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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면 만납니다. / 2017년 1월 29일 주일 예배
본문 / 누가복음 2:22-39
어떤 축구 스타가 자신의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랑은 돈도 그 어떤 것도 문제되지 않는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며 인간의 사랑이 정말 그럴까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아내는 미스 코리아입니다. 돈은 안 보았어도 외모는 본 것 아닙니까? 소경이 아니고서야 외적인 것을 판단하지 않고 배우자를 선택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도 사람은 외모를 본다 말씀하셨는데 인간이 그것을 부정하면 자기기만입니다. 가시적인 조건을 보고 결혼하는 것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은 약속이고 믿음입니다. 결혼식을 할 때 왜 서약을 합니까? 어떤 조건이 마음에 들어 사랑을 시작했어도 그 사랑에 대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관계는 깨지고 맙니다.
예를 들어 외모에 반했다고 하면 그 외모가 언제까지 사랑을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신뢰와 약속이 사랑의 기반이 될 때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함께 하리라던 소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은 믿음과 사랑의 열매입니다.
모든 성도는 소망의 열매를 결실하기 위해 믿음과 사랑의 나무를 가꾸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매로 그 나무를 판단한다 말씀하셨는데 소망의 열매를 추수하지 못하면 그 성도의 믿음과 사랑은 자아숭배를 위한 종교적인 행위와 자기기만으로 드러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과 사랑의 나무에서 과연 소망의 열매를 거둘 수 있겠습니까? 열매가 열리기 위해서는 먼저 꽃이 있어야 하는데 소망의 꽃을 피우고 있습니까? 믿음과 사랑의 나무는 꽃 없이 열매를 맺는 나무가 아닙니다. 성도가 마지막에 결실하게 될 소망의 열매는 반드시 그 꽃이 풍성하게 만개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믿음을 돌아보며 소망의 꽃을 피우고 있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에 정해진 규례에 따라 아기 예수가 태어난 후 40일이 되자 정결예식을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아들을 낳은 어머니는 정결예식을 위해 40일을 기다려야 하고 딸을 낳으면 80일 후에 번제와 속죄제를 드릴 수 있습니다. 율법에 정해진 법에 따라 아기 예수를 안고 성전에 올라가 예식을 행할 때 그 성전에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기를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놀라운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시므온과 안나입니다.
오늘 말씀은 아기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두 사람에 관한 교훈입니다. 참 놀라운 일 아닙니까? 아기를 보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본문 28절에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30절부터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인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찬송합니다.
시므온은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 노래합니다. 이 아기는 하나님이 약속하고 예비하신 메시야로 모든 성도들을 구원할 생명의 빛이며 영광이라 증언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이 많은 한 남자와 여자를 예비하시고 그들을 등장시켜 아기 예수를 메시야로 증언하게 하신 것일까요? 그들이 메시야에 대한 증언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확증하기 위한 것일까요? 시므온과 안나의 증언이 아니더라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증언하는 증거는 차고도 넘칩니다.
하나님은 시므온과 안나를 통해 성도들에게 누가 과연 소망을 이룰 수 있는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아기 예수는 자라 성인이 되어 모든 성도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여 구원을 완성하시고 승천하시었다가 다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성도들이 메시야의 초림을 준비하고 기다렸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모든 성도들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비하고 주님을 맞이하는 소망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메시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메시야 대망 사상이 고취되어 있었습니다. 메시야가 나타나 다윗에게 약속하신 다윗 시대 이스라엘의 영광이 재현되기를 기대하고 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도들은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세속적 메시야를 소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세속적인 메시야를 기다린 것은 아닙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처럼 시므온과 안나같이 죄와 절망에 빠진 소망 없는 인생들을 죄에서 구원할 영적인 메시야를 소망하는 의롭고 경건한 성도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b.c 430년 경 말라기 선지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이후 이스라엘은 세례 요한이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까지 약 400년 동안 침묵의 시대를 보냈습니다. 그 사백년 동안에는 어떤 선지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고 관리들은 백성을 수탈하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하였습니다.
