충성을 맹세하였고 죽기까지 충성을 하셨습니다. 행 22:10에 보시면, 바울이 다메섹 노상에서 변화 받을 당시에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하므로 사명받기를 원하니 주님께서도 15절에서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하셨고, 또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 때부터 “예수님은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기 시작하였고, 유대교적 종교를 등지고 복음의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1/3이 바울 사도의 행적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다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또 11절에 보시면, “자신의 증언대로 성도들도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직접 보았지만 우리는 바울의 증언으로 부활의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본다는 뜻은 곧 안다는 곧 믿는다는 뜻입니다. 저희들도 바울 사도처럼 인격의 변화, 사명 생활의 변화를 이루셔야 할 것이요, 반드시 부활을 소망하며 영생을 사는 자처럼 생활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93과 승천하신 예수님 (엡 1:20~2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승천하신 예수님”이란 제목 아래 “승천하신 예수님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는가?” 에 대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1. 우선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신 후 40일을 계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40일이나 땅 위에 계셔야 하느냐에 대하여 어떤 학자는,
1) 부활을 충분히 입증하시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열한 차례를 나타내 보이셨고,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일시에 보이신 것이 500여명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6).
2) 부활하신 후에도 상당하게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진리를 자세히 가르치셨습니다(눅 27:47).
3) 미혹하는 자들의 훼방을 막기 위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시체를 도적해 갔다”는 말들로 거짓을 유포하면서 부활을 부인한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만일 예수님이 금방 승천하셨다면 거짓에 넘어갈 사람들의 수가 퍽 많을뻔 하였던 것입니다.
2. 성경에는 예수님이 승천하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시 110:1에서도 예언하셨고, 마26:24에서도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을 보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부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권능의 우편” 또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씀들이 있으며(막 16:19, 눅 22:69, 롬 8:34, 히 1:3, 13,8:1, 12:2, 벧전 3:22), 스데반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행 7:55, 56)고 하였습니다. 이 하나님 우편 보좌란 뜻은 하나님과 동등한 영광과 권위의 자리에 앉으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우편이란 자리를 하나님 다음 자리로 오해하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빌 2:9).
3.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어떤 모습으로 계실까에 대한 것입니다. 부활하셨으니까 혹 영으로 계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져 볼법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을 입으신 몸, 인간의 부활체를 가지신 몸 그대로 영원히 계신 것입니다. 골 2:9에 보시면,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부활 때에 인간의 모습을 버리신 것이 아니고 영원한 신성과 인성 그리고 인성의 부활체를 그대로 가지신 채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입니다.
4. 본문 말씀의 뜻을 살피겠습니다.
1) 20절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여 예수님을 살리셨고, 하늘에 있는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이란 영계의 높은 세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 21절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의 권위를 설명하셨는데, 최고의 이름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천사를 일컫는 정사, 권세, 능력, 주관하는 자들보다 더 뛰어나시고, 이 세상 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영원히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천상천하의 대주재(유 1:4)로서,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는 지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3) 22절에서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이 만물을 복종케 하시는 왕이시며, 또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교회의 머리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지러워서 복음 사역자의 머리가 아프면 그것이 곧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아프시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교회의 일로 인하여 근심될 일이 없도록 섬겨야 할 것입니다.
4) 23절에서 교회는 예수님의 몸과 같고(머리는 몸의 대표임) 예수님은 만물의 주이시라, 교회 중심(예수님의 몸 안에서)으로 사는 성도에게는 만물을 가지시고 만물의 부족을 채워 충만케 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승천하신 예수님이 자기 안에 있는 자에게 영계와 현상계를 포괄하는 만물로서 충만케 해 주시는 역할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5. 따라서 승천하신 예수님은,
1) 만유의 왕노릇을 하시고(고전 15:25~26),
2) 교회의 머리 역할도 하시며,
3) 만유 심판을 예비하시고,
4) 성도에 대한 중보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롬 8:34, 히 9:24).
5) 예수님의 부활은 사탄에 대한 승리입니다.
그러나 대법원 판결에서 사형이 확정되어도 집행은 얼마 있다가 시행되는 것처럼, 악의 심판은 마지막 때에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성도 개개인을 위하여 중보해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제94과 가정에 대한 신앙 (엡 6:1~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가정에 대한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가정의 탄생은 부부 제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창 2:18, 21~25). 부부 생활의 협력 관계도 중요하지만 가정은 인류 생산의 산실(産室)이요, 최초 인류의 연합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살기 어렵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부부의 연합체와 부모, 자녀, 형제, 자매 등으로 가정을 구성해 주셨고, 연합은 인류 문화 발전에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인류의 연합체가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라면, 가정은 그 연합체의 핵과 같아서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교회를 ‘집’이라고 하신데도(딤전 3:15) 사랑과 연합체로서의 귀한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정신이 있고, 육체의 신진대사가 있으며, 활동하는 지체가 있어서 활동을 합니다. 이와 같이 인류 연합체도 가정을 핵으로 시작하여 사회가 있고 국가의 기능이 있어서 공동 사회를 유지해 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좋은 가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2. 본문에 보시면 자녀와 부모 또 종과 상전이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가정의 요소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 세계의 계급을 인정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높은 자(상전)와 낮은 자(하인)를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각 개인의 인권을 차등하신 것이 아니고 축복이나 달란트 은사의 차이에 따라 지도자가 있고 섬기는 자가 있어야 함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라 하셨고,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잘 양육하라 하셨으며, 종들은 상전을 섬길 때 주께 하듯 하고 상전들은 종들에게 공갈을 치지 말며 자기 위에 상전이신 하나님이 계신 것을 항상 인식하라고 하셨습니다.
3. 기독교인의 각 가정은 어떻게 살아야 좋을까요? 우선 자녀와 부모의 할 일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본문에 보시면 자녀들의 의무를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부모의 자녀에 대한 의무보다 자녀의 부모에 대한 의무가 더 중요함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철없는 자녀들은 의무가 없습니다. 철이 들고 지각이 있는 자녀들이 부모와 가정에 대한 의무가 있는데, 본문에서는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주 안에서”란 하나님을 먼저 공경하는 신앙 안에서 부모의 뜻을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효도가 반드시 함께 성취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설교를 듣는 자녀들이여, 신앙과 효도를 동시에 성취하고 있습니까?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함이고, 효도는 부모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많은 자녀들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도 부족할 뿐 아니라 부모의 뜻에 잘 복종하지 않는 자가 많습니다. 이런 상태는 자신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것임을 믿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도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기 위하여 효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악한 세대의 자녀들이 이 엄연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부모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어떤 자녀들은 사소한 불만으로 부모와의 대화를 끊거나 집을 나가는 예도 있습니다. 그런 일은 분명히 나중에 후회할 것입니다.
2) 부모들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하셨으니, 여기의 “노엽게 한다”는 뜻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지 않으므로 자녀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가 자녀들에게 반드시 이행하여야 할 의무는,
① 자녀가 성장하여 활동할 수 있는 때까지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는 부모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자녀들은 자활력이 있으므로 부모의 특별한 도움이 없어도 성인의 역할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만이 있는 자녀가 있으면 호랑이나 사자 새끼를 보고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어릴 때를 제하고는 사냥법을 배워서 자립을 시키지 않습니까?
②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때 자신의 생활로 본을 보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부모가 자식 앞에서 부끄러운 잘못을 상습적으로 한다면 자녀에게 “너는 잘하라”고 교육하거나 아무런 자격이 없을 것입니다.
③ 부모는 자녀들을 양육할 때 고급적 대우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롬 12:16에서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어리석어서 유족한 아이들의 본을 따르려 하지만 그것은 표준 생활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표준 생활은 근검 절약하고(마 14:20) 낮은데 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3:4).
