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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다윗과 포레스트 검프>의 줄거리:
잘 알려진 IQ 75짜리 남자가 있습니다. 톰 행크스에게 두 번째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안겨준 영화속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 입니다. IQ 75짜리에게 삶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있다면 내막(內幕)과 의도(意圖)와 음모(陰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막 의도 음모 모른 채 평생을 삽니다. 그리고 내막 의도 음모에 민감한 사람들이 소원만 하다 마는 모든 자리에 도달합니다. 성경 속에도 포레스트 검프가 나옵니다. 내막과 의도와 음모 파악이 안 되는 다윗입니다.
다윗과 포레스트 검프
(사무엘하 3:31~39)
31.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
32.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왕이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33. 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이르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34.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35. 석양에 뭇 백성이 나아와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다윗이 맹세하여 이르되 만일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모든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하매
36.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37.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아니라
오늘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다윗과 포레스트 검프>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다윗과 포레스트 검프’
사람 이름이기도 하고 동시에 영화 제목인 IQ 75의 남자 ‘포레스트 검프’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 영화는 IQ가 75밖에 되지 않는 백치에 가까운 주인공이 우연찮게 1970년대 미국에서 있었던 모든 중대사에 다 개입하게 되고 모든 사람이 간절하게 소원하기만 했던 자리마다 올라가는 유쾌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어려서 다리가 부자유스러워서 지지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못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중 유일하게 친절했던 여자 친구의 도망치라는 소리에 지지대가 떨어져 나가도록 점점 더 빠르게 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달리던 곳이 미식축구 선수들이 훈련을 하던 곳이었고, 그의 달리는 모습을 본 미식축구 코치의 눈에 띄게 되어서 미식축구를 시작하게 되는데, 물론 주인공은 미식축구의 규칙을 이해하진 못하고 공을 쥐고 뛰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프로 미식축구 선수가 된 주인공은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서 백악관에 들어가게 되고, 이 만찬의 자리에서 케네디 대통령이 검프에게 말을 건네려 하자 콜라를 실컷 마신 검프가 오줌이 마렵다고 화장실로 가는 모습과 케네디 대통령이 웃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게 됩니다.
또한 검프가 탁구를 치게 되었는데 그 일이 닉슨 대통령 시절에 중국과의 핑퐁 외교와 맞물리게 됩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의 내막은 아무것도 모른 채 탁구만 치는데도 핑퐁 외교의 사절단으로서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도 합니다만 자기를 탁구선수로 보낸 정치인들의 의도를 모르면서 회상을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평화가 우리 손에 달렸다고 하지만 내가 한 것은 탁구뿐이었습니다.’라고 합니다. 자신과 연관된 일의 의도 음모나 내막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깨달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길에서 만난 사람이 준 카탈로그에 ‘미래를 보장한다.’라고 쓰인 한 마디에 혹해서 해병대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러면서 해병대에서는 ‘Yes, sir!’이라는 한 마디만 하면 되었기에 편했다고 회상을 하는데 유쾌한 내용입니다. 이 영화로 주인공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포레스트 검프의 오리지널이 있는데 성경 속의 바로 다윗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을 보면 꼭 백치 같아 보입니다. 다윗이 대단한 것 같아도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의 내막에는 관심이 없고 의도 저의 음모를 파악할 관심도 없고 능력도 없는 포레스트 검프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라기만 하고 이루지는 못했던 일들을 포레스트 검프가 해냈던 것처럼, 성경속의 포레스트 검프인 다윗도 선민의 나라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가 주어지는데 굉장한 일입니다.