그 침묵의 시대에 성도들이 현실적으로 정치적인 독립과 경제적인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세속적인 메시야를 원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음으로 사는 성도의 소망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과 인생을 변화시킬 메시야가 아니라 죄악 된 세상과 그 연약한 인생에서 구원할 영적인 메시야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향해 ‘만민과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 찬양한 것입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그 어둠의 시대에 소망의 등불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기다리십니까? 어느 가수의 노랫말 중에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된다’는 가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이 시대의 성도의 믿음이 그런 것입니다. 그리워하지 않는데 만날 수 있습니까? 설령 만난다 해도 그 만남은 심판이 될 것입니다.
누가 구원이라는 소망을 이루겠습니까? 구원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 만남을 그리워하는 성도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가 나옵니다. 과부가 그 원한을 풀기위해 불의한 재판관을 번거롭게 하자 재판관이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었다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하물며 선하신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한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않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의 원한이 무엇입니까? 성도는 그 원한을 풀기위해 기도하는 사람인데 그 믿음의 인생이 다 가도록 밤낮 부르짖어야 할 원한은 무엇일까요?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는 기도일까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성도가 그런 원한을 품을 수 있습니까? 과부는 세상에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과부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성도를 의미합니다. 과부의 원한은 하루 빨리 육체를 벗고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과부의 원한은 죄악 많은 세상을 떠나 소망 없는 육체를 벗고 하루빨리 신랑이 되시는 주님을 뵈옵는 것입니다.
마치 본문에 나오는 과부 안나를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36절부터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가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안나 이 과부 할머니의 원한은 소망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하며 생전에 메시야를 만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소망을 이루었습니다.
본문 38절에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안나는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이 아기는 죄로 고통 받는 하나님의 택한 성도들을 위해 그 죄 값을 치르고 구원할 메시야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이 아기 예수를 통해 그 은혜로 속량을 받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니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복음 18장의 비유에서 성도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예수님이 오셨을 때 볼 수 없다 말씀하신 그 믿음이 이 죄악 많은 세상을 떠나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그 나라를 기다리는 과부된 성도의 소망입니다. 바울의 경고처럼 말세에 성도들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방탕에 빠지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정욕과 탐심을 섬기는 향락에 빠진 소망 없는 과부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메시야를 소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25절에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말씀합니다. 그는 특별한 성령의 계시를 받았는데 26절에서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라” 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언젠가 너는 메시야를 보게 될 것이며 그 후에 죽게 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 천국에 가기를 원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나는 천국에 가기에 너무 젊고 할 일이 많습니다.’ 말합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시므온과 같은 계시를 받았다면 혹 메시야를 만나지는 않을까?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걱정은 필요 없습니다. 성령은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를 찾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기 전에 주님이 재림 할 것이라는 계시는 받지 못했지만 시므온처럼 주님을 기다려야합니다. 안나는 성령의 특별한 계시를 받지 않았지만 과부가 된 이후 소망을 주님께 두었습니다. 때와 시기를 알 수 없는 그 기다림과 소망이 성도의 믿음을 드러나게 합니다. 분명한 때와 시기가 계시되었다면 그것은 소망과 기다림의 인내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왜 믿음과 사랑은 소망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소망은 즐거움과 인내의 양면성이 있습니다. 성도의 소망은 때와 시기를 알 수 없는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그 소망은 믿음과 사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결국 소망하는 성도들이 참 믿음 있는 자들로 드러납니다. 믿음과 사랑은 때를 알지 못하는 그 소망을 인내하여 열매를 거두게 합니다.
