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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모음집]
내 상상력이 조금의 여유를 가지고 달려가고 있는 곳이었다면
전창수 지음
<말죽거리 잔혹사> 전학에서 퇴학까지.
1. 학교에서 배운 것
인생의 일할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아마 그랬을 거야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 그리고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법과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 그 중에서도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도움을 준 것은 그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 최대한 굴복시키는 법
- 유하, <학교에서 배운 법>
아, 그 시기. 그러니까 유신정권의 말기, 아니 말살(?). 무언가 갑갑한데 눈을 뗄 수 없는 저 놈들의 카리스마와 그리고 안타까움.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는 전형적인 로맨틱코미디나 전형적인 학원물의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그래서, <말죽거리 잔혹사>는 보는 내내 즐거움을 선사하진 못한다. 현수와 우식, 그리고 햄버거와 찍새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암투는 마치, 70년대 말기의 유신정권 시대의 암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시대배경도 78년도다. 그뿐 아니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전형적인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우정으로 귀환함으로서 건전한 사생활까지 유도(?)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의 잔혹한 사건들은 청소년기를 관통하는 방황이고, 역동성 있는 희망으로 변환된기도 하는 것이다.
2. 폭력이 권력의 핵심?
<말죽거리 잔혹사>는 결코 폭력을 미화하지 않는다. 그 대신, 조금 더 리얼리티한 액션에 중점을 두고 현수와 찍새간에 벌어지는 최종 액션신에 무게를 둔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의 눈빛에 살기가 가득하다. 조금만, 잘못하면 사람 죽일 분위기다. 그것이 때로는 마음을 불편하게도 하고, 때로는 그들의 눈빛에 흡수되어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 시기, 그러니까 70년대 말기는 실제로 폭력은 권력의 핵심이었다. 잘못된 법인 것만은 분명하다, 아무도 그 법을 바꿀 수가 없다. 폭력이 법이라면 내가 법이 되는 수밖에. 현수는 그렇게 법을 실현한다. 객기가 아니라, 그는 그 법을 실제로 실행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수련하고 끊임없이 기회를 엿본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못된 법을 처단하기 위해서. 그래서, <말죽거리 잔혹사>의 최후 액션씬은 더욱 더 빛이 나고,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사랑 때문이어도 좋고, 친구 때문이어도 좋다. 그러니까 현수는 이건 분명 잘못된 것이라는 건 아는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어떻게 고쳐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퇴학을 각오하고 찍새를 처단하는 것. 현수는 현명하다거나 이성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러기엔, 그는 아직 어린 고등학생이다. 고3도 아니다. 그는 고2다. 한참, 방황하는 나이의 그다. 그래서, 그는 이성보다는 감정적으로 판단한다. 때로는 정의가 구현될 수 없는 사회가 있다. 현수는 그것을 감성으로 느낀다. 현수의 미래?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거 하나만은 분명하다. 현수는 결코 절망적으로 살지 않으리라는 것. 그래서, <말죽거리 잔혹사>는 은근하게 해피하다.
3. 영화와의 경쟁?
70년대나 80년대나 교육방법이 크게 달라진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어디를 가든, 짱은 존재한다. 어디를 가든, 모범생도 존재한다. 다양한 개성을 가진 소년들이 저마다의 미래를 향해 조그만 희망을 키우고 있는 곳이 학교다. 그 꿈을 짓밟는 사람들. 때로는, 거대한 권력의 압력이기도 하고, 때로는 주변에 아주 가까운 동료들 혹은 친구들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경쟁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바른 경쟁인가? 서로에게 상처만 줄 뿐인 경쟁은 피하는 것이 낫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재미와 동시에 상처까지 남겨주려 한다. 그것이 <말죽거리 잔혹사>와 나 혹은 우리와의 피할 수 없는 경쟁이다. 아, 죽임보다 더 잔인한 경쟁이어라!