이제까지의 내용에서 아브넬은 사울의 사망 이후에 블레셋을 쫓아내고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다시피 했고, 사울의 넷째 아들인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고 실권자로서의 자아의식으로 선왕의 여자를 자기 여자로 삼았습니다. 이것을 이스보셋 왕이 볼 때에는 있을 수 없는 기가 막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지적을 했는데, 그 지적에 자존심이 상해서 공공연하게 왕을 떠나고 배신할 것을 왕 앞에서 천명하고, 이스보셋 왕이 지금 다스리고 있는 지역 전부를 다윗에게로 돌리기 위한 일에 매진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와서 나라를 넘기겠다는 약속을 하고 융숭한 대접까지 받았으나 전쟁에서 돌아온 요압 장군이 ‘스파이로 와서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고 했던 아브넬의 의도와 그 음모를 왜 모르느냐’고 다윗에게 따집니다. ‘어떻게 그렇게 편안하게 보낼 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자기의 사람들을 보내서 돌아가고 있는 아브넬을 다윗이 부르는 것처럼 평화스러운 분위기로 위장해서 칼로 찔러 죽입니다. 왜냐하면 요압의 동생 아사헬을 아브넬이 죽였기 때문에 요압이 오라고 하면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으로 이어지는 내용 중에 눈에 띄는 부분이 있습니다. 죽은 아브넬을 위한 다윗의 애도하는 장면인데 정말로 이렇게 슬퍼할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요? 이제까지의 다윗의 삶을 통해서 볼 때에 다윗이 연기를 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데 아브넬의 죽음을 이토록 슬퍼하는데 상당히 이상합니다. 성경은 아브넬을 있는 그대로 속사람을 다 펼쳐내 보이는데 악하고 더럽고 교활하고 불신앙적 사람이었는데, 다윗은 이런 아브넬의 모습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처럼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는데 이게 좀 맞물리지를 않습니다.
다윗은 전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고 있었던 사무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스라엘의 왕권을 사울 집안에서 다윗에게로 옮기는 것을 처음에는 비밀리에 진행이 되었겠지만 이제 이스라엘 사람으로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넬은 사울의 넷째 아들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고, 유다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11지파를 결집시켜서 나라를 세우는데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대항했던 자였습니다. 그리고 실권자로서의 의식에 도취되어 선왕의 여자를 자기의 여자로 삼았습니다. 그 일로 이스보셋이 지적을 하자 자존심이 상해서 관계가 틀어지자 왕에 대해 배신할 것을 공공연하게 선언할 정도로 신뢰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진실이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윗을 접촉하여 자기가 통솔하고 있는 이스라엘 11지파를 마치 자기 것인 냥 바치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더 악한 것은 다윗에게 이스라엘 전체 왕권이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다윗 앞에서 고백하면서 그 하나님의 뜻을 자기가 수행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넬 만큼이나 악한 요압 장군을 통해서 아브넬을 쳐내시는 것입니다. 아브넬의 행동은 마치 많은 차들이 달리는 고속도로에 횡으로 뛰어든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면 이 땅과 연루되었던 모든 사슬을 끊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만 향하게 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면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야되고 하나님께로 가려면 이 땅에서 내 마음을 붙잡고 있는 모든 이해관계의 줄이 다 끊어져야 하고 이 땅에서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끊어져 나가야 하는데, 아브넬은 이스보셋의 지적을 받고 자존심이 상한대로 선왕의 여자를 취한 행동을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땅의 연관성을 그대로 다 유지하고 자기의 이해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다윗을 찾아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고 하자, 하나님께서는 악한 요압을 심판의 도구로 삼으셔서 아브넬을 죽이시는데 이러한 아브넬의 죽음에 대해서 다윗은 왜 슬퍼한 것일까요?
