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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미션 프로히비티드>의 줄거리:
영화 '미션: 임파서블'에서처럼, 불가능해 보여도 시도는 해볼 수 있지요. 그러면 미션 프로히비티드란 무슨 뜻일까요? 미션이란 행하라고 주어지는 임무이고, 프로히비티드란 행함이 금지 되었다는 말입니다. 도둑질처럼 아예 금지 된 조항을 행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루어져야만 해서 내게 주어진 과제인데 그런 과제를 행하지 않는 것이 나의 미션이라는 뜻입니다. 삶의 낭패와 혼란은 이렇게 이상한(?) '미션: 프로히비티드'의 실패에서 비롯 되고 있습니다.
‘미션: 프로히비티드(prohibited)’
(열왕기하 3:1~20)
1.유다의 여호사밧 왕 열여덟째 해에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을 열두 해 동안 다스리니라
2.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의 부모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그의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주상을 없이하였음이라
3. 그러나 그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를 따라 행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4.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5.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지라
6. 그 때에 여호람 왕이 사마리아에서 나가 온 이스라엘을 둘러보고
7. 또 가서 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사신을 보내 이르되 모압 왕이 나를 배반하였으니 당신은 나와 함께 가서 모압을 치시겠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올라가리이다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 하는지라
8. 여호람이 이르되 우리가 어느 길로 올라가리이까 하니 그가 대답하되 에돔 광야 길로니이다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미션: 프로히비티드(prohibited)’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미션: 프로히비티드(prohibited)’
‘prohibit’는 ‘금지하다’라는 뜻이고 ‘prohibited’는 형용사로 ‘금지된’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영화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을 생각나게 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프로젝트를 수행해내는 내용이지만 근본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일지라도 꼭 이루어야 될 것이 있다면 도전은 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션 임파서블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고 안 되면 되게 하는 식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행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숨통이 열려있고 길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목인 ‘미션 프로히비티드(prohibited)’는 불가능한 임무가 아니라 금지된 임무입니다.
미국의 맥 라이언 여배우가 LG화학의 섹시 마일드 샴푸를 광고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미국의 토크쇼에 나가서 샴푸의 이름이 형용사를 명사로 만들었다며 우스갯거리로 삼은 적이 있었지만, 미션 임파서블 제목의 영화 자체도 형용사를 명사로 내걸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제목의 프로히비티드도 그런 식으로 사용해봅니다.
그렇다면 미션 프로히비티드(prohibited)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도둑질처럼 금지된 조항을 어기고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야 하는 과제가 주어져 있는데 나의 미션은 주어진 과제 앞에서 그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마는 이루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지만 내가 그 과제를 수행하지는 않는 것이 미션입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 하면 되니까 쉬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루어야 함에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신앙인으로 어느 회사의 과장입니다. 나에게는 하루 동안 이루어야 될 업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위의 제목대로 생각하자면 회사가 나에게 이루라고 준 과제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는 내가 엄마라면 자녀의 양육이 임무입니다. 그런데 자녀양육 앞에서 그 임무가 금지되어 있어서 안 하는 것이 미션인 셈입니다.
여러분이 이 말을 비유적으로 의미를 공감할 수 있게 예를 들어 보면 미식축구에서 공격수가 공을 가지고 터치다운을 위해서 상대방의 엔드라인을 향해 뛰어 갈 때 같은 팀의 선수들이 상대방 수비수들을 밀치면서 공을 가진 사람의 길을 터주는 것과 같고, 직장에서 과장으로서의 주어진 업무는 하나님의 미션 즉 라틴어로 ‘미시오 데이(Missio Dei)’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셨던 것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었고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격수의 터치다운과 과장으로서의 업무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임무를 행하시도록 나의 임무는 나 자신의 의욕과 나 자신의 생각을 밀쳐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움직이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생각을 밀쳐내는 것인데, 이것이 오늘 제목인 미션 프로히비티드인 것입니다. 이루어야 하는 과제는 주어졌지만 나는 해서는 안 되는데, 어렵겠지만 신앙인이라면 누구에게서나 일어나야만 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종교개혁으로 유명한 손꼽히는 여호사밧 왕이 등장하는데, 그가 반복해서 저지르는 신앙적 오류가 이 미션 프로히비티드의 실패인 것입니다.
때는 북 왕국에서는 아합 왕이 죽고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어 2년을 통치하고 병으로 죽게 됩니다. 아하시야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동생이자 아합과 이세벨의 아들이었던 여호람이 왕이 됩니다.