[사마리아] 소녀시대
소녀가 울고 있다. 처음에는 흐느끼는 듯 하더니, 이내 소녀의 울음소리는 통곡으로 바뀌어 간다. 창 너머로 소녀를 쳐다보는 한 남자의 눈길이 쓸쓸하다. 소녀의 울음에 한번쯤은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거나, 슬며시 어깨를 내어줄 수도 있을 텐데, 남자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창 너머로 말없이 바라볼 뿐이다. 그런데 그 남자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소녀의 울음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다만, 소녀의 울음에 울컥. 내리쳐오는 슬픔. 그것은 어쩌면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힘없는 자의 복받침일 수도 있고, 잘못된 행동에 대한 친구의 죽음을 말없이 지켜봐야만 했던 자책일 수도 있다. 그 어느 쪽이어도, 소녀가 겪어나가야 할 세상은 슬픈 것이고, 평생 지고 가야 할 소녀의 상처는 소녀가 헤쳐나가야 할 험난한 물음이자 대답이다. 그리고, 영화 <사마리아>는 그 대답을 결코 제대로 ‘정의’해 놓지 않는다.
1. 바수밀다 “인도에 바수밀다 라는 창녀가 있었어. 그런데 그 창녀랑 잠만 자고 나면 남자들이 모두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된데.. 날 바수밀다 라고 불러줄래? “ 재영의 말에 여진은 동의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여진은 재영이 채팅에서 만난 남자들과 원조교제를 하는 것도 말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도 않는다. 영화를 이끄는 힘은 바로 ‘정의’하지 않는 데에 있다. ‘정의’하지 않음으로 인해, 영화는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고, 끊임없이 갈등 속에 서 있게 만든다. 그 갈등은 ‘판타지’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여진이 재영의 원조교제에 동의하지 않음에도 재영은 여진의 가끔 던지는 걱정스런 물음에 시종일관 웃음으로 괜찮다며 달랠 뿐이다. 그 웃음의 끝에 죽음까지도 있다. 죽은 후에조차 웃음을 멈추지 않는 재영에게 “그만 웃어”라고 말하는 재영. 뭐가 그렇게 좋았길래 재영은 죽은 후에도 웃음을 멈추지 않는 것일까. 재영의 웃음은 어른들의 잘못된 성윤리에 던지는 일종의 경고일지도 모른다. 죽음은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 그럼에도, 재영이 웃고 있다는 사실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재영의 웃음은 정말로 좋아서,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음 이외에는 다른 삶의 방식이 없기 때문이라는, 뒤에는 경찰이 있고 앞에는 떨어지면 죽을지도 모르는 허공에서 우리는 방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갑작스런 질문을 떠오르게 한다.
2. 사마리아 “돈 안 받을게요. 지난번 돈도 돌려줄게요. 그럼 편해지죠?” <사마리아>의 두 번째 에피소드, 사마리아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분명, 보상받아야 할 사람은 여진인데, 오히려 여진은 남자들에게 보상을 해주고 있다. 여진이 재영이 만났던 남자들을 만나는 이유? 참, 무책임한 말이 될지 모르지만 ‘돈을 돌려주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아서다. 아직은 성숙하지 못한 자아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사마리아는 아직까지 완전하게 성숙되지 못한 판단력으로 분명 누가 보아도 온전하다고 할 수 없는 ‘환불’의 방식으로 남자를 용서, 혹은 정화하려는 여진을 통해서 또 한번 질문을 던진다. 누가 여진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질 때즈음 <사마리아>는 영기라는, 여진의 아버지를 전면에 등장시킨다.