얼마 전에 꽃놀이패라는 예능을 보았습니다. 출연자들이 패를 뽑아 극과 극의 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꽃길과 흙길로 출연자들의 운명이 나누어집니다. 예를 들어 꽃길이 호텔에서 사우나를 즐기며 스테이크를 먹을 때 흙길은 폐가에서 장작을 패고 노농을 해며 죽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환승권이라는 패를 뽑으면 자신이 원할 때 언제든지 흙길에서 꽃길로 옮길 수 있습니다. 한 출연자가 처음에는 흙길을 가게 되었는데 중간에 환승권을 뽑았습니다. 그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꽃길로 가서 즐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그는 환승권을 사용하여 꽃길로 갔는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이 환승권을 가슴에 딱 품고 있으니까 흙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하나도 힘들거나 지루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번처럼 흙길에서 일하는 게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며 저것이 소망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환승권이 있습니까? 골로새서 1장 13절 이르시길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말씀합니다. 이미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시민권은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를 벗고 하나님 나라로 옮겨질 그날을 위해 살아가는데 마음에 품은 그 소망 때문에 어떤 고난을 만나도 인내하고 승리하는 능력이 됩니다. 성도에게 이 세상은 흙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환승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흙길을 걷는 것도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믿음을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일성수, 십일조, 기도생활일까요? 이런 것보다 더 분명한 믿음의 증거는 고난을 인내하고 있는 가, 즉 소망으로 인내하며 즐거워하고 있는 가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 믿음으로 고난 받으시고 기도하며 인내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22절에서는 ‘너희를 미워하고 욕하고 모함하고 버릴 때에 너희에게 복이 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살이 크다’ 말씀하셨습니다. 인내의 소망은 믿음의 열매이자 꽃인데 그 꽃이 없는 사람은 사실은 성도가 아닙니다. 소망의 꽃이 많이 필수록 고난도 많아지겠지만 그 향기로 인해 또 다른 믿음의 형제들에게 큰 위로와 기쁨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시므온과 안나의 소망으로 인한 그 향기가 기쁨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전에 늘 웃으며 ‘감사합니다’를 고백하던 한 권사님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벌써 마음이 편안해 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권사님의 소망과 그 향기 때문입니다. 좋은 냄새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지 않습니까? 목회하면서 생각만 해도 기분 좋게 하는 성도는 많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왜 저럴까 이런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제가 주님 만날 날을 소망하는 하나님의 종과 목회자로 살며 마음에 품고 있는 믿음의 고백 중에 하나가 본문 29절의 시므온의 증언입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릅니다만 저는 이 고백을 너무 좋아하고 또 그것이 제 믿음의 삶에도 그대로 이루어지길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장인어른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이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믿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달려가는 것이 하나님의 종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소망을 품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소망을 이루어 가는 길은 영적인 즐거움이지만 육체로는 고난과 외로움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믿음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종은 하나님의 영원한 위로가 보입니다. 그 면류관을 소망하며 달려온 하나님의 종이 이 세상을 떠날 때 고백하는 말입니다. ‘주님, 드디어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십니다’ 제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제 자녀들이 시므온의 고백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우리 아빠를 이 죄악 많은 세상에서, 그 연약한 육체에서, 그 험한 믿음의 싸움에서, 약속하신 대로 마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품지 않으면 그 소망의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자격도, 능력도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전적인 은혜이지만 그 은혜를 받은 성도는 성령이 이끄시는 견인을 받게 됩니다. 운전자들이 원치 않는 것은 견인을 받는 일입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차는 견인을 받고 비로소 주행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견인 사이에는 성도의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어지는 자기부인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주인 되어 내 생각과 감정과 체면을 받드는 그 자아를 숭배하는 우상숭배가 끊어져야 합니다. 차는 견인이 고장 난 상태이지만 사람은 그때가 즉, 성령의 견인을 받을 때가 온전함입니다. 원래 인간은 제 스스로 제 멋대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 견인되어 끌려가는 사람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분명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남이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늙으면 힘이 없어 이리 저리 남에게 끌려 다닌다는 말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그때 너는 성령의 견인을 받아 순교의 자리까지 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 안에서 자아의 죽음과 성령의 견인으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소망을 이루어가는 거룩한 삶이 나옵니다.
그 거룩한 믿음의 삶이 소망을 결실하게 하는 꽃으로 피어납니다. 그 소망의 꽃이 시므온과 안나의 인생에서 활짝 피었습니다. 성도는 그 꽃과 그 향기를 보고 감격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그 꽃을 피우기 위한 고난과 인내의 고통과 그 영광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의 꽃과 향기를 흠향하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시므온이 피운 소망의 꽃에 대해 본문 25절에서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였다” 증언하고 안나에 대하여는 37절에서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열심히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독사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기도와 금식은 타락한 자기 의를 인정받기위한 자기기만과 종교 사기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본서 6장에서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가 말하는 것’ 이란 무엇입니까?