④ 예수님은 가정을 하나님 만큼 사랑하지 아니하셨고, “누구든지 아비나 어미를…또 아들이나 딸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면 합당치 않다”(마 10:37) 하셨으니, 이 뜻은 가정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거나 가정의 일을 하나님의 일보다 더 귀히 여기지 말고 또 가족들에 대한 사랑도 예수님과 동등하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도가 가정에 지나친 애착을 쏟으면 하나님이 덜 기뻐하신다는 것을 늘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의 모친과 다른 가족과 이웃의 가족을 다 균등하게 대하신 것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마 12:50). 오늘날 가정들은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과욕에 얽매여 있고 말씀의 표준을 상실한 상태에서 자유 분망하고 있음을 크게 개탄하여야 하며 함께 책임을 다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95과 행복한 가정 (마 12:46~50) 목록으로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행복한 가정”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전도하실 때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무슨 말을 하려고 찾아왔었습니다. 이때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가서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께 말하려고 밖에 섰다”고 하였더니 예수님이 그 말한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하시고 손으로 제자들을 가리키시면서 “나의 모친과 동생들을 모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일깨워 주시는 내용들은
1) 예수님에게도 동생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마 13:55에 보시면 예수님이 동생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 남편 요셉과 혼인하여 네 아들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2) 그 동생들이 복음을 믿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또 그 때에 그 동생들이 찾아 온 것은 예수님을 협력하려는 의미로 찾아온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동생들을 형제로 영접하시지 않고 손길을 제자들 쪽으로 돌리시면서 “나의 모친(믿음의 여성들)과 동생들을 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동생들이 믿지 않았지만 나중에 믿고 훌륭한 사역자가 된 “야고보”가 있었습니다(갈 1:19).
3) 예수님은 남이라도 믿는 자를 형제와 가족으로 생각하셨고, 또 한집 식구라도 믿음을 갖지 않았을 때는 형제와 가족적 의미가 없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성도는 한 가족과 같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셔야 할 것입니다.
2. 가정의 유래에 대하여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1) 본래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실 때 한 할아버지와 한 할머니로 시작되게 하시므로 인류의 시작은 생산성 있는 가정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부의 결합이 가정의 중심이고 그 이외의 부모나 형제는 가정의 부수적인 협력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제만 같이 살거나 부모중 한 분이 안 계실 때는 가정의 진정한 의미가 상실됩니다. 그러나 한 집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사는 것도 넓은 의미로 볼 때는 가정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이유는 ① 행복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기관은 가정입니다. ②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주셨습니다. 가정은 먹고 마시는 곳입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하셨습니다. ③ 그리고 가정은 후손을 생산하여 생육번성 시키며 땅을 정복하라고 주신 것입니다(창 1:28).
3) 가족이 있을 바에는 여러 식구가 많이 함께 사는 것이 좋습니다. 그 이유는 조화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핵가족 제도가 생기면서 노인 따로, 부부 따로, 아이들 세계 따로 사는 것은 교육상으로도 퍽 안 좋은 일이기 때문에 앞으로는 가정의 구성 요원이나 어떤 행사(예배나 친목)에 꼭 합류하는 방법을 모색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어떤 가정이 행복한 가정일까요?
1) 온 집안 식구가 다 믿음 생활을 잘 하여야 합니다. 한 집 식구 중에 누구는 천국가고 누구는 지옥에 간다면 그 얼마나 안 된 일입니까? 삼풍 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가족 중 누구는 붕괴된 속에 깔려있고 누구는 살아있는 상태에 있는 형편을 연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2) 모든 가족들이 다 하나님 뜻대로 잘 살아주어야 합니다. 가족이 다 예수를 믿어도 믿음 있는 사람의 상태와 믿음 약한 사람의 상태 즉, 생활방식과 목표와 소망이 다 다릅니다. 이럴 때에 가족이 다 은혜받은 형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가정은 다 믿는 가족이지만 형제간의 욕심으로 인하여 화합하지 못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3) 가족이 다 자기 책임을 성실히 하여야 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책임을 어머니는 어머니의 책임을 아이들은 아이들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떤 가정의 할아버지는 자신이 연탄가는 책임을 지고 시행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책임을 소홀히 하면 그 가정은 생활의 질서를 잃게 되고 혹 가족 한 사람이 책임에 반대되는 방탕을 한다면 그 가정은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녀들 책임은 공부하는 것이니까 그것도 잘 지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4) 가정에 어려운 일이 없어야 합니다. 가정에 병자나 사업의 어떤 실패가 있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이런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만 방지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시 121:7~8). 그래서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여 기도하라(마 26:41)”고 하셨습니다. 이런 일들을 종합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이 가정 예배입니다. 가정 예배를 드리는 가정은 “가정 행복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는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의 가정이 더욱 행복해지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상고하였습니다.
제96과 가정의 행복 (엡 5:22~25, 6: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가정이 행복해지는 비결 네 가지”를 교훈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에 잘 나타난 대로 먼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다음에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동양적 도덕률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상식적인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가족들이 이 네 가지 책임을 의도적으로 연구하여 시행하는 가정이 많지 않은 줄 압니다. 가정은 인류 공동체의 시작이자 최고의 현실적 보금자리입니다. 따라서 모든 행복의 근원이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아셔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1. 가정 행복의 첫째 비결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1) 여기에서 복종과 순종은 약간 다른 뜻이 있다고 합니다. 복종은 무조건 하는 것이고, 순종은 자원하여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때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하라”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좋든 싫든, 마음에 맞든 안 맞든 무조건 진리에 복종하듯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남편을 무시하는 아내나, 자존심과 자아 의식이 강한 아내는 이런 복종을 잘 못하겠지요. 그럴 때는 반드시 가정 불화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복종하는 지혜를 터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여기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남편의 뜻보다 더 엄하다는 사실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책임을 이행하는 순서에 있어서 아내가 먼저 할 것을 성경에서 세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은 본문에서 하셨고, 또 한 번은 골 3:18에서 말씀하셨으며, 세 번째는 벧전 3:1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말씀하실 때마다 아내에 대한 책임을 먼저 강조하셨으니 그 이유는 아내를 남편 돕는 배필로 만드신 점과 여자가 먼저 유혹을 받은 사실로 그런 책임을 먼저 주신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도는 “왜 이러냐”고 묻기 전에 먼저 순종하여야 하니까 무조건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2.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생명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또 엡 5:28에 보시면 “남편이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 하시고, 그렇게 하는 것이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부부를 한 지체로 생각하여 자기를 돌보듯이 아내를 돌보고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만일 남편이 복종 잘하는 아내를 자기처럼 사랑하지 않았다면 불행의 책임을 그가 져야 할 것이고, 만일에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을 잘 안하여 불행해졌다면 역시 그 책임은 아내에게 있는 것입니다. 어떤 아내가 “남편이 자기보다 어리석어서 복종을 못한다”고 핑계를 한다면 남편의 뜻에 복종하였다가 망하게 된 다음에는 남편이 주장하는 자세를 자연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이 핑계하기를 “아내가 복종을 안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었다”고 했다면 이때는 복종을 안한 아내가 먼저 계명을 위반하였으니까 우선적 책임을 져야 되고, 다음에는 남편도 조건적 사랑을 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연약을 크게 뉘우쳐야 할 것입니다.
3. 자녀들이 부모님의 뜻을 주 안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순종은 복종과 달라서 본심으로 어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근본이 순종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먼저 세상을 떠나실 부모님들에게 자유와 권리를 드리는 것입니다. 자유와 권리는 말보다 귀한 것이고 물질보다 귀한 것입니다. 정신적 자유와 생활적 자유를 드리도록 하는 것이 가장 잘하는 효도인 것입니다. “윗 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처럼 윗 사람의 마음이 편해야 아랫 사람도 마음이 편하고, 그 가정이 웃음으로 변할 것입니다. 가정의 행복의 비결로 효도를 명하신 것은 부모와 자녀가 동거하고, 자식이 부모를 모시고 살아야 하는 것이 성경적 원리이기 때문입니다(눅 15:13).
4.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녀들이 노여워 하는 마음을 갖거나 부모와 멀어지는 마음을 갖게 되면 후시대의 전망이 어두워질 것입니다. 행복은 행복한 마음에서 오고, 발전은 긍정적, 적극적 자세에서 옵니다. 그러니까 어른이나 아이나 24시간 좋은 마음만 갖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않을까요?
1) 부모가 자식에게 해줄 만큼 해주어야 합니다. 얼마큼이 해줄 만큼인가 할 때, 환경에 따라 다르겠지만 자녀가 공부하는 시기까지는 먹고 입고 쓰는 것을 대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부를 다한 다음에는 물질적 책임을 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2) 자녀가 어떤 실수를 했을 때 배타적 관계로 책망하지 말고 친교적 관계로 책망하여, 그 책망 때문에 자녀가 낙심하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아주 등지고 나가는 자녀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불효자에게 복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엡 6:2).