3. 소나타 “인간도 아닌 새끼. 그 어린 게 들어갈 구멍이 어디 있다고...” 사건 현장에 나갔다가 우연히 옆 모텔을 보게 된 형사 영기. 모텔에서 남자와 함께 나오는 여자는 자신의 딸 여진이다. 바수밀다에서는 죽음을, 사마리아에서는 용서를, 그러나 소나타에 와서 영화는 비로소 ‘응징’을 한다. 그러나, 그 응징의 방식조차 또다른 잘못된 세계를 보여준다는 것이 <사마리아>의 특징이다. 결국, 재영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들에게 영기가 택한 응징의 방식은 최종적으로는 죽음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작 여진이 입은 마음의 상처가 해결되었느냐? 오히려, 상처는 더욱 쌓일 뿐이고, 여진을 위한 아버지의 선택은 여진이 혼자서 길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비에 젖은 진흙길을 걸어서 오든, 차를 몰고 오든 그것은 재영이 헤쳐나가야 할 몫인 것이다. - 그러니까, 세상은 재영을 죽음으로 몰고갔고, 여진은 재영을 죽인 그들을 용서하고자 했지만, 또다른 세상에서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아니, 또다른 해석도 있다. 재영인 스스로 죽음을 택했고, 여진은 재영의 흔적을 더듬고 싶어서 재영이 만났던 남자들을 다시 만난 것이고, 영기는 여진이 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분노를 표현해야만 했다. 해석이야 분분하겠지만, <사마리아>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함부로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느낌을 분명 한가지는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는 없는, 가슴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느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감동이라는 것이다.
<마더>는 행복해야 한다
마더는 슬픈 영화다.
그러나, 그 영화가 슬픈 이유는 누군가 죽었기 때문도,
또 사랑 후 이별이라는 가슴을 울리는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는 엄마의 슬픈 운명 때문에 슬프다.
현실을 사는 우리 엄마의 모습이 꼭 그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기 아들만큼은 절대로 나쁜 놈이 아닐 거라는 철썩같은 믿음
그것이 우리들 엄마의 모습이고, 우리 아들만큼은 무조건 잘 되어야 한다는
가끔은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엄마의 집착.
때때로 그것은 현실사회에서 자식을 숨막히게 만드는 족쇄로 작용하기도 한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는 카리스마가 있다.
김혜자 선생님의 잔인하고 표독스런 연기가 압권인 영화다.
여기에 원빈의 바보스러우면서 능청스런 연기까지.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새로운 현대사회의 이슈를 만들어냈다.
엄마는 아들을 어디까지 사랑해야 하는가?
그러니까, 이 땅의 부모들은 자식에 대한 믿음을 어디까지 가져야 하는가?
영화에서 보여주는 이 사랑에 대한 의외의 해석은
우리의 마음을 찡하게 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생각할 만한 거리를 제공해 준다.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엄마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때로는 엄마 자신이 상처받게 된다는 것을!
엄마는 진정 행복해져야 하는 존재다. 그래야, 자식도 행복해질 테니까.
나는 다시 한번 우리들의 엄마가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제니 주노> 고정관념화된 어른들에게
어른들은 그런다. 자기만이 옳고, 자기 뜻대로만 하면 세상이 다 ‘만사형통’인 줄 안다. 자만에 빠진 어른들은 더 나아가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고, 인간을 ‘개조’시키겠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스스로는 변하지 않으면서, 남은 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 사람의 주위에는 늘 불행한 사람이 한 명 이상 존재한다. 그 불행의 씨앗이 커지면, 사회는 돌이킬 수 없는 패닉상태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자만’과 ‘독재’에 빠진 그런 사람의 권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사회는 그만큼 불행해지고 그로 인해 피해자는 속출하게 된다. 그만큼 한 사람의 “어른”이 끼치는 영향력은 막대하다. 그래서, 인성교육은 더욱 더 중요해지고 올바른 가치관 정립과 또한 다른 사람의 생각을 겸허하게 포용할 줄 아는 대인관계는 더욱 더 중요해지고 있다.
