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대에서 입석대 방향으로 하산했다
다행히 남쪽 방향이라서인지 눈이 바닥에 없어 생각보다 편하게 내려왔다



산의 남서쪽에는 넓은 고산초원지대를 이루는 장불재가 있으며, 동쪽 사면에는 선돌이라 불리는 서석대·입석대·광석대 등의 3대 석경과 풍혈대 등이 있다.


승천암이다 승천암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무등산 양지바른 암자에서 스님이 저녁 때 부엌에서 군불을 때고 있는데 큰 어미 산양이 급히 비명을 지르며 뛰어들었다.
무엇에 쫓기고 있으니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스님은 나무 청에 자리를 보아 그곳에 안식처를 제공하였다.
그래서 어미 산양은 세 마리의 새끼를 순산 할 수 있었다.
일주일 쯤 후에 어미 산양은 암자를 떠났다.
그 후 3년이 지난 어느 날 새벽에 무엇이 스님의 가슴을 조이고 있어서 잠을 깨었다.
“너는 내가 3년 전에 먹이를 먹으려는데 방해를 하였다.
수백 마리의 산양을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하였다.
그 어미 산양만 먹이로 취하였으면 승천할 수 있었다.
그 대신 너를 먹이로 하여야겠다.
네가 살려면 종각에 매달린 종을 세 번 울려라.
내가 승천할 시각에 종소리를 들어야 승천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내 배속으로 들어가 내가 승천하는데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
“나를 풀어주라 그러면 종을 치겠다.”
“네가 도망가기 때문에 풀어줄 수 없다.”
이런 말이 오고가고 할 때 갑자기
“땡”
“땡”
“땡”
하고 종이 울렸다.
그러자 이무기는 사르르 스님을 풀면서 사라졌다.
날이 밝자 스님은 신기하여 종각에 가 보았다. 산양 세 마리가 뿔이 부러지고 이마가 깨어져 죽어있었다.
이 산양 세 마리는 어미 산양이 스님의 덕으로 죽지 않고 태어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항상 암자 주위를 멤 돌면서 스님께 어떤 일이 일어나는 가를 살펴오던 차 이무기가 스님을 헤치려 하자 이무기의 소원인 종소리를 들려주었다. 산양들은 목숨을 바쳐 스님께 은혜를 갚았다.
스님은 산양들을 양지 바른 언덕에 묻었다. 그리고 그들의 넋을 달래는 염불을 올리고 암자로 돌아왔다.
갑자기 청천 하늘에 먹구름이 일고 하늘을 가르는 뇌성이 울리더니 꽝! 하고 벼락이 터졌다. 벼락은 산양의 무덤에 명중되었다.
그러자 수백 마리의 산양들이 태어났다. 산양 때들이 무등산을 뒤 덮었다. 승천한 용이 산양들이 종을 쳐준 덕으로 용이 되었으므로 그들을 위하여 세상을 보지도 못하고 어미의 배속에서 죽어간 산양들을 태어나게 하였다.
산양들은 하늘에 기도하였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영원히 무등산에 살 수 있게 하여주소서!’
그러자 하늘에는 먹구름이 모이고 뇌성이 울리더니 또 천지를 깨는 듯 한 벼락이 꽝! 하고 터졌다. 그 순간 무등산에 산재해 있던 수많은 산양들은 돌로 변하였다.
그 돌들은 무등산의 더덜겅이나 입석대, 서석대, 규봉 같은 주상절리대가 되어 영원히 남게 되었다.



입석대는 대표적인 경승지로 10~15m의 돌기둥이 여러 모양으로 깎아 세운 듯이 서 있다. 광석대는 산정에서 남동쪽 1㎞ 거리에 있으며, 규봉 등이 아름답다. 또한 산중턱에 있는 지공 터널은 큰 돌들이 약 2㎞에 걸쳐 있다.

입석대에는 각자한 것이 여럿 보이는데 암행어사의 선행을 기록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장불재에서 바라본 서석대,입석대 방향 모습이다 중머리재로 내려왔다

중간에 광주천 발원지가 있다

중머리재에서 증심사 내려오는 길 편백나무가 있어 한컷

날씨가 점점 흐려지더니 눈발이 하나둘 날리기 시작한다

의재 허백련 묘소를 찾았다
김덕령 장군과 더불어 무등산하면 빠질 수 없는 인물, 의재 허백련은 남종문인화의 대가이자 광주시민이 사랑한 예향 광주의 정신적 뿌리다. 김덕령이 의향 광주의 뿌리라면, 의재 허백련 선생은 예향 광주의 뿌리인 것이다.
의재 허백련은 1938년부터 40여 년간 광주 무등산 자락에 머물며 많은 명작을 완성하였고 시·서· 화의 동호인의 모임인 ‘연진회’를 조직하여 광주가 예향으로 자리 잡도록 기여했다.
의재 허백련이 활동했던 중심지는 무등산 증심사로 향하는 중간에 있다. 증심사로 가는 계곡 주변에는 의재가 기거했던 춘설헌을 비롯해 사람들이 모여 차를 마시던 관풍대, 농업학교의 흔적인 삼애헌, 후세에 그를 기리기 위한 의재 미술관과 그가 가꾸던 녹차 밭과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무등산 등반을 마치고
하루 더 남도 여행을 하기 위해 목포로 향하던 중 나주 완사천을 찾았다 중간에 약간 눈발이 날렸으나 이내 그쳤다

완사천은 고려 태조와 관련된 유적으로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기 전 이곳 나주를 몇 차례 내려오는데 903~914년 사이 10여년동안 네 차례나 된다. 왕건은 이곳 완사천에서 당시 17세의 장화왕후를 만나 인연을 맺고 제2대 혜종을 낳는다. 한편 이곳 완사천 일대에는 흥룡사와 혜종사란 사당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장화왕후가 나주오씨로 동복오씨를 거슬러 올라가면 선조이기에 오늘 이곳을 일부러 찾은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흥룡사는 금강진(현 완사천 일대) 북쪽에 있는데, 태조 왕건이 장화왕후와 인연을 맺을 때 장화왕후의 오씨가문이 대대로 살았던 터로, 혜종을 낳은 인연으로 건찰된 것이라 한다. 한편 혜종사도 역시 『신증동국여지승람』에「혜종사재흥룡사중주인지금사지(惠宗祠在興龍寺中州人至今祀之)」라 조선 중기까지 혜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모셔온 곳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하여 뒷날 이곳을 흥룡동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내 목포 유달산 근처로 가 숙소를 정했다 숙소 주변 저녁을 위해 식당을 찾던 중 보리밥 집을 찾았는데 반찬도 풍부하고 맛 좋았으며 분위기도 괜찮았다 막걸리 한 잔과 더불어 즐겁게 여독을 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