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래
어제 홀로 송년을 맞이하며 약속한 것들 가운데 '물명상'과 '빨래'만 할 수 있었다.
안경은 고칠 수 없었으며, 아버지의 시계는 아예 생각조차 못 했다.
오랜만에 현존호흡 연습 때 글들을 찾아보다 '물명상' 글을 꺼내어 다시 읽었는데, 그 때문이었을까?
찬물에 드러서자마자 아홉살의 몸이 떠올랐다.
아홉살의 몸
부서지기 쉬운 몸
그러나 부서질 수 없는 몸
'부서지기 쉽다'는 표현 자체가 극한의 고통을 표현하고 있다.
따순 눈물이 흐르는데 ... 냉탕에 온도가 따뜻해질 정도로 눈물의 양이 버금갔다.
혼자만의 눈물이 아니었다. 얼마나 많은 아홉살들이 그렇게 부서지는 몸을 만날까?
왜 그렇게 느껴질까.
나는 왜 이 땅을 이리도 믿지 못할까
이 땅에 나고 자란 사람들을 믿지 못할까
모두는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을 믿지 못 한다.
여전히 전쟁중인 나라
전쟁중에 가장 위협받는 여자와 아이,
여전히 여자와 아이를 지키지 못 하는.
그런 일들이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는것만 같다.
이십여년 전 '팔레스타인평화'모임을 향해 걷는 내가 있다.
이라크평화를 향해 걷는 내가 있고,
로힝야의 아이들을 향해 걷는 내가 있다.
이 걸음들의 시작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냥 마음이 동하는 걸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든 걸음에 뒤따라오는 아이가 있다. 아홉살의 아이...
어제 목욕탕에 하얀색저고리를 가져갔다. 처음이다. 빨래감을 가져가 '하면 안되는' 일을 하는 것, 하얀 저고리의 소매와 깃을 손을 문대 빨고 냉탕과 열탕을 오가며 '물명상'을 했다. 새벽 수련에 배운 어깨에 탁기를 빼는 동작도 하면서....내 몸에 남아있는 아주 오래된 무거움과 차가움을 느낀다. 이런 등과 어깨의 냉감들이 나를 기도하게 하고, 애도의 마음을 품게 하는 감각들이다.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 '감각'의 안내에 따르곤 한다. 어떤 감각은 따른다고도 볼 수 없다. 그저 그 감각이 되버린다. 세월호의 침몰을 바라보던 그 밤, 나는 이미 그 바닷속이었다. 밤새 숨이 쉬어지지 않는 고통 속에서, 잠든 식구들이 깰까봐 조마조마하며 입을 틀어 막으며 고함에 가까운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구조되었다'는 말에 이 모든 것들이 멈춰졌다. 어찌 이럴 수 있나? 할 정도로....이 날 이러한 '나'와의 만남은 내 안에 침몰된 '나의 역사'를 불러 일으켰다. 새벽마다 깨어나 통곡하며....애도의 시간들을 맞이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매주 화요일이면 분향소에 갔다. 어쩌면 교하중앙공원의 분향소가 나를 살렸는지도 모른다. 그 곳에만 가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숨이 쉬어졌다. 일주일에 한번, 나의 담당일이 나를 살리는 그런 날이되었다. 그러고보니 '침묵의 기도'를 드리는 날도 화요일이구나! 이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형체를 알 수 없이 누더기가 된 몸이 떠오른다. 무섭다. 너무 두렵다....
나는 잠시 그 몸을 향해 '조금만 천천히 와 달라고 부탁해도 되겠니..'라고 말한다.
말하면서도 아프다....얼마나 오래 나를 기다렸을텐데....이제라도 만나 얼싸안으며 반가워해도 모자랄텐데....나 혼자서는 어려울 것 같다고...솔직하게 고백한다.
다행히도 이미 예약된 '꿈상담'과 '표현예술치료'가 있다고 설명한다. 너를 위한 작업을 이미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다고.
십수년전 만덕산에서부터 시작해, 원불교 신앙으로 만났고, 그 영적체험에서 끝내지 않고, 오랜동안 붙들고 살았다고.
1년 전 남편의 직장에서 열린 행사에 갔다가, 우연히 만난 어떤 선생님을 통해, 그녀가 나에게 신화에 나오는 누구라며, 관심을 보일 때 나는 알았다고. '아 이 사람과 너를 만나겠구나!'
그리고 나를 만나러 오는 이들 모두....'내가 너를 만나기 위한 길이며 다리였다'는 것을. 한 여자의 삶에 너와 같은 아이가 없는 이가 없다고......이 참혹한 비극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까....동동거리는 내가 있다고.
4년 전 얼어붙은 발을 만나고, 다리를 만나고.....나는 여전히 물명상으로 그 다리에 뭉쳐진 감정을 풀어주는 중이라고.....나는 너를 잊었던 적도 많지만, 내 다리만은 한 순간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다고. 내 몸은 너의 모든 것이라고.
아홉살 아이가 있는 내면의 방에 푹신한 쇼파와 물명상할 수 있는 편안한 욕조와 아이가 좋아하는 따순 호박죽과 맛깔난 떡볶이, 새우깡, 수정과, 할머니표 멸치칼국수.....먹을 것들을 차려 놓는다. 호박죽은 밀어낸다. 그건 어른이 되고부터 좋아했다며.
먹을 것들을 좋아해서 얼마나 다행인지.......엄마가 끓여준 누른밥과 함께 먹은 파김치...
빨강머리앤과 캔디캔디, 허클메리 핀, 키다리아저씨 만화영화들도 한가득
이오니아의 푸른별, 겨울비, 안녕미스터블랙..황미나, 김영숙, 김진, 이현세의 만화책들도 한가득
따순 이불과 강화 직녀님댁 붉은 아궁이의 방도
할머니 발고락 냄새...할머니 따순 숨내도....
그렇게 편안하게 살펴준뒤 내면의 방을 나선다.
저 멀리....차학경의 방, 숱한 여인들의 방이 보인다.
그 방들을 밝히는 따스한 가로등 오랜만이네...'오페라의 여가수'!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고 그 곳에 그대로 있구나....
나는 이렇게 한 해의 끝과 한 해의 시작을 사는구나
이십대의 방황과 유흥을 알던 한 친구가 죽고,
마치 '사악한 자들의 비통한 시나리오'를 담은 영화처럼 무안의 참사가 우리를 뒤흔드는 이 날들에서....
나는 여전히 이렇게 살아남아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슬픔만이 있는 것은 아니라며
살아남은 자의 '책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나는 나에 대한 책임이 있고
삶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이 나라에 대한 책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