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세월을 아끼라(惜光陰)
에베소서 5:16
信仰與時間有何關係也? 聖經每言時間, 以厲信者之心. 使徒祈禱之時, 必言申時初, 「使徒三章 一절」 安得烈(Saint Andrew.안드레)之逢主時, 必言申正, 「요한一章 三九절」 農夫入葡園時, 必言巳時午時申時酉時, 「馬太二十章 一절 至六절」 弟子欲葬父, 主曰爾從我, 「馬太八章 二十一절」云者, 皆言時間之急, 而以厲其信者之心也. 孔子曰 朝聞道 夕死可也, 亦言從道之急也. 佛有四願, 願不老不死不病不生也. 故卽爲出家從道, 佛亦言時間以勵信急也. 主曰 先求義國, 先者指時間如金之貴, 如此貴重之時, 豈行不必要之事? 當擇最要之事, 而先爲之可也. 最要之事何也? 食乎衣乎, 農乎商乎, 事父母乎, 使妻子乎, 此皆要道, 而皆關人事, 人欲行之則行之, 然惟神不許之則不能行, 吾云萬事能爲之云, 此甚無力之言也. 主曰 今夜若取爾靈, 則爾糧皆無用. 又謂弟子曰 此聖殿雖美, 石不能疊, 而盡毁之云. 項羽力雖拔山, 終自刎而死於烏江, 參孫力可搖大屋, 而終矐目而死, 雖空鳥野花, 神不許則不能永地, 知此理者, 當先爲者何事也? 노아下舟, 先築祭壇, 아부라함이入迦南, 先築祭壇者, 皆以此也. 故信者於萬事之先, 當先行事神之事可矣. 若人先行而神後則必敗矣. 摩西不能入迦南何也? 傳道時 欲以己能試之, 故主不許入也. 不榮神而欲榮己者 自古皆敗, 敎會有三獻 一가인, 二해롯, 三猶大, 此皆先己而後神故敗矣. 故吾等事神當先, 食先祈禱, 寢先祈禱, 心常黙禱, 與神聯絡, 免爲孤子, 如是而神國庶臨于爾內矣. 主曰 恒在我道, 此恒在云者, 亦時間也. 恒繼續之意, 而愈久而不息也. 山川雖變, 我心愈益堅固. 主日天地, 雖我言一點, 一刻皆成矣. 我信如是, 我心恒在主言之內, 子雖爲父之子而欲孝, 病時幼時除之, 則能孝之時不過三十年矣. 故當盡力孝親可也. 故欲孝而父不待, 樹欲靜而風不止矣. 吾等欲爲善事, 而魔常試之, 故不能專力, 故光陰可惜也. 不費于無用之事, 雖片時不可虛送, 當惜寸陰. 伏奇文夕戚, 皆惜時間故也. 鷄鳴而起, 孜孜爲孝, 文王坐而待朝, 古者諸侯庭所, 揀而朝臻, 臣論國事, 諸臣朝服而待, 徧臨卽入殿, 得布論事. 故主不擇時而禱, 或於願時祈, 或終夜禱, 皆惜時故也. 主命徒曰 汝傳道時, 勿與人修人事, 徒請葬父, 使死人葬之, 汝從我言, 事主甚急急, 不可須臾落也. 吾等恒念主之事, 使主在吾心內, 我與主爲一體, 不可湏臾離也. 可離非道也, 信仰如呼吸, 呼吸停止則死也. 生則當呼吸, 保羅曰 不休祈福, 恒常慰汝, 怳在凡事感謝, 是繼續之意也. 信心如水之流, 如樹之長, 不流不長則死也. 信仰生生不已, 舌口新新道也. 時間利用於前進, 不可用於後退者. 聊看今世之人, 時間浪費於無用之事, 飮酒博奕是也. 每看路邊有博奕者, 彼皆無從事處, 故設座路傍奕博, 文明之人見之, 笑以爲野蠻. 當面之急急, 多設工場, 國內無遊手者, 如有遊手者, 警官當押去勞働, 警官使之勞働則賃薄, 自由勞動則賃厚, 人人不欲遊手, 工場多則勞動處多矣. 人無遊手, 國何貧乏乎? 時間之浪費, 不可專責人民也, 政者之有責任矣. 當急急施設, 使國無遊手者至可. 敎民時間尤爲貴用, 必樂時間保存, 此無損害, 則是謂文明之人也. 未開者無時間觀念, 萬事瓦解, 寒心寒心. 或於婚因式場, 以常時礼式, 請帖廣告, 而一時或二時에누리. 來客所苦, 狼狽多矣. 歡不爲歡, 와승톤高官集會, 至時間 請客不來, 와승톤先食閉會, 後客來曰 時計病矣, 若時計不改, 則當遞貴官云矣. 獨逸乾提先生, 每朝七時必過市, 市民一齊時間改正, 故獨逸國民有創造之氣.
