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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08일 주일 메시지 (예비 묵상)
시리즈 주제: 누가가 들려주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 3
제목: 하나님의 대리인 예수 그리스도
본문: 누가복음 4:42~44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4.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설교를 위한 묵상
1. 예수는 신이 된 인간인가?
지난 주일 설교 후에 청년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한 청년이 묻기를,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통해서 신이 되신 건가요?’ 그 청년의 질문은 설교 중에 들은 바, 사무엘과 다윗의 관계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 누가의 복음서에 드러난다는 말에 대한 반응이었다. 나는 그에 대한 대답을 두 가지로 했다. 하나는 설교에서 내가 왜 그 이야기를 했는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실 신학적으로 예수님이 인간인가 신인가 하는 주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고.
신학적으로 예수님은 참 인간이며 동시에 참 하나님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성경에는 예수님이 참 인간이라고 하는 설명과 하나님이라고 하는 설명 둘 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반신반인(半神半人, Demigod)의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신학적으로는 참 신과 참 사람이신 분, 즉 100% 신이며, 100% 인간이신 분이라고 말할지라도 그런 존재를 결국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럴 때는 신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더 나은 설명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설명은 전제와 논의의 지평을 바꿀 때 가능하다.
성탄절에 태어난 아기 예수는 인간인가 신인가? 인간의 아들이 태어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난 것인가? 성경은 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났다고 하는가? 그것이 무슨 뜻인가?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리고 예수님을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은 어떤 점에서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이런 질문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2. 역사적 예수 연구
나는 이 주제를 생각할 때 ‘역사적 예수’에 대한 글을 읽었다.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가 쓴 책, ‘기독교의 심장’(The Heart of Christianity: Rediscovering a Life of Faith)에서 ‘제5장 예수: 하나님의 마음’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 글에서 마커스 보그는 예수님에 대한 과거의 이미지와 새로운 접근방식을 비교하여 설명한다.
예수님에 대한 과거의 이미지는 예수님의 신성과 상징적인 묘사를 강조한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표현되는 신조에 담겨 있다. 그 이미지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교회의 체험과 전통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마커스 보그는 예수님을 그와 같이 이해하면 ‘예수님의 인간성’이 희생된다고 우려한다. 즉, 예수님의 지혜와 연민, 용기, 치유 능력은 당연한 일이 된다. 별것이 아니다! 하나님이니까 그렇게 하실 수 있다! 우리가 따를 모범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우리와 다른 분이니까!
보그가 주장하는 바는, 예수님에 대한 기독론적인 표현들은 예수님이 스스로를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부활 이후에 교회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신앙고백이다. 교회는 예수님 안에서 어둠을 밝히는 빛을 보았으며,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찾았다. 그리고 이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를 발견했으며, 이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그 약속된 메시아를 보았다. 그는 하나님과 한 분이며, 우리는 그를 ‘나의 주님이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이 모든 것은 교회의 신앙고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표현들은 은유적이며 결단의 고백이며, 예수님에 대한 그런 고백들은 그 자체로 하나님을 계시하여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그런 고백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체험을 반복한다.
이후에 보그는 ‘부활절 이전의 예수’에 대해서 설명한다. 즉,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한다. 보그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해가 우리로 하여금 ‘성육신을 살아내도록’ 도와준다고 그 가치를 평가한다. 보그는 부활절 이전의 예수와 부활절 이후의 예수 둘 다에 대하여 바른 이해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그에 따르면, 부활절 이전의 예수는 유대교 신비주의자(a Jewish mystic)요, 치유자(a healer)요, 지혜의 스승(a wisdom teacher)이며, 사회적 예언자(a social prophet)며, 운동의 창시자(a movement initiator)였다.
마커스 보그의 글을 읽으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사셨으며 죽음 이후에 신적인 존재로
그 공동체 안에서 높여지셨다.
즉, 인간으로 사셨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분이다.
바울이 로마서 초두에서 말하는 바가 이와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로마서 1:3~4
마커스 보그의 말처럼 복음서는 예수님의 승천 후 40년 이상이 지나서 기록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복음서가 표현하는 예수님 이야기에는 이미 공동체의 신앙고백이 들어 있다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신앙고백으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록했다고 말할 때, 어떤 것이 과연 역사적 사실이고 어떤 것이 신앙고백인지를 명확하게 구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사실과 신앙고백을 동시에 이해하려면 ‘새로운 틀’(new paradigm)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역사적 예수 연구의 결과도 결국 참 신이자 참 인간이라는 신조의 반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가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를 주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마커스 보그는 이것을 성육신의 삶을 살아낸다고 표현했다). 야고보가 기도에 대하여 가르칠 때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약 5:17). 그것은 우리들도 엘리야처럼 기도하라는 요청이다. 나는 역사적 예수 연구가 ‘예수님은 우리와 성정이 같은 분이시면서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바쳐서 복종했다’는 야고보 사도의 현대적 권면이라고 생각한다.
3. 새로운 지평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기
신약성서 기자들은 오늘 우리의 논의에 대해 문제라고 여기지 않는 듯 하다. 히브리서 기자의 다음 글을 생각해 보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2
위 저자는 예수님이 우리의 모델이라고 소개한다. 물론 빌립보서 2장에서 바울 사도도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바라보고 따라야 할 모델이며 모범이라고 성경기자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한다. 역사적 예수 논쟁과 예수님의 본성에 대한 신학적 토론을 하고 있는 교회를 보면서 초기교회 신자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그러므로 내가 도달한 결론은, 초기교회의 신자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 안에도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발전하고 있음은 명확하다.