집을 지을 때 기초가 튼튼한 반석 위에 짓는 것이 당연합니다. 반석은 흙을 깊게 걷어내야 발견합니다. 게으른 사람들이 그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흙 위에 적당이 세우고 맙니다. 흙으로 빚어진 사람은 그 흙 된 자아와 세상을 부정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어도 자기부인의 십자가 없이 적당한 믿음, 즉 행위를 통해 소망의 집을 지으려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심판을 견딜 수 없어 곧 무너지고 파괴될 것이다’ 이르신 것입니다.
성도이지만 여전히 그 타락한 자아가 주인인 사람이 있습니다. 정욕과 탐심에 종노릇하는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자아를 섬기는 그 인생이 배설하는 기도, 금식, 헌금, 예배 등등 믿음과 소망으로 포장된 그 모든 것이 종교라는 탈을 쓰고 있는 자아숭배입니다. 그것은 소망의 꽃이 아니기 때문에 더럽고 추악한 사망과 심판의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시므온의 의와 경건과 안나의 금식과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 안에서의 자기부인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인한 소망의 나타남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증언합니다. 그들이 거룩한 믿음의 삶을 산 것도 성령의 견인이었고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다 마침내 정결예식을 위해 성전에 올라온 아기 예수를 보고 그리스도 알아 본 것도 성령의 가르침입니다. 이처럼 성령은 성도를 영원한 소망으로 이끌고 결국 그 소망을 성취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여러분 믿음에 소망의 꽃이 피었습니까?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신부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화장도 화장이지만 그것보다 신부에게는 아름다운 소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성도 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세상이 알 수 없는 영원하고 아름다운 소망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밝히 드러내었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귀신을 제어하고 소경의 눈을 뜨게하고 앉은뱅이와 중풍병자를 고치고 오병이어의 기적과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예수님에게 메시야의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반면에 시므온과 안나가 본 것은 이제 태어난 지 40일된 아기입니다. 참 희한한 일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아기를 보고 그리스로 영접하고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으니 말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성도들의 소망의 결핍이 결코 그들의 원하는 소원과 기적의 부족함 때문은 아닙니다. 기적의 성취로 소망을 충만하게 할 수 있다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표적을 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소망이 있는 성도들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사랑하고 자아성취를 위해 살아가는 종교인들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믿음의 길을 가는 성도는 다릅니다. 시므온과 안나가 메시야에게서 기적을 보았습니까? 예수님의 비유로 말한다면 그들은 다 자란 겨자 나무를 본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겨자씨를 보았을 뿐입니다. 소망을 품은 성도는 이 세상에서 기적을 보고 소망을 키우지 않습니다. 그들이 소망을 품는 데는 작은 겨자씨 하나면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믿지 못한 도마에게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복이 있다 말씀하셨고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선언합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의 믿음과 그 소망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이 복음을 기록했습니다.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은혜면 소망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지는 없어지지만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한다 말씀하신 주님은 누가복음 21장 34절에서 이르시길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경고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치 아기 예수가 시므온과 안나의 인생을 통해 그 믿음과 소망의 대해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누가 소망을 이룰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증거를 마음에 품고 주님이 약속하신 다시 오실 그 날을 기다리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경건한 소망의 꽃을 피우는 성도들이 그 열매를 주님께 기쁨으로 바칠 날이 올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집 앞에 모과나무가 있었습니다. 창문을 열면 가지가 손에 잡힐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이 나무가 제법 큰데 해마다 열매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봐도 모과인데 6년 동안 열매를 보지 못했습니다. 모과도 숫나무가 있나, 모과가 아닌 가 의심이 갔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꽃이 활짝 피고 여기저기에 열매가 열리더니 큼지막한 모과가 누렇게 익었습니다. 7년 만에 열매가 열렸습니다. 그 열매로 모과차를 만들어 마시고 있습니다.
그 나무를 보며 믿음의 나무로 세상에 심겨진 성도의 인생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다렸더니 마지막에는 아름다운 열매를 내어 놓은 것처럼 믿음으로 인내하며 소망으로 기다리면 영광중에 주님을 뵈올 날이 있다는 이 진리를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주님이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소망을 이루기를 성도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