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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먹구름 껴도 맑음>의 줄거리:
'먹구름 껴도 맑음'이란 기상 캐스터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아닌 듯합니다. 먹구름이 끼었다는 것은, 어떤 일이나 사건의 전개가 좋지 않게 될 수도 있을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삶에 먹구름 끼는 날이 참 많지요. 내 잘못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나로서는 불가항력적인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먹구름 자체를 막을 수 없다면 먹구름 껴도 맑게 사는 법을 터득할 수는 없을까요? 다행히 먹구름 껴도 맑음의 길이 있어 말씀드리려 합니다.
먹구름 껴도 맑음
(역대하 5:1~14)
11. 이 때에는 제사장들이 그 반열대로 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정결하게 하고 성소에 있다가 나오매
12. 노래하는 레위 사람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과 그의 아들들과 형제들이 다 세마포를 입고 제단 동쪽에 서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고 또 나팔 부는 제사장 백이십 명이 함께 서 있다가
13.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14. 제사장들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먹구름 껴도 맑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먹구름 껴도 맑음’
이 제목은 “구름 껴도 맑음”이라는 illustration 책이 있습니다. 부제는 ‘달콤한 신혼의 모든 순간’입니다. 책을 열면 페이지가 한 컷 만화형식으로 되어 있고, 거기에 풍선 말과 #(해시태그) 뒤에 써넣은 것들이 있습니다. 신혼생활이라고 해서 삶에 구름이 끼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신혼생활 중에는 구름이 끼더라도 맑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신혼생활의 활활 타오르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 열기와 빛으로 구름의 어두운 그림자를 물리치고 맑게 살 수 있다는 내용의 삽화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도록 잘 그려놓았습니다.
한편 성경에서도 구름과 연관되어서 많은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19장 9절과 16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라고 하셨고, 또한 20장 21절에는 “백성은 멀리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라고 하는데 여기서 ‘흑암’은 완전히 차단되어서 보이지 않는 먹구름을 말합니다.
모세가 시내 산을 뒤덮은 먹구름 안으로 들어가서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또한 신약에서도 구름 이야기는 많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7장 5절을 보면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활홀경에 빠지는데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26장 64절에서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구름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 오늘 본문에서도 구름이 등장합니다.
본문에 성전의 완성된 모습이 나옵니다. 성전에는 지성소와 성소가 있고, 지성소 안에는 날개를 수직으로 펴서 어떤 출입도 막는 듯 두 천사를 세웠고 그 안쪽에는 법궤를 모셔 들입니다. 법궤를 모시자 구름이 성전 안에 가득히 임하게 되었고, 제사장들은 그 구름이 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어쩔 줄 몰랐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앞서 모세가 시내 산으로 들어갔던 먹구름에는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개혁에 대한 주제로 말씀을 나눌 때에 교회일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에베소서 2장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또한 그렇게 됨으로서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의 영적세계관이 드러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에게는 육체가 속한 땅의 차원이 있고 마음이 속한 공중의 차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이신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이 있습니다. 본래 사람은 공중에 있는 마음이 땅에 있는 육체의 오감을 통해 접하는 것에 반응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가 접하는 것과 상관없이 마음은 위에 계신 하나님께 드림으로서 하나님의 반응이 내 육체를 통해 나타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보고 있다면 사람들은 육체로 보는 돈에 마음이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매이게 됩니다. 그러나 타락하기 전에는 우선 마음을 하나님께로 보내고, 하나님께서 보시고 갖고 계신 돈에 대한 뜻이 내 마음에 전달되게 됩니다. 그럴 때에 내 육체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며 돈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에서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라고 하는데, 즉 마음이 육체로 접하는 것들에 매여서 반응하며 살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로 인해 마음이 있는 공중과 영이신 하나님이 계신 하늘 사이가 먹구름으로 차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귀가 공중에 권세를 잡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먹구름 아래에서 살고 있습니다. 먹구름은 또한 우리의 삶의 조건이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로 빠져드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먹구름이 끼면 걱정이 많아집니다.
