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高麗(今 開城) 1
高麗(今 開城)
高麗 太祖의 姓은 王이요. 諡는 建이오 字는 若天이니 松岳郡人이다. 新羅의 政이 襄함에 弓裔가 高句麗의 地를 拠하여 鉄原에 都하고 国号를 泰封이라 하고 王建에게 精騎를 주어 地를 略함에 여러번 功이 있었다.
騎将洪儒와 裴文慶과 申崇謙等이 가만히 피하여 王建을 推戴하여 国号를 高麗라 하고 年号는 天授라 하고 松岳에 都를 定하였다. 文獻備考에 開城府는 옛 高麗国都라 하였다.
荒凉二十八王陵
風雨年々暗漆燈
進鳳山中紅腳躅
春来猶自発層々
荒凉한 二十八王의 陵이여
風雨年々에 漆灯이 暗하도다.
進鳳山中 붉은 躑躅이
봄이 옮에 오히려 層이 発하였더라.
二十八王은 高麗 太祖 以下 여러 임금이 二十八王이니 그 陵이 開城의 松岳、進鳳山、碧串洞、鳳鳴山 여러 곳에 있었다.
漆灯은 墓外에는 長明石灯을 버려 놓고 壙内에는 漆灯을 만들어 걸었다.
進鳳躑躅은 進鳳山은 開城 東南 九里에 在하니 進鳳躑躅이라하였다.
鳳輦透池降帝姬
春寒氈帳祓羊脂
浮生白眼応難較
紅淚先沾勺薬枝
鳳輦이 透迤하여 帝姬가 하였으니
봄이 차매 饒帳에 羊脂를 하였도다.
浮生의 白眼이 응당 較키 難하니
紅淚가 먼저 勺薬枝에 沾하도다.
鳳輦은 帝王의 車輛이다. 透迤는 돌아오는 모양이다. 帝姬는 忠烈王의 後니 곧 元世祖의 女이고 斉国 大長公主니 名은 忽都 魯揭里 迷失이다.
忠烈王이 世子로 元에 在하여 公主를 娶하였다. 祓羊脂는 忠烈王이 位를 嗣하여 元으로부터 돌아올 때 公主로 더불어 輦을 같이하고 京에 入하니 元帝가 그 신하 脱忽로 하여금 公主를 보낸데 脱公이 먼저 이르러 穹庐를 베풀고 白羊脂로서 祓하였다.
白眼은 흘겨보는 눈이니 高麗史에 公主가 子를 나으니 貞和宮主가 宴을 設하고 賀할때 宮人이 東廂에 席을 布하니 王왈 正寝만 못하다 한 故로 宮人이 公主에게 말하지 않고 正寝에 平床을 두어 公主의 座를 定한대 或曰 平床의 座는 宮主와 같이 하고자 함이라 하니 公主가 大怒하였다.
王이 또 西庁에 席을 옮기니 근본 高榻이 有하였다. 宮主가 公主에게 觴을 드릴 때 王이 公主를 돌아 보니 公主가로되 어찌 白眼으로 보느냐 어찌 宮主로 我에게 跪케 하느냐 하고 宴을 罷하고 殿에 내려 大哭하였다.
勺薬枝는 忠烈王 二十二年 五月에 寿寧宮(忠烈王母后宮) 勺薬이 盛開하였는데 公主가 命하여 一枝를 折하여 把玩良久에 感泣하다가 疾을 得하여 薨하니 年이 三十九이다.
<한글>
고려 태조의 성은 왕이고, 시호는 건이며, 자는 약천이다. 송악군 출신이다. 신라 정권이 쇠퇴할 때 궁예가 고구려 땅을 점거하여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태봉이라 하였다. 왕건에게 정예 기병을 주어 여러 차례 땅을 정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기장 홍유, 배문경, 신숭겸 등이 가만히 피신하여 왕건을 추대하고 국호를 고려라 하였으며, 연호를 천수라 하고 송악에 도읍을 정하였다. 문헌비고에 의하면 개성부가 옛 고려국 도읍이었다.
황량한 28대 왕들의 능침이여
해가 갈수록 무덤 밖 촛불이 어두워지는구나.
진봉산 중턱의 붉은 철쭉꽃이
봄이 가면 오히려 층층이 피어나는구나.
28왕은 고려 태조 이후 여러 임금들을 말한다. 그들의 능침이 개성의 송악산, 진봉산, 벽렬동, 봉명산 등 여러 곳에 있었다.
무덤 밖에는 방구석을 두고 무덤 안에는 칠랍등을 달았다고 한다.
진봉철쭉은 개성 동남쪽 9리에 있는 진봉산에서 유래했다.
봉교가 빙글빙글 돌아오니 황제의 딸이 하였구나
봄이 차차 찾아오자 천막에 양지를 바르게 되었네.
부질없는 인생길에 시기 질투는 어렵기만 하여
붉은 눈물이 먼저 촉약나무 가지에 젖었구나.
봉교는 제왕의 수레이다. '투외'는 돌아오는 모습이다. 제희는 충렬왕의 후비로 곧 원 세조의 딸이자 제국 대장공주였으며 이름은 훌두루극리미실이었다.
충렬왕이 세자 시절 원에 가 있다가 공주와 혼인하였다. 정화례는 충렬왕이 왕위에 올라 원에서 돌아올 때 공주와 함께 하였는데, 원제가 신하 탈훌로 하여금 공주를 맞이하게 했고, 탈훌이 먼저 와서 거처를 마련하고 양지로 공주를 맞이하였다.
백안은 흘겨보는 눈길을 말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공주가 아들을 낳자 정화궁주가 연회를 베풀어 축하하였는데, 궁인들이 동쪽 행랑에 자리를 펴자 왕이 '정실만 못하다'고 하였다. 궁인들이 공주에게 알리지 않고 정실에 평상을 펴고 공주의 자리를 정하였더니, 누군가 '평상 자리는 궁주와 동등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하자 공주가 크게 노하였다.
왕이 다시 서현에 자리를 옮기니 본래 높은 자리가 있었다. 궁주가 공주에게 잔을 권할 때, 왕이 공주를 흘겨보자 공주가 "어찌 흘겨보는 눈길로 보느냐? 어찌 궁주로 하여금 나에게 꿇려 하느냐?"라고 하며 연회를 파하고 전돌에서 통곡하였다.
촉약나무는 충렬왕 22년 5월에 수릉궁(충렬왕 모후 궁) 북촉약나무가 활짝 폈는데, 공주가 한 가지를 꺾어 오래도록 들여다보다가 감격해 울다가 병을 얻어 39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