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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수류탄은 던지라고 있다>의 줄거리:
모든 대포알이나 총알과 달리 수류탄은 문자 대로 석류열매 모양으로 생긴 것을, 손잡이에서 안전핀을 제거하고 손으로 던져서 터뜨립니다. 그래서인지 수류탄으로 인한 사고는 중단이 없습니다. 선민에게 매일 엄청난 양의 수류탄이 발생합니다. 게다가 예외 없이, 생길 때부터 이미 안전핀이 제거 된 상태입니다. 주저 없이 즉각적으로 던져야 합니다. 그런데 지니고 있다가 자신에게서 터지게 되는 일을 일상적인 것으로 알고 사는 사람들이 있어 안타깝습니다.
수류탄은 던지라고 있다
(사무엘상 4:1~11)
5.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6.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히브리 진영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찌 됨이냐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영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7.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8.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9.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10.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수류탄은 던지라고 있다>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수류탄은 던지라고 있다’
수류탄은 폭탄이지만 다른 모든 폭탄이나 총알과는 다르게 사람이 직접 손으로 던져서 터뜨립니다. 언제나 사람 손에 들려 있다가 던져져서 폭발하기 때문에 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합니다. 강재구 소령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베트남으로 파병하는 군인들의 수류탄 투척 훈련을 시키는 도중에 수류탄의 안전핀이 빠진 채로 땅에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하자 즉시 자기 몸으로 덮쳐서 옆의 모든 군인들을 살리고 장렬하게 돌아가셨습니다. 또한 2004년에 김범수 대위가 사고를 당해서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하셨고, 일반 병사 중에서 공완택 병장도 수류탄이 떨어지자 쓰고 있던 철모로 덮으면서 몸으로 끌어안고 장렬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작년 9월에도 대구 신병 훈련장에서 사고가 발생해서 수류탄을 들고 있던 부사관이 죽고 주변인들이 다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수류탄은 소화기처럼 손잡이가 있는데 안전핀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안전핀을 빼게 되면 손잡이가 벌어지게 되고 안쪽에 있는 뇌관이 작동하며 터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안전핀을 뽑고 손잡이를 꽉 누르면서 던질 때에 뇌관이 작동하여 2~3초 내에 폭발하게 됩니다.
이러한 수류탄이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데 선민만이 이것이 수류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수류탄은 더군다나 안전핀이 뽑힌 상태로 2~3초 안에 집어던지지 않으면 폭발하고 마는데 도대체 선민만이 알고 있는 이 수류탄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의 삶에는 항상 문제와 걱정과 염려가 있는데 수류탄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요14: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평강의 삶이 가능한 이유는 수류탄이 터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수류탄인줄도 모르고 쥐고 있지만 선민은 수류탄인줄 알고 수류탄이 생기자마자 던져버립니다. 강재구 소령이 수류탄을 몸으로 덮은 것은 옆의 부하들을 살리기 위함이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에 생겨나는 수류탄은 던진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던지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것입니다.
