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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 예수님은 나의 외모>의 줄거리:
외모지상주의! 피하지도 탓하지도 말 것입니다.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나도 예뻐지면 됩니다. 외모가 별겁니까? 시선이 닿는 부분이잖아요? 다만 누구의 시선이냐만 주의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람을 볼 때 사람의 시선과 하나님의 시선이 닿는 부분, 즉 사람이 보는 외모와 하나님이 보시는 외모가 다르다는 뜻이지요. 하나님이 보시는 외모에 목숨 거는 외모지상주의가 복이 되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외모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은 나의 외모
(아가 4:1~5:1)
1.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구나
2.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오는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3.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4. 네 목은 무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방패 천 개,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5.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어린 사슴 같구나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 예수님은 나의 외모>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 예수님은 나의 외모’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에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기름을 붓기 위하여 이새의 집에 들렀을 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사무엘이 첫째 아들 엘리압을 보자 키와 용모가 훌륭했기 때문에 기름을 부으려하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라고 하셨습니다.
‘외모’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달리 말하면 시선이 닿는 부분입니다. 나를 구성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육체 외에도 감정이나 생각 혹은 인격이나 도덕성도 나를 구성하는 요소입니다. 여기서 시선이 닿는 부분이 외모인데 하나님의 시선이 닿는 부분은 중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외모가 있다는 말입니다. 외모의 정의를 두고 말하자면 사람이 보는 외모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시는 외모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요즘 외모지상주의(Lookism)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됩니다.
외모가 인생의 우열과 성패를 가늠한다고 믿기에 외모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취직할 때에 면접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요즘은 능력보다 외모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취업준비생들은 스펙을 쌓는 것보다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성형수술을 한다고 합니다.
결혼조건도 이러한 외모지상주의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결혼정보업체의 등급표에 따른 여성의 만점 기준을 보자면 키는 170cm이상, 얼굴은 미인형, 안경을 써서는 안 되고, 체중은 55kg 미만의 마른 체형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남자의 경우에 상위등급을 얻기 위해서는 직업이 가장 중요했었지만, 이제는 키가 185cm이상, 체중은 75kg미만이 필수조건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간에는 180cm이하는 루저남이라는 말까지 생겼고, 이러한 풍속으로 인해 젊은이들에게는 키높이 깔창이 필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저처럼 나이가 많은 사람은 좀 덜한 편이지만 그래도 외모로 인한 많은 열등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머리는 큰데 다리는 짧고 굵습니다. 초등학교 때 반바지를 입을 때마다 창피했습니다. 제가 딸이 없기에 망정이지 제 체형을 닮은 딸을 낳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게 된 외모지상주의를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요?
외모지상주의는 외모지상주의를 통해 극복할 수 있습니다. 외모는 시선이 닿는 부분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시선이 닿는 부분의 외모지상주의는, 하나님의 시선이 닿는 부분의 외모지상주의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시선이 닿는 부분의 외모에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부분의 외모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이렇게 세상의 외모지상주의를 하나님의 외모지상주의로 극복할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제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의 아내가 된 시점입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초야(初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솔로몬이 자기의 아내를 향해서 부른 노래입니다. 우리가 읽은 1~5절까지는 신부로 맞이한 술람미 여인의 외모에 대한 아름다운 찬사입니다. 그리고 5장 1절까지는 초야를 맞이하여 부부의 연합을 기다리는 솔로몬의 초조한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이제까지는 주로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에 대해 가졌던 마음이 노래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곧 선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가져야 하는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이 마음은 꿈에서조차 잃어버릴까 불안해하고 두려워할 정도로 좋아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내 마음에서 한시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여 살 수 없다는 표현입니다.
