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홍경래의 반항운동
위에서 정치가 부패하고 아래로 백성들의 생활이 여지없이 파멸되어 곤란을 말할 수 없다. 필경 터지고야 말 민중반항운동이 일어났다.
순조 11년 12월에 용강사람 홍경래(洪景來)가 이희저(李禧著) 우군칙(禹君則) 김사용(金士用) 등으로 더불어 서로 결탁하여 가지고 국가를 새롭게 하며 민중을 도탄 가운데 건져 볼 생각을 품고 가산군(嘉山郡) 다복동(多福洞)에 근거를 두고 가만히 동지를 모으며 기계를 만들어 비밀히 전쟁을 준비하고 그 곳에 사람이 들어오기는 하여도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하여 적병 수만을 양성하여 홍경래 스스로 평서대원사(平西大元師)가 되고 관서 일대에 격문을 돌리되 관서는 단기구강(檀基舊疆)으로 문물이 병랑하며 왜호양란(倭胡兩亂)에 공로가 크거늘 조정이 서토(西土)를 업신 여김은 어찜이뇨. 이때 어린 임금이 위에 있고 권간(權奸)이 날로 포학하고 김조순(金祖淳) 박종경(朴宗慶)의 무리가 국권을 농락하니 천재지변이 자꾸 일어나고 민생이 도탄에 빠져 앞 일이 망측하게 되었으니 이때 우리 관서 사람들은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숙청할 것이라 하고 먼저 가산을 쳐서 군수 정기(鄭碁) 부자를 죽이고 그 다음 선천을 쳐서 부사 김익순(金益淳)을 항복받고 그 이듬해 정월에 정주성을 웅거함에 청천강 이북 여러 고을이 다 항응 하였다.
이 급보가 조정에 이름에 임시로 어전회의를 열고 대책을 의논할 새 그때 영상 김재찬(金載瓚)이 지리와 군사를 잘 아는지라. 장졸을 파송하여 요로를 지키고 기계와 군량을 예비하여 놓고 이요헌(李堯憲)으로 양서 순무사를 삼아 이를 토벌할 새 안주에 나아가 안주적병을 쫓고 나아가 정주(定州)를 외어 싸고 치니 성이 굳고 군사가 강하여 용이히 빼지 못할지라.
4월에 이르러 성 밑에 화약을 묻어 불을 놓으니 성이 둘러빠지고 적군이 죽고 흩어지며 홍경래가 잡혀 죽으니 이에 난이 평정하였다. 그때 정치가 문란하여도 김재찬 같은 위인이 영상이 되어 일을 잘 처리함으로 무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 김이익(金履翼) 박효성(朴孝成) 등의 상소는 이 변란의 원인을 말하였는데 금일 도하에 유민이 많으니 이것을 구제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고 또 난을 불러 드린 원인은 조정에 붕당이 있어 그 당만 알고 나라는 근심하는 자 없고 자기 몸만 생각하고 백성을 생각지 않으며 정부에서 사람을 쓰되 어진 이를 택하지 않고 사사를 생각하며 국고가 비어 빈민을 구제할 수 없고 그 기계가 녹이 쓸어 전쟁에 쓸 수 없으니 이제 고치지 않으면 관서 뿐 아니라 전국이 다 관서같이 위태하다고 말하였으니 그때 나라의 형편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