이 시기에 북 왕국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치던 모압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여호람 왕은 이 반란을 제압해야만 하는데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부족함으로 남 왕국 유다의 여호사밧 왕에게 파병을 부탁합니다. 여호사밧 왕은 이 요청에 기꺼이 응답을 했는데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사밧 왕이 전체 본문의 주요 인물이기는 하지만, 여호람 왕의 신앙에 대해서도 잠깐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여호람 왕이 바알의 주상을 없애긴 했지만 여로보암의 죄를 계속했다고 합니다.
‘바알의 주상을 없앴다’는 의미는 ‘풍요와 다산을 추구하는 마음에 제동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보암의 죄를 계속했다’는 것은 여로보암이 북 왕국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남 왕국 유다의 예루살렘성전에 가서 절기를 지키려는 것을 막고 대신 금송아지를 세우고는 출애굽을 행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여로보암의 죄가 반복해서 나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고 우리 또한 반복해서 그러한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잘 알아야만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름을 주신 이유는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추구하라고 주신 것인데, 그 이름을 금송아지에 붙임으로 인해서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과 선민들의 연결은 단절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 사건을 이 땅에서의 나의 돈 문제나 건강 문제 등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으로 곡해시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신 이유는 하나님을 갖도록 하게 위함이었는데 여로보암은 이 관계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할 때도 조심해야 할 것은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맙시다.’라고 하는데 이 말이 ‘바알의 주상을 깨뜨렸다’는 의미와 같은 설교입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바알의 주상을 깨뜨렸으면 그 다음 말이 나와야 하는데 없습니다.
마음에는 공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추구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추구합시다.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하나님의 부자가 됩시다.’라는 말이 이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풍요와 다산의 바알의 주상을 깨뜨렸으면 부자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으나, 마음이 채워지는 것이 부자라면 하나님으로 부자가 되어야 하는데, 여로보암의 죄를 답습함으로 인해서 다시 세상으로 채우며 하나님과의 연결 고리를 끊은 것입니다.
여호사밧 왕이 이러한 여호람과 연합군을 형성하게 된 것인데 왜 이렇게 반복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앞서 여호사밧 왕이 아합 왕과 연합했을 때에 역대하에 가보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어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 왕은 그 책망을 듣고도 아합 왕의 아들인 아하시야와 함께 사우디아라비아의 남쪽 항구에서 오빌로 가는 무역 선단을 만들려고 했다가 이것도 하나님께서 풍랑으로 인해 파선하게 하십니다.
여호사밧 왕은 훌륭한 왕으로서 정직하게 여호와 신앙을 지키려고 애쓰던 사람이었지만 이러한 경험을 하고서도 기껏 여호와 하나님을 등진 사람들과 연합을 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미션 프로히비티드를 실패한 것입니다.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정직과 섬김의 자세는 있었지만 그 신앙과 그 사랑이 온전하게 표현되지를 못했는데 그러면 여호사밧 왕의 마음을 한 번 들여다봅니다. 이 사람은 왜 아합 왕과 결탁하고 또 그 아들인 아하시야와 결탁하고 그의 동생인 여호람과 결탁하고, 그 결탁으로 인해서 어려움이 닥치게 되면 다시 여호와를 찾는데 왜 그렇습니까?
물론 아합 왕이나 아하시야 왕이나 여호람 왕은 어려움이 닥쳐도 여호와를 찾지도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여호사밧 왕은 하늘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았지만, 문제는 먼저 하나님을 찾고 시작할지를 결정했어야 했는데 항상 시작한 후에야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우리에게서도 늘 반복되는 일입니다.
여호사밧 왕은 왕으로서의 지위와 임무가 있었습니다. 왕으로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이웃나라들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나라와는 동맹을 맺고 어떤 나라는 토벌을 합니다. 이러한 국제 역학관계를 잘 살펴서 왕으로서의 임무를 잘 수행하려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단지 왕으로서 선민의 나라를 잘 해보겠다고 하고 있는 것인데 그러나 이것이 바로 선민에게 반드시 이루어져야 될 미션 프로히비티드가 실패하는 상황입니다.
