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信의 論評 딈傳一章十九節
主曰 勿論人敎訓則 不然不論則 不能知. 故今使徒評信以敎之 此非惡評也 乃敎訓也. 今余不敢比使徒而敢評 信者非惡也 乃傳也. 似聽讀者 有誤讀者則 豈不正誤乎?
今使徒敎提摩 先證自己之信. 信前罪之魁, 迫主逆主 而猶蒙矜赦者 皆信前 不知而犯卽 良心直行者也. 良心犯罪改卽 主猶赦之, 信哉! 此言眞萬世人之福也. 又有一事 主終忍 示本爲永遠之王. 我信而愛之 汝亦模我而信. 今人有棄此 而信者 眞如破船 差甚矣. 必如노아時人 不得救, 豈不哀哉? 破船有二由.
一棄良心. 良心如棹 無棹船必破, 遇風遇波 無以制濟. 無良心者 云東云西 敵罪無勇 遇魔必敗 信必破矣. 信以良心爲主, 雖信知未足 不看利害, 無律者 神以良心判(롬二章十四節). 況大於律之神爲良心, 能敵罪 魔乎!
良心如鏡 一切善惡 皆能照, 如佛敎之明鏡臺. 未至審坮之前 良心爲審坮, 棄此卽 信破. 不知而良心犯罪者 猶蒙矜恤. 況良行 信者乎? 大哉! 良心之信也.
一棄忍耐. 不忍 信必破. 信後多難, 古聖人皆然. 非忍信不能保. 故主曰 終忍得救. 信後有經驗 患生忍 忍生練 練生望(롬五章四節).
忍如帆, 非帆不能行船. 遇風帆能引風 而去 故非帆遇風必破. 信之舟遇難 非忍必破. 每說敎時 言忍者多 而行忍者少. 忍飢忍難易 而忍奢忍豪不能. 大衛見女 而殺人, 巴蘭見金 而動心. 忍一切情欲卽 釘于十架 是完信. 故信而無忍者 是破信矣.
良心忍耐之外 愛及望亦信之德. 信之行有目的 無的必破. 於是生愛着 一心專力邁進 信仰如完舟 內外而防水 運良心之楫, 掛忍耐之帆 遇風而尤疾. 到아랏듸山上, 感謝上帝之恩, 下視破船之人 一不得生. 今以破船爲戒 願遭證信.
096. 신앙의 논평 / 디모데전서 1:19
주께서는 물론 인간을 가르치라고 하셨으니 그렇지 않고 논하지 않으셨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지금 신앙을 논평하여 가르칩니다. 이는 악평(惡評)이 아니라 교훈입니다. 지금 제가 감히 사도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감히 평한다면 신앙은 악평하는 것이 아니라 전(傳)하는 것입니다. 비슷하게 듣고 읽는 것이 잘못 읽을 수도 있으니 어찌 바르고 그릇됨이 없겠습니까?
지금 사도는 디모데를 가르치는데 먼저 자기의 신앙을 증언합니다. 믿기 전에는 못된 죄인의 우두머리였고 주님을 거슬러 핍박했으나 오히려 긍휼을 입고 용서를 받은 것은 모두가 믿기 전에 알지 못하고 범하였으니 양심에서 곧바로 나온 것이었습니다. 양심범죄는 회개한즉 주께서 오히려 용서하십니다. 미쁘도다! 이 말은 진실로 만세(萬世)에 인간의 축복입니다. 또 한 가지 일은 주님께서 끝까지 참으셔서 영원한 왕이 되시는 본을 삼으셨습니다. 내가 믿고 사랑하니 그대 역시 나를 본 삼아 믿는데, 지금 사람들 중에는 이를 버리고 믿는 것은 참으로 파선(破船)한 것과 같아서 어그러짐이 심합니다. 필시 노아의 때의 사람들처럼 구원을 얻지 못하니, 어찌 애처롭지 아니합니까? 파선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양심을 버린 것입니다. 양심은 배의 키[棹]와 같으니 키가 없으면 배는 필시 파선하리니, 바람을 만나고 파도를 만나면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양심이 없는 자는 동쪽인가 서쪽인가하고 죄를 대적함에 용기가 없으며, 마귀를 만나서도 필시 패하게 되니 믿음도 필시 부서지고 맙니다. 양심을 위주(爲主)로 하는 신앙은 비록 믿음이 부족할지라도 이해(利害)로 보지를 않으며, 율법이 없는 자는 하나님께서 양심으로 판단하십니다(롬2:14). 더구나 율법보다 크신 하나님이 양심을 위하시니, 능히 죄를 대적하고 마귀를 대적할 수 있습니다!
양심은 거울과 같아서 일체의 선악을 다 비출 수 있으니, 마치 불교의 명경대(明鏡臺)와 같습니다. 심판대에 이르기 전에 양심이 심판대가 되니, 이를 버리면 신앙은 파선합니다. 알지 못하고 양심이 범죄한 것은 오히려 긍휼을 받습니다. 황차 양심으로 행한 신앙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크도다! 양심의 신앙이.
다른 하나는 인내를 버린 것입니다. 인내하지 않으면 믿음은 필시 파선합니다. 믿은 후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옛 성인들에게도 그랬습니다. 인내가 아니면 신앙을 보전할 수가 없습니ᅟᅡᆮ. 그러므로 주께서 끝까지 참아 구원을 얻으라고 하셨습니다. 믿은 뒤에 환난이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는 것을 경험합니다(롬5:4).
인내는 돛과 같습니다, 돛이 없으면 배를 운행할 수 없습니다. 바람을 만나면 돛이 능히 바람을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돛이 없으면 바람을 만날 때 필시 파선합니다. 신앙의 배는 어려움을 만날 때 인내가 없으면 필시 파선합니다. 매 설교 때마다 인내를 많이 말하지만 인내를 행동하는 자는 적습니다. 배고픔을 견디고 어려움을 인내하는 것은 쉬우나 사치와 호화를 견디기란 어렵습니다. 다윗이 여자를 보고 살인을 했고, 발람이 금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인내는 일체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을 박는 이것이 완전한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신앙하고서 인내가 없으면 이는 파선한 신앙이 됩니다.
양심과 인내 외에 사랑과 소망 역시 신앙의 덕목(德目)입니다. 신앙의 행동은 목적이 있으니 목적이 없으면 파선합니다. 여기에 생기는 사랑으로 옷 입고 일심으로 전력하여 매진하면 신앙은 온전한 배가 됩니다. 안팎으로 물을 막아내어 양심의 노로 운항하면 인내의 돛을 달고 바람을 만나도 더욱 빨리 갑니다. 아라랏 산 위에 도달하여 하늘의 하나님께 은혜를 감사하고, 아래로는 하나도 생명을 얻지 못한 채 파선한 사람들을 내려다 볼 것입니다. 지금 이 파선을 경계하여 신앙의 증거를 삼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