결론적으로 가정이 행복해지는 일에 있어서 먼저 부부가 화합하고, 다음에 부모와 자녀간에 화합한 후 그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가정이 된다면 복의 근원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형통하고 복되게 하시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제97과 기독교 교육의 중요성 (엡 4:11~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기독교 교육의 중요성”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자녀 교육을 잘 시키는 것이 가정의 발전도 되고, 나가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1. 본문 말씀은 기독교 지도자를 세우신 말씀과 기독교 교육의 목적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 기독교 지도자를 세우심에 대하여 하나님이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를 세우셨다고 하셨는데,
① 사도와 선지자는 초대 교회 이전에만 주셨던 직임이고,
② 목사와 복음전하는 자는 특수한 사람에게 주시는 성직이며,
③ 교사의 직임은 누구든지 노력하여 받을 수 있는 직임입니다. 믿음의 지식을 지닌 성도이면(교회가 임명한 주일학교 교사가 아니더라도) 가족들과 어린 자녀들을 위한 신앙 교사가 반드시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한 가정에 교사 자격자 한 사람만 있으면 그 가정의 신앙 교육을 충분히 책임질 수 있을 것입니다.
2) 교육의 목적은,
① 온전한 성도가 되게 하고,
② 봉사하는 자가 되게 하며,
③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자 즉, 교회를 육성시키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많은 성도가 ‘교육’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어른들은 그 대상에서 빼고 아이들만 교육의 대상으로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사실은 어른들 중에도 온전케 된 성도가 많지 않습니다. 또 봉사할 줄 알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롭게 받드는 성도들도 많지 않음을 생각할 때 기독교 교육의 실상이 참으로 미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줍니다.
2. 이스라엘 국민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자기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면 외국에 나가 있는 국민들이 전쟁을 하기 위하여 황급히 입국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육이 부실한 나라의 국민들은 오히려 외국으로 도망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어떤 기독교인들은 “헌금의 부담을 주는 개척 교회는 잘안나가려고 한다”는 말을 들을 때 봉사자 만들기 위한 기독교 교육이 얼마나 부실한가를 또 한 번 실감하게 해 줍니다. 교육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1807년에 불란서 나폴레옹의 말굽 아래 독일이 망하였을 때 독일은 극심한 파탄에 처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독일의 애국 철학자 ‘피히테’는 분연히 일어나서 국민들을 모아 놓고 불란서 군대의 말발굽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나라가 왜 망한 줄 아십니까? 국민의 이기심과 도덕적 타락이 나라를 망하게 한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인격 개조의 혁신과 도덕성 회복을 이룩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오직 새로운 혁신만이 나라를 재건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외쳤을 때 그 당시 교육가인 ‘훔볼트’란 문교 장관이 피히테의 사상을 본받아 60년간 교육에 힘썼을 때 비로소 1871년 독일이 불란서를 굴복시켰던 것입니다. 그때 독일의 ‘모르트게’ 장군이 개선가를 부르면서 돌아왔는데, 국민들은 그에게 큰 찬사를 보내었으나 ‘모르트게’ 장군은 말하기를 독일의 승리는 군인들이 한 것이 아니고 60년간 교육시킨 선생님들이 한 것이니 영광을 그들에게 돌리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화에서 저희들은 도덕성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는데, 여기에 신앙 교육이 첨부된다면 얼마나 위대한 국민이 되겠으며 든든한 나라가 되겠는가 하는 것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저희들은 어떤 교육을 시도하여야 될 것입니까?
1) 성경 교육을 시도하여야 할 것입니다(딤후 3:15). 이것은 너무도 잘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르칠 선생님이 많지 않습니다. 성경 선생님은 반드시 한 가정에 한 사람씩은 있어야 합니다. 육신의 양식은 자기 것으로 먹고 영혼의 양식은 남이 주는 것을 얻어먹는 식의 생활을 이제는 그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고졸증이 없으면 군대도 못 가는 시대입니다. 한 가정에 목사 한 사람은 없어도 반드시 교사 한 사람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2) 경건 교육에 힘써야 합니다. 경건 교육이란 하나님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복종, 충성하셔야 하겠지요. 이것이 부모의 모범 교육으로 후시대에 전달되어야 할 것입니다. 딤전4:7에서 “경건을 연습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떨면서 섬기는 생활을 꼭 가르치셔야 할 것입니다(시 2:11).
3) 봉사의 생활을 가르쳐야 합니다. 어느 곳에서나 낮은 자세를 취하고 투기하지 않으며 어떤 일에나 앞장서서 봉사할 줄 아는 인물이 되어야만 교회와 사회에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교육의 중요성은 한 집에 교사 한 사람을 꼭 두시고 성경 공부와 가정 예배를 시행하면서 성경 교육, 경건 교육, 생활 교육, 봉사 교육을 꼭 시행하는 가정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일정한 시간에 가족의 모임을 갖는 문제가 가장 크게 대두되고 중요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제98과 요셉이 받은 가정 교육 (창 37:1~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요셉이 받은 가정 교육”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야곱의 요셉의 역사를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야곱은 지식이 돋보이는 사람이 아니요, 성실한 일꾼이고 하나의 가장으로서 네 부인을 거느리고 열 두 아들을 키운 사람이며, 요셉은 야곱의 열한째 이들로 17세까지 아버지의 양육을 받았습니다.
1. 요셉의 훌륭한 점을 찾아 보면,
1)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받은 아들이었고, 2) 형들의 과실을 아버지에게 고할 만큼 정의로웠으며, 3)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을 잘 하였고(창 37:13), 4) 꿈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5) 어려운 환경을 잘 극복한 사람이며, 6) 무서운 시험도 잘 이겼고, 7) 정치도 잘하고, 8) 용서도 잘하였으며, 9) 많은 가족 부양의 책임도 감당하고, 10)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2. 그렇다면 이렇게 성공한 요셉이 부모로부터 받은 교육과 감화가 무엇이었을까 할 때,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형들은 요셉에게 교육적 입장이 되어 주지 못하였으니까(창 37:2, 11) 결국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받은 교육과 감화를 17년 동안 받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훌륭한 지도자처럼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자기의 생활로 교육을 대신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은 어떤 생활로 요셉에게 좋은 감화를 주었을까요?
1)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여긴 것으로 시작하여 집을 떠날 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고, 계속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와 발전의 복을 받았으며, 고향에 돌아온 후 하나님께 서원한 약속을 지켜 제단을 쌓은 일 등은 모든 자녀들에게 신앙적 모범이 아닐 수 없는 것이요,
2) 근면한 사람이었습니다. 외삼촌의 집에서 20년을 살 때 눈 붙일 겨를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3) 야곱은 지팡이 하나만 들고 집을 떠난 후 큰 재산을 이룬 사람이었고,
4) 대가족을 먹여 살린 큰 가장임을 보여 주었고,
5) 특히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는 말씀이 창 47:9에 나타난 것을 보면 부친의 고생스러운 생애가 자손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던 것입니다.
3. 오늘의 부모들이 자녀 교육의 목표를 어디에 두며, 또 어떻게 교육을 시켜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어떤 유명한 교수(서울대 교육학 ‘박성수’)의 말을 인용하면, 첫째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인물을 만들라” 하였고, 둘째는 “일과 사람과 삶의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라”고 하였으니 핵심적인 교육 목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의 교육 목표는,
①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사람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② 도덕적으로 사람다운 사람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③ 이웃이나 나라에 봉사할 수 있는 사람, 조금이라도 덕을 베풀지언정 손해를 주지 않는 사람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목표를 생각하면서 “나 자신은 어떠한가” 할 때,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계명 실천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고,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착하고 예의바른 사람이 되어야 하며, 이웃 봉사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아도 아직은 마음 뿐이요 실제로 돕지 못하는 형편이 너무 안타깝기만 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육의 목표만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여라”, “착하고 예절바른 사람이 되어라”, “주는 자는 될지언정 받을체는 하지 말라”고 교육하셔야 할 것입니다.
2) 그러면 부모로서 생활적 교육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① 우선 부모가 근면한 생활을 자녀들에게 보여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가장 손해를 많이 보고 사는 것이 시간 낭비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시간 낭비하는 것을 자녀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항상 근면하게 일하는 것입니다. 만일 일할 것이 없다면 독서나 묵상 기도라도 하여 본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② 기도의 모범이 꼭 필요합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위하여 어떻게 기도한다는 사실을 알게도 하고, 기도에 동참도 시켜서 신앙적 감화가 자녀들에게 전달되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합심 기도를 안 하다가 새롭게 시작해 보시면 그 기도회의 효력이 얼마나 크고 쉽게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하시게 될 것입니다.
