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完全한 救援 太六章卄六-끝節 요三章二節 宮朝 淸朝
神有大愛 欲人完全. 非但完灵 亦欲完肉. 或曰敎會完灵 而非完肉. 守主日妨事務 獻金妨利益 不能完肉 是也. 神造肉造灵 不可偏也, 偏灵不可 偏肉亦不可. 肉是灵之舍 灵是肉之主也.
看世人之修養 皆偏也. 視世如罪惡 洗耳而入鷄犬不聞之處 或參禪 或靜坐. 西藏某僧侶 冥想握手十年爪穿葺心. 江華高有賢入山祈禱 不務家業, 是偏灵也. 以利二子 恃父之權 盜聖殿之物, 猶大從主惟利 是貪終至賣主. 紅袍富者 日事宴樂 不聽傳道者之言, 是偏肉也.
偏灵不完, 偏肉亦不完 不完一也. 然則 所謂全者卽 靈肉兩全也. 莊子曰 鞭其所後 一養生, 在山入山居岩穴 虎食之 一養在窮山, 閉門而居 病攻之. 皆所後者也 故所鞭之 而完.
主曰 空鳥野花 亦有衣食, 人何憂衣食乎? 人解此甚誤. 神賜人知能 技術優於花鳥, 豈不能得 衣食乎? 此指信仰而勤勉可也. 不見 五兩二兩之譬, 五兩爲十兩 二兩爲四兩 豈非勞働乎? 西人使兒勞働 以給主日之獻金 使知勞働而食. 勿望父母 勿望友人, 是眞敎育也.
使之兩全 誰也? 不在于他 惟在神. 彼南美 不及北美之富 良有以也. 湖南有洞裡 媤父之說 是靈肉兩全之生活也. 或曰 是与聖書有違 靈肉不可容. 主在世 何棄忘肉乎? 見病医之, 見飢食之. 又曰 不可以餠生 惟以言生. 飯肉也 言灵飯生者 亦以言生也 亦欲完生者. 神之恩 降于肉 降于灵. 義信如亞伯, 黙想如以撒, 膽勇如雅各, 忍耐如約瑟, 愛國如摩西, 知謀如基田, 敬敬如三友悅, 是皆靈肉兩全也.
雖欲從願 非神不可得, 雖欲聖潔 非神不可得. 何可以事忘神耶? 웨슬레之母有敎子 皆敎育得當者也.
196. 완전한 구원 / 마태복음 6:26-34, 요한복음 3:2. 궁정교회 주일아침, 삼청교회 주일아침
하나님은 큰 사랑을 지니셔서 인간이 완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영(灵)이 완전할 뿐만 아니라 역시 육신도 완전하기를 바라십니다. 혹이 말하기를 교회는 영을 온전케 하지만 육을 완전케 하지는 못한다고 말합니다. 주일을 지키려니 사무에 방해가 되고 헌금을 하니 이익에 방해가 되니 육신을 완전케 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지으시고 영혼을 지으셨으므로 한 쪽으로 치우칠 수가 없으니, 영으로 치우칠 수가 없고 육신으로 역시 치우칠 수가 없습니다. 육은 영의 집이요 영은 육신의 주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수양(修養)하는 것을 보면 모두 편향됩니다. 세상을 죄악처럼 여겨서 귀를 씻고 닭과 개소리 안 들리는 곳으로 들어가서 혹 참선(參禪)을 하고 혹은 고요히 좌선(坐禪)을 합니다. 티베트[西藏]의 한 승려(僧侶)는 명상하느라 10년을 손을 쥐어 손톱이 손을 뚫을 정도로 마음을 모으고, 강화(江華)의 고유현(高有賢)은 산으로 들어가 기도하면서 집안일은 아예 하지 않았다니, 이는 영적으로 치우쳤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아버지의 권리를 믿고 성전의 물건을 도적질했으며, 가룟유다는 오직 이(利)를 위해서 주님을 따랐으니 이 탐욕이 마침내 주님을 팔기까지 했습니다. 자색 옷을 입었던 부자는 날마다 잔치하며 즐겼으나 전도자의 말을 듣지 않았으니, 이들은 육신에 치우쳤습니다.
영적으로 치우쳐도 완전치 못하며 육신으로 치우쳐도 역시 완전치 못하니 불완전하기는 한가지입니다. 그러하니 소위 완전한 것은 영육이 둘 다 완전해야 합니다. 장자(莊子)가 말하기를 뒤에 쳐지는 것을 채찍질함이 하나의 양생(養生)하는 것인데, 산에서 바위굴속에 살며 빈산에서 하나의 양생을 내면으로는 잘 했지만 굶주린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이가 있었고, 문을 닫고 거하면서 외면적으로 양생을 잘 했더라도 병이 안으로 공격하여 죽은 이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뒤쳐진 것들이기 때문에 채찍질을 해야 완전해집니다.
주님께서 공중의 새와 들꽃들도 역시 의식(衣食)이 있다고 하셨는데, 인간은 어찌하여 의식을 걱정합니까? 인간이 이를 너무나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능을 주셔서 기술이 꽃과 새들보다 뛰어나는데, 어찌 의식을 얻지 못하겠습니까? 이는 신앙을 가지고 근면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5량과 2량의 비유에, 다섯 양은 열 양이 되고 두 양은 넉 양이 되었으니 어찌 노동이 아니겠습니까? 서양 사람들은 아이에게 노동을 시키고 돈을 주어서 주일에 헌금하게 한다고 하니 노동하고서 먹는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바라지 말고 친구에게 바라지 말라는 것이니, 이것이 참 교육입니다.
영육(靈肉)이 양쪽으로 온전케 하시는 이는 누구입니까? 다른 데에 있지 아니하니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저 남미(南美)는 북미(北美)의 부강(富强)에 미치지 못하니 족히 이런 까닭입니다. 호남(湖南)의 한 동네 가운데에 한 시아버지는 이 영육의 양쪽이 다 완전하게 생활했다는 설명입니다. 혹 말하기를 이는 성경에 어긋남이 있다고도 하니 영과 육은 용납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어찌 육신을 잊으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병자를 보시면 고치셨고, 주린 자를 보시면 먹이셨습니다. 또 말하기를 떡으로 살 수가 없고 오직 말씀으로 산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위하여 먹고 양생함은 말씀이 영을 먹여 살리는 것이니 역시 말씀으로 사는 것이 또한 완전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육신에 내리시고 영에도 내리십니다. 옳은 믿음은 아브라함과 같고, 이삭과 같이 묵상하고, 야곱과 같이 용감하며, 요셉과 같이 인내하고, 모세와 같이 애국하며, 기드온과 같이 슬기로운 꾀가 있고, 사무엘처럼 경건하니, 이는 모두 영과 육의 양쪽이 완전함입니다.
비록 순종하기를 원한다고 할지라도 성신이 아니면 이룰 수가 없고, 성결하기를 바란다고 해도 성신이 아니면 얻을 수가 없습니다. 어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웨슬리의 어머니는 아들의 교육이 있었으니 모두 교육으로 마땅히 얻은 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