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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퍼팅성공 백프로 언행 비결>의 줄거리:
골프에서 그린 위의 공을 홀컵에 넣기 위한 샷이 퍼팅이지요. 홀컵과의 거리, 그린의 질과 지형, 바람의 세기 등을 고려하여 퍼팅을 하는 순간 선수와 관중 모두 숨을 죽이게 됩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어떤 대상을 향하여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 할 때, 성공적인 퍼팅이 그린 위에 남기는 공의 궤적처럼, 그렇게 적절하고 올바른 길이 하나님에 의해서 점선으로 그려져 있음을 알고 계십니까? 이 점선을 따른 언행의 퍼팅 백 프로 비결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퍼팅성공 백 프로 언행 비결
(예레미야 5:1~31)
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2.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
3. 여호와여 주의 눈이 진리를 찾지 아니하시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지라도 그들이 아픈 줄을 알지 못하며 그들을 멸하셨을지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들의 얼굴을 바위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
4.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어리석은 것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
5. 내가 지도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
6. 그러므로 수풀에서 나오는 사자가 그들을 죽이며 사막의 이리가 그들을 멸하며 표범이 성읍들을 엿본즉 그리로 나오는 자마다 찢기리니 이는 그들의 허물이 많고 반역이 심함이니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퍼팅성공 백 프로 언행 비결>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퍼팅성공 백 프로 언행 비결’
유명한 골프 선수 타이거 우즈가 근래의 부진함을 벗고 지난 9월에 페덱스컵 플레이오프 최종전 투어 챔피언십 1라운드에서 선두를 차지하였습니다. 마지막 18번 홀에서 9미터 거리의 이글 퍼트를 성공시키는 장면이 인터넷 상에 올라온 것을 보았는데 통쾌하고 멋진 장면이었습니다.
퍼트를 하는 그린은 골프장마다 다 다릅니다. 선수들은 그린에 공을 올리고 나면 퍼트를 위해 지형을 살피고 바람의 세기까지 계산합니다. 이 과정이 얼마나 진지한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식은땀을 흘리며 긴장하게 합니다. 결국 공을 치고 그린 위를 굴러 한 번에 홀컵에 들어갈 때에 통쾌함을 줍니다.
우리의 삶도 퍼팅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부가 살아갈 때에 서로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게 됩니다. 혹은 돈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것이 비유적으로 그린 위에서 홀컵을 향해 퍼팅을 하는 모습과 닮았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사람과 사물을 계속해서 대면합니다. 차를 한 대 사려고 하면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차에 대한 생각과 말과 행동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골프의 퍼팅으로 비유한다면 우리의 삶이 퍼팅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모두 하나님이 지켜보시는 가운데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이 홀컵으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차를 사려고 하는 목적과 과정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가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타이거 우즈가 그린에서 9미터 퍼팅을 성공시킬 때에 홀컵으로 향하는 길은 외길인지도 모릅니다. 지형이 평평하지 않기에 공은 언덕을 오르고 내리며 궤적을 그리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공의 궤적과 같습니다. 다만 홀컵으로 들어가는 길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의 궤적이 이 길을 따르는지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진로에 대해 생각하고 말합니다. 이때에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생각과 말이 지나야 되는 궤적을 점선으로 그려놓으시고 이 점선에 맞는지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이 점선은 오늘 본문 1절에 나오는 ‘정의와 진리’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자녀의 진로에 대해 이야기 할 때에는 생각과 말과 행동은 골프공이 됩니다. 이것이 진리의 점선을 따라 잘 굴러가면서 하나님이라는 홀컵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선에서 벗어나면 탈선입니다. 본문에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길에서 탈선한 삶은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사람은 하루 종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을 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것이 다 하나님 마음에 들 수 있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홀컵으로 향하는 하나의 점선에 맞추어 생활하는 것이 어떻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말입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도 참 늦게야 깨달았지만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점선대로 달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어려운 것으로만 생각하고, 어렵기 때문에 당연히 못 지킨다고 생각하며 포기한 채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17~18절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자녀의 진학문제에 대한 고민은 율법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통해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따라야 할 점선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도 훨씬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점선에서 탈선한 상태로 나오는 말과 생각과 행동은 자녀가 그대로 따르지도 않을뿐더러 다툼만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따라 살 때에 삶은 쉽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본문 22절에서는 이 탈선의 모습을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강릉에서 늘 바다를 보고 삽니다. 어느 때에는 파도가 거칠게 일어서 해변으로 강하게 밀려들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닷물은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폭풍이 쳐서 바다가 흉용하게 뛰놀지라도 지나고 나면 항상 그 자리에 있습니다. 이 흉용한 바다조차 선을 넘는 법이 없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은 입만 열면 탈선입니다. 생각만 하면 탈선이고 행동만 하면 탈선입니다.
또 24절을 보면 탈선의 결과가 나옵니다.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언행이 하나님의 점선을 따라 움직이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많은 것들을 받을 수 있을 텐데, 탈선함으로 인해 주실 수가 없게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댐 같은 시설이 없었기에 농사는 전적으로 천수답이었습니다. 그런데 때를 따라서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생존을 좌우하는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은총으로 주어지도록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조건은 언행의 퍼팅 백 프로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인간은 왜 탈선을 하는 것일까요?