③ 부모의 진실성 교육입니다. 거짓말을 안하고 약속을 잘 지키는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중국의 노나라 장왕이 제나라 환공의 침략을 받고 다급한 중에 영토를 나누자는 조건으로 협상을 하다가 “이 협상은 협박에 의한 것이니까 전쟁을 계속하자”고 하였을 때 지혜로운 신하가 “왕이 약속을 위반하면 존경을 받지 못한다” 하여 약속을 지킨 탓으로 큰 존경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고, 또 일본의 풍신수길도 권세자의 위치에 오를 때 ‘오오자와’라는 호족을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는데, 자기보다 더 높은 ‘노부가나’ 군주가 “오오자와 일족을 죽이자”고 하자 군령을 어기고 도망시키므로 신의를 지켰다는 말이 있습니다.
④ 언어의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언어와 성격과 교양은 일치합니다. 부모나 어른들은 어린이들 앞에서 반드시 좋은 일, 좋은 말 표현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신앙 교육으로 경건과 도덕성과 봉사적 입장을 취하게 하고, 생활 교육으로는 근면과 기도와 진실과 언어의 본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제99과 성령님에 대한 지식 (행 1:8, 3:38~39) 목록으로
1. “성령 강림절”이란 절기는 부활절 이후 일곱 주간이 되는 주일에 지키는 것입니다. 행2:1에서 오순절 때에 성령님이 강림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간 계시다가 승천하셨고(행 1:39), 승천하신 지 10일만에 성령님이 오시게 된 것입니다.
2. 이 시간에는 성령님에 대한 요절 두 곳을 읽었습니다.
1)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증인이 되리라” 하셨으니,
① “성령이 임하신다”는 뜻은 좌정하신 위치를 바꾼다는 뜻이요,
② “권능을 받으라” 하심은 성령님이 능력 주심을 의미하는데, 그 능력은 초자연적 능력과 일반적 능력을 다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초자연적 능력을 받아 베드로와 바울이 죽은 자를 살렸고(행 9:40, 20:11), 병 고치는 기적을 나타내셨지만(행 3:6~8, 5:15~16, 28:8) 사도의 말년까지 역사하시지는 않았습니다(빌 2:27, 딤후 4:20). 그러나 일반적 능력은 지금까지도 역사하십니다. 저희들은 필요에 의하여 초자연적 능력도 구할 수 있지만(행 4:30, 31) 응답은 하나님의 섭리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 능력은 항상 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구하시고(눅 17:5), 지혜를 구하시며(약 1:5), 실천력을 구하고(마 26:42), 특히 증거하고 가르치는 능력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엡 6:19). 성도들은 이런 말씀에 근거하여 능력 받기를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특히 말씀 증언의 능력을 구하여 쓰임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2) “회개하고, 죄사함 받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방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39절에서 “먼데 사람에게 얼마든지 약속하셨다”는 말씀이 입증합니다. 따라서 “불신앙을 회개하고 불신죄의 사함을 받고 성령의 충만한 은혜도 받으라”는 뜻입니다. 만일 이 말씀을 제자들이 받는다면 회개와 죄사함은 도덕적 의미가 되고, 성령을 받음은 충만을 뜻함이 될 것입니다. 성령님은 믿음의 시초부터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3.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삼위일체 교리에 근거하여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영이며(마 10:20), 그리스도의 영입니다(롬 8:9, 벧전 1:11). 행 5:3,4에 보시면, “성령을 속인 것이나 하나님을 속인 것이 같다”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예수님(요 14:6)이신데, 요14:17에서는 “진리의 영”이라 하셨고, 생명의 영(롬 8:2), 지혜의 영(사 11:2), 거룩한 영(롬 1:4), 심판의 영(사 4:4, 28:6), 영광의 영(벧전 4:14)이라 하신 말씀에서 성령님은 하나님이심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 그러면 성령님이 어떻게 존재하시고 어떻게 역사하실까요?
1) 성령님은 영으로 존재하시니까 형체와 모양이 없는 상태에서 천사처럼 역사하신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보이는 분으로 나타나신다면 눈이 어두운 성도들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마음으로, 성경으로 누구든지 감지할 수 있고,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는 것을 믿음으로 느껴야 할 것입니다. 마 28:20에서 예수님이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바로 성령님과 말씀으로 함께 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5. 그러면 이 성령님이 성도들에게는 어떻게 역사해 주실까요? 성령님은 인격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가르치기도 하시고(요 14:26), 책망도 하시며(요 16:8), 안위도 하시고(행 9:31), 때로는 근심과 슬픔을 나타내시기도 하며(엡 4:30, 사 63:10) 여러 가지 사역에 임하시고, 특히 각종 은사도 주십니다(고전 12:4~11). 그러나 육에 속한 사람 즉, 불신자는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고전 2:14, 유 19).
1) 타락한 인간에게 성령님의 접촉하심과 역사가 없으면 믿음을 발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나고(요 3:3),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앙고백이 성취되는 것입니다(마 16:17). 고전 12:3에 보시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2) 성령님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서 분담하신 바가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구원 사역을 계획하신 분이시고(엡 1:3,4), 성자 예수님은 그 계획 속에 속죄제물과 중보자가 되신 것이요(히 9:11~15), 성령님은 구원받을 백성에게 감동하여 예수님과 관계를 맺도록 진리 사역을 하시는 것입니다.
3) 그러면 구원 사역에 있어서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요약하면,
① 거듭나게 하시는 일과(요 3:3),
② 진리의 영으로 복음을 전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영감과 기록도 성령님이 하셨고(벧후 1:21), 또 증언 사역도 하시므로(요 16:13) 믿음을 발생시켜 주신 것입니다. 중생의 은혜가 불꽃이라면 진리의 말씀은 가연성 물질과 같아서 불이 타는 것처럼, 거듭난 생명이 진리의 말씀을 수납할 때 믿음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③ 성령님은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와 함께 성도의 마음 속에 계시고 떠나지 않으십니다. 요 14:17과 고전 3:16에서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만일 성령님이 떠나신다면 공기 없는 호흡처럼 믿음이 성립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아셔야 하며, 자신의 성화와 노력에 따라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잘믿는 사람과 못믿는 사람의 차이가 성령님의 충만한 역사와 미약한 역사에 있음을 아셔서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도록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또 성령의 충만은 내주하신 성령님의 강한 역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본인의 <성령님에 대한 설교집>을 참고하십시오).
제100과 성령님의 역사로 되는 일 (롬 15: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령님의 역사로 되는 일”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고, 영으로, 진리로 존재하시며(요일 2:20, 요 14:17), 인격을 가지시고(엡 1:13, 4:30), 능력을 나타내시는(행 1:8) 하나님이심을 잘 아실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성령님의 역사를 살펴 보면 저희들이 믿음 생활을 잘함에 있어서 성령님이 역사해 주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즈음도 성령님의 역사를 힘입어 새로운 변화를 나타내는 성도가 있어서 간증의 대상이 되는 것을 봅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되는 일이 무엇인가를 살펴 보겠습니다.
1. 성령님의 역사로 거듭난 생명을 주십니다. “거듭남”이란 영적 생명을 받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엡 2:1, 요 3:1~8, 엡 4:22~24). 지식이 있어도 하나님과 성경 말씀을 받아 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가 성령님의 역사로 거듭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의 믿음의 시작은 이 거듭남의 은혜로 되는 것을 믿으셔야 하고, 또 전도를 하여도 믿음을 갖지 못하는 것은 그가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지 못하였기 때문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사람이 구하거나 소원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의 선택한 자를 그 작정된 시기에 거듭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2. 성령님은 믿음을 발생케 해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 예수님 그리고 성경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고전 12:3에 보시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 하셨고, 갈 4:6에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 하셨으며, 또 성령님은 성경을 기록하셨고 보증하시는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딤후 3:16, 벧후 1:21, 엡 1:18, 4:30). 여기의 성경을 기록하신 일이나 보증하시는 일들은 다 믿음을 일으키는 사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일은 성령님의 역사로만 되는 것입니다.
