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無所有)
2019. 01. 08. 백란주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 애들뿐이었다. 그 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 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스인가 하는 비료를 구해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그 애들을 위해 실내 온도를 내리곤 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 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청했었다. 우리 다래헌(茶來軒)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초를 보고 한결 같이 좋아라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노사(耘虛老師)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우었다.
아차! 이때서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빛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 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 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나는 이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한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승가僧家의 유행기遊行期) 에도 나그네 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을 못했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분(盆)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법정, 〈무소유〉 중에서-
무소유와 소유는 어떤 의미에서는 반대말이 아니라 동의어라는 의견에 공감한다. 실천할 수 없는 무소유가 아니라 실천할 수 있는 소유에 대한 고민을 갖게 하는 새해의 시작이다.
때로는 물질적 가치의 소유에 대한 자세보다 나의 생각을 소유, 가두려고 하지 않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편협한 사고를 마치 객관적 사실마냥 인정하고 판단하는 과오를 저지르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묻게 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에서 가져야 할 것이 ‘사고의 유연성’임을 알면서도 점차 사고가 경화되는 부모님을 뵐 때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했다. 그런데 가끔씩 경화되는 나의 사고에 놀랄 때가 있다. 윤활유의 아이들을 만나고 나면 나는 기름칠 한 것처럼 ‘그래, 그럴 수 있겠구나!’가 된다.
KBS 인간극장 ‘백년을 살아보니-철학자 김형석’편에서 노학자는 신문에 기고할 주제로 입시 부작용의 모습으로 드러난 숙명여고 사건을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딸들에게 시험문제를 알려줬던 숙명여고 쌍둥이자매 일. 그게 사실이면 이다음에 그 자식들이 인생
을 살아가는 동안 ‘양심적 전과자’가 된다. ‘내가 그렇게 잘못하면서 살았구나!’하면서”
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다.
자녀에 대한 욕심, 소유에서 지나친 사랑이 빚어낸 모습이라 생각한다. 어른인 우리들은 느낀다. 살면서 드러나지 않는 잘못을 들키지 않았다고 해서 세상을 속일 수 없는 것을.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네가 안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떳떳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들은 ‘양심’이라는 무거운 벌에 스스로 갇혀 더 괴로울지 모른다. 법이라는 잣대보다 무서운 양심이 인간의 욕심을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은 시간이 축적될수록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양심’을 느끼며 살아가야하는 이유이다.
법의 심판을, 세상 사람들을 속였다고 해도 자신의 양심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그러한 벌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진리를 노학자는 ‘양심적 전과자’라는 말로 일렀다. 김형석 교수의 ‘양심적 전과자’라는 말을 듣는 순간, 올해는 스스로 양심적 전과자가 되지 않는 생각과 행동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법’이라는 테두리에서 보호받아야 할 약자들을 교묘하게 울리는 양심적 전과자들의 힘은 많은 곳에서 드러난다. 위선자들의 다른 이름이 ‘양심적 전과자’가 아닐까 싶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에서 나눔을 실천하고 봉사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실속을 챙기는 사람들, 자신의 인맥을 과시하며 약자들을 이용하는 사람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묘하게도 우리들은 존경하게 된다. 존경 이면에 드리운 욕심을 약자인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이 베풀고자하는 모습의 진정성에서 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딸아이들과 타인과의 관계맺음에 대해 이야기 하던 중 ‘인맥과 민폐’에 대해 생각을 나누었다. 인맥이란 타인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는지에 따른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밖에서 비교하는 ‘자존심’과 비슷한 느낌이라한다. 민폐란 내가 타인에게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나의 행동에 따른 결과물로 여겨져 안에서 나오는 ‘자존감’과 비슷하다며 이야기 했다.
사람들은 인맥에 대해 과시하기도 하고 그 인맥에 대해 자신의 일을 부탁하기도 한다. 내가 인맥이라고 생각하듯 상대도 인맥으로 받아들이면 별 문제는 없다. 서로의 원하는 바를 인맥이라는 공통분모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대가 나의 인맥이라는 관점과 달리 민폐로 여길 때 나의 모멸감은 어떨까. 감정을 다치게 된다. 관계 또한 금이 가게 된다. 요즘 아이들은 옛날 우리들처럼 형제가 많지 않기 때문에 타인들과의 관계 맺음이 형제 못지않게 힘이 될 수 있다. 아이들에게 좋은 관계를 나의 계산에 의해 인맥으로 이용하지 않는 참다운 관계 맺기를 바랐다. 더불어 내가 누군가에게 민폐가 되지 않는 삶을 살기를 부탁했다. 민폐가 되지 않으려면 스스로 ‘양심적 전과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 법의 심판에 앞서 나의 양심에 대한 심판은 본인만이 내릴 수 있는 사실을 넘어선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이 난초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 집착이라 여기고 그 난초를 다른 사람에게 주고서야 자신이 홀가분해질 수 있었다했다. 난초 입장에서 보면 파양이었다. 책임질 수 없을 때 누군가에게 책임을 맡기게 되는 법정 스님의 행동을 두고 ‘책임이다, 무책임이다.’ 아이들은 의견을 나누었다.
난초를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기에 무책임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자신이 데리고 있으면서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 오히려 무책임한 행동이 된다고 말한다. 난초를 제대로 돌볼 수 있는 누군가에게 맡긴다는 것이 오히려 난초에 대한 책임감이라 말하는 한 아이의 말을 통해 무책임하다고 말했던 아이들은 묘하게 설득되었다.
그랬다. 관점이라는 것은, 기준이라는 것은 어떤 방향으로 보느냐,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나의 의견과 다르다고 해서 상대방의 의견이 틀린 것이 아니 듯, 오히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시선을 갖게 해주기도하기 때문이다. ‘다름’에서 오는 차이는 사고의 폭을 깊게 하는 장치가 된다.
감정의 입양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에서 담는다. 타인의 생각과 달리 자신의 감정에 필요한 사람을 시선에 두며 마음에 담아서 관계맺음이 시작된다. ‘공유’라는 그릇에 ‘감정’이라는 물을 담는다. 나의 기분에 따라 상대방을 평가한다. 나의 기분이 정형화된 고체 그릇이 될 때 자신의 감정으로 타인의 감정을 고체화 시킨다. 그 그릇에 자신의 감정대로 고스란히 담기기를 원하는 감정 이 또한 소유가 아닐까. 집착이 아닐까. 나의 감정에 따라 타인이 동행해 주지 않으면 ‘서운하다’는 감정으로 그 그릇은 균열이 생기게 된다. 그 틈으로 상대방 또한 서운함을 담고 흘러나온다. 감정이라는 그릇에 처음 입양되었던 좋은 감정은 어느 사이 메말라 간다. 틈 사이로 나가고 공기 중으로 증발되어 날아간다. 결국 어떤 경로를 거치든 처음 입양되었던 감정은 파양으로 남게 된다.
어린왕자는 내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 항상 책임이 있다고 했다. 책임이란 보이지 않는 의식을 끝까지 파양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양심적 전과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올해 그 무엇에든 스스로 ‘양심적 전과자’가 되지 않는 한해이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