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스미스
1968년 19회 멕시코 올림픽대회 육상 경기에서는 흑인 인권 탄압에 대한 시유가 노골적으로 표출되었다. 200m 경기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한 미국의 흑인 선수 토미느미스와 졸 칼로느가 시상대에서 운동화를 신지 않고 검은 양복 차림으로 목에는 검은 스카프를 둘렀다. 미국 국가가 울리자 고개를 푹 숙인채 검은 장갑을 낀 한 손을 높게 쳐들면서 미국에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침묵 시위를 벌였다. 흑인 인권운동 지도자 킨 목사가 암살된지 여섯 달이 지난 시절이었다. 두 선수는 흑인들의 가난을 되변하기 위해서 운동화를 신지 않았고, 흑인들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목에 검은 스카프를 둘렀다. 스미스는 미국에 흑인들의 힘을 상징하는 오른손을 칼로스는 흑인들의 단결을 회소하는 왼손을 치켜들 것이다. IOC는 올림픽 정신을 훼손하는 폭력적 행위로 간주하면서 두 선수의 메달을 박탈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육상 경기에서 보여준 메시지는 구 후 미국 사회를 휩쓴 “흑인 해방운동” 블랙 파워(Black Power)의 상징이 되었다.
미국의 흑인 선수들은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 사회학과 교수인 해리 에드워즈의 주도하에 인권을 위한 올림픽 프로잭트(Olympic Project for Human Righs : OPHR) 이라는 단체를 결성한다. 에드워즈 교수는 그래서 대학 시절 폴볼, 농구, 육상 스타로서 미네르티 바이킨느와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느의 스카수트지면을 받기로 했지만 학업을 계속해 교수가 되었고, 미국의 인종 차별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궁극적으로 흑인 선수들의 올림픽 보이콧을 위해 OPUR을 결성하게 된 것이다.
참느냐 보이콧이냐를 두고 선수동안 논란이 있었지만 올림픽 메달외에는 지옥과 같은 미국 사회를 돌파할 방도가 없었다. 이 흑인 선수들은 결국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 참가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들을 “화이트 아메리카”의 광대가 되길 거부한다. 이들은 대회에 출전하며 세가지를 은구했다. 첫째는 인종 차별주의자였던 당시 20C 위원장 에이브리 브런린디지의 최자, 둘째는 인종차별 국가인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글디지안(혈직바브웨)의 올림픽 출전 그리고 무하마드 알리릐 복권리로다. 그리고 이들을 자신동의 의지를 행동으로 표현했다.
이들이 시상대에서 보여줄 행동을 당연히 IOC미국 사회에 격한 반응을 불러왔다. 결국 그들은 자신동의 인생을 걸고 일어난 노즐한 메달을 박탈 당했고 선수촌에서 쫓겨났다. 미국에 돌아가선 직업을 구할 수 없었고 살해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을 다룬 한편으로는 미국 사회의 지지인 각성을 불러 일으켰다. 400m 계주 우승자인 와이어미아 타이어느는 자신의 금메달을 이들에 바친다고 발표했고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미국로정책은 “우리의 동료가 불공정과 불평등을 알리기 위한 행동에 지지를 표한다”는 선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이런 상황을 알지 못한 채 시상식 참여했다. 은메달 리스트 호주의 피터 노먼도 입장하기전 스미스의 키를 로드의 의중을 헤아리고는 여기에 동참하기로 한다. 그는 관중석에서 동그란 OPHR 메달을 얻어 가슴에 달고 시상대에 함께 오른다. 이들의 시위는 미국의 인종 차별 문제로 전세계에 알린 최초의 시위였다.
스미스는 “우승을 하면 미국인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검둥이“가 된는 현실을 그냥 두고 볼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이들이 경기장에서 미국 시민으로 미국을 위해 뛰지만 짐에오면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빼앗기는 그런 거짓과 기반의 일부분이 되는 것을 기억한 것이다.
2005년 캘리포니아대 산호세 캠퍼스는 이 두 사람의 모습을 동상으로 재현했는데 학생회는 “두 사람의 행동을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한다”며 이들의 행동을 기념했다. 이에 스미스는 “우리는 죽더라도 역사는 남는다”고 화답한다. 카를로스와 스미스의 이른바 “침묵의 시위”는 “20세 TV 명장면” 여섯일째에 오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