이 수류탄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 선민의 역사를 처음으로 돌아가서 알아봅니다. 창17:1절에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시는데 이 말씀 뒤에 할례의 언약을 맺으십니다. ‘나는 전능하다, 내 앞에서 행하라, 그리고 완전하라’는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지 않으면 삶이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이고 ‘삶이 완전하다’는 것은 ‘삶에 절대적인 평강이 임하였다’는 뜻입니다. ‘평강이 깨졌다’는 것은 완전하지 않은 것이고 내 마음에 걱정 근심 염려 초조 불안 시기 질투 미움이 생기게 되는데 수류탄이 터져서 내 삶의 한쪽이 허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내가 지금 회사에서 사장님 앞에 있을지라도, 마음속으로는 사장님 앞에 있다는 생각으로 사장님을 대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사장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있는 것으로 먼저 하나님과 마음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앞에 계신 사장님과 마음을 연합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다른 일반 회사원들은 사업장 앞에서 행동을 하지만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과 내 마음이 먼저 결합된 상태가 바로 수류탄인데, 세상 사람들은 이것이 수류탄인줄을 모르고 사업장에 나가서 마음을 사업과 연합해서 품고 있습니다. 사업하면서 염려스러운 날과 평강한 날을 비교해봅니다. 삼성 회장이라고 해서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우리가 볼 때는 삼성의 회장 정도 되면 걱정이 없을 것 같지만 성경에 근거해서 확언할 수 있는 것은 계속해서 수류탄이 터지고 평강이 깨지는데 성경이 증언하는 진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과 연합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생각하고 염려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수류탄을 던져버려야 하고, 그럴 때에 내 마음이 하나님과 연합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됩니다. 사업을 하는 내가 사업을 던져버렸을 때에만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다른 것과 연합된 내 마음은 내 삶을 파괴하는 화약이 되고 수류탄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참 기가 막히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에 대한 소문이 점차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상황이지만 아직은 지도자적 위치에 선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대제사장 엘리가 지도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무려 사천 명이나 사망하고 패배하게 됩니다. 3~4절을 보면 장로들이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왜 전쟁에서 지게 하셨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여기까지는 참 훌륭합니다. 일이 잘못되면 여호와를 떠올리는 것은 선민으로서 당연한 수순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법궤를 가져다가 전쟁터 안에 둠으로서 블레셋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려 하게 됩니다. 대제사장 엘리에게 허락을 받고 그 아들들이 법궤를 옮기는 행렬에 앞장서서 진영에 들어옵니다. 5절의 말씀처럼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고 합니다. ‘땅이 울린지라’는 말씀은 법궤에 대한 이스라엘의 일치된 환영과 열광으로 사천 명이 죽어서 주눅이 들었던 이스라엘 군인들의 기대와 확신이 극대화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이 법궤로 인해서 승리에 대한 기대와 확신과 열광으로 함성이 퍼져나가고 일치단결하고 사기충천해진 이스라엘은 전쟁을 위한 최적의 상황으로 준비가 된 것입니다. 반면에 이 함성을 들은 블레셋 진영에서는 두려움이 팽배해집니다. 이제까지 우세하게 대해왔던 이스라엘이 이렇게 땅이 진동하는 함성과 사기충천한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위축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굴욕적으로 물러설 수는 없기 때문에 싸웠는데 결과는 이스라엘의 패배였습니다. 법궤가 없을 때에 사천 명이 죽었는데 법궤를 가져오자 삼만 명이 죽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법궤를 앞세웠을 때에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들이 법궤를 가져오겠다는 생각은 할 만합니다. 광야에서 행진할 때에 언제나 법궤가 앞장섰고,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법궤가 앞서 인도했으며, 여리고 정복 때에도 법궤와 함께 행진함으로서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경우에서 나타났던 승리의 결과가 왜 이번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것일까요? 이스라엘은 그 이유를 충족시키지 못했는데,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요단강에서, 여리고성에서 법궤를 앞세우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늘에 계십니다. 그런데 그 분의 말씀을 새긴 돌판이 들어있는 법궤를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거이고, 하나님이 선민인 우리를 보고 계시고 생각과 의견을 갖고 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시므로 법궤를 보는 것은 선민의 시작점이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증거물인 법궤를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막에 있을지라도 그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지금 요단강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궤를 증거로 하나님 앞에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여리고성 사람들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그 성을 돌면서도 마음으로는 그 적들을 마음에 담아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법궤를 보며 하나님과 먼저 연합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로 주신 법궤를 보면서 나는 지금 사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고 병이 난 몸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생각을 하지 못하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마음으로 붙잡은 상태에서 법궤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하나님을 가리키는 증거물들은 주술적인 물건으로 바뀌고 맙니다. 내 앞선 연합으로부터 생겨난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선민이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다른 것들과 마음을 연합한 상태 자체가 수류탄입니다. 원수에 대한 적개심도 원수와 연합한 상태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 내 꿈을 향해서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것도 연합입니다. 원수와의 연합이든 긍정적 비전과 꿈과 아군과의 연합이든 하나님과의 연합이 아니라면 다 수류탄입니다. 2~3초 내에 던져버리지 않는다면 폭발하고 맙니다.
