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 의와 신 / 갈라디아서 3:11, 로마서 5:1
세상 사람들 중에는 "착한 일만 하면 예수를 믿지 않아도 복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하나님도 모르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어떤 국회의원 출마자는 "나는 악한 일을 한 적이 없고 옳은 일만 해왔다"고 하면서 당선을 위해 무당을 찾아가 굿을 했습니다. 제가 그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하니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나는 악한 일을 한 적이 없으니 믿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은 아직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모르시는군요"라고 하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허락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예수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에게만 구원의 은혜를 주십니다. 아무리 선행을 하고 지식이 많고 도덕성이 높아도 그것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강조했더니, 그제서야 이해했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이런 마음이 있고, 이런 우상이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뜻을 모르고 믿으면 '십 년 공부 아미타불'과 같습니다. 밤새도록 통곡하면서도 무엇 때문에 우는지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보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을까요? 이것을 아는 것이 참된 앎이요, 이것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는 의로운 사람이 많습니다. 교육자, 종교인, 철학자, 정치인, 과학자가 많습니다. 이들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백부장은 자선가이자 종교인이며 지위와 학식이 높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여전히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해변가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백부장에 비해 무식하고 지위가 없었지만, 구원은 베드로에게 있었고 백부장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식한 베드로가 오히려 유식한 백부장의 인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주님 앞에서 의를 자랑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의인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오셨습니다. 누구나 주님 앞에서는 모두 죄인입니다.
한 신사는 대학을 졸업하고 관청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공공 전구를 훔쳐 자기 집에 설치했지만, 그것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친구의 인도로 기독교 부흥회에 참석하여 설교를 들었는데, 목사가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지옥에 간다"고 외쳤습니다. 그 신사는 그날 마음이 뜨거워졌고, 자신이 전구를 훔친 도둑이지 신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견딜 수 없어 다음 날 목사 앞에서 고백했고,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습니다. 목사는 전구를 사서 돌려놓으라고 했고, 시간이 많이 지났다고 하자 전구 값을 전기회사에 주고 잘못을 고백하라고 했습니다. 그대로 했더니 그날부터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워졌습니다.
이것이 의와 믿음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의인은 많아도 믿는 사람은 적습니다. 말세에 믿는 자가 있겠느냐고 하신 것처럼, 주님 앞에 설 때는 의가 아닌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는 돈을 못 번 것, 배우지 못한 것, 시골 사람은 서울에 가보지 못한 것, 한국 사람은 미국에 가보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기지만, 믿지 못한 것만큼 한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부자였던 사람이 지옥불에서 고통 받을 때 "왜 전도자의 말을 듣지 않았을까, 우리 집의 다섯 형제에게 전도해 달라"고 한 것처럼 얼마나 한이 되었겠습니까.
신하의 외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재력과 학력, 권력을 다 동원해도 아이는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예수님이 병을 고치신다고 했지만,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요 갈릴리 사람이라며 업신여기다가 아이가 죽게 되어서야 할 수 없이 찾아갔습니다. 예수님께 절하며 자신의 의와 권세를 다 내려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하셨으니, 이는 의가 아닌 믿음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