그저 살다보니 그렇게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25절을 보면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라는 말은 이른 비와 늦은 비로 비유되는 하나님의 은총들을 물리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허물’은 우리가 몇 번이나 살펴보았던 히브리어 아원입니다. 아원은 동사인 아와에서 파생된 말로써 ‘비틀다, 뒤틀다, 구부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죄’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하타로써 ‘표적을 빗나가다’라는 뜻입니다.
14절을 보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이 삼라만상의 창조주이시며 지배자이심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인간의 마음에 가장 가까이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마귀에 속은 인간의 마음은 가장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피해 세상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구부러지고 비틀리게 된 것이 허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표적에서 빗나가 다른 표적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대신 배우자를 표적으로 삼고 직장에서 승진하는 것을 표적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이것들이 표적으로 선택된 이유는 내 마음에 만족을 줄 수 있으리라 믿어지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피해서 비틀린 마음은 다른 대상을 마음에 담고자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채워질 수는 없습니다. 채워지지 않기에 인간의 마음은 ‘만족지향성’이라는 특이한 체질을 갖게 됩니다. 만족을 이루기 위한 움직임이 인격의 특성이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족지향성의 마음에 자녀가 들어오면 하나님 크기의 마음을 채우기 위해 마음에 담긴 자녀를 잡아 늘리기 시작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뜻을 따라 자녀를 주물러서 자녀를 만들려고 합니다. 여기서 자녀가 견디지 못하고 찢어져버립니다. 배우자나 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여간 눈에 보이고 귀에 들려서 마음에 담기는 대로 잡아 늘려서 하나님 크기의 마음을 채우라고 보채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어떤 대상도 하나님 크기가 될 수 없기에 잡아당길수록 찢어지고 조각이 나버립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첫 번째로 붙들지 않으면 만족지향성의 인격이 됩니다.
한편 이렇게 채워지지 않는 만족지향성의 반대급부로 불만이 생겨납니다.
8절을 보면 “그들은 두루 다니는 살진 수말 같이 각기 이웃의 아내를 따르며 소리지르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무엘하 11장에는 성군 다윗조차도 하나님을 잊는 순간 밧세바를 탐하게 되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는 순간 마음은 하나님을 빗겨가서 밧세바를 표적으로 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크기의 마음은 결코 밧세바라는 여인을 통해 채워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치사하고 야비하게 죽이는 살인사건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은 마음이 만족지향성으로 일단 발동이 되면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마음에 집어넣고 잡아 늘립니다. 교황이든 화엄사의 주지스님이든 개신교 각 교단의 총회장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말과 생각과 행동이 탈선이 되는 것입니다.
30~31절을 보면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선지자들이 거짓을 예언하며’라는 말은 이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점선을 따르지 않고 만족지향성을 띄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라는 말은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력을 하나님을 위해 쓰지 않고 자기만족을 위해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성전에 장사꾼들이 들끓게 되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를 백성들도 좋게 여긴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목사님의 설교는 거짓말입니다. 성경을 보고 생각하고 말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점선에서 벗어난 탈선에 불과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문제이든지 생각하고 말하기 전에 먼저 나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 만족한 상태가 아니라면 나타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탈선입니다. 심지어 내 건강에 대한 걱정 같은 지극히 당연한 일조차 탈선이 됩니다. 하나도 하나님의 점선을 따라 홀컵으로 들어가는 생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좋은 것들은 정작 하나도 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예 생각도 말도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 유익합니다. 하나님의 점선에서 벗어난 탈선적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인 이상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한 상태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말과 생각과 행동은 만족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 만족하면 만족지향성이 사라지기 때문에 생각할 필요조차 없어집니다. 그러나 생각이 없는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은 세상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피해 세상을 향하려는 비틀린 마음을 멈추고 가장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동안에 마음은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단 하나의 일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대할 때에도 먼저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십자가에서 배우자에 대해 죽는 것은 곧 배우자에 대한 만족지향성이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배우자를 끌어들여서 만족하려던 마음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돈 문제나 건강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나 건강을 잡아 늘려서 마음을 채우려는 만족지향성에 대해 죽어야합니다. 그럴 때에 탈선은 멈춰지고 가장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게 된 마음은 더 이상 배우자로 인해 만족하고자 하지 않고, 돈을 통해서 만족하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배우자나 돈에 대한 생각을 주십니다. 그럴 때에 행하게 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생각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점선을 따라 갈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서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은 세상을 향한 만족지향성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한 상태에서는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점선을 따라 홀컵으로 향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제목에서 말씀드린 언행 퍼팅 백 프로의 비결입니다.
무협영화에 나오는 검객이 쌍칼을 종횡무진으로 휘두르는데 이것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규칙이 없이 마구 휘두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정해진 길을 따라서 정교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한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검객의 쌍칼과 같습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무질서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정해놓으신 점선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탈선 없는 삶이 십자가 생활화의 묘미입니다.
십자가만 붙잡고 있으면 되므로 이렇게 쉬운 삶의 길은 없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으로 만족하게 되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과 함께 나의 마음의 만족지향성을 죽임을 통해서 하나님으로 만족하게 되면, 이른 비와 늦은 비처럼 때에 맞는 은총이 우리의 삶을 채워가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끊임없이 고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언행 퍼팅 백 프로의 주인공들이 되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사실은 세상의 어떤 일보다 쉬운 일임을 깊이 깨닫게 하여 주셔서, 십자가를 꼭 붙잡고 24시간을 살아갈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으로 만족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그려 놓으신 점선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언행 퍼팅 백 프로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