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명당 성주 금산(錦山)리의 500년, 연산(蓮山)마을
백일기(소설가,교육평론가)
연산마을은 백추(白樞,1530~1604) 선생이 마을의 '하드웨어(마을의 기틀)'를 만들었고, 한강 정구(寒岡 鄭逑,1543~1620) 선생이 그곳에 '소프트웨어(어질 인(仁)의 정신)'를 채운 500년 천하의 명당 마을이다.
1. 왕재산(王在山,인현산(印縣山))과 금산리 연산마을
비단처럼 아름다운 산, 금산(錦山)리
풍경 : 마을 뒷산인 인현산(왕재산)을 포함하여 주변 산세가 매우 수려하고, 사계절 변화하는 모습이 마치 비단(錦)에 수를 놓은 듯 아름답다 하여 '금산'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풍수적 의미: 풍수지리에서 '금(錦)' 자가 들어가는 지명은 대개 땅의 기운이 귀하고 정갈한 곳에 붙여집니다. 연꽃이 물에 떠 있는 연화부수형 명당인 연산마을을 품고 있는 산이기에, 그 기운이 비단처럼 귀하다는 의미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2. 백추 선생의 안목과 금산리
마을의 기틀을 잡은 백추(白樞) 선생이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단순히 살기 좋은 곳을 찾은 것이 아니라 이 '비단 같은 산세'를 보고 발길을 멈췄다고 전해집니다.
선생은 정선부사 시절 강원도의 험준한 산세를 겪었기에, 이곳 성주의 부드럽고 수려한 금산의 풍경을 보고 "군자가 은거하며 학문을 닦기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비단 같은 곳은 없다"며 정착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3. 세 가지 이름의 조화
연산(蓮山): 마을의 형상이 연꽃 같아 붙여진 이름 (풍수적 형상)
인산(仁山): 한강 정구 선생의 덕망을 기려 '도장(印)' 대신 '어짊(仁)'을 택한 이름 (유교적 정신)
금산(錦山): 비단처럼 수려한 산수를 찬양하는 이름 (자연적 아름다움)
4. 마을의 전설과 금산
"비단 같은 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어, 이 마을 사람들은 비단 옷을 입는 귀한 신분이 되거나 비단결 같은 고운 마음씨를 가진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기도 합니다. 한강 정구 선생 같은 대유학자가 이곳을 영면의 장소로 택한 것도, 백추 선생이 이곳을 자손만대의 터전으로 삼은 것도 결국 이 '비단 같은 산의 기운' 때문이라는 믿음이 지명 속에 녹아 있다.
비단처럼 고운 산세 아래 어진 선비들이 모여 살던 곳, 그것이 바로 성주읍 금산리가 가진 진정한 의미입니다.
5. 마을 지명유래
가. ‘인산(仁山)’ 지명의 유래와 한강 정구 선생
원래 이 마을 뒷산의 이름은 도장을 찍는 고을이라는 뜻의 인현산(印縣山) 혹은 인산(印山)이었다. 여기에는 관청의 행정과 관련된 유래가 있었다.
관인의 전수처: 조선 시대 성주 목사가 교체될 때, 새로 부임하는 목사와 떠나는 목사가 이 고을 경계인 이 산 아래에서 관인(官印, 고을 원님의 도장)을 주고받았다고 하여 '도장 인(印)' 자를 써서 인산(印山)이라 불렀다.
어질 인(仁)으로의 변화: 1663년(현종 4년), 한강 정구 선생의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해 모시게 되면서 지명이 바뀌었다. 당대 최고의 대유학자이자 ‘인(仁)’을 실천한 선생이 잠드신 곳에 '도장 인(印)' 자는 격이 맞지 않는다고 하여, 성인(聖人)의 덕을 기리는 의미로 ‘어질 인(仁)’ 자를 써서 인산(仁山)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인현산(仁賢山): 같은 맥락에서 산 이름 역시 '현인이 잠든 곳'이라는 뜻의 인현산(仁賢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6. 마을의 시조와 집성촌 (수원 백씨)
연산마을(금산1리)은 수원 백씨(水原 白氏)의 집성촌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시조와 입향: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시조 격인 인물들은 수원 백씨 문중 사람들이다. 성주 지역의 수원 백씨는 고려 말~조선 초기에 입향하여 뿌리를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연산마을은 오래전부터 수원 백씨들이 모여 살며 마을의 기틀을 닦았다.