3. 말씀을 가르치고 깨우치는 사역을 하십니다. 요 14:17, 26에 보시면 “성령님은 진리의 영으로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고 하셨습니다. 루디아가 바울 사도의 증언을 들을 때 그에게 말씀 청종하는 능력을 주신 것이나(행 16:14), 생각나게 하시는 것도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의 역사로 성경 공부의 맛을 느끼고 깨닫는 은혜를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또 성령님의 역사 중에 가장 크게 역사하시는 은사가 성경을 가르치는 것임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특별히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4:17, 26, 16:13).
4. 성령님은 성도의 인격을 변화시키십니다.
1) 인간의 육정을 잠재시키십니다. 갈5:16에 보시면 “성령을 좇아 행할 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 하셨고, 사울이 다메섹 노상에서 개종하는 체험을 할 때 “땅에 엎드러졌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면 먼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죽이는 일부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부정을 못하면서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잘못된 일일 것입니다.
2) 도덕적 변화를 받습니다. 갈5:22~23에서 성령님은 아홉 가지 열매를 맺어 주시는데,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충성과 절제라 하셨고, 이러한 미덕들은 전부 도덕적으로 인격에 관한 것입니다.
3) 신령한 사람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신령한 사람은(고전 3:10) 신령한 은혜를 분변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고전 2:10, 13~14). 육신적인 일이나 현실적인 문제는 멀어지고 신령한 은혜에만 더욱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변화를 받은 다음에 세상적으로 유익하던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함을 인하여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려고 노력한다(빌 3:8)고 하셨습니다.
4) 네 번째로 변화되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 성화(聖化)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하여 선택하셨다”(롬 8:29)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많이 닮게 하는 역사를 하십니다(엡 3:16, 롬 15:16).
5. 성령님은 성도의 마음 속에 항상 내주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 28:20) 하신 말씀이나, 갈 4:6에서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셨다” 하셨고, 요14:16에서는 “보혜사 성령님이 성도의 곁에 계신다” 하셨으며, 고전 6:19에서는 “성도의 몸을 성령님의 전”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들은 다 성령님이 성도와 함께 계심을 증언하여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생활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깨달을 때 고독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6. 성령님이 보혜사가 되셔서 모든 일을 유익하도록 간섭해 주시는 것이고(요 14:16),
7.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능력과 은사를 주십니다(행 1:8, 고전 12:4~6). 고전 12:4에 보시면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신다” 하셨고, 슥 4:6에서는 “하나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신앙 생활의 모든 유익한 일들이 전부 성령님의 역사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아셔서 성령님의 역사가 시행되기를 믿고 기다리셔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앞서기 전에 성령님의 역사에 이끌리기를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성령님에 대한 설교집> 참고)
제101과 감사할 은혜들 (시 103:1~14) 목록으로
추수(맥추) 감사절을 맞이하여 “감사할 은혜들”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감사는 감사절에만 느끼고 감사할 것이 아니라 항상 감사할 일을 생각하고 연구하여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 특별히 감사하여야 할 것들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만, 본문에도 감사의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절에서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 하시고, 은택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속죄의 은혜, 병을 고쳐 주신 은혜, 인자와 긍휼을 베푸신 은혜, 좋은 것들을 주시는 은혜, 새롭게 하시는 은혜, 공의로 판단하시는 은혜,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은혜, 죄를 따라 갚지 아니하시는 은혜, 죄를 기억지 아니하시는 은혜, 인간의 체질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 등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에 취하여 사는 성도가 된다면 퍽 행복하고 은혜로울 것입니다. 이 시간에 감사할 은혜는,
1. 나를 선택하여 주신 은혜입니다. 이 세상에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있고, 뽑힌 자와 떨어진 자가 있으며, 희망이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있습니다. 그런 중에 인류의 최대 소망은 구원이고 영생인데, 이것이 자기로 말미암아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무조건 선택으로 받게되는 은혜인 것입니다. 대학 입시나 미스 코리아에 당선되거나 또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크게 기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가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서 영생한다는 사실은 이 세상의 어떤 존귀보다도 더 큰 은혜임을 아셔야 하는데, 이것을 하나님이 만인 중에서 무조건 우리를 선택하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받게된 것입니다. 깜짝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선택의 은혜 다음에는 구원의 은혜가 따라갑니다. 구원하시려고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핵심은 속죄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속죄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독생자의 대속적 고난과 죽음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시면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실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의 희생 뿐이었고, 예수님이 이를 감당해 주시므로 택한 백성들이 죄를 용서받고 의인이 되어 (법적인 의) 심판을 면하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얻어 영생하게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의 은혜는 속죄와 영생이요,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성취하신 은혜임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함께 하여주시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말씀과 성령으로 “항상 함께 하신다”(마 28:20) 하셨고, 택한 백성 야곱에게도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떠나지 않을 것이라”(창 28:15) 하셨고, 또 “싫어버리지 않는다”(사 41:9)고도 하셨습니다. 계 3:20에서는 “함께 동거하시며 더불어 생활하신다”고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동거해 주시는데는 교제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보호, 인도, 공급해 주시는 은혜가 함께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를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편 그늘이 되셔서 항상 지켜 주십니다. 영혼과 육신을 지키시고, 믿음과 건강을 붙드시며,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재난에 피할 길을 주시며, 여러 모로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 121:1~8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에게서로다. 그 하나님이 졸지 않으시며 나를 지키시되 실족지 않게 하시고 우편의 그늘이 되사 자연의 재해에서 보호하시며 환난을 면케 하시고 영원토록 출입을 지키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시니 얼마나 든든합니까?
4. 성경을 주신 은혜를 감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저희들 손 안에 알려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합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영원토록 변치 않는 말씀을 글로 적어서 완전하게 주셨습니다. 아직도 성경의 은혜를 실감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촌에 가서 생선을 사면 값도 싸고 싱싱한 것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선이 도매상, 소매상을 거치면 그만큼 상품의 질이 떨어지지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가장 원리적인 말씀인데, 현대의 교인들은 중도매상, 소매상을 거친 설교로만 은혜를 받으려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성경에 무지하고 습관도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주신 은혜를 감사하시고, 성경을 스스로 배워서 깨닫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엡 3:3,4).
5. 죄인에 대하여 오래 참아 주시는 은혜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다 죄인이지만 형무소에 가지 않고 살고 있는 것처럼, 성도의 죄책은 예수님이 다 짊어지셨기 때문에 성도는 심판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신분이 본질적으로 깨끗한 것은 아닙니다. 재판받을 일은 없으나 죄성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도의 이런 죄성에 대하여 오래 참아 주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며(벧후3:9), 징계를 하셔도 “죄질보다 가볍게 하신다”(10절) 하셨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연약한 대로 때리시고, 죄짓는 대로 벌하시면 살아남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번 감사절을 맞이하여 모든 은혜를 감사하시는 중에 특별히 이 시간에 말씀드린 다섯 가지 은혜를 꼭 기억하시고 감사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102과 초막절과 감사절 (신 16:13~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초막절과 감사절”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제가 88년 2월에 성지 순례차 예루살렘을 간 일이 있었습니다. 도시의 어떤 양옥집 마당에 종려나무 잎으로 그늘을 지은 막을 발견하고 안내원에게 물었더니 유대인들이 1년에 한 번씩 초막절을 지킬 때 종려나무 잎으로 막을 짖고 절기 해사를 갖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초막절 행사는 출애굽 때 율법으로 주셨고, 지킨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한 후부터 지켰으며, 포로 시대 이후에도 지켰고(슥 14:16, 18, 느 8:14~17), 요 7:37에 “명절 곧 큰 날”이란 말씀이 있는데, 그 “큰 날”이 초막절 8일째 되는 마지막 날을 의미하기 때문에 초막절은 예수님 시대까지도 지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 시대 유대인들은 자기 집 뜰이나 광야에 초막을 짓고 제단을 쌓은 다음 실로암 못의 물을 길어다가 제단에 부으면서 찬송을 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의 초막은 조상들의 광야 40년간에 초막 생활을 하도록 인도하여 주신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고, 물을 붓는 것은 광야에서 반석의 물을 마시게 하신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를 하되 조상들에게 주신 은혜까지 감사한 것입니다.
