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도 기다려야 별이 뜬다
최호림 제 3 시집
아직도 꿈은 있겠지.
밤송이처럼 영그는 그리움도 있겠지.
대추 익어가는 저녁녘
노을빛처럼 부드러운
오로지 한빛으로 발돋움하는
하늘처럼 변함없는 가슴도 있겠지.
아직도 만날 수 있겠지.
생각하면 웃고 오는 얼굴
분명 어딘가에
사무치도록 날 사랑하는
죽음도 떼어놓을 수 없는
뜨거운 흙가슴이
풀밭 가꾸며 살고 있겠지.
-<기다리기·3> 전문
낙엽같은 이력서를 들고
문전걸식을 한다.
어쩌다 뿌리내리는가 하면
능력에 따라 우대한다는 외판사원
허기를 메꿀 삶의 자리 하나 얻지 못하고
벼랑 끝에 선
하루해가 너무 길다.
이십대에 찾아든 곳은 십대의 일터요,
삼십대에 찾아든 곳은 이십대의 일터다.
늘 몇 발자국 늦게 도착하면 자리가 없다.
빈 이력서의 칸에다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적어넣고
불꺼진 항구같은 달동네를 오른다.
-<야곱일기·4> 전문
□책 머리에
풍요 속에 빈곤을 느낀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채워지지 않는 욕심을 부둥켜안고 있을 뿐, 꿈(고향)을 잃어버렸다. 우리가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꿈은 인간답게 살 수 없게 하는 파괴의 요소들이다. 꿈이 없다는 것은 정신이 병들어 끝이 보이는 길 같다.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사는 길은 잃어버린 꿈을 찾는 일이다. 여기서 시인들은 정신적 지주(支柱)로서 꿈을 찾는 교량의 역할을 해야 한다. 어쩌면 이것이 이 시대를 사는 시인들의 숙명인지 모른다.
해설을 써주신 김상일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출판을 맡아주신 신원문화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1991년 6월
최 호 림
□최호림과 그의 시 세계
서정시의 원형
김상일(문학평론가)
최호림 씨의 세 번째 시집 《하늘도 기다려야 별이 뜬다》에 수록된 작품을 유형별로 크게 이대분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야곱일기>의 시점은 삼인칭적이요, 언어 사용법이 대상을 지향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를테면 서사시적이었다고 한다면, 여타의 작품들은 일인칭적에다 주로 시인의 정동을 이미지화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전통적 서정시와 대응을 보여준 한 모델로 보아 무방한 것이다.
<야곱일기>는 정녕 시인 자신의 인생 역정에서 경험 내지는 목격이나 전문한 사건들을 주로 사회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인데, 그러한 사건들을 몇몇 열거해 보면 이런 것이다. 젊은 시절의 난치병에 따른 생활고-약값으로 천원을 지불하고 나니/한달 양식이 달아났다-지배 내지 유한 계급의 일상 생활-캐나다 산 생수를 마시며/수서지구를 휘젓고/강마다 폐수 방류를 일삼는-그리고 그들의 출세주의적 자녀 교육-음식도 제일 비싼 것을, 옷도 제일 멋진 것을, 남보다 출세해서 잘 살아야 해, 넌 귀족이 되어야 한다-에이즈, 농민의 황폐상, 노사투쟁, 노조결성의 해직교사, 호화주택, UR협상, 인신매매, 아파트 투기 등등 요사이 거의 매일 TV나 신문을 통해 대하고 있는 반사회적 사건이 거의 망라적으로 한두 줄씩은 언급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사건들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서에 나타난 적이 있는 신화적 사건이나 인물을-카인, 스테판, 유다 등이 독서 과정에 등장하는 한편, 그러한 인격이나 장면과 대응하여 현실적인 잡다한 사건이 연쇄적으로 출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 텍스트가 설정한 원근법에 따라 부단히 시점을 이동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러한 시점의 이동에 따라 독자는 문면에 나타난 그 이상의 의미를 형성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통사적 단위는 저마다 지향 대상 즉 상관체를 가지고 있었다. 가령 천하의 둘도 없는 불한당 스테판, 그리고 ‘군중 속에 끼어 들어/신나게 고함지르며 돌멩이를 던지고 있는 나’ 따위가 그것이다. 그런데 시간을 초월하고 있는 인격과 한편 화자라고 보여지는 현재의 ‘나’는 거의 부단히 서로 상황에 개입하면서 하나의 의미를 형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원경과 전경이 착주하고 있거나 해체된 채 공존하고 있는 현대 회화의 어떤 화폭을 바라보는 느낌이지만, 아무튼 독자는 그러한 복잡한 독서 과정을 거쳐 텍스트에 내재하고 있는 의미 시스템에 접근해 가야 하는 것이다.
