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문제해결 기도와 문제탈출 기도>의 줄거리:
중차대한, 위급한, 절실한 등등의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문제해결 기도에 응답이 주어졌다는 확신은 오직 착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단언컨대 전혀 기도 없는 노력만가지고도 그 정도 확률로는 문제들이 해결 되었을 것입니다. 삶의 문제들을 만났을 때 드려야할 기도는 문제탈출 기도입니다. 해결이 아니라 탈출하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문제를 허락하십니다. 하나님, 세상, 나의 삼각관계 속 기도의 정석을 알아봅니다.
문제해결 기도와 문제탈출 기도
(시편 3:1~8)
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문제해결 기도와 문제탈출 기도>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문제해결 기도와 문제탈출 기도’
복음성가 중에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또한 경부고속도로를 서울 방향으로 올라오다보면 죽전휴게소에 못 미쳐서 모 출판사가 있는데 옥상 간판에 캠페인을 하듯이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라는 글을 써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을 하는 것일까요? 기도할 수 있다면 걱정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기도할 수 있어서 걱정입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신앙은 퇴보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이 압박감 때문에 삶은 고단하고 무겁기만 합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율법적 중압감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를 해야만 한다는 마음의 율법적 규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는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기도할 수 있기 때문에 걱정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문제가 주어질 때마다 문제해결의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해결의 기도를 하는 한 신앙은 퇴보할 수밖에 없고 삶은 무겁고 고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문제탈출의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
당면한 문제를 기도하여 해결 받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말에 아마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는 확률은 단언컨대 전혀 기도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확률보다 낫지 않습니다. 문제해결 기도는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먼저 내가 문제를 파악해서 이런 점에서 잘못되고 약화되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고, 올바르게 하고 강화시키기 위해서 해결책을 만들어내려고 하는데 그 자체가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로서의 원죄의 활성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원죄가 반복되고 있을 뿐이지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해결책으로 생각하는 방법은 실제로는 해결이 아닙니다.
앞서 1편에서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이 문제에 닿아서 활성화되면 그 자체로서 겨와 같은 쓰레기가 되어버립니다. 내가 해결책을 정해놓고 그대로 주어지길 바라는 문제해결의 기도에서는 문제에 대해 본래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왜 문제를 허락하셨고 문제를 보고만 계시는 것일까요?
문제탈출 기도를 하라고 문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문제탈출 기도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석’이라는 것은 곧 동일한 방식으로의 해결입니다. 문제가 주어질 때마다 이렇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이 한 편씩 진행되면서 우리 신앙생활에 가장 기초적인 문제들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어떤 내용이기에 문제탈출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시의 역사적인 배경은 다윗 왕의 노년에 셋째 아들 압살롬의 반역에 대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궁으로 진격을 하여 다윗과 충신들은 피난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피난 중에 지은 시가 본문입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으니 무척이나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다윗은 문제해결의 기도가 아닌 문제탈출의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주어질 때에 문제해결의 기도가 아니라 문제탈출의 기도를 드려야만 합니다. 이것도 역시 삼각관계를 전제로 해석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 삼각관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세상이 있고 내가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로 가든지 세상으로 가든지 마음으로 결정하며 삶을 진행시킵니다.
1~2절에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라고 합니다. 다윗은 아들의 반역으로 왕궁을 떠나며 지은 시답게, 이 국가적인 재난에 마음이 사로잡혀버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압살롬의 반역이라는 세상 문제의 삼각관계에서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이 얼마나 심한지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형편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삼각관계에서 예기치 못했던 급박한 관계가 발생할 때에 어떤 인간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의 마음이 자발적으로 문제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문제에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적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다릅니다. 3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중심을 나로 여기기 쉽습니다. 여호와는 나를 지켜주시는 방패요, 나를 우뚝 솟아나게 하시는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 즉 나를 왕으로 삼으시는 수단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방패시라면 어떻게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서 도망을 가겠으며, 여호와께서 나의 영광이신데 어떻게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처럼 사람들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나의 머리를 드셔서 왕으로 삼으신다는 데 어떻게 왕궁에서 쫓겨나서 피난을 간단 말입니까? 3절의 말씀은 이처럼 여호와를 수단으로 삼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방패시요’라는 말은 나를 보존하고 지키는 일은 하나님의 일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영광이시오’라는 말은 사람들 앞에서 명예를 얻는 것은 내 문제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내가 우뚝 솟겠다는 결정을 하고나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관계가 아니라 내가 우뚝 솟든지 땅바닥에서 구르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내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칼자루를 쥐고 있는 주체는 내가 아닌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다윗의 마음은 문제에 끌려갔으나 이 문제를 바라보며 문제의 주체가 하나님임을 상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사업에 문제가 생겨서 돈 문제에 끌려간 것과 같습니다. 이럴 때에 어떻게 고백을 해야 할까요? 돈을 많이 벌게 해주시는 분으로 고백해서는 안 됩니다. 돈이 없어서 망하든지 돈을 많이 벌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문제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로부터 탈출하는 기도의 시작입니다. 문제에 끌려가는 것은 누구나 똑같지만 기도에서 차이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왜 굳이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신다고 하실까요? 성산은 곧 다윗 성인 예루살렘 성을 말합니다. 