2. 이 초막절에 대한 성경을 찾아보면, 레 23:33~44과 민 29:12~40과 신 16:13~17에 공통성 있는 내용도 있지만 각각 특색있게 기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공통성 있는 내용은 감사의 의미로 매년 7월 15일부터 8일 간을 지키되 제사와 예물을 드리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기에서는 8일 동안 제사드리는 법을 상세하게 말씀하시면서 그 시기에 성회를 공포하고 번제와 소제, 전제, 희생(화목제) 등 각종 예물을 드리되 안식일에 드리는 행사 외에 특별한 예물과 제물을 따로 드리고 나무의 실과나 종려가지, 무성한 가지, 시내 버들가지 등으로 초막을 짓고 그곳에 거하면서 즐거워할 것이며, 선민이나 이방인을 가리지 말고 대대로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종려 나무, 무성한 가지와 버들가지 등을 말씀하신 것은 장구한 사막 생활에서의 그늘을 주신 은혜를 감사한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 나가서 훈련을 마치고 배출대에 있을 때 그늘이 없어서 운동장 한복판 뙤약볕에 앉아 기도해 본 일이 있었습니다. 사막에서의 그늘이란 오늘날 서늘한 집보다도 더 요긴한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민수기에서는 “1일부터 8일까지 제사드리라”는 내용이요, 신명기에서는 “초막절을 지킬 때 보리를 타작하고 포도를 거두어 즙을 짜서 수장한 후에 자녀, 노비, 고아, 객, 레위인, 과부까지 성별과 계급의 차별이 없이 즐거워하되 물산과 손을 댄 모든 일에 복주신 것을 감사하고 공수로 보이지 말며 힘대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유대인들의 감사 정신이 대단한 것을 배우셔야 할 것입니다. 이 초막절이 첫 번 추수인 보리와 포도를 수확하여 수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7월 15일이란 기간은 맥추절과 비슷한 절기인 것입니다.
3. ‘맥추절’이라 하면 저희들은 보리 고개를 생각하게 됩니다. 옛날에 양식이 없어 주리던 시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쌀이 없어 보리를 먹고, 보리도 없어서 밀가루를 먹었지요. 밀가루 제품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빵이요, 또 하나는 수제비나 국수요, 또 한 가지는 풀데기였습니다. 이 세 가지 중에 풀데기가 제일 절약이 된다 하여 그것을 먹으면서 빵이나 수제비를 먹고 싶어한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민이었지만, 그 지역의 특색으로 볼 때 그늘도 귀하고 물도 귀하며 양식도 귀하였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저희들이 사는 세계는 천국같은 곳이요 천국같은 생활이 아닙니까? 따라서 저희들은 “무엇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는다면 짐승이나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4.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오늘의 사람들이 보리같은 양식을 얻는데는 여러 가지 은혜의 조건이 따라야 합니다. 첫째로 자연 만물 조건에서 땅이 있어야 하고, 물과 햇빛과 바람이 있어야 하며, 씨앗을 주셔야 합니다(출 23:16, 창 1:10~12, 신 28:12, 마 5:45). 그 다음 생물학적 조건에서 자라게 하시는 은혜와 결실기를 주셔야 합니다(고전 3:6, 행 14:17, 시 126:6). 또 인간적 조건으로는 농사짓는 자유와 건강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5. 출 34:21~24과 신 16:9~17에 보시면 “맥추절을 지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시면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복을 헤아릴 줄 아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이요, 그 다음에 또 맥추절은 자녀와 노비와 성중의 객과 고아와 과부, 이방인까지 다 모여 즐거워하며 화목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리고 자원하는 예물을 드릴 때 하나님은 세 가지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열방의 대적을 쫓아주시고, 지경을 넓혀 주시며, 아무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신 16:16~17, 24). 이렇게 감사를 잘하면 하나님은 생활의 보호와 형통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시간에는 초막절의 의미와 맥추절을 지킨 사례를 통하여 이스라엘 선민들이 어떻게 감사하고 또 어떤 복을 약속 받았는가에 대하여 교훈을 받은 것입니다. 은혜를 깨달으며 감사를 잊지 않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103과 성탄과 관련된 지식들 (마 1:18~2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탄과 관련된 지식들”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탄생 경위를 말씀하셨는데,
1)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정혼만 하고 동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리아에게 잉태되셨다 하셨고,
2)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어서 아내의 잉태한 사실을 숨기고 정혼 상태를 가만히 끊으려 하였는데,
3)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시기를 그의 잉태는 성령으로 된 것인즉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4) 이 사실은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가 사 7:14과 8:8에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과 그 이름을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계심)이라 할 것이라”는 예언이 응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5) 그래서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동침하지 않은 상태로 기다리다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2. 저희들이 성탄과 관련된 지식으로 무엇을 아셔야 할 것입니까?
1) 성탄의 의미를 아셔야 하겠지요. 성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며, 왜 축하를 받으셔야 하는가를 아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 대답으로,
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곧 하나님이시며,
② 택한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힘입어 오신 것이고,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실 뿐 아니라 죄에서 멸망받을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으니까 모든 피조물들에게는 예수님의 탄생이 창조자의 강림이 되는 것이고, 성도들에게는 창조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세주가 세상에 오신 것이기 때문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하는가 할 때, 오신 목적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죄인을 구원하시려 함인데, 꼭 사람의 몸으로 오셔야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셔야 하는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 아담이 인류의 대표자인 것처럼 예수님이 인류의 대표자가 되셔서 구원받을 대상의 죄책을 짊어지셔야 하기 때문이고,
② 인간고를 친히 경험하시므로 인간을 위한 중보자가 되기 위함이며,
③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④ 인간다운 삶의 모범을 보이시기 위함이며,
⑤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를 든다면, 이미 창조 당시부터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고, 본문에도 나타난 바와 같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3) 또 성탄과 관련된 지식은 “왜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셔야만 하셨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① 예수님이 인간의 죄와 상관없이 순결한 분 그대로 오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에 반드시 부모의 피를 받아 생명체가 조성되고, 그 피의 성질에 따라서 성품이 구성됩니다. 여기에 피는 육체의 구성에만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품에도 관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피는 타락한 인간의 부패성을 전가시키는 매개체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요셉이나 마리아의 피를 받아 오셨다면 이는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죄있는 사람일 뿐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② 완전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아들이어야만 하나님이 그를 속죄의 제물로 쓰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신 것이고, 성령님의 잉태케 하심이란 인간의 피를 받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4) 그러면 성령으로 잉태케 하실 때 꼭 여인의 몸을 빌리셔야만 하는가 하시겠지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대로 응하여야 하며(창 12:2, 사 11:1, 마 1:1),
② 완전한 인간으로서 사회적 조건을 갖추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족보없는 인간이나 호적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족보가 확실하고 사람들이 아는대로 요셉의 아들로서의 호적을 가진(눅 3:23) 손색없는 사회인으로 모범을 보이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5)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지식은 예수님의 신인 양성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육체적, 도덕적, 사회적 조건을 구비하셨으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란 신분과 하나님이란 신성을 그대로 갖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자신의 영원한 본질이니까 그대로 보유하신 것 뿐인데, 그의 생애 중에 지혜와 능력으로 자주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고를 맛보시고 십자가를 지실 때는 완전히 인간적으로 당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을 대표한 입장에서 대속하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난이 끝난 다음부터 자신의 신성적 능력으로 부활을 하신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성탄의 의미, 강생의 의미, 동정녀 탄생의 의미, 성령으로 잉태된 의미, 신인 양성을 가지신 의미를 잘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104과 성탄절과 신앙 (마 2:1~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탄절과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 탄생한 곳에 와서 경배드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성탄을 맞이한 저희들은 먼저 본문 말씀을 통하여 동방 박사들의 신앙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1)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님 탄생 사실을 알고 두 번째로 축하하러 온 사람들입니다. 첫 번 축하는 천사들과 목자들이 하였습니다(눅 2:8~10). 예수님이 탄생하신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25리 밖에 안되는 가까운 곳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구약 성경에서 예언하신 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지 못하였다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그의 별을 보고 왔다”고 하였을 때 비로소 소동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2) 동방의 박사들은 메시야 탄생에 대하여 연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의 별을 보고 왔다”는 것은 막연한 점성술에 의한 지식만으로 예측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민 24:17과 계 22:16에 보시면 예수님을 별이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따라서 동방의 박사들은 별의 징조를 보면서 성경 말씀과 연관을 지어 연구한 결과로 메시야 탄생을 확신한 것입니다.
