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부활의 두길
요한복음 5:29, 20:1-18, 시편 16:10,
누가복음 24:46, 사도행전 2:25-31, 13: 34-35, 17:3, 고린도전서 15:4
홍제원교회
1932. 4. 27.
今春雨始降, 草木萌芽, 溪流始聲, 百虫驚蟄, 是孝子思親之日, 不勝凄愴, 親如彼來, 彼氷雪雖猛, 生氣不能壓倒, 石底之竹筍, 必穿石而出, 此理甚明, 彼鶉破殼而出者, 以有生命故也. 人若有生命. 万難不壓倒也. 必破難局而出, 主復活以有生命故也. 此時羅兵守之, 且印封皆無所施, 大石塞門, 亦自移去, 地上帝王, 以己權力妨主之道, 皆無所施也. 吾信徒前有百難, 必冒險而往, 勇氣百倍者, 主必佑之, 主命徒曰涉險海云, 吾等不必避世, 以信而往, 主必佑之, 少勿驚疑可也. 此時未明也, 旭日姑未東昇, 宇宙捲入黑幕之中, 寂而無聲像, 架下之人心, 沈黑不辨東西, 不辨是非. 如롬家圍繞之人, 又如洪水之人, 妄動招禍, 有不可言矣. 此時聖京市民, 沈在深睡中, 㮢端之雀, 姑未弄旭, 路上之馬跡, 姑未生痕, 行人稀少, 亟變無所示而起人皆未知, 但知尸出墓外, 不知何在, 故羅人路人流言曰, 門徒盜尸而去, 此何怨甚也? 吾等亦復活之時, 角響雖發, 人皆不聞不知. 皆在困睡中, 捲入地獄, 如紅袍之富人, 矇然不覺哀哉. 孟子曰捨正路而不由哀哉亦此也. 然復活有二, 一善의 復活, 二惡의 復活也. 人皆有復活之理, 而惡之復活有永苦, 不如不活, 善之復活有永生, 爲吾所望. 參看路可十六章可也. 市民皆睡而主忽復起, 市民雖生如死, 是惡之復活也. 今世之人皆無生命, 飮酒放浪深眠于淫亂之中, 地獄之門爲爾而開. 吾等賴神而生, 요한三章七. 是眞生也. 不知眞生者, 如人在屋外, 不聞屋內之音樂也. 某記者入深山之中, 見石上藤籠而苔絲也, 藤苔下視石而謂之曰 我雖微物是生的也, 爾是無機物也. 又見昆蟲飛揚于棕櫚之上, 蟲謂棕櫚曰汝花葉雖美, 不如我高飛, 我生的動物也. 又見幼兒牽一犢, 犢大如山, 兒謂犢曰我是汝之主人, 汝無靈魂故耳. 此等植物及動物, 皆無靈故無復活. 人有靈故復活. 吾等信主爲神之家族, 如主復活, 角響發時上雲間見主, 彼麥粒落地身朽, 而苗生主已言之, 吾依主而使神內住, 必至於不朽不腐, 身榮如主共王天國矣. 主號令臨空叫聖徒而, 起應之曰나보니可也. 乳兒安寢母懷, 聖徒安在主懷, 寂久無聲, 時至則主必以慈愛之音呼之, 世人皆不得知而已. 東昇之太陽朗照于墓內, 雲光燒烟, 威嚴壯快, 明朗新鮮, 精潔高尙, 所望充滿, 比彼黑暗, 何優何劣也.
지금 봄비가 처음 내리니, 초목이 싹 트고, 시냇물이 흐르며, 온갖 벌레들이 놀라 깨어납니다. 경칩(驚蟄)은 바로 효자가 어버이를 생각하는 날로써 슬픔을 이길 수 없게 합니다. 어버이가 저 나무와 같다면 얼음과 눈이 아무리 혹독하여도 살아나는 기운을 억누를 수 없어 살아났을 것입니다. 저 돌 밑에 깔렸던 죽순은 돌을 뚫고 올라옵니다. 이 이치는 아주 분명합니다. 메추라기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도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생명이 있다면 온갖 어려움도 이기며 난국을 깨뜨리고 나올 것입니다. 주께서 부활하신 것은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로마 병사가 무덤을 지켰고, 또 무덤의 문을 인장을 찍어 봉하여 놓았으나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막아 놓았던 무덤의 거대한 돌문은 스스로 옮겨졌고, 이 지상의 왕은 권력으로 주님의 길을 방해하려고 하였으나 모두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 신도의 앞에도 백 가지 어려움이 있어 반드시 위험을 무릅쓰고 가야 합니다. 용기백배한 사람은 주께서 반드시 도와줍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위험한 바다를 건너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세상을 피하지 말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주께서 반드시 도와 줄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도 놀라고 의심하지 말아야 됩니다.