예를 들어 몸에 병이 생겼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몸에 난 병과 마음이 결탁하게 됩니다. 걱정하고 염려하고 어떻게 나아야 할지를 생각하고 병원에 가고 훌륭한 의사를 찾고 식이요법을 하려고 하는데, 이러한 상태는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내 몸으로 껴안은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던져버려야만 하는데 이 던지는 방식이 바로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지금 육체의 질병과 연합한 내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사업과 내 마음이 결탁되어 있다면 그 마음이 수류탄이기 때문에 빨리 십자가로 던져버려야 합니다. 자식과 결탁한 내 마음이 수류탄인데 놔두면 자식과의 관계에서 평강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꾸 자식과의 관계가 일그러지는 이유는 내 마음이 자식과 결탁되어 있기 때문이고, 그대로 놔두면 수류탄이 되어 폭발할 수밖에 없어서 자꾸 평강이 깨지고 허물어져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과의 전쟁을 하나님의 전쟁으로 삼으시고 승리로 이끄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밟았어야 할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법궤를 생각해낸 것 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면 이제 번제를 드렸어야 합니다. ‘번제’는 수류탄 던지기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보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번제단에서 수류탄 던지기를 하고 화목제를 드려야 합니다. ‘화목제’는 아무것도 연합하지 않은 마음으로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고, 그럴 때에 전쟁은 비로소 하나님의 전쟁이 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원리는 그렇습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건강문제나 진로문제 등 하나님 이외의 것과 마음이 결합해서 생각하면 반드시 내 삶의 평강은 깨어집니다. 처음에는 잘 되는 것 같아도 반드시 실패합니다. 처음에는 사천 명이 죽었지만 법궤를 가지고서도 끝내 블레셋과 마음을 연합하고 있었기 때문에 삼만 명이 죽게 되고 결국 법궤도 빼앗겨버리고 맙니다.
이 세상인 블레셋과의 전쟁과 마음이 먼저 연합한 상태에서는 법궤는 단순한 나무통일 뿐입니다. 법궤가 하나님을 가리키는 증거물이 아닌 단순한 주술적 물건으로 취급당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스라엘에게 법궤를 빼앗기게 합니다. 선민에게 법궤가 주술적 물건으로 취급 받을 바에는 이방인에게 빼앗기는 게 낫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이 내 건강과 먼저 결합된 상태에서 주술적 물건으로 불릴 바에는 차라리 이방인들에게 불리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신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내 마음이 다른 것과 연합한 것이 없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다른 것과 연합한 상태에 대해서 죽는 것이 수류탄을 던지는 것입니다. 수류탄을 품고 있으면 터지고 그래서 마음에 기쁨과 충만함과 감사가 없고 평강이 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으십니까? 법궤안의 돌판에 하나님의 글자가 쓰여 있는데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내 삶에 대해 의견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내 삶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마음 놓고 이 세상과 연합되어있던 내 마음을 십자가에 던져버리세요. 던진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라가 임하는 것이고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수류탄 던지기를 하는 이유는 십자가를 통해서 죗값이 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죄적인 체질은 남아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접하는 것들을 마음과 결탁시키려는 기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수류탄 던지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의 수류탄을 던져야 합니다. 놔두면 내게서 터집니다. 십자가를 향해서 던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는 게 아닙니다. 내게서 터져야 할 수류탄을 십자가에서 주님이 덮으시면서 터진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나도 살고 옆 사람도 살고 다 살 수 있습니다.
자식과 관련된 문제가 있다면 자식과 연합한 마음을 십자가에 던질 때에 주님의 죽으심으로 그 마음도 죽게 됩니다. 사업과 결탁된 마음을 십자가에 던지면 주님이 죽으실 때에 그 마음도 죽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만 나와 사업에 대해서 하나님 뜻이 임하실 것입니다.
수류탄은 던지라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정조준해서 내 마음이 모든 세상 것과 결합할 때마다 그 생각을 더 진전시키지 말고 2~3초 내에 던져서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것과도 결합하지 않은 마음으로 주님의 길을 따라 승천하여 아버지와 연합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매일매일 발생하는 수류탄을 던지라 하신 것이오니,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바라보며 십자가를 향하여 정조준해서 던지게 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하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와 결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