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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3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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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퇴계선생유적지를 가다가 이육사 문학관을 들렀다.
이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이 말해주 듯 안동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나 오로지 잃어버린 조국을 위해
일생을 바친 민족시인이다. 육사는 41세 생애 중 감옥을 17회나 들어갔었고, 수인번호 264를 따서 이육사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이육사기념관에서 내려 본 원천리 들판. 들판 끝에는 낙동강이 있고, 뒤로는 왕모산이 보인다.
이육사의 대표작 <광야>의 시상이 떠올랐던 곳이라 한다.
광야(曠野)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는 절망적인 현실에도 굴하지 않는 굳은 의지와 신념. 조국 광복에의 신념과 의지. 새 역사 창조의 의지를 노래한 시다.
이육사 기념관
이육사 [李陸史, 1904.4.4~1944.1.16]
일제 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
청포도(靑葡萄)》, 《교목(喬木)》 등과 같은 작품들을 통해 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노래했다. 호 육사(陸史). 본명 원록(源祿) 또는 원삼(源三), 개명은 활(活). 경북 안동(安東) 출생.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학교에서 수학,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 1926년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魯迅]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3년 귀국,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1937년 윤곤강(尹崑崗) ·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노래했다. 안동시에 육사시비(陸史詩碑)가 세워졌고, 1946년 유고시집 《육사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다.
육사의 생애와 문학적 특징
1930 년대 한국시에서 육사는 특이한 존재이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시작(時作)에 몰두했음에 반해, 육사는 전 생애를 항일투쟁에 바쳤고, 러한 정치적 행동의 순간순간 시를 썼다. 그의 시론은 '시란 인격의 표현이며, 그런 점에서 삶의 최종적인 언어이고, 그와 동시에 시는 그러한 최종적인 목표에 이르기 위한 행동의 과정이기도 하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시론은 선비기질로서의 강렬함과 기품을 지니고 있다는 점과, 기승전결(起承轉結)의 한시골격을 근간으로 하여 시 형식의 고전성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동양문화권의 시 전통에 직결되어 있다.
육사 시의 문학사적 의의
육사의 시가 갖는 현대시사적 의미는 몇 가지로 지적할 수 있다. 첫째, 1930년대 전반을 풍미하던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둘째, 고전적인 선비의식과 한시(漢時)의 영향으로 전통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셋째, 한국시에 남성적이고 대륙적인 입김을 불어넣었다. 넷째, 죽음을 초월한 저항정신과 시를 통한 진정한 참여를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육사의 시는 모더니즘의 비인간화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하여 전통적인 시 형태를 현대적으로 변용하였으며, 현대시에 남성적이고 대륙적인 색채와 체질을 불어넣었고, 아울러 시를 통한 진정한 참여와 저항의 방법을 보여준 선구적 시인이라는 점에 시사(詩史)적 의의가 있다. (출처 : 정한모, '한국 현대시의 정수')
비극적 황홀
육사가 우리 현대시사에서 가장 뚜렷하게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시인이라면 그의 삶은 바로 '절정'에 궁극적인 시적표현을 얻은 셈이다. '절정'은 하나의 한계상황을 상징하지만 거기서도 그는 한 발자국의 후퇴나 양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매운 계절'인 겨울, 그 상황 자체에서 황홀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황홀은 단순한 도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강철과 같은 차가운 비정(非情)과 날카로운 결의를 내포한 황홀이다. (출처 : 김종길, '진실과 언어')
황혼(黃昏)
내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게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 십이성좌 의 반짝이는 별들 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속 그윽한 수녀들 에게도,
시멘트 장판위 수인들 에게도
의지 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은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대 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쏘는 토인들 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 도 또 저 푸른 커튼을 걷게 하겠지
암암히 사라지는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줄 모르나 보다.
기념관 옆에는 이육사묘소로 가는 오솔길이 있다.
왕복 1시간 30분 정도 (5.6km) 걸린다고 하여 다음으로 미루었다.
기념관 입구정면에 서 있는 육사의 흉상
육사시집
육사 친필 원고
육사는 독립유공자로 역대 대통령으로 부터 표창을 받았다.
부상으로 받은 은수저 한벌이 이채롭다.
기념관 밖으로 나오니,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청포도 샘, 육우당, <절정> 시비가 보인다.
청포도 샘
재현한 육우당과 기념관 후면
<절정>시비와 육사의 좌상. <절정>은 왕모산 기슭의 칼선대가 시상지로 알려져 있다.
절정 (絶頂)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참고, 매일신문 옛길기행 기사인용)
이육사의 울분, ‘절정’ 노래한 왕모산 갈선대
왕모당을 지난 깎아지른듯 가파른 산을 옆으로 돌아 오르면 ‘갈선대’(葛仙臺)가 나온다. 김휘동 전 안동시장은 사랑방 38호에서 이곳을 비유해 “단애의 절벽에 드렁칡이 선녀들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듯한 모습처럼 치렁치렁 드리워져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는 듯 하다”고 했다.
그는 또 “퇴계 선생은 왕모산의 경치에 감탄해 ‘응당 이곳이 복지인 줄 알고서 짐짓 신령스러운 벽을 두어 높은 산을 눌럿도다’라는 시를 남길 정도로 절경이다”고 했다.
이곳 갈선대(칼선대라고도 불린다)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눈 앞에 펼쳐진 절경에 감탄하고, 육산 선생의 나라 잃은 울분이 가슴으로 전해오는 듯하다.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칼을 세워둔 모습의 갈선대는 민족시인 이육사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절정’의 시상지로 유명한 곳이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육사는 자신이 태어난 원촌마을이 아득히 바라다 보이는 이곳에 올라 나라 잃은 슬픔과 울분을 시로 표현했다. 갈선대 바로 밑 호젓한 마을은 단천(丹川)이다. 도산구곡 중 여섯 번째인 천사곡과 일곱 번째인 단사곡 물길이 태극모양을 하며 마을을 휘돌아 삼남으로 굽이굽이 흘러가는 풍광이 가히 은자가 자연을 벗 삼아 한평생 도학을 이룰 만한 땅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육사의 고향 원촌마을에는 <육우당유지지비>와 <청포도시비>가 서있다.
청포도 시비
청 포 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원천리일대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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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민족시인 친일시인과는 철저히 구별하여 민족성을 고취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