3)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려고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동방에서부터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다”는 말이 영접을 뜻하는 것입니다. 영접하지 않으려면 먼 동방에서 올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경배만 하고 끝낼 대상이면 찾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4)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리며 경배하였습니다. 이것은 영광돌리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연구하여 깨닫는 신앙,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는 신앙, 가장 값진 예물을 드리며 경배하는 신앙이 귀한 중에,
5) 또 한 가지는 계시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이었습니다. 계시에 순종하는 것이나 성경에 순종하는 것은 꼭 같은 것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한 저희들은 꼭 동방 박사들의 신앙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2. 은혜를 많이 받는 성탄절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로서 말구유에 탄생하신 것을 깊이 생각하시면서,
1) 먼저 구원의 은혜와 신령한 은혜를 받으셔야 하겠습니다.
①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② 예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 십자가로 구원하셨습니다.
③ 그런고로 구원받은 백성들은 반드시 십자가의 은혜를 믿고 십자가를 자랑하며 전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유와 평안을 힘입는 것입니다. 요 8:32과 갈 5:1에서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자유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또 자유를 주시러 오신 것입니다. 이 자유는 죄와 심판에서의 자유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로서의 특권있는 자유인 것입니다. 왕이나 권세자의 아들이 속박당할 일이 없는 것처럼 영원을 사는 성도가 죽음을 의식하지 않는 평안을 누리셔야 할 것입니다(요 14:26).
3) 예수님을 열심히 닮는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범적 인간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식을 배우고, 그의 생활을 본받으며, 더 나가서는 자기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 대하여 어떻게 충성하셨는지를 본받아 닮아야 할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부터 누울 자리 없이 구유에 탄생하시고, 가난한 집에서 자라셨으며, 빈 손으로 사시다가 빈 손으로 가신 그 생활이 오늘의 성도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어려운 사람들 편에 서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이면 구제와 봉사를 하려고 힘쓰는 것입니다.
4) 아기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어린아이처럼 순결해지는 저희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는 어린아이 같은 자라고 하셨습니다(마 18:4). 의도적으로 자기를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낮추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3. 금년의 결산을 잘 하시고 새로운 각오와 희망으로 새해를 맞이하셔야 할 것입니다.
1) 연약과 불충성에 대한 반성을 하셔야 합니다. 금년에 무엇을 잘못하였는가? 또 무엇이 거리끼는 것인가? 무엇이 연약하여 덕을 세우지 못한 것이 있으며, 하나님 앞에 열심히 충성하지 못하였는가를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2) 그리고 이웃 간의 사랑에 위배된 것이 있어서 서로 화해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꼭 만나서 사과하시고, 무흠한 관계를 회복시키시기 바랍니다.
3) 믿는 사람은 물질 거래 관계를 깨끗하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 신용을 흐리지 않기 위해서는 평소부터 물질 거래를 안하도록 노력하시고, 반드시 줄 것을 주고 깨끗하게 사는 습관을 기르셔야 합니다.
4) 마지막으로 새해를 출발하실 때는 먼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하시면서 믿음 생활의 발전을 이루기 위하여 목표를 정하고 새출발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데, 가장 중요한 은혜가 말씀에 끌리며 사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105과 우리의 날을 계수함 (시 90:8~17) 목록으로
송구영신의 때를 맞이하여 “우리의 날을 계수함”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 말씀 앞에 보시면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란 글이 있습니다. 모세는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의 창조자 되심과 영존하심과 인간의 생명에 대하여 명령하심과 또 인간의 생애를 “한 경점과 같다” 하시고 꿈처럼 또 아침에 핀 꽃이 저녁에 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9절 이하에서 인생은 짧고 일식간에 다하며 수고와 슬픔 때문에 무상하지만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을 때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일생을 평범하게 산 사람이 아니지요. 이스라엘 남자를 죽이는 때에 태어 났고, 강물에 버려졌으나 건짐을 받아 40년간 애굽 왕실에서 공주의 양자로 자랐고, 40년간 목자 생활을 한 후 80세부터 120세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출애굽) 지도자로 생활한 사람입니다.
1. 그런데 모세가 인생을 무상하게 여긴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인생이 죄를 너무 많이 짓고 살기 때문이었습니다. 8절을 보시면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다”고 하였습니다. 죄는 부끄러운 것이요 불행의 씨앗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약점이나 죄를 숨겨서 덕을 보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습니다(히 4:13). 따라서 자기의 죄와 부족을 숨기려 하는 것은 헛된 일이요 하나님을 속이려 하는 것이니까 일체 숨기려 하지 말고 회개하므로 새 출발하는 전환기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2) 인생이 하나님의 진노 중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9절에 보시면 “우리의 모든 날이 주님의 분노 중에 지나간다 하셨고, 또 11절에서는 ”누가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라고 하셨습니다. 모세의 생애도 그러하였습니다. 모세의 처음 40년도 민족과 함께 애굽의 노예 생활이었고, 목자 생활 40년이나 출애굽 40년도 다 괴로운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인생의 모든 날이 하나님의 분노 중에 지나간다고 한 것입니다. 인생이 죄를 떠나 살지 못하는 한 하나님의 노여움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너무 짧고 빠른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10절에서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 하셨는데, 이와 같이 인생을 짧게 알고 빠르게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오래 살아 보아야 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빨리 청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에 세월이 더딘 것 같아도, 성년이 되어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자신의 가족과 사회에 대한 책임 문제를 생각하면 인생이 너무 짧고 빠른 것을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금방 하루, 금방 일년이 가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시간도 “천년이 지나간 한 경점같다” 하셨고, 5절에서는 “꿈꾸고 잠잔 것처럼 지나갔으며 아침에 돋은 풀이…저녁에 베이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또 체부보다 빠르고(욥 9:25), 베틀의 북보다도 빠르다(욥 7:6)고 하였습니다. 인생을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다 빠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4) 수고와 슬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10절에 보시면 “인생의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년수의 자랑”이란 “오래 살았다”는 뜻인데 사람이 오래 살수록 수고와 슬픔을 더 많이 겪는다는 뜻입니다. 부모가 오래 살다보면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을 볼 경우도 있습니다. 재물이 많고 건강하고 명예를 갖고 있어도 슬픈 일을 안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였을 때 ‘재클린’ 여사가 당한 슬픔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인생은 다 수고와 슬픔을 겪으며 살기 때문에 무상한 것입니다.
2. “우리의 날을 계수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60세를 살면 21,600일입니다. 그것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날을 계수한다”는 뜻은 숫자적인 날수가 아니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보람이 있고 무상하지 않은가에 대하여 연구하라는 뜻인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인생의 불행은 죄 때문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면 반드시 행복할 것입니다. 죄사함 받고 인생을 보람있게 사는 방법에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우리의 날을 계수하여 무상하지 않게 사는 방법을 본문에서 세 가지만 교훈받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13절에서 “여호와여 돌아 오소서 언제까지(멀리) 계시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면 인생은 허전해 지고 망한다고 하였습니다(시 73:27). 그래서 말씀과 기도가 끊어지면 안됩니다. 말씀과 기도와 순종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방법입니다.
2)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으셔야 합니다. 17절에서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소서” 하셨고, 14절에서는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평생을 기쁘고 즐겁게 하소서” 하시므로 아침마다 하나님께 은총을 구하여 만족과 기쁨과 평강을 누려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시면 인생은 만족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또 15절에서는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하였고, 16절에서는 “주님의 행사를 종들에게 나타내시되 영광스럽게 나타내시고 자손에게도 나타내소서”라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한 해 동안의 생활을 반성하시고, 인생을 잘못 살면 헛된 것이므로 무상하지 않도록 잘살기 위하여,
①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실 뿐 아니라,
② 매일 아침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시되 믿음의 은총, 기쁨의 은총, 만족의 은총, 평강의 은총, 영광이 나타내는 은총, 모든 행사가 주님의 손에서 견고해지는 은총을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106과 믿음 생활의 반성 (엡 3:3~4, 계 3:20) 목록으로
송년 설교로 “믿음 생활의 반성”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희망을 갖기 위하여는 매사를 비판적으로 살피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지금 드리는 말씀은 제가 어떤 교회에 가서 설교한 내용을 글로 남기고 싶어서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 이웃들의 신앙 생활을 점검해 보시지요.
