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경숙 시인 등단 심사평 ◈
미당의 시 ‘국화 옆에서’가 생각나는 계절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
폭염의 골짜기를 지나 서늘한 바람이 터치하면 국화는 노란 꽃망울을 터뜨립니다. 하늘에 잇닿은 키 큰 가로수의 푸른 잎들은 본연의 빛깔을 드러내고 속절없이 자진하기 시작합니다.
그 계절의 모퉁이에 함초롬히 핀 국화는 /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라고 읊조린 향기 짙게 밴 완숙한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윤슬 윤경숙 시인의 탄생을 지켜보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덕향문학 목요문학강의실 최기복 교수의 위대한 해산 앞에 숨죽입니다. 열정적인 강의실에서 찬연하게 빛을 발하는 샛별을 하늘에 띄웠습니다. 최기복 교수의 녹슬지 않는 시심(詩心)에 갈채를 보냅니다. 윤슬 윤경숙 님의 위대한 탄생에 환호합니다. 심사위원의 데스크에 당도한 따끈따끈한 원고를 대하는 마음은 경건합니다.
1. 들꽃
살포시 햇살 받으며
바람에 꺾이지 않으려
여린 목을 연신 흔들고 있다
세월은 자꾸 가고
기다림에 지쳐
꽃물 뚝뚝 떨어져
사그라지고
내 마음 준 당신은
어느 곳을 서성이고 계신가요?
내 이름도 모르면서... // <들꽃> 전문
윤경숙 님의 詩 <들꽃>을 대하면서 넓게 펼쳐진 들에 흐드러지게 핀 이름 모를 작은 꽃을 보는 듯합니다. 살포시 햇살 받으며 환하게 웃고 있는 꽃송이,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는 모습을 바람에 꺾이지 않으려 여린 목을 연신 흔들고 있다는 묘사가 대견합니다. 작은 들꽃이 바람에 몸을 내맡기고 순리를 따르는 모습이 시인 자신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어쩌면 시인은 독자로 하여금 들꽃의 몸짓에 동일시하도록 공감의 장치를 장착했을지도 모릅니다.
시나브로 흐르는 시간에 기다림에 지쳐 꽃물 뚝뚝 떨어지고 사그라지는 들꽃은 애처롭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들꽃이 피었다 지는 것에 신경 쓰지 않는 군상 속에서 시인은 들꽃의 시듦에 가슴 아파합니다.
마지막 연이 절창입니다. 내 마음 준 당신은 / 어느 곳을 서성이고 계신가요? / 내 이름도 모르면서.../ 들꽃의 패러독스입니다. 바람에 꺾이지 않으려고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던 모습은 오간 데 없습니다. 당차게 따지듯이 묻는 들꽃의 모습이 앙증맞습니다. 사랑스럽습니다.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은 들꽃의 독백이 긴 여운을 줍니다. 시인의 놀라운 기교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2. 가을의 길목에서
초췌한 여심이 추심을 향한 노래를 부른다
은행나무 이파리 끝에 매달려 시간을 조율한다
매미의 울음소리가 계절의 문턱에서 머물고
풀벌레는 목이 메도록 운다
내 유년의 가을은 아직도 숲 속에 머물고
낮달은 초라하게 웃고 있다
여기까지 온 것도 신의 섭리이다
간절한 기다림의 열매는 마음속에 살아 숨 쉰다 // <가을의 길목에서> 전문
시인의 시간이 가을의 길목에 다다랐습니다. 추심을 향한 노래, 은행나무 이파리 끝에 매달려 시간을 조율하는 여류시인의 마음이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늦게 남은 매미의 울음소리를 계절의 문턱에 머물게 하고 가을 전령사의 시끄러운 소리는 목이 메도록 운다고 의인화했습니다. 이순의 능선에 다다른 시인은 유년의 가을 숲 속으로 역주행하고 희미하게 스치는 낮달의 실루엣은 초라하게 웃고 있다고 합니다.
시인은 순하게 현실로 돌아옵니다. 여기까지 온 것이 신의 섭리였음을 순한 어린양처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가슴속에 도사리고 있는 뜨거운 열정의 열매는 감출 수 없습니다. 간절한 기다림의 열매가 마음속에 살아 숨 쉰다고 한 마지막 행에 방점을 찍습니다. 시인의 행보를 지켜보는 독자의 마음을 두근두근 설레게 합니다.
3. 별
밤의 주인이 되어
그 허세가 반짝거린다
친구 하자고
손 내미는 어둠을 뒤로한 채 고고하다
시샘하듯 서로 무리 지어 속삭인다
난
너의 사랑이고 싶다고
무류한 밤의 서정에
숨죽이고 살아온 시간의 덫
저항의 운명 앞에 체념의 속삭임은
침묵의 기도가 된다
넌
나의 사랑이란다 // <별> 전문
시인의 <별>과 별을 사랑한 영원한 청년 시인 윤동주의 별과 나란히 놓아 봅니다. 윤동주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합니다. 윤경숙 시인의 별은 밤의 주인이 되어 반짝거리는 허세를 품은 당당함이 독보적입니다. 고고하고 시샘하듯 속삭이기도 합니다. 윤동주 시인의 별과 윤경숙 시인의 별이 다른 듯 보입니다.