방금 지적했듯이 독자는 통사적 단위의 연쇄에 따라, 이미 시인에 의해서 구조화되어 있는 상관체에 대한 관념을 연합시키면서 의미를 구축해 나아가는 것이지만 거기에 혹종의 기대나 때로는 기대에 대한 실망, 배신이 아주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때로는 의미의 결락 부분이 있으면 독자는 그것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야곱일기>는 그러한 변증법적 관계의 설정이 독자를 크게 긴장시켜 주고 있는 많은 부분이 가끔 노견되었고, 따라서 의미 시스템을 구조화하는 데도 평면적임을 면치 못하고 있지 않았는가 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맥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 터이다.
유다여
그대의 은 삼십 냥이 부끄럽구나.
정직한 사내여,
그만한 욕심은 누구에게나 있다.
이 시대에 한국에 태어났다면
한 줄의 기사거리도 못된다.
제 아비가 딸을 이중 인신매매 하고
제 어미가 술 한잔 값에 딸을 팔아넘기는
야차같은 인면수심들.
-<야곱일기·28> 전문
보다시피 원경-유다여······-과 전경-이 시대의 한국······-이 공존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유다는 배신자의 심벌이었다. 독자는 다음으로 이어질 문맥에서 배신적 인간관계가 나타나리란 것을 기대하리라. 아니나 다를까. 그 기대는 곧 충족된다. 자식을 매매한 부모의 비도덕적 행위가 그것이다. 이제 원경(유다의 소행)은 사라져 가고 전경만이 독자의 시점에 들어선다. 그런데 이 전경에 보이는 비도덕적인 사건의 열거만을 가지고서는 미상불 ‘이 시대의 한국에 태어’난 독자의 정동을 크게 긴장시킬 수가 없다. 첫째는 통사가 너무 투명한 데 있다. 어느 단위나 색다른 문채(文彩)를 찾아볼 수 없었으니, 독자는 항용 TV가 전하는 뉴스를 흘려 보내듯, 혹은 달력의 날짜쯤을 확인하듯 그렇게 무감동적으로 대하고 말 것이었다. 왜냐하면 원래 사건이란 언제나 금제의 파괴, 일어나서는 안 되는데 일어난 사실로, 거두절미하고 살인범들이 체제를 유지하며 통치하고 있는 판국에 나머지 피지배 계급의 범죄나 비도덕적 행위쯤은, 오히려 다발하지 않는 것이-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속담이 있다-이상했기 때문이다. 사건의 열거는 정치적으로 좀더 랭크를 높여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야곱일기>의 통사적 단위에도 자주 보여주고 있듯이 최 시인의 장기는 전통적인 서정 시인으로서 소질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가 한다.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한 모델을 들어 보이겠는데 다음 인용은 <과원일기(果園日記)>의 초두 부분이다.
햇살에 일렁이는 바람의 치맛자락
아침마다 눈부신 꽃들은 피어난다.
분주한 질서의 문전마다
다디단 꿈은 익고
계절이 몰고 온 넘실대는 향연
부푼 풍선은 하늘 가득 수가 는다.
-<과원일기>에서
한 보기에 불과하지만 최 시인의 이러한 계열의 작품의 언어에는 지향적 대상이 없다.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해서 상상이 대상이 구체적인 한 형태를 가지고 나타난다. 그것은 외재적으로 실재하지 않은 이상 대상에 대한 일상적 지식은 필요하지 않는다. 서사시에서처럼 진위가 문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햇살은 탄생이나 결실을 위해서 일렁이는 바람이요, 동시에 모성(치맛자락)이었다. 그것은 또한 아침이기도 했으나 창조는 눈부시게 꽃피우리라. 단위는 저마다 의미 시스템의 한 고리를 이루고 있었으니 햇살은 같은 의미지만, 모성은 혹은 꿈을, 춥고 어두운 겨울이나 죽음을 물리치고 꽃이 되어 부활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곧 넘실대는 잔치요, 또 그래서 그것은 부푼 생명을 하늘 높이 가득 수가 느는 것이다. 여기 보이는 ‘수’는 꼭이 수(數)일 필요는 없었고 수(繡)로 바꾸어 읽어도 된다. 이 한 편의 시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최 시인은 전통적 서정시의 한 원형을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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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약력
-경북 영일군 흥해읍 출생
-선교대학원 졸업
-《현대문학》추천 등단
-한국문협·자유시인협회·크리스찬문학가협회 회원
-시집,《연을 날리며》·《개살구야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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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호림 - 하늘도 기다려야 별이 뜬다|작성자 단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