성주 지역과의 인연: 성주는 성주 이씨, 벽진 이씨 등 명문가들이 많지만, 성주면 금산리 일대는 수원 백씨들이 대대로 세거하며 학문과 예를 숭상해온 곳이었다.
7. 마을 관련 전설: 묘를 쓰지 못하게 했던 땅
이 지역에는 풍수와 관련된 엄격한 금기가 있었다.
읍기(邑基)의 보전: 과거 인현산에서 성주 읍내 중앙까지는 성주 고을의 기운이 모이는 핵심적인 줄기라 하여, 개인적인 묘를 쓰지 못하도록 엄격히 금지했던 곳이다.
금기를 깬 예외: 하지만 한강 정구 선생의 묘소를 이장할 때는 그의 학문적 깊이와 인품을 존경하여 이 금기를 깨고 명당에 모시는 것을 온 고을이 용인했다고 한다.
이 때 정구선생 묘소에서 '3일간 김이 피어오른 이야기'나 '여종의 순장 설화' 등은 모두 이처럼 금기조차 뛰어넘는 선생의 영험함을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이 마을의 이름이 '행정의 상징(印)'에서 '덕망의 상징(仁)'으로 바뀐 점은, 한 인물의 존재가 지역의 정체성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보여주는 아름다운 사례이다.
8. 마을 입향조 백추(白樞1530~1604) 선생
백추 선생은 단순한 마을의 시조를 넘어,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한 유학자이자 관직에서도 청렴했던 인물이다.
연산마을의 개척자, 백추(白樞) 선생
본관 및 가계: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자는 공진(共辰), 호는 송고(松皐)입니다.
관직 생활: 조선 중기 문신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정선부사(旌善府使)를 지냈다. 관직에 있을 당시 백성들을 어질게 다스려 명망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입향 배경: 그는 원래 살던 곳을 떠나 풍수지리적으로 뛰어난 길지를 찾아 성주로 들어왔다. 당시 그가 주목한 곳이 바로 연꽃이 물에 떠 있는 형국이라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명당, 지금의 금산리 연산마을이었다.
9. 마을의 형성과 '인산(仁山)'의 인연
백추 선생이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수원 백씨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고, 마을은 번성했다.
한강 정구와의 관계: 백추 선생은 한강 정구 선생보다 조금 앞선 세대였지만, 같은 지역의 유학자로서 깊은 교류가 있었다. 나중에 한강 정구 선생의 묘소가 이 마을 뒷산인 인현산으로 오게 된 것도, 백추 선생이 닦아놓은 마을의 학문적 분위기와 풍수적 우수성이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마을 이름의 변화: 백추 선생이 개척할 당시에는 관인을 주고받던 '인산(印山)'이었으나, 훗날 한강 선생의 덕을 기려 '인산(仁山)'으로 바뀌게 되는 드라마틱한 역사를 가진 마을이 되었다.
10. 향시조(鄕始祖)로서의 위상
마을 입구와 산기슭에는 그를 기리는 재실과 비석들이 남아 있어, 수원 백씨 후손들이 매년 제향을 올리며 그 뜻을 기리고 있다.
특히 선생이 정선부사를 지낼 때 보여주었던 청렴함과 선비 정신은 연산마을 사람들이 대대로 자부심을 느끼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연산마을은 백추 선생이 터를 잡았고(開基), 한강 정구 선생이 잠들면서(葬地), 조선 시대 영남 유학의 정수가 서린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백추 선생이 연꽃 모양의 명당을 찾아 마을의 문을 열었고, 훗날 한강 선생의 묘소가 들어오며 마을의 이름마저 '도장(印)'에서 '어짊(仁)'으로 승격되었다."
11. 백추 선생을 기리는 공간: 송고재(松皐齋)
연산마을에는 백추 선생의 호를 딴 송고재가 있다. 이곳은 단순한 건물을 넘어 마을의 중심이자 수원 백씨 문중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있다.