오늘 내용은 이제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 대해 가진 마음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선민들을 보시며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가지시는지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닿는 사람의 외모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하나님께서는 이 외모를 갖춘 사람과 연합하게 될 것을 바라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에 대해서 갖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로 들어가서 연합하고 싶다는 욕구를 갖게 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외모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학식의 유무 등의 것들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렸듯이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들어오시도록 지음 받은 마음의 공백이 있습니다. 이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연합의 욕구를 가지실 수 있는 외모가 있고, 반대로 연합을 포기하실 상태의 외모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가서를 읽을 때에 놓치기 쉬운 점이 있습니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관계를 하나님과 선민의 관계 혹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맞습니다. 그런데 이 두 관계가 근거로 삼고 있는 관계의 원형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입니다. 영원 전부터 존재하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계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아들 하나님으로써 영원 전부터 함께 하셨습니다. 이 관계가 바로 선민과 하나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원형이 되는 관계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는 그 자체로 궁극적 목표가 아닙니다. 교인들이 예수님과 연결됨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가지시는 관계에 참여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계시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마음을 드리면 예수님이 하나님과 맺으시는 관계가 나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 대해 가지신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이 사랑의 감정은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관계와 일치할 수는 없지만 비유될 수 있는 마음가짐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시기에 연합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시선이 닿았을 때에 예쁘게 보이는 사람이 예수님 한 분 뿐이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에 등장한 많은 신앙인들은 어떤 입장이었을까요? 신약은 오신 예수님을 믿고 구약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믿는 기간입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에서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성령님을 통해 다윗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이 구현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에서 예쁘게 보일 수 있는 길은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외모가 되셔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시선에 예쁘게 보일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 때에 삼각관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나와 내가 마주대하는 세상과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세상에는 가족도 있고 돈 문제 건강 문제 등도 포함됩니다. 육체를 입고 살기에 접하는 모든 사람과 사건과 사물들이 세상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외모를 갖는 것은 이 세상을 우선적으로 관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럴 때에 내가 관계해야 할 세상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손이 나가십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의 외모를 가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결혼 첫날밤에 술람미 여인에게 느꼈던 것과 같은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관점에서 내가 예쁘게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 눈에 예쁘게 보이는 사람이 예수님밖에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가장 예쁘게 보시기에, 우리는 그 시선이 머무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나도 좀 봐달라며 그 시선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만큼 예쁘지는 않을지라도 성수주일하고 돈 벌면 세금도 잘 내고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았으니 예쁘게 봐달라고 주장할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수주일뿐만이 아니라 아무리 봉사를 하고 헌금을 많이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예쁨의 조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쁘게 보시는 사람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한 분 뿐이십니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10절에서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 외에는 하나님이 예쁘게 보시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시선이 닿는 부분에서 예쁘게 보이는 사람은 천하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이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것을 조건으로 하나님은 나를 예쁘게 여기십니다.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하나이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하나님과 동등 됨을 부인하고 종처럼 하나님의 뜻을 받들며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예뻐하심은 무한대로 뻗어나갑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뻐하셔야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과 연합할 때에야 육체로 마주하고 있는 세상 대상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이 펼쳐질 수 있습니다. 이 연합은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예쁘게 여겼듯이, 하나님께서 예쁘게 여기시는 자들에게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연합되기 위한 마음의 공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공간이 추잡하고 더러운 것들로 채워져 있다면 하나님과 연합할 수 없습니다. 옛날에 선풍기 아줌마라는 분이 TV에 나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본래는 아주 미인이셨는데도 불구하고 성형강박증으로 인해서 스스로 얼굴에 이물질을 주입하였고, 그 결과 얼굴이 부풀어 올라 일그러지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마음 아픈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셔야 할 자리에 돈을 담고, 건강을 담고, 가족을 담았습니다. 정치인들은 권력을 담고, 젊은이들은 애인이나 오락을 담습니다. 이렇게 이물질을 담으면서 우리의 마음은 괴물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연합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 매달려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동일시는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첫 번째 관심의 대상으로 모셔 들임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고백이 이루어질 때에 마음은 회복됩니다. 마음의 성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대상보다도 하나님을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내 앞에 많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녀 문제, 사업 문제, 돈 문제, 건강 문제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보다도 하나님을 더 우선적인 대상이 되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 십자가의 주님과 연합하여 죽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 죽으면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예쁘게 여긴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예쁘게 보십니다.
세상이라는 이물질로 인해 괴물 같은 마음이 주님의 보혈로 인해 씻기고, 주님의 부활을 따라 부활할 때에 술람미 여인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예쁨 받을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오셔서 연합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어떤 것을 가졌을 때에도 느끼지 못했던 절대 평강 절대 기쁨 절대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이때에 십자가에서 죽느라 등 돌렸던 이 세상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뜻대로 손대시면서 이끌어 가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김아중 씨가 주연을 했었던 “미녀는 괴로워”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한나’라는 아가씨가 몸무게가 100kg가 됩니다. 그런데 목소리는 얼마나 호소력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노래를 못하는 댄스 가수의 대창을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다 결심을 하고 전신성형수술을 통해서 미녀가 됩니다.
우리는 모든 여자가 시샘하고 모든 남자가 탄성을 지르는 미녀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외모지상주의에 맞는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우리가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이물질을 담을 때에 괴물이 됩니다. 돈이든 자녀든 배우자 등은 마음에 담기 위한 대상이 아닙니다. 마음에 담을 때에 이물질을 주입하는 것이 됩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연합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상대하셔야 할 대상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코 이들을 우선시하여 연합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될 것입니다. 나에게 있어서 ‘우리’는 나와 배우자 혹은 나와 자녀가 아닌 나와 하나님이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내가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보시기에 예쁜 모습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외모지상주의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이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외모가 되어주시면 하나님은 나를 예쁘게 여기시고 연합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세상을 마주대하며 사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미인의 삶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하나님 시선에 합당한 미인이 되게 하여주셔서 언제나 하나님과 연합된 상태에서 이 세상의 모든 대상들을 마주대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