신앙은 시간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성경>에서는 시간을 가지고 신자의 마음을 권면하였습니다. 사도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 갈 때는 신시(申時) 초(初 : 오후 3시경)였고(행 3:1), 성 안드레가 주님을 뵈온 때도 신시(申時) 정각[申正 : 오후 4시경]이었습니다.(요 1:39). 농부가 포도원에 들어갈 때를 사시(巳時 : 오전 10시). 오시(午時 : 낮 12시), 신시(申時 : 오후 4시), 유시(酉時 : 오후 6시).를 말하였습니다.(마 20:1-6).
제자가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하니, 주께서 ‘너는 나를 따르라’(마 8:21)고 하신 것은 다 시간이 급함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이는 신자의 마음을 면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라고 한 것도 역시 도를 따르는 것이 급함을 말한 것입니다. 불교에는 네 가지 소원[四願]이 있는데, 불로(不老)와 불사(不死)와 불병(不病)과 불생(不生)입니다. 그러므로 즉시 출가하여 도를 따르라고 하였는데 불교도 역시 시간이 신자를 분발 시키는데 급함을 나타냈습니다.
주님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하였으니, ‘먼저’라고 하는 것은 시간이 금과 같이 귀중함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렇게 귀중한 시간을 어찌 불필요한 일에 쓰겠습니까? 마땅히 가장 중요한 일을 택하여 먼저 행하도록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먹는 것입니까, 입는 것입니까, 농사일입니까, 상업입니까, 부모 섬기는 일입니까, 처자식 먹여 살리는 일입니까? 이 모두 중요한 길이긴 하지만, 이는 다 사람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행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하기를 ‘만사를 다 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매우 무력한 말입니다. 주께서 ‘오늘 밤에 만일 너의 영혼을 데려간다면 너의 양식은 다 소용이 없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또 제자에게 이르기를 ‘이 성전(聖殿)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돌을 겹쳐놓을 수 없도록 다 허물어버릴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중국의 초패왕 황우(項羽)는 ‘산을 뽑아낼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하였으나 결국에는 오강(烏江)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고, 삼손은 큰 집을 흔들 수 있는 힘을 가졌으나 끝내 눈이 멀어 죽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나 들판에 피는 꽃들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아는 사람은 무엇을 먼저 하여야 하겠습니까? 노아는 배에서 내리자 제일 먼저 제단을 쌓았고,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먼저 제단을 쌓은 것은 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만사를 하기에 앞서 마땅히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먼저 행하여야 합니다. 만일 사람을 앞세우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뒤로 한다면 반드시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전도할 때에 자기 자신으로 시험을 해보려고 하였기 때문에 주님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영광을 하나님에게 돌리지 않고 자신에게 돌리려고 하는 사람들은 예로부터 다 실패하였습니다. 가인, 헤롯, 그리고 유대인, 이 셋은 모두 자신을 앞세우고 하나님을 뒤로 하였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마땅히 앞세워야 합니다. 식사하기 전에 기도하고, 잠자기 전에 기도하며, 마음은 늘 묵도 하여 하나님과 연락을 하여야 아비 없는 고아를 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속에 임할 것입니다. 주께서 ‘나의 도에 항상 거하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항상 거하라’고 이른 것도 역시 시간을 말한 것입니다. ‘늘’이라고 한 것은 계속의 뜻이 있어서 아무리 오래 가도 쉬지 않는 것입니다. 산천은 비록 변하더라도 나의 마음이 더욱 견고해 지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말 한 마디라도 일각이면 다 이루어집니다.