<제니 주노>는 이미 한차례 사회적 고정관념에 대한 시험을 거쳤다. 15세의 임신. 사실,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밝게 임신을 받아들이는 현대의 청소년은 매우 드물거나,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니 주노>가 15세의 임신이라는 파격적이라는 소재에도 불구하고, 선뜻 거부감이 일기 전에 15세의 임신 자체가 논란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현실이 개탄스럽기만 하다. 실수였든 고의였든 우리사회의 현실에서 15세의 임신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어디서든 고통받고 있을 그네들의 모습은 존재하는 것이기에, <제니주노>의 문제는 영화가 아닌 우리 사회적인 병폐로서의 문제제기를 시도한다. <제니주노>는 청소년들의 성적 호기심에 대한 판타지다. 이 판타지는 <몽정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몽정기>가 있을 법한 성적 호기심에 대한 접근이라면, <제니주노>는 직접적으로 임신까지 했고, 또 임신한 사실에 대해서 처음에는 숨기고 약간 고민하긴 하지만, 결국은 스스로의 위치를 인식하고 밝게 세상을 살아가려는 태도에서 우리는 ‘일탈’한 청소년들이 꿈꾸는 판타지를 볼 수 있다. <제니주노>가 청소년들의 일탈을 부추기는 영화라고 떠들지만, 이미 ‘임신’하여 고민하고 있을 청소년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이 꿈꾸는 미래가 한 순간의 ‘실수’로 잿더미가 되어버린다면…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해야만 하게 했던 우리 환경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먼저 우리의 환경보다 그들을 먼저 탓한다. 청소년기. 방황기에 있는 그들에게 길을 똑바로 인도를 하지는 못할지언정, 강압과 억압 그리고 편견만을 강조하며 우리 자신의 잣대로 그들을 판단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 편견으로 고정화된다. 그것이 “고정관념”이다. <제니주노>가 비판받아야 할 점이라면 문제제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해법을 정확히 제시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주겠다는 판타지로서의 역할을 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그런 시늉만 했을 뿐 별다른 깊은 고민을 하지는 않는다. 그 점은 오히려 절망에 빠진 이들을 더욱 더 절망적으로 몰고가는, 파탄의 판타지가 될 수도 있다. <제니주노>는 항상 들떠 있으며, 그들의 미래는 부유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고정관념’화된 어른들은 그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들의 뜻을 꺾으려 할 것이며, 그들을 허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의견은 애초에 들어보려 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들에게 어떤 잘못을 한 것인지 그들의 미래가 어떨 것인지에 대한 해법을 제시해 주지도 않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생소한 어린 자식의 임신. 그들은 <제니주노>의 상황에 처한다면, 먼저 상처를 입을 것이며 스스로의 상처를 먼저 치유하느라 자식의 미래에 대해 고민할 여유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영화는 그런 어른들을 은근히 비꼰다. 영화 속의 어른들은 결국은 <제니주노>에게 두 손을 들기는 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나 어이없고 설득력이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서 절망적이기만 하다. 그렇다. <제니주노>는 문제제기만 했을 뿐. 깊이 있는 고민은 하지 않았다. 설득력이 부족한 결말과, 마냥 행복하기만 한 그들. 영화 속의 어른들은 <제니 주노>에게 엄마 아빠로서의 역할을 부여하지 않았다. 또한, 끝까지 그들을 허락한 것이 아니다. 다만, 상황이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현실은 어떻겠는가. 주노가 택시를 잡아타고 제니를 쫓아갔다. 주노가 제니의 차를 따라잡고, 택시기사들이 일제히 그녀의 차를 향해 나아갔을 때, 제니의 양수가터지고 애기를 낳는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결말이란 말인가? <제니주노>는 그렇기 때문에, 15세의 아이가 임신을 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다면, 그들을 그래도 행복하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니? 라고 ‘어처구니없이’ 묻는 판타지다. 그 판타지는 별다른 맛은 없다. 그러나, 어쨌든 무엇인가 계기는 되어야 할 것이다. 15세의 임신.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15세의 임신은 일반적이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왜 오늘날의 사회는 15세에 임신한 것이 그다지도 사회적인 문제가 된단 말인가? “고정관념”은 버리고, 이제는 새로운 해법을 찾아나서야 할 때다. 문제가 있는 학생은 어딘가에서 그 이유가 있다. 문제가 있는 사람은 분명히 그 원인이 어딘가에 있다. 사회의식의 성장은 “왜”라는 질문에 있다. 그 사람을 욕하기 전에 “왜”라는 질문을 먼저 던지자. 아주 지독한 “고정관념”에 빠진 사람은 때로는 사람을 아주 지독하게 피곤하게 한다. 그 사람은 ‘왜’를 먼저 생각하지 않고, ‘나’를 먼저 주장하는 사람이다. ‘나’를 너무 세우지 않는 것도 좋지 않지만, ‘나’만 고집하는 것은 더욱 더 피곤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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