우리나라에 최순실 게이트로 먹구름이 끼어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소녀상을 발단으로 일본과의 외교관계에 문제들이 생겨났습니다. 중국은 중국대로 사드 배치로 인해 보복을 한다며 한한령(限韓令)을 내려서 한국의 드라마나 연예인들과 제품과 문화들을 차단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 확인되는 상황이 나쁘다고 해서 먹구름이 끼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이나 중국과의 관계가 좋고, 훌륭한 대통령이 나라를 다스린다고 해서 본질적으로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에 의해서 마음이 하늘과 차단되어 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먹구름 아래에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재벌이 되어도 먹구름 아래의 재벌이고, 대통령이 되어도 먹구름 아래의 대통령입니다. 이러한 점을 알고 오늘 본문의 구름에 대해서 생각해본다면 좋을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에게 구름은 사람이 사는 땅의 세상과 하늘 사이에 있는 것으로서, 상징적으로 하늘과 땅을 가르는 경계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구름 위에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구름이 경계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구름 속에 임재하시는 일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부정적인 의미의 ‘공중에 권세 잡은 자’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 맥락 속에서도 구름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이 존재하는 경계선입니다. 타락을 염두에 두더라도 구름은 하늘과 땅을 가르는 경계선으로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구름이 빽빽하게 임하였다’는 것은 곧 구름 위에 있던 하늘이 구름과 함께 이 땅에 내려온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비행기가 승객을 태우기 위해 땅에 착륙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언약궤를 지성소 안으로 모셔 들일 때에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찬양하는 가운데, 온 성전 안에 구름이 가득히 임했다는 것은 하늘이 이 땅으로 내려왔다는 것이고, 거꾸로 말하면 성전에 집중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구름 위로 올라가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구름이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오늘 ‘먹구름 껴도 맑음’이라는 제목에서처럼 먹구름이 끼어도 맑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기상캐스터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배성태 작가의 ‘구름이 껴도 맑음’이라는 책에서는 신혼부부의 사랑으로 환경을 이겨낼 수 있음을 전하고 있지만, 성서적으로 먹구름이 끼어도 맑게 살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먹구름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먹구름 아래에서 인간들끼리 사랑하기 때문에 극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사랑은 한시적이고 퇴색하고 변질되기 마련입니다.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부모의 사랑조차도 오류를 품고 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진실하되 그 사랑이 잘못 된 결말로 나타나서 자식을 망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먹구름 위로 올라갈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의 마음을 지성소에 들여놓은 언약궤의 모습으로 갖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은 먹구름을 뚫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마음이 올라가면 이 땅에서는 육체가 만나는 모든 것들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고, 그 전달되는 하나님의 뜻대로 몸이 움직이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는 곧 성소의 등대가 밝음의 의미를 갖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맑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떡 상이 의미하는 대로 하나님으로 배부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언약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 돌판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궤를 두는 지성소를 두 천사가 날개를 펴서 보호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법궤의 모양대로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말씀의 돌판은 곧 인격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증거(sign)입니다. ‘말씀하신다.’는 것은 곧 생각과 판단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법궤 모양이 되는 것은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모시는 것입니다. 법궤의 돌판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에 상응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그 이름을 담으면 먹구름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됩니다만, 그러나 이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십자가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지성소에 자꾸만 다른 이름들이 들어옵니다. 자녀나 건강 혹은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내게 아직 주어지지 않은 것들을 마음에 지성소에 담고 추구하게 됩니다. 그래야만 내가 기쁘고 만족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인데, 육체로 만나는 것들을 마음의 지성소에 담으면 가라앉고 땅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구름 위에 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의 지성소에 담으면, 우리의 마음은 그 이름의 존재를 추구하기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또한 구름 위의 하늘로 올라간 마음이 가라앉지 않으려면 육체로 접하는 이 세상 것들을 마음에 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계속해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인데 성전에서 매일 상번제가 드려졌던 것과 같습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 같이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드렸던 이유는 매일 같이 상번제에서 죽어야 함을 뜻합니다. 이 세상 것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에 성전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고, 내가 죽은 자임을 계속할 때에 우리의 마음은 구름 위에 머무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육체로 접하는 것들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재 하나님을 가지겠다는 마음을 가짐으로서, 우리의 마음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은 구름 위의 하늘에 마무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렇게 마음이 하늘에 머무르게 될 때에 나타나는 일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째,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고 나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 나의 태양이여!”라고 한다면 지금 내 마음에는 당신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깜깜한 무대 위에 오직 조명이 비치는 배우만 보이는 것이 바로 영광입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했다’는 것은 제사장들과 모인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서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4장 26절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하십니다.