1. 예수 믿는 의미를 잘 알고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믿는 새생활은 이런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는 성도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귀하는 믿음 생활에 대하여 아시는대로 대답할 자신이 있습니까? 많은 성도들이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고 나면 큰 위안을 느끼고 “주일을 지켰으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원에서 노는 사람들에게 인건비를 주면서 “주일날 일하지 말고 교회에 나가서 예배에 참석하라” 하면 잘할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 생활은 제도에 복종하는 것만으로는 성립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로 거듭남이 있고, 하나님 아는 지식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른 순종으로 사랑과 사명 실천이 있으며, 매일 매순간 하나님을 의식하며 교제하는 영적 생활이 따라야 하겠지요. 그래서 “예수 믿는 의미를 잘 아시고 교회에 다니시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2. 믿음의 요소는 성경 내용이란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글로 기록하여 주셨습니다. 기록된 말씀은 참으로 확실한 것입니다. 부동산이 누구의 것인지, 이런 말 저런 말이 떠돌아도 등기부 등본에 뚜렷이 나타난 사람의 소유인 것처럼 기록된 성경 말씀은 참으로 확실한 신앙의 원리인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이 말씀을 돌려가면서 읽었고 또 사본하여 돌렸습니다. 설교문을 돌린 것이 아니고 성경 말씀 그대로를 적어 돌린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대강 기록한 것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도 알 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읽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몰라서 묻는 성도들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주신 것이 설교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눅 24:37). 그런데 오늘날은 완전히 거꾸로 되었습니다. 설교로만 은혜를 받으려 하고, 성경을 읽고 은혜받는 관계는 아주 없어지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래서 설교자의 목소리가 커졌고, 말재주 있는 증언자들이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현실 문화에 못 따라가는 기독교 실상의 퇴보라고 하여야 좋을 것입니다. 성경에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요일 4:11). 어떤 증언자가 사랑에 관하여 장시간을 설교하였습니다. 결국은 “서로 사랑하라”는 여섯 글자를 강조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무엇이 사랑이며 정의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설교는 성경을 깨닫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지만 한국 교계의 성도들은 거의가 성경에 눈길을 쏘지 않고 설교자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려고 하는 것은 마치 생선을 바닷가에서 사지 않고 소매상에 가서 사는 것과 같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여 깨닫는 성도가 되시고 잘 모르는 것만 설교에 의존하는 성도들이 되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내용과 뜻으로 전달되고 이해되는 것일 뿐 목소리의 웅변이나 세상의 이야기로 전달되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적은 무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많으면 감동이 큰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물은 그릇 분량만큼만 채워집니다. 사람이 많다 하여 내 그릇이 커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내 마음을 비우고 은혜 받을 자세를 갖출 때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처음 휴가를 용문산 41기 수련회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 장소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주여 주여 하는데, 우뢰 소리 같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군대 생활 중에 있었던 부조리한 한 가지를 회개하고 끊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죄를 과감하게 회개한다면 다른 부대로 전근을 가야 합니다. 그것이 저로서는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회개를 못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집회에서 은혜를 못받은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사람이 많아야 은혜를 쉽게 받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회개를 해야만 은혜를 받게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혼자 하여야 합니다. 회개만 잘하면 어느 골방에서라도 혼자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아닙니다. 노아 시대에 구원받은 자는 인류 중에 여덟명이었고, 모세 때에 구원받은 자도 역시 적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다수를 기뻐하시지 않으신다”(고전 10:5)는 증거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적은 무리에게 더 큰 은혜주시는 약속(눅 12:32)을 굳게 믿으시고 좁은 길에 선 것을 언제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나만 만나자고 하실 때 좋은 것처럼 주님이 나를 인정해 주신다는 확실한 신앙을 가질 때 가장 보람있고 행복한 것입니다.
4. 저희들에게 반성할 일은 너무 많습니다. 목사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고 생활하십니까? 또 이웃에 대하여 부자유한 관계는 없습니까? 또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신 6:5)? 교회에서 덕을 세우는 교인으로 인정을 받고 생활하십니까? 또 주님과 항상 동행하십니까? 새해에는 더 큰 변화가 있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107과 반성할 과제들 (행 20:34~35, 딛 2:7~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반성할 과제들”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앞에 읽은 행 20:34~35은 바울 사도의 생활 고백이고, 뒤에 읽은 딛 2:7~8 말씀은 바울 사도께서 ‘디도’ 사역자에게 권면하신 말씀입니다.
1) 바울 사도는 자신의 전도자 생활 고백에서,
① 자신이 수고한 소득으로 “동행들의 쓸 것을 공급하셨다” 하셨으니, 이는 물 후원이 빈약한 상태에서 자급 전도하셨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② 범사에 모범을 보였으니 참으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고,
③ 약한 사람들을 도왔다 하셨으며,
④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아시고 “주기를 좋아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네 가지 생활 고백을 교훈받았을 때 교역자나 성도가 다같이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바울 사도가 ‘디도’에게 주신 권면입니다.
①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에 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선한 일에 본을 보이십니까?
② “교훈을 부패하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그대로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음식을 냉장고에 보관했는데도 잘못하면 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도 연구를 잘못하거나 시험이 든 자들 중의 부작용을 막기 위하여 말씀 내용을 통제하다 보면 변질된 내용으로 증거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증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반듯하고 생생하게 증언할 것을 권면하신 것입니다.
③ 경건함을 유지하라(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하셨고,
④ 성도들로 하여금 말의 실수로 책망받지 않도록 교훈하며,
⑤ 대적자들이 성도를 볼 때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며, 악하다 할 것이 없도록 지도하라고 교훈하신 것입니다. 여기의 대적자들은 이단자들이나 불신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에게서 적은 과오만 나타나도 악하다 하고 비난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때에 성도가 빛된 생활을 흐리게 하면 그런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빛된 생활을 강하게 할 때는 악한 자들도 굴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들로부터 악인의 취급을 받지 않도록 확실하게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들을 깊이 생각하면 저희들의 생활에 대한 반성이 너무 미흡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2. 필자는 이 말씀을 상고하면서 이 말씀이 교역자의 생활을 교훈하신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몇 가지를 반성한 일이 있었습니다. 필자의 반성이 곧 여러분들의 반성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반성하여야 합니까?
1) 겸손한가를 반성하여야 하겠습니다. 겸손은 성도의 기본 자세입니다. 예수님이 종의 형상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마 20:28). 모든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2) 온순함에 대하여 반성하셔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온유, 겸손하셨습니다(마 11:29). 딤후 3:3에서 “사나운 것은 죄라”고 하셨습니다. 양이 털깍는 자 앞에서 잠잠함 같이 사나운 행동을 자제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사나움 그 자체가 마음 속에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욕심이 많은 사람이 아닌지를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욕심 많은 사람이 되면 덕이 안되겠지요. 십계명 중에 마지막 계명이 “이웃의 집이나 아내나 종이나 짐승을 탐내지 말라”는 말씀인데, 이것은 곧 성도가 물질 관계를 바로 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욕심’ 하면 물욕과 명예욕과 현세욕을 들 수 있는데, 성도가 그런 욕심을 자제하지 못하면 덕을 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물질을 양보하고(창 13:9), 바울이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전 15:9) 하셨고 또 “있는 바를 족한 줄 알라”(히 13:5) 하신 것처럼 필요 이상의 물욕과 명예욕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4) 게으르지 않은가를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자기 일에 충실하고, 낭비하는 시간을 줄여야 할 것입니다. 또 유익없는 일에 시간을 보내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짓는 일로 알고 반성하셔야 할 것이요,
5) 성경 지식이 너무 빈약하거나, 믿음 생활하는 일에 대하여 잘 모르시는 경우가 있을 것인데, 이런 것은 하나님 앞에 무례한 것이므로 성경 배우기를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6) 사랑 없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사랑 실천이 미숙하면 사랑 업는 자의 취급을 받기 쉬운 것입니다.
7) 어린아이처럼 순진하여야 하고,
8) 모든 일에 진실하셔야 하며,
9) 누구 한 사람과도 불화의 상태를 가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10)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현세적 영달을 별것이 아닌 것처럼 적당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약 4:4과 요일 2:15~16을 반드시 읽어 보십시오.
이상 열 가지 겸손, 온유, 욕심, 나태, 성경 지식, 사랑, 순진함, 진실성, 모든 이와의 화목 그리고 세상을 적당히 보는 마음을 도록 반성하고 결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