용도: 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고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의미: 마을 사람들이 '인산(仁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진 성품을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가르침을 전하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정선부사 시절의 청렴함과 일화
백추 선생이 강원도 정선부사로 재임할 당시, 그의 인품을 보여주는 일화가 구전된다.
청백리의 삶: 선생은 관직에 있을 때 단 한 번도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사직을 마치고 연산마을로 돌아올 때, 짐수레에는 책 몇 권과 소박한 가재도구뿐이어서 백성들이 그의 청렴함에 감동해 눈물을 흘리며 배웅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교육 중시: 퇴계 선생의 제자답게 마을로 돌아온 뒤에도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가 닦아놓은 학문적 토양 덕분에 훗날 한강 정구 선생의 묘소가 들어올 때도 마을 사람들이 유교적 예법에 따라 그 장엄한 장례를 정성껏 도울 수 있었던 것이다.
'연산(蓮山)'과 '백추'의 풍수적 조화
백추 선생이 이곳을 택한 이유는 마을의 형세가 ‘'연꽃이 물에 떠 있는 모습(연화부수)'이었기 때문이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도 깨끗하게 피어나는 선비의 절개를 상징한다. 백추 선생은 자신의 호 '송고(소나무 언덕)'처럼 변치 않는 절개를 지키며 살기 위해 이 땅을 선택했고, 그 선택이 결국 성주를 대표하는 명당 마을을 만들었다.
백추 선생이 마을의 '삶의 터전'을 잡았다면, 훗날 한강 정구 선생은 그 뒷산에 '영원한 안식처'를 잡았다는 것이다. 마을의 시조와 위대한 스승이 한 공간의 앞뒤를 꽉 채우고 있는 형국이다.
12. 한강 정구 선생의 묘소와 각시묘(여종의 묘)
왕재산 기슭에 있는 한강 선생의 묘소 주변에는 선생의 일생을 기록한 커다란 신도비가 서 있다.
비문에는 선생의 학문적 계보(퇴계와 남명의 제자)와 함께, 그가 죽었을 때 전국에서 선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장례식의 장엄함이 기록되어 있다.
김(안개) 설화의 흔적: 비문 자체에 기이한 김이 났다는 내용이 직접 적혀 있지는 않으나, 당시 기록(행장)들을 보면 "하늘과 땅이 슬퍼하고 산천이 기운을 내뿜었다"는 식의 표현이 등장한다. 이것이 민간으로 내려오면서 '3일간 묘에서 피어난 김'이라는 구체적인 설화로 굳어진 것이다.
각시묘(여종의 묘)의 위치
설화 속 여종의 묘는 한강 선생의 주묘(主墓)에서 조금 떨어진 아래쪽에 위치한다고 전해진다.
보통 주인의 묘 바로 곁에 종의 묘를 쓰는 것은 당시 예법상 파격적인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은, 묘역 전체를 감싸는 풍수적 흐름 안에서 그 여종이 선생을 영원히 보필하고 있다는 마을 사람들의 믿음이 반영된 결과이다.
이 묘는 공식적인 석물(비석이나 상석)은 초라하거나 없을 수 있으나, "선생을 끝까지 모신 충성스러운 넋이 머무는 곳"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더 한다.
13. 안산(案山)
마을 앞에는 책상을 놓은 듯 한 평평한 산(案山)이 있는데, 이는 풍수적으로 '공부하는 학자'가 나올 형상이라 하여 책상 안(案)자를 사용하여 안산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이 마음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14. 500년 길지 연산 마을을 답사
이 마을을 직접 방문하신다면 마을 입구의 세거비 → 송고재 → 왕재산 한강 묘소와 신도비 → 각시묘 터 순으로 둘러보시는 것을 추천한다.
백추 선생이 닦아놓은 청렴한 선비의 마을 위에, 한강 선생의 거대한 학문적 기운이 덮여 있는 묘한 조화를 느끼실 수 있을 것이다. 성주 금산리는 단순한 농촌이 아니라 조선 유학의 한 페이지가 지형으로 새겨진 박물관과도 같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