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온종일 신발 한 번 신어 보는 일 없이 살았던 날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런 시간을 두 해나 살았어요. 눈 뜨면 또 새 날을 주신 우리 하느님께 감사 드렸던 시간도, 잠자리에 들면 손으로 이부자리를 쓰다듬으며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는지 감격했던 시간도 잊은지 오래였어요. 결국 무기력의 극치를 달리던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울로 왔습니다.
2년 전, 결혼과 동시에 해외 파견 근무를 떠난 사위, 신혼인데도 혼자 살게 된 딸.
딸은무기력을 벗어나지 못하는 엄마를 서울로 오라 오라고 했습니다. 큰 병원으로 옮겨 보자고요.
딸은 비행을 가면서도 혼자 집에 있을 엄마 걱정에 곳곳에 보물을 숨겨두었죠. 노란 손수건 대신에 노란 포스트잍을 붙여 두었어요.
냉장고 문을 열면, '엄마 사과 주스 하나 먹으면 10% 나온 것'
세면대 서면, '울 엄마 세수 하시려고요? 토닥토닥 로션까지 바르면 50% 나은 것'
현관 앞에 나오니 폭신폭신한 운동화 한 켤레가 놓여 있다.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있다 봐요. 사랑해요.'
딸이 사 준 푹신한 운동화를 신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성당을 갔습니다. 물론 딸이 걸어서 가는 법과 마을버스를 타고 가는 법도 두 번 씩이나 가르쳐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성당까지 가는 길이 1시간이나 걸렸습니다. 너무 오래 걷지 않았던 시간이 길었거든요.
등촌 1동 성당을 갔던 첫 날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합니다.
10시 수요일 미사였죠.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를 참례 했습니다. 서기원바오로 부주임 신부님께서 집전 하시는 미사였습니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고해성사도, 거룩한 미사도 은총이었습니다.
미사를 마친 후 한참이나 제대를 바라보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오른쪽으로 고개를 떨구고 계신 주님을.
그렇게 혼자 주님을 바라보는데 뒤에서 누군가 조용히 등에 손을 올리며
''자매님 혹시 레지오 같이 하지 않으시겠어요?''
라고 물었습니다.
등촌 1동 성당은 낯선 사람도 이웃으로 맞아들이는 곳이었습니다.
''집이 통영인데 잠시 딸네 와 있어요.''
라고 했죠. 그랬는데도 웃으시며
''조만간에 손주들 키우러 서울 오셔야겠네요. 그 때 우리 레지오 같이 해요.''
라고 하더군요.
그냥 웃었습니다. 지하에 내려가 차 한 잔을 하자고 하더군요.
저도 모르게 따라갔어요. 실로 오랜만에 커피를 마셨습니다.
그 자매님은 자기 레지오 단원들을 소개해 주었죠.
다음 달에 자기 레지오 미사전례 봉사가 있는데 손이 모자라서 그러니까 저보고 한복을 입고 와서 대성당 앞에서 서울주보와 월간지 광헌을 나눠주는 일을 도와 주라고 했습니다.
저는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남편에게 택배로 한복을 보내 달라고 해서 한복을 입고 임무를 수행하기까지 했습니다.
웃음을 잃은 지 오래였는데 주임 신부님의 퀄리티 높은 강론과 유머는 순간 빵 터지게 했습니다.
제가 웃었어요.그것도 나도 모르게 소리 내서.
성우보다도 더 감칠 맛 나는 목소리의 부주임신부님 미사는 또 어떻고요. 사순절 십자가의 길은 눈물를 바가지로 쏟게 만드셨습니다.
이제 1년차도 안됐다는 보좌신부님의 강론은 열등감을 느끼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나날을 미사에 맛들이며 살았습니다. 어떤 날은 하루에 두 번도 갔습니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성당으로 이끌게 하였습니다. 하루종일 미사 갈 생각했습니다.
서울주보와 등촌 광헌월보를 너들너들 해질 때까지 보았습니다 .
한 시간 걸리던 성당길도 27분이면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딸의 말처럼 오월이 오면 엄마도 봄날처럼 피어날거라더니 정말 그랬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던 그 길고 긴 죽음과도 같았던 시간도 끝이 났습니다.
그래서 통영으로 내려 왔습니다.
등촌 1동 성당 미사가 그리웠습니다.
북신본당에 와서도 말 끝마다 제가 ''우리 등촌 1동 성당''이라고 하니까 남편도, 성가대 옆 자리에 앉은 레지나도
''우리 등촌 1동 성당 이라고?''
하며 제 본당은 그곳이 아니라 북신동 성당임을 굳이 일깨워 주었습니다.
제가 하도 등촌 1동 성당 이야기를 하니 딸이 오랜 냉담을 풀고 엄마 따라 미사를 왔습니다.
그 때 마침 주임신부님께서 공지사항에 세계 청년대회 홈스테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딸이 남편도 집에 없으니 청년 두 명은 받을 수 있겠다고 신청을 했습니다. 맛있는 조식과 커피는 자신이 있다면서.
그렇게 저는 등촌 1동 성당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어둠이 밝아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했을 때, ''멀리 보이는 사람이 이웃임을 알아볼 때'' 라고 했던가요?
등촌 1동 성당은 저를 성당에 온 첫 날부터 이웃으로 맞아들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등촌 1동 성당을 감히 우리 성당이라고 말합니다.
서울에 오면 나도 모르게 우리 성당부터 오게 됩니다.
딸이 오래간만에 엄마가 왔는데 자기랑 안 놀아 주고 시도 때도 없이 성당갈 생각만 한다고 투정을 부리는데도 말입니다.
어제 몇 달 만에 다시 온 우리 등촌 1동 성당,
서기원바오로 부주임신부님 집 전의 저녁 미사였습니다 .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 안에 무엇을 담느냐가 오늘 하루 내 삶을 결정합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라고요.
첫댓글 고마운 성당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