이때는 아직 날이 밝지 않은 미명(未明)으로 밝은 해가 아직 동쪽에서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우주는 검은 장막 속에 말려들어 있어서 소리와 형상이 없는 적막뿐이었습니다. 십자가 아래 있던 사람들의 마음은 깊은 어둠 속에 동서를 가릴 수 없고 시비를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롬의 집을 둘러싼 사람들 같고. 홍수를 만난 사람과도 같아서 함부로 움직이면 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말로써 다할 수가 없습니다.
이때 거룩한 성(聖京) 예루살렘의 시민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처마 끝에서 밤을 지샌 새들은 아직 날지 않았으며, 길 위에 말 발자국의 흔적도 없고, 지나는 사람들은 아주 드물었습니다. 엄청난 변화는 보인 바가 없어서 잠에서 일어난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다만 무덤 속의 시체가 없어져서 아무도 어디로 갔는지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로마 사람이나 길 가던 사람들은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해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우리도 부활의 날에 풍악인 나팔소리가 아무리 나더라도 사람들은 알지도 듣지도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게 됩니다. 지옥에 가기를 마치 붉은 홍포를 입은 부자와 같이 되어 몽롱한 가운데 슬픔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맹자가 이르기를 ‘바른 길을 버리고 가지 않으니 슬프도다’ 한 것이 역시 이러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선(善)의 부활이고, 둘째는 악의 부활입니다. 사람에게는 부활하는 이치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악의 부활은 영원한 고통이 있으므로 부활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선의 부활은 영생(永生)이 있으므로 우리의 소망이 됩니다. 참고로 누가복음 16장을 보는 것이 옳겠습니다. 사람들은 잠에 빠져 있으나 주께서 홀연히 일어나셨으니 백성들은 비록 살은 것 같으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이는 악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 사람은 다 생명이 없습니다. 술 마시고 방랑함으로써 음란한 가운데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지옥의 문이 열려 있으나 우리는 하나님에 의하여 살아나는 것이다’(요한복음 3:7). 이것이 참된 생명입니다. 참된 생명을 모르는 자는 마치 사람이 집 밖에 있으면서 집 안에서 나는 음악을 못 듣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기자(記者)가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돌 위를 등나무 넝쿨이 에워싸고 있으며 이끼가 낀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등나무와 이끼가 돌을 내려다보며 ‘우리는 비록 하찮은 미물(微物)이지마는 바로 살아 있는 생물체이고, 너는 움직이지 못하는 무기물이라’고 하였답니다. 또 곤충이 큰 종려나무 위에 올라가서 ‘네 꽃이 아무리 예뻐도 나처럼 높이 날 수가 없다. 나는 살아 있는 동물이다.’라고 하였답니다. 또 어린 아이가 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가는데, 송아지의 크기는 산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소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의 주인이다. 너는 영혼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답니다.
이런 식물이나 동물들은 다 영혼이 없기 때문에 부활이 없습니다. 사람은 영혼이 있으므로 부활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으므로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주님과 같이 부활 합니다. 나팔 소리 날 때 구름 사이로 올라가서 주님을 뵙게 됩니다. 저 보리 낱알이 땅에 떨어져서 자기 몸을 썩게 한 뒤에 싹을 틔운다는 사실을 주께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께 의지하여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안에 거하게 하시어 썩고 부패하지 않는 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몸의 영광이 주와 함께 천국에서 왕이 되어야 합니다. 주께서 공중에 임하시어 명하시면 성도가 일어나 ‘랍오니여!’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편히 잠자듯이 성도도 주님의 품 안에서 고요히 있었습니다. 이렇게 오래도록 조용하게 있다가 때가 되면 주께서 자애로운 음성으로 성도들을 부르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동쪽 하늘에서 올라온 태양이 무덤 속을 밝게 비취자 구름과 안개가 사라지고 세상은 위엄과 장쾌한 분위기로 밝고 신선하고 깨끗하고 고상하여 소망이 충만하게 되었으니 저 컴컴하고 어둡던 세계에 비하여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쁜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