아직 성전이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에는 성막이 있고 법궤와 번제단이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화살을 쏘듯이 목소리를 보내는 것입니다.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는 말은 방향 없는 다급함의 표현이 아닙니다. 마치 길 가다가 갑자기 개가 튀어나오면 “엄마야!”라고 소리를 치듯이 외치는 것과는 다릅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음은 이런 다급함의 표현이 아닙니다. 나의 목소리로 부르짖는 것은 화살로 과녁을 노리듯이 목소리로 하나님이 계신 성산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형편과 피난처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일까요? 이것은 내 마음은 문제에 끌려가지만 결코 하나님을 이 문제 있는 곳으로 부르는 식의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반대로 내 마음이 문제로부터 탈출해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예화가 있습니다. 압살롬이 쳐들어와서 다윗이 피난을 가게 되자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이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레위인들을 모아서 법궤를 어깨에 메고 다윗의 피난 행렬에 참여합니다. 다윗의 피난길에 항상 하나님을 상징하는 법궤를 따르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독에게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을 명합니다. 법궤를 본래 성막으로 돌려놓고 정작 자신의 마음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향하여 마음을 보냅니다. 피난처로부터 하나님께로 마음을 탈출시켰던 것입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예도 있습니다. 사무엘이 사사로 활동하기 직전인 엘리 제사장 때의 일입니다. 이때에 이스라엘이 블렛셋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을 때에 블레셋에게 큰 패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사무엘상 4장 3절을 보면 다윗과 반대의 행동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라고 해서 법궤를 가져왔으나 법궤를 빼앗기고 오히려 삼만 명이나 죽고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도 죽임을 당했으며 이스라엘은 망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피난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법궤를 돌려보내고 하나님이 계신 법궤가 있는 곳으로 마음을 탈출시킵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들과 장로들은 블레셋과의 전쟁이라는 문제에 묶인 상태에서 하나님을 문제해결의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습니다.
우리에게 돈 문제가 발생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돈 문제에 묶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 같으면 돈 문제에 묶인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께로 탈출을 시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흔히 문제해결의 기도의 용장으로 불리는 권사님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 돈 문제에 하나님을 불러오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서 내가 정해놓은 대로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기도를 드리면서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라고 하니 오히려 문제인 것임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차라리 이런 기도는 안 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러한 문제해결의 기도는 선악과를 따먹고 생겨난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려는 주체로서 죄악의 열매를 점점 더 활성화시키는 것뿐입니다. 가장 강렬한 원죄의 활성화가 바로 문제해결을 위한 기도의 현장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붙잡는 것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갖고 하나님을 불러들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면 문제는 내 일이 아니게 됩니다. 돈을 더 주시든 더 없게 하시든 하나님의 일입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방패라고 했습니다. 왕궁에서 쫓겨나든 혹은 지켜주시든 그것은 하나님의 일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내가 해야 될 일은 문제에 붙잡혀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께로 마음을 탈출시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을까요?
5~6절을 보면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합니다. 지금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급한 상황에서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라고 합니다. 마음이 피난가고 있는 문제로부터 탈출하여 하나님께로 향하자 평안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마치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만약 우리 눈의 시신경을 한없이 늘릴 수 있다면, 이 덥고 힘든 상황을 벗어나 호주나 뉴질랜드 쪽의 시원한 풍경을 보며 마음을 식힐 수 있을 것입니다. 몸은 아무리 어두운 곳에 있더라도 눈의 시신경을 저 멀리 밝은 곳에 둘 수 있다면 환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마음을 하나님께로 탈출시키자 설령 천만인이 에워싼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잠도 잘 오고 밥맛 또한 좋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이유에서 풍랑 이는 배위에서 주무실 수 있었던 것이고, 베드로도 내일이면 헤롯대왕에게 참수를 당할 판인데 천사가 와서 일어나라고 옆구리를 찰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탈출 기도의 효과입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7절을 보면 지금까지 내용과는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문제로부터 탈출하여 하나님께로 도달하면 하나님 안에서 평강을 누리게 되고, 그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뜻이 전달됩니다.
다윗의 문제에 대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알려지자 다윗은 그제야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하나님을 응원하기 시작합니다. 단순히 자신의 구원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제3자의 일을 대하듯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응원하는 것입니다. 문제에 빠진 상태에서 겁내고 벌벌 떨며 구원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천만인이 에워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의 평안을 누리는 상태에서 구원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응원하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완료형입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신 계획이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며 기도한 것입니다.
지금도 홈페이지에 게재되어 있는 “십자가 생활화 1분기도”가 있습니다. 이 1분 기도의 내용을 오늘 본문에서 드러난 다섯 단계 즉 문제에 묶임,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정함, 하나님께로 탈출함, 하나님 안에서 평강을 누림, 평강을 누릴 때에 하나님의 뜻이 나타남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문제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언제나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주님의 길이 있습니다. 이제 문제해결을 위한 기도는 중단하고, 문제탈출의 기도로 다윗이 경험한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두려워하지 않는 평강과 그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의 뜻을 오늘도 주렁주렁 열매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철저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마음이 십자가를 바라봄이 중단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문제들이 연이어 일어나는 삶에서 끊임없는 탈출이 이루어지고, 끊임없는 평강이 이어지고, 끊임없는 하나님의 뜻이 열매로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