그러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고 읊조리는 윤동주 시인의 별과 저항의 운명 앞에서 넌 나의 사랑이라고 읊조리는 윤경숙 시인의 별은 다르지 않습니다. 두 개의 별 모두 사랑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닌 별입니다.
별은 시인을 사랑합니다. 하여 시인의 하늘에 유독 찬연하게 빛나는 존재가 별입니다. 시인은 별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인은 외로운 날에 별을 찾을 것입니다. 행복이 충만한 순간에도 별을 보고 탄성을 지를 것입니다. 시인이 슬퍼서 하염없이 울고 있을 때도 별을 찾을 것이며 별에 기대어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어쩌면 윤경숙 시인의 하늘에서 빛나는 별은 윤동주 시인이 동경했던 별일지도 모릅니다. 양을 치던 목동의 어깨에 기댄 채 편안하게 잠든 아가씨와 밤을 지낼 때 빛나던 그 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윤경숙 시인의 <별>은 많은 상상과 감동을 주는 문학의 주인공입니다.
4. 시조창에 빠졌을 때
한가득 숨을 단전에 가두고
긴 목구멍으로 한을 토해낼 때
난
구름 위에 떠있고
물과 함께 유유히 흐르고
새처럼 날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고고한 선비의 혼령이 바람을 가른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내 가슴속의 한들을 방울방울 녹여낸다 // <시조창에 빠졌을 때> 전문
윤경숙 시인의 자화상 같은 시 <시조창에 빠졌을 때>을 대하는 손이 경련합니다. 잠시 블랙홀에 빨려들 듯 호흡을 멈추게 하고 긴 숨을 토하게 합니다.
시조의 초장을 읊조릴 때 구름 위에 떠 있다가 물과 함께 유유히 흐르게 합니다. 중장을 뱉어낼 때 새처럼 날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고고한 선비의 혼령으로 바람을 가릅니다. 절정에 치달아 등줄기를 탁 흐르는 땀방울이 가슴속의 한(恨) 녹여냅니다.
윤경숙 님이 시인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감지하게 합니다. 윤경숙 시인이 시조창을 할 때마다 만난 시조의 시어가 님의 가슴에 파고들어 심장에 안착하고 혈맥을 타고 흘러 전신으로 흘러 시인의 DNA가 되었을 거라는 아름다운 착각을 해봅니다. 그 DNA가 윤경숙 님을 시인의 꽃길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윤경숙 시인의 시조창과 시가 엮어내는 놀라운 문학의 하모니를 기대합니다.
5. 집 앞 외등
등신처럼 서서
등신불이 되지 못한 한을 안고
밤의 길목을 지킨다
피곤한 육신의 무거운 발걸음이 집 앞에 이르면
그는 잠시 꽃등이 되기도 한다
견딜 수 없는 고독에 태양을 원망하다
겨우 맞이한 밤의 서정 그리움으로 몸살을 앓는다
휘청거리는 큰 키 때문에 정체성을 잃어버릴 때
마실에서 돌아오는 나를 맞이하며 반기는
속 깊은 우정
거기 그 자리
골목을 지키는 오롯한 모습이 성자를 닮아간다 // <집 앞 외등> 전문
가로등이 시인을 만나서 성자가 됩니다. 과연 목요문학강의실이 배출한 시인답게 생명이 없는 존재에 생기를 불어넣어 인격체가 되게 했습니다. 거기 그 자리 골목을 지키는 오롯한 모습은 성자의 모습입니다.
등신(等神)은 어디에서 나온 말인지 시인은 알고 있습니다. 신의 형상을 딴 나무 인형을 등신이라고 합니다. 우쭐대다 망치고 수치스럽고 실수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신이 하는 것과 같은 것들을 비슷하게 해내는 아주 작은 신(神)을 ‘등신’이라고 합니다. 윤경숙 시인이 등신(等神)의 반열에 오르게 될 날을 고대합니다.
난
구름 위에 떠있고
물과 함께 유유히 흐르고
새처럼 날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고고한 선비의 혼령이 바람을 가른다
윤경숙 시인의 자화상 같은 <시조창에 빠졌을 때> 중에서 절창의 부분을 선별하여 극찬합니다. 덕향문학 15호를 통하여 등단하여 기성문인의 반열에 오른 윤경숙 시인의 앞날에 문운이 활짝 열리기를 빌면서 크게 기뻐합니다. 가문의 영광입니다. 많은 축복받으소서!
(심사위원 : 김구부, 김인희(記), 신상성, 최기복, 최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