나는 지금 ‘누가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로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다. 누가가 들려주는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있듯이 누가는 예수님을 소개할 때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이라고 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누가복음 4:43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이다(마 15:24, 요 8:16).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을 부르시고 그를 세상에 보내신다. 예수님은 자신을 그렇게 이해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성경은 소개한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부름과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사야는 그처럼 ‘보내기 위해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이사야 6:8).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위임 받은 대리인들(agents)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다스리신다. 그리고 세상을 함께 통치하기 위해서 자신의 대리인을 부르신다. 그들은 아담이며 노아,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선지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특별한 명령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받은 명령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인식했다. 예수님도 그렇게 자신을 여겼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지평(horizons) 또는 이해의 틀(paradigms)을 생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예수님을 나의 신앙의 대상 또는 나를 구원하실 분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려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도마처럼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할 것이다. 예수님을 이해하는 다른 방식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경륜(the economy of God) 아래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회복과 다스림, 그리고 피조세계의 완성이라는 위대한 계획 아래서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리인이 된다.
신약성서의 기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그리고 우주적인 통치에 대해서 익숙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시고 노아와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예언자들을 부르신 것과 그들에게 사명을 주신 것,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실 것에 대해서 익숙했다. 그들은 이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와 신화적 이미지들을 구약성경을 통해서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게 들으며 자라났다. 그들은 개인주의적인 세계관이 아니라 공동체적, 그리고 신적인 통치와 주권을 현실로 인식하는 세계관 속에서 성장했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의 기자들은 말하기를,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이며, 우리를 불러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자고 초청하시는 분이며, 동시에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이라고 부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 같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인간을 신적인 존재라고 한 성경을 인용하시면서 우리들의 존재의 근원을 상기시켜 주셨다(요 10:34, 35). 어떤 이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려 함이다 고 했다. 그 분이 그리스도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를 구원하실 분으로 예수님을 생각할 때, 그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위의 두 패러다임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개인의 관점에서는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경륜의 관점에서 보면, 구원이란 하나님이 본래 지으신 그 원형을 회복하여 피조세계의 대리인으로 만물을 충만하게 하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미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에게는 위의 두 관점이 동시에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삶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시며, 동시에 나를 불러 우리라는 공동체를 형성하게 하시고 그를 통해서 만물을 회복하시는 분이다. 전자의 생각에 무게중심이 너무 쏠리게 되면 기독교 신앙은 배타적인 경향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그것이 문제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새로운 생각과 시각은 ‘하나님의 경륜 아래서 신앙하기’다. 그렇게 되면 우리 기독교 신앙은 더 개방적이고 보편적이 될 수 있으며, 시대를 선도할 등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구주 나셨도다!
예수는 인간인가 신인가? 이 질문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되물어 온다. ‘당신은 인간인가 신인가?’ 즉, 어떤 존재가 신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면 그는 신인가 인간인가? 신을 닮은 인간인가? 아니면 창조주보다 조금 못하지만 신인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느냐는 결국 우리 자신을 어떤 존재로 이해하느냐의 문제이며, 그것은 불가피하게 이 세계를 이해하는 우리의 관점 형성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그런 세계관은 오늘 우리들의 삶이 왜 그렇게 표현되는지를 설명해준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생각이 무엇인지를 성경말씀을 통해 점검하고 사로잡아 예수 그리스도 앞에 복종하게 할 필요가 있다. 지나치게 개인주의적 기독론은 우리의 신앙을 배타적이 되게 하여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된다. 유대인들이 범한 실수가 바로 이것이다. 유대적 선민사상!
우리는 지금 대강절을 보내면서 성탄절을 기다리고 있다. 성탄절은 구주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의 탄생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날은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 태어나신 날이며, 그 구원은 사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새로운 백성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은 한 개인의 탄생일뿐 아니라 그 개인을 통해서 일어날 한 백성의 탄생이며, 그 공동체를 통해서 만물이 회복될 재창조의 날이다. 그런 점에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세상을 비치는 참 빛이라고 한 점은 창조의 아침에 온 세상을 비추었던 빛을 생각나게 한다.
또한 예수님의 탄생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으로 탄생한 이스라엘 민족의 탄생에 견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 백성을 자기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기 때문이다. 그 백성이 구원 받은 이야기는 출애굽 이야기의 핵심 모티브다. 그리고 그 백성의 구원은 새로운 나라를 세워 그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위한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하여 마침내 열방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려는 목적을 지향한다. 이는 신약에서 교회의 탄생에 견줄 수 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나던 날에 동방에서 박사들이 찾아왔다면, 교회의 탄생일인 오순절 날에는 천하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모여 자기들이 난 곳 언어로 메시지를 이해하는 소통의 역사가 일어났다!
성탄절은 이렇듯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빛 가운데서 볼 때 더욱 풍성한 의미를 나타낸다. 구유에 누인 아기는 우리에게 겸손과 자기비하의 덕을 가르쳐준다. 하지만 그 아이를 비춘 빛이 하늘에서 비친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면 그 탄생에서 우리는 더 원대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이해하셨다. 그리고 신약성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로 자라났고 억압받는 식민지 속주민으로 사셨다고 그려준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하나님이 보내신 목적을 이해하고 그것을 위해 사시고 죽으셨다고 자세하게 그 언행을 소개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고 들으면서 단지 나를 구원할 아기의 탄생으로만 이해하지 말고, 그것을 넘어 그 아들을 보내시고 오늘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어떤 위대한 계획 속에서 세상을 통치하시고 이끌어가시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안에서 비로소 예수님의 탄생도 우리의 삶도 빛 가운데서 바른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를 깨달을 때 우리는 자신과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이해하고 살아가기 시작할 것이다.
<끝>.
누가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 3. 하나님의 대리인 예수 그리스도 (1).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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