여호사밧 왕은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한 것과 같은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사밧 왕에게 주어진 진짜 미션은 왕에 자리에서 이웃나라와의 우호관계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는 왕의 자리에서 왕의 임무를 하지 않는 것이 미션입니다. 신앙인이 아니라면 여호사밧 왕처럼 하면 훌륭한 왕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폭군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신앙인으로서의 미션은 북 왕국 이스라엘과 힘을 모으고 에돔 군과 같이 아람과 모압을 치면 된다는 계획이 빤히 보이는데도 하지 않아야 되는 프로히비티드라는 것입니다.
오늘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본문에 나오는데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의 연합군에 에돔의 군사까지 더해서 모압을 향하여 진군을 행할 때에 일주일 만에 물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일주일 만에 도착한 계곡에 물이 넘칠 시기임을 당연히 계산하고 간 것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로 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여호사밧 왕은 미션 프로히비티드를 실패하고 난 뒤에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라 왕으로부터 임무를 출발해서 일이 곤란하게 되자 그나마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게 되고 엘리사가 등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 문제를 해결해주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적은 20절에 보면 “아침이 되어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쪽에서부터 흘러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고 하는데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소제’는 가루를 빻아서 드리는 제사인데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제사가 아닌 다른 모든 제사(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에 곁들여지는 제사였습니다. 즉 여기서 말하는 소제가 뜻하는 바대로 제사가 드려졌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제사가 ‘아침에 드려졌다’는 것은 ‘상번제가 드려졌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번제는 전쟁터인 계곡에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지는 것입니다.
여호사밧 왕이 지금 예루살렘의 성전에서는 아침 상번제가 드려지고 있음을 기억했을 때에 물이 철철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에서는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번제가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일지라도 아침에 일어나면 성전에서 상번제가 드려지면서 양이 죽고 있음을 떠올리고 자신이 죽어야 될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엄마라면 오늘도 자녀를 잘 키워보겠다는 임무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주어진 나의 임무에 달라붙어서 그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면 그것이 잘못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지성소가 되어야 하는데 지성소에는 법궤가 들어있었던 것처럼 말씀하시고 계획하시고 생각이 있으신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셔서, 나의 하루를 이루어야 될 모든 과제를 하나님께서 먼저 계획하고 계시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하는 것인데 그렇지 못했다면 상번제를 떠올리며 그러한 나에 대해서 죽는 것이 상번제의 의미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들에 의해서 상번제는 드려지고 있었지만 여호사밧 왕은 이 상번제의 의미를 잊고 있었습니다. 왕으로서의 임무를 잘 수행하려고 하는 생각에 상번제가 밀려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책망을 받으면서도 여로보암의 길을 걷던 여호람과 같은 사람과도 결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로인한 어려움을 맞이하게 되어서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찾을 때에 전쟁을 다시 수행할 수 있었는데 미션 프로히비티드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직무로부터 하루를 출발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깁니다. 선생님이라면 학생들을 잘 지도하는 것을 임무로 삼고, 그렇게 안하면 게으른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그 임무에서 죽어야 합니다. 선생님으로서의 임무는 미션 프로히비티드로서 의도적으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게으르거나 그 임무를 등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억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하지 않는 것인데 이게 미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살아계심을 믿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나의 오늘 할 일을 당신의 계획대로 추진해 나가실 것을 믿고, 오늘 하루의 임무를 터치다운하실 것을 믿고, 나는 하나님께서 터치다운하시려는 것을 가로막는 나의 생각과 나의 능력과 나의 의욕을 적으로 알고 쳐부수는 것인데 이게 바로 미션 프로히비티드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어진 나의 직위와 신분으로 인하여 주어져 있는 과제를 수행하고 싶어 하는 나를 적으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 십자가에서 상번제의 의미를 반복하며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어진 일을 잘 수행하고 싶어 하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미션 프로히비티드를 수행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터치다운해 나가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어렵게 꼬이는 이유는 여호사밧 왕이 상번제의 의미를 등한시하고 왕의 직무에 충실했던 것과 같습니다. 외국과의 결탁을 유리하다고 여겨서 참전했지만 그렇게 한 곳마다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거의 많은 사람들이 주어진 일을 잘 하고 싶어서 열심히 하는 것인데 그것이 우리의 삶을 꼬이게 합니다. 우리도 내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려고 할 때에 힘들어지는데 특별히 신앙인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미션 임파서블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미션 프로히비티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불가능을 넘어서는 어려움을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완결시키셨습니다.
내가 수행해야 될 미션과 과제 앞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는 죽었음을 고백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쥐고 터치다운해 나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상번제의 의미를 십자가로부터 반복해서 성취함으로 미션 프로히비티드를 날마다 성취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