다윗은 내막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브넬은 자기가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선왕의 여자를 자기 여자로 삼으면서 이스보셋 왕이 눈 감아 주기를 원했지만 이스보셋은 그렇게 할 수 없었지요. 어떻게 아버지의 여자를 취하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입 다물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만약 아브넬이 살아서 다윗에게 이스라엘 11지파를 귀속시키는 공로를 세웠다면 앞으로 두고두고 다윗에게 얼마나 많은 지분을 요구하고 달려들었겠습니까? 아마도 이스보셋에게 요구했던 것 이상의 대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의도나 음모 내막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아브넬의 죽음에 대해서 진심으로 슬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다운 일이었고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신 이유가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포레스트 검프가 한 가지 일에만 집중했듯이 다윗이 믿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었습니다. 달리는 일에 집중한 포레스트가 미식축구의 규칙도 모른 채 공을 들고 달리기만 했던 것과 같고, 탁구를 칠 때에는 오직 그것에 집중해서 그것과 연관된 다른 의도 음모 내막에 대해서는 몰랐고, 군대에 가서도 오직 ‘Yes, sir!’라고 만 할 뿐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은 하나님이 살아계심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골리앗의 사건으로 경험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서 나타나실 수도 있고, 나를 통하지 않을 때는 사울 왕의 기름부음 사건으로 인한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달렸다고 말한 것처럼 내 바깥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나타나실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살아계신 사실만을 가지고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으로 다윗은 아브넬을 만날 때에 그 내막을 캐내고 의도를 알려고 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불꽃같은 눈으로 아브넬을 보고 계시기 때문에 무슨 의도나 음모나 내막이 있든지 다윗과는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단지 다윗은 만나게 되는 모든 선민의 나라 안에 있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겼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름부음 받은 자였기 때문에 사울을 죽이지 못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선택하신 선민들이었기에 다윗도 귀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심판하는 일이 아닌 다음에는 다 귀하게 여겼습니다. 아브넬은 악하고 교활하고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놈이었습니다. 이스보셋에게 잘못을 지적받자 군부를 장악하고 있고 힘이 있으니 자기가 세운 왕의 면전에서 배신을 선언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마음의 눈으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아브넬에 대한 눈을 감았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에 그 사람의 표정을 읽고 그 사람의 말에 숨겨진 저의와 의도를 생각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그 사람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이 사람을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매사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적용하다보면 그 사람 속에 있는 의도 저의 음모 내막에는 관심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요즘 음모론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이 시대의 음모론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를 사랑하시고 불꽃같은 눈으로 보시며 알고 계시는 것을 믿으면 포레스트 검프가 한 가지 일만 했듯이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포레스트 검프의 어머니 말대로 “신이 주신 내가 할 수 있는 장점 하나를 최선을 다해 하면 인생은 초콜릿 상자 같아서 다음에는 어떤 것이 나올지 모른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초콜릿 안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처럼, 사람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하나님만 알고 계시다는 이 간단한 사실을 다윗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장님을 만날 때에도 대통령을 만났던 포레스트 검프처럼 대하세요. 사장님에게 잘 보이기를 신경 쓰지 마세요. 청년들이 애인 만날 때에 애인의 말 한 마디나 표정 하나에 신경 쓰지 마세요.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를 보고 계시고 애인을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브넬의 내부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고 그를 귀하게 받아들이고 관계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 믿는 사람을 대할 때에도 그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귀한 존재로 생각하고 대하면 됩니다. 사장님이든 부장님이든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다윗은 살아계신 하나님 한 분만을 신경 쓰며 사람들을 다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주변 전체를 정리해 나가십니다. 다윗은 아브넬을 귀하게 여겼지만 이스라엘을 통치할 다윗 옆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기에 요압 장군을 통해서 심판하십니다. 그 요압 장군 또한 다윗에게 붙여둔 가시로 사용하심으로서 다윗이 왕위에 집착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왕위에 앉아서 편안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만 마음을 돌려야만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요압 가시를 두시고 또 그 가시로 인해서 여호와께서 친히 복수하시는 진리가 이스라엘 선민들의 가장 큰 믿음의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친히 피를 묻히지 않도록 악한 요압을 들어서 아브넬을 처리하도록 하시는데 행동대원으로 두시는 것입니다.
악한 자가 내 옆에 있을 수도 있고, 어떤 음모와 의도를 가지고 내게 접근할지 알 수 없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기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를 생활화해야 합니다. 사장님이 인상을 쓴 것이 마음에 걸리더라도 그것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으세요. 인상 썼기 때문에 기가 막히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심지어 그 일로 해고를 당할 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에는 더 좋은 길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마치 초콜릿 상자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붙잡느라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사장의 눈치를 살필 때에 나는 해고당해 빠져나왔다면 그것이 좋은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나를 향한 다른 사람들의 의도 음모 내막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아버지께만 마음을 다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에 이 세상의 삶은 내막도 파악 못하는 IQ 75에 머물지라도 하나님의 IQ에서 나오는 계획대로 진행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성경속의 포레스트 검프인 다윗처럼 제2 제3의 다윗으로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