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그 날은, 언제 사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별로 익숙하지 않았던 생선을 냉장고에 넣어두었고, 그것을 꺼내 김치와 다른 야채를 함께 넣어 찌개로 끓였다. 서호시장에서 사 왔었는데, 그렇게 싱싱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애써 요리한 국이 별 맛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식구들을 불러모아 밥 먹기를 권했고,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뒤적거리는 풍경의 시간이었다.
그다지 맛있지는 않았지만 함께 푸짐하게 먹을 수 있도록 나는 많이 넓은 그릇에 담아내었고, 나는 굼뜬 가족들에게 빨리 밥 먹자는 청을 그만하고 나 먼저 먹겠다고 생선을 발랐다. 크기가 크지 않아 살은 많지 않았고, 적당히 뜯어낸 살을 밥에 얹어 먹었다. 목으로 삼킨 순간 내려가는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뼈가 걸린 모양이었는데 문제는 밥과 생선이 넘어가는 위치가 적나라한 느낌으로 와 닿았다. 나는 내가 일생동안 밥을 먹으면서 이렇게 음식물이 내려가는 느낌을 실감나게 느껴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어느 지점에서 내려가는 느낌이 멈추었고, 대신 격렬한 통증이 밀려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나는 당황하는 남편과 함께 응급실로 달렸다.
통영의 응급실은 그다지 응급을 요하는 곳이 아니었다. 감기몸살환자나 손이 베인 곳을 접합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일요일 아침의 새통영병원에서는 내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진주 경상대병원으로 향했다. 나는 바로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꼬구라져 있었다. 어디쯤 가고 있는지 몇 마디 물었을 뿐이었고, 내가 아무리 아파도 내 고통을 남편이라 할 지라도 그렇게 소리높여 호들갑 떨어대기 싫다는 자의식은 있었다. 그러나 태어나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종류의 고통이었다.
드디어 도착한 병원, 그 곳은 가히 응급실이라 이름 붙일만한 곳이었다. 나도 충분히 응급환자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응급환자도 기다리고 접수하고 해야했다. 생사를 다투거나 치명적인 부상으로 출혈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증상을 말하고 엑스레이를 찍었으나 사진 상으로 뼈가 보이지 않았다. 먼저 이비인후과 진료를 권해서 우리는 또 기다렸다. 갈수록 통증이 나를 죄어왔고, 그 모습을 본 병원의 직원이 내게 휠체어에 앉아 이동하기를 권했다. 교통사고로 동생이 몇 개월 동안 입원해 있었을 때 와 본 적이 있던 3층의 진료실로 이동해서 2~30대 밖에 되어보이지 않는 이비인후과 의사와 만났다. 나는 저 의사가 뭘 할 수 있을까 심히 의심스러웠고, 신뢰가 가지 않았다. 혀를 길게 내밀고 목 안쪽에서 뼈가 있는지 꺼낼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을 했다. 나는 혀를 길게 내미는 일도 싫었고, 내 혓바닥을 의사가 장갑 낀 손으로 세게 잡는 일은 더 싫었다. 그리고 ‘지금 당신만큼 긴급을 요하는 많은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이렇게 협조하지 않으면 곤란하다’라며 사무적으로 대하면서 말하고 있는 저 새파란 의사가 나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으리라는 기본적인 불신을 갖고 있었다. 협조는 혹은 마음을 얻는 일은 겉으로 드러나는 말로 할 수 없다.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있고 신기하게도 상대방은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챈다.
많은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협조하지 않았던 나는 내과로 옮겨갔다. 내시경 치료를 위해서였다. 내과의사와 간호사는 내게 내시경을 해 본 적이 있냐고 물었고 나는 없다고 말했다. 보통은 수면내시경을 하지만, 환자님의 경우 조금이지만 식사를 했기 때문에 수면내시경의 경우 음식물이 역류해서 기도를 막을 위험이 있다. 그래서 생 내시경을 해야한다. 자신들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지만 위험을 대비해서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은 위급할 땐 생 내시경도 해야하고 또 견뎌내더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카메라가 달린 내시경과 가시를 빼 내기 위한 장치가 입을 통해 들어갔고, 나는 또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을 겪게 되었다. 담당의사는 뼈를 꺼내어 남편에게 보여주었고, 2~3센치 크기의 부메랑 모양으로 생겼던 그 뼈가 식도를 훑고 지나간 상처를 이야기 했다. 목 안쪽에서의 비교적 넓은 반경의 식도를 통과하던 뼈가 위에 도착하기 전의 식도 반경이 좁아지던 어느 지점에 정지하여 콱 박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비로소 고통에서 해방되었고, 일요일은 한낮을 지나고 있었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나는 그제서야 나를 이렇게 치료해 준 세월이 묻어나는 중년의 의사와 간호사 분들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일요일인데도 나오셨어요”
“네, 저희가 휴일에는 당번을 정해서 집에서 대기하고 있어요.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이렇게 나와서 치료하고 가요”
“제가 내시경 넣을 때 너무 힘들게 해서 죄송해요”
“아니예요. 환자분은 엄청 잘하신 분에 속해요”
“그래도, 그래도 너무 너무 감사해요. 이렇게 치료해 주지 않았으면 제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어요”
“너무너무 아프신 게 맞았어요. 그렇게 뼈가 박혀 있으면 아플 수 밖에 없어요. 위험했어요. 정말. 수고 많았어요”
상처 난 식도 벽에 염증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항생제를 처방받고, 하루? 이틀 정도의 금식을 지시받았다. 20여만원이 넘는 응급치료비를 지불하였다. 그 상태로면 그렇게 죽을 수도 있었을 나를 살려 준 현대의 의료기술에 감사했다. 병원 문을 나서는 데 무심한 가을 햇빛이 내려쬐고 있었고 잔잔한 바람도 스쳐가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평온해 질 수 있었다. 내 기억은 거기까지만 선명하고, 다시 집으로 오던 길, 집에 와서 아이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일, 쇼크 뒤의 후유증으로 남은 오후를 누워 지냈던 일들은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 생선의 이름은 ‘열기’였다. 일명 빨간 생선. 크게 맛없는. 그리고 뼈는 엄청나게 강한. 우리가 보통 많이 먹는 고등어나 갈치, 전갱이 같은 생선은 뼈가 부드럽고, 웬만큼 삼켜도 밥이랑 김치를 한껏 우겨 넣으면 그냥 넘어가게 마련인데, 이 열기는 도무지 용서가 없는 딱딱한 뼈였다. 이 굽힐 줄 모르는 성깔 있는 생선을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하다. 나 역시 열기라는 너를 잘 못 알아보고 호되게 당했다.
그 뒤로 나는 작은 트라우마가 생겼다. 뼈가 있는 모든 생선을 조심하게 되고, 자꾸만 목에 걸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앞선다. 하다못해 사과를 먹다가도 가운데 중간부분을 삼키다가 켁켁거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