나의 신앙이 이와 같고, 나의 마음은 늘 주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효도를 하려고 하여도 병든 때, 어릴 때를 제외하면 효도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30 년밖에 안 됩니다. 그러므로 힘을 다해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옛 시에 ‘자식이 효도를 하려고 하여도 아버지는 기다려 주지 않고, 나무가 가만히 있으려고 하여도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좋은 일을 하려고 하나 마귀는 늘 우리를 시험하기 때문에 전력을 다할 수 없으니 시간이 참으로 아깝습니다. 쓸 데 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헛되게 보내서는 안 되고 마땅히 촌음을 아껴야 합니다. ‘기특한 문장에 정신을 쏟다가 저녁에 슬퍼한다.’라고 한 이야기도 다 시간이 아깝기 때문입니다.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서 힘써 효도해야 합니다. 옛날 중국의 주나라 문왕은 앉아서 아침 조회를 할 때까지 기다렸다고 합니다. 옛날 제후들은 지정한 장소에 모였다가 조회를 하러 들어오고, 신하들이 국사를 의논할 때는 모두 조복을 입고 기다리다가 시간이 되면 궁전에 들어가 의논할 일을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주께 기도할 때는 시간을 정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원하는 시간에 기도하며, 때로는 밤새 기도하는데 이는 시간을 아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전도할 때에 사람들과 인사를 차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제자가 아버지를 장사 치르겠다고 청하자,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여 주님을 섬기는 일이 급급함을 말하고 잠시도 뒤떨어지지 말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늘 주님의 일을 생각하고 주님으로 하여금 내 마음속에 있게 하여 나와 주님이 일체가 됨으로써 잠시도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떨어지게 하면 도리가 아닙니다. 신앙은 숨 쉬는 것 같아서 숨이 끊어지면 죽게 됩니다. 살아 있자면 마땅히 숨을 쉬어야 합니다. 바울이 이르기를 ‘기도를 쉬지 않으면 항상 너를 위로하리라’하였는데 하물며 모든 일에 있어서 감사한다는 것은 바로 계속의 뜻이 있습니다. 신앙의 마음은 마치 물이 흐르는 것 같고 나무가 자라는 것 같습니다. 흐르지도 자라지도 않으면 죽게 됩니다. 신앙은 삶을 끊임없이 살게 하는 것이고, 혀와 입은 새로운 것을 새롭게 말하는 길입니다.
시간은 전진하는 데 이용하고, 후퇴하는데 쓰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날 세상 사람들을 살펴보십시오. 시간을 쓸데없는 일에 낭비합니다. 술을 마시고 도박하는데 쓰고 있습니다. 늘 도로변에 장기와 바둑을 두는 사람을 보면 그들은 다 일할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길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장기와 바둑을 둡니다. 지식이 많은 문명한 사람이 볼 때 야만이라고 비웃지마는 우리가 당면해 있는 급급한 일은 공장을 많이 세워, 나라 안에 놀리는 손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노는 사람이 있으면 경찰관이 잡아다가 일을 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경찰관이 시킨 노동의 임금은 적게 하고 자기 뜻에 따라 노동한 사람의 임금은 후하게 주면 사람마다 손을 놀리려고 하지 않게 되고, 공장이 많아지면 노동할 곳도 많게 됩니다. 사람들이 손을 놀리지 않는데 왜 나라가 가난하겠습니까?
시간의 낭비는 전적으로 백성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정치하는 사람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마땅히 급하게 시설하여서 나라에 손을 놀리는 자가 없게 하는 것이 지극히 옳습니다. 백성을 가르치는 시간은 더욱 귀하게 쓰고, 꼭 즐길 수 있는 시간도 보존해 주어 여기에 손해가 없게 한다면 이를 일러 문명인이라고 합니다. 미개한 사람들은 시간관념이 없어서 만사가 와해되어 흩어지니 한심하고 한심합니다. 간혹 혼인식장에 가보면 늘 예식이 있는데 청첩하는 광고를 해 놓고 한 시간 또는 두 시간을 에누리하여 지체하면 내빈들이 고통을 받고 낭패가 많습니다. 이리하면 기쁜 것이 기쁘지 않습니다.
워싱턴 대통령이 고관들을 모아 집회를 했는데 시간이 되어도 초청한 사람이 오지 않자 먼저 식사를 하고 회의를 마치었습니다. 뒤에 온 사람이 ‘시계가 고장 나서 그랬습니다.’라고 하니, 워싱턴이 ‘시계를 바꾸지 않으면 귀관을 교체 시키겠다’고 하였답니다. 독일의 칸트(乾提) 선생이 매일 아침 7시에 반드시 저자거리를 지나가면 시민들이 그를 보고 시계를 맞추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독일 국민의 창조 능력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