표면상으로는 살벌해 보이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내 가족과 내 목숨까지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부모도 있고 처자도 있고 형제자매도 있고 내 목숨까지 내가 의식할 수 있는 공간에 다 있을지라도, 마음에 예수님만 보이고 예수님만 따라 가는 것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무대에서 조명이 비치는 곳만 보이듯이, 내 마음에서 예수님만 보이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그러한 경험을 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산 아래에 동료들이 있었고 예수님을 따르며 하고 싶었던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변화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자 모든 것을 다 잊고 마음은 예수님으로 가득 차게 되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에서도 아브라함이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날 때에도 ‘영광의 하나님이 보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삼자가 보기에는 미친 짓이었습니다. 치안부재의 시대에 그 아름다운 아내를 데리고 어디로 떠나겠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하나님 외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정신없이 나갔던 것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이 세상 것을 붙잡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으면, 그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가 계신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이 구름 위로 올라가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해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고, 내 마음에서 하나님만이 조명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 때에 ‘항상 기뻐하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이 기쁨은 구름 위에서 얻는 것이기 때문에 구름 아래의 이 땅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처럼 모든 것이 없어도 ‘오직 여호와로 기뻐하리라’는 고백도 가능해집니다.
우리가 마음의 지성소에 돈의 이름을 담으면 자나 깨나 돈을 추구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똑같이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으면 하나님을 추구하게 되는데, 그것을 붙잡아야만 내가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자나 깨나 하나님으로 배부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삶을 삽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가지셨듯이 내 마음이 하나님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 느끼시는 기쁨을 나도 예수님 안에서 느끼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자나 깨나 그 생각만으로 살아간다면 이 땅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둘째, 마음이 구름 위로 올라가면 구름 위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사업문제 건강문제 나라문제 등의 많은 문제들이 있는데 우리 마음이 그 문제 속에 빠져 있으면서 반응할 때는, 그 문제가 어느 정도의 크기와 어떤 비중의 문제이고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마치 로키 산을 갔더니 눈앞에 펼쳐진 로키 산은 장엄하고 웅장함에 기가 죽습니다만 비행기를 타고 로키 산을 바라보면 너무너무 귀엽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시고, 누가복음 17장 6절에서도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라고 하십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뭡니까? 믿음은 마음을 꺼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꺼내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을 갖고 싶은 것이 믿음인데, 그런 생활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지금 너희 앞에 당면한 큰 산 같은 문제는 들어서 던지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굉장히 깊기 때문에 그 뿌리를 뽑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뿌리째 뽑아서 바다에 던지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구름 위의 하늘에 가있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구름 위의 하늘에서 이 땅의 내 삶의 문제를 내려다보면 문제가 별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 문제가 있다면 이 돈 문제의 비중과 돈 문제의 가능성들을 어디서 보면 가장 적당한 거리에서 보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보면 맞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만사가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돈 문제로 먹구름이 끼었어도 우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딱 붙어서 하나님 품에 안겨서 보면 문제도 아닙니다. 로키 산을 눈앞에서 보다가 비행기 타고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귀여운 문제입니다.
마음이 구름 위로 올라가서 보면 내게 주어진 모든 문제가 굉장히 귀엽습니다. 얼마든지 손끝으로 치면 튕겨져 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먹구름이 껴도 맑음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지성소에 육체로 만나는 세상 것을 담지 않는 것입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내 기쁨은 하나님뿐임을 아는 것입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내 운명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밖에 없고, 이 세상 것이 담겨지려고 할 때마다 십자가를 붙잡고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께 간구합니다. ‘제 마음을 데려가 주세요. 주님이 계신 하늘에 제 마음도 데리고 가주세요.’라고 계속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으로 배부르게 해주세요. 하나님으로 기쁘고 만족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찹니다. 오늘 찼다고 내일 또 저절로 차는 게 아니므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이 알려 집니다. 하나님 때문에 내 마음이 기쁘고 하나님의 뜻이 알려지므로 기쁘고 그 뜻이 알려지는 대로 행동합니다. 내가 행동하는 이외에 나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사건들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사랑으로 내가 지금 끌어안고 있는 문제가 땅에서 해결되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면 감사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는 이 말씀이 먹구름이 끼어있는 이 복잡한 세상에서 가능한 이유는, 십자가 생활화로 우리 마음이 구름 위로 올라가면 맑음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내 마음의 지성소에 세상을 담으려는 죄악이 십자가 생활화로 끊임없이 죽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이름만 담게 하시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로만 마음이 가있어서, 먹구름 위에서 먹구름 아래 육체의 삶이 진행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