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연속 학교에서 연수를 듣고 있다.
초목들은 물론이거니와 자동차, 태양열 집열기, 도로와 같은 무생물들조차 더위를 감당할 수 없어 혓바닥을 내밀고 있다. 데워진 지구의 뜨거운 맛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 폭염에 아랑곳없이 연수가 열리는 강당은 웃옷를 하나 걸쳐야 할 정도로 추울 정도이다. 나의 시원함은 다른 어떤 곳의 지독한 열기일 것이다. 페퍼민트 차와 투게더 아이스크림, 집밥처럼 정갈한 점심도 공짜로 제공해 준다. 그러나 그 모든 장점이 있다한들 영혼을 팔 수는 없는 법이다. 강사진은 주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장학사, 초등학교 선생님들, 그리고 대학교수님도 1분 정도이다. 나 역시 초등학교 선생이면서 동료들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국민의 반 이상이 듣는다고 하는 유투브라는 무한한 공간은 우리가 설거지를 할 때에도 들을 수 있도록 최고의 지성을 제공해 준다. 운동하면서, 청소하면서도 얼마든지 좋은 강의를 들을 수 있다. 우리의 눈과 귀는 웬만한 걸 들이대어도 꿈쩍도 하지 않을 정도로 닳고 닳아있다.
내용여부를 떠나 자신의 소박하지만 꾸준한 실천을 말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언어로 진정성과 노력하는 모습이 귀를 끌어당긴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모은 방대한 자료로 아는 것, 들은 것을 보여주기 식으로 서로 이질적인 언어로 구성된 강의를 듣고 있노라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닥치고 앉아있기엔 몸이 너무나 근질근질하고, 도무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수긍이 가지 않는다. 그 정도가 심한 강의 앞에서 나는 ‘어쩌라고!’하는 심정으로 앉아있다. 앉아 있기는 했지만, 이틀동안의 정신적 피로함으로 인해 나는 소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2 아들녀석은 방학하기 전부터 보충수업을 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말을 했다. 빠질 정당한 이유가 없다는 걸 저도 아는지 그래서 더 화가 나는지 혼자 감정의 수위를 높였다. 자신의 눈높이에 맞지도 않고, 그런 수업을 왜 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말했다. 나는 그렇게라도 면학분위기를 붙들어야 하는 학교 입장이 이해가 되기도 하고(아니 익숙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아이들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단도리 하는 담임선생님의 힘겨움도 알 것 같았다. ‘그래도 이래 저래 다 안하면 어떻게 되겠노?’ 하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갖다붙였지만, 그 어설픈 논리는 나 스스로에게도 납득시킬 수 없는 일이었다. 큰 틀에서는 참가하는 것으로, 군데군데 자체휴식을 취하는 것으로 합의를 한 후 시간을 보내고 있다. 듣기 힘든 강의에 발광을 하는 나나, 보충수업 따위는...... 단숨에 휴지통에 쑤셔 박을 것 같은 아들이나 자신이 수긍하고 싶은 상황에 있고 싶은 욕망은 똑같은 것이다.
테레사도 그러해 보였다. 자신이 수긍할 수 있는 공간에 있기를 원했다. 테레사의 주변에는 집안에서 반라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어머니와, 샤워하는 테레사를 힐끗거리며 들여다보는 계부와, 촌구석의 술집에서 수작을 거는 주정뱅이들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테레사는 그녀가 원하는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 유일한 통행권은 베토벤의 음악과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와 같은 책이라고 생각하고, 수치스럽고 번잡한 일상 속에서도 꿋꿋이 그것을 꼭 붙들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우연히 나타난 사람이 의사 토마스였다. 토마스를 말하기 전에 이 소설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시대적 배경을 잠시 스쳐가 보고자 한다. 1968년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68혁명은 사르트르로 대변되는 실존주의가 휩쓸고 있었는데, 이들은 기존의 전통과 가치를 거부하고 특히 ‘죄를 지으면 지옥을 간다’는 기독교적 모럴에 넌덜머리를 내었다. 일반 대중의 경우, 실존주의에 함의된 철학적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보다는 전통에 반항하는 자유로운 가치에 열광했고, 그것이 더 큰 가치일수록 용기 있는 실존주의자가 되는 것이었다. 전 유럽을 휩쓸었던 혁명의 바람은 체코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소련의 지배를 받는 체코슬로바키아는 자유를 선포하고 ‘프라하의 봄’이라는 불리우는 자유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밀란 쿤데라 역시 혁명의 정중앙에 있었고 그의 분신이기도 한(아마도) 토마스는 실존주의의 신봉자였다. 소련의 지배아래에서 아부하던 정치가와 지식인들을 향해 토마스는 그들을 오이디푸스 신화에 비유하며, 잘못을 참회하며 자신의 눈을 찔러 속죄하지 않는 그들을 비난했다.
소설이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인물의 이야기라면, 토마스가 우리 주변의 실제 인물이라면 아주 난감해 질 수 있다. 아내와 이혼 후, 자신의 아들을 보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것을 비난하는 부모와의 관계도 망설임 없이 정리한다. 바람둥이인 토마스는 테레사와 동거하면서도 사비나를 비롯한 다른 여자들을 만나면서 테레사를 절망에 빠트린다. 그가 직업인으로서 훌륭한 의사임에는 틀림없지만, 한 개인으로서 과거와 상식과 책임의 밧줄을 끊어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의 삶을 놓지 않는다.
소설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을 이해하는 일이라고 했던가? 소설을 다 읽은 우리는 토마스가 테레사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명제를 부정할 수는 없다. 프라하가 소련군의 점령치하로 다시 들어가고, 강경한 진압 대신 지식인들을 회유하고 감시하며 타협적인 정책으로 오히려 피를 말리는 전략을 쓰고 있을 때, 토마스는 그녀가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으로 스위스로의 망명을 거부한다. 또, 스위스에서 그의 생활방식을 버리지 못하는 토마스를 견디지 못해 테레사가 다시 프라하로 돌아 갔을 때 그 역시 테레사에게 돌아가기 위해 난처한 상황을 거부하지 않는다.
테레사가 지고지순한 사랑, 진지함과 이상, 도덕성과 같은 높은 가치에 뿌리를 내린 무거움의 삶이라면 토마스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해 거추장스러운 도리나, 사회적인 시선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가 옳고 그르다는 말을 할 수 없다. 누구의 삶이 더 편안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테레사로 인해 토마스는 오히려 그가 유지할 수 있었던 사회적 지위가 추락하고 경제적 곤궁을 한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감당해 내었다. 토마스는 자신이 쓴 글을 통해 개인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물었으나, 책임을 지는 주체는 각 개인의 것이지, 자신이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한바탕 소나기라도 쏟아질 듯한 날씨이다. 점점 아열대성 기후가 되어가는 환경이다. 플라타너스와 은행나무 같은 나무들이 더 높이 자라날 것이다. 나는 인간에게도 이러한 방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뿌리가 자연스럽게 내려갈 수 있도록, 가지가 뻗어나갈 수 있도록 개인은 개인을 배려하고, 국가와 사회 또한 배려해야 할 것이다. 인간을 하나의 키치라는 상자에 집어넣으려는 시도를 한 모든 공산주의는 몰락했다. 사비나와 토마스가 그토록 싫어했던 그 키치는 우리에게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를 억압하던 과거정권이 몰락했다고 하더라도, 훌륭한 이상이라는 또 다른 키치로 우리를 강제하지 말 지어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오랜 시간을 억압당해 온 사람들이어서 그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만 참고 견뎌야 할 시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