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嘉靖) 12년인 계사년(癸巳年, 1533년 중종 28년) 8월에 참찬(參贊) 조공(趙公)이 별세하니, 향년은 77세였다. 그해 겨울 10월에 양주(楊州) 노원리(盧原里)에 있는 부인 나씨(羅氏)의 묘소에 장사지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을미년(乙未年, 1535년 중종 30년)에 아들인 조흥조(趙興祖) 등이 묘소 왼쪽에 장차 비석을 세우려고 하여 나에게 비명(碑銘)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오호(嗚呼)라, 내가 어찌 차마 나의 구씨(舅氏, 외삼촌을 말함) 묘소에 명을 짓는단 말인가?
공의 휘(諱)는 원기(元紀)이고 자(字)는 이지(理之)이며 본관(本貫)은 한양(漢陽) 사람이다. 한천 부원군(漢川府院君) 조온(趙溫)은 우리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 공신(開國功臣)에 녹훈(錄勳)되었고 그 청덕(淸德)과 준절(峻節)이 세상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으니, 시호(諡號)는 양절(良節)이다. 양절공에게 조육(趙育)이라는 아들이 있는데, 의영고 사(義盈庫使)를 지내고 뒤에 참판(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사예(司藝)를 지낸 조충손(趙衷孫)을 낳았는데, 그가 곧 공의 선고(先考)로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추증되었다. 판서가 남상명(南尙明)의 딸에게 장가들어 정축년(丁丑年, 1457년 세조 3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린 시절에도 장난을 좋아하지 않고 겸손히 물러나 느긋하고 신중한 기상(氣像)이 있었다. 일찍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계묘년(癸卯年, 1483년 성종 14년)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학문을 하는 태도는 반드시 이취(理趣)를 깊이 탐구하고 장구(章句)에 일삼지 않았으며, 글을 짓는 태도는 반드시 자기 자신의 말을 하고 이전 사람들의 말을 한마디도 도습(蹈襲)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빼어난 재기(才器)를 지니고서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기간이 대체로 여러 해였다.
이윽고 병진년(丙辰年, 1496년 연산군 2년)의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고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뽑혀 들어갔다. 그 당시 연산주(燕山主)가 사초(史草)를 살펴보려고 하자, 공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힘써 아뢰고 애써 간청하다가 연산주의 노여움을 건드려 파직을 당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공을 위하여 걱정을 하였으나, 공은 그 일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경신년(庚申年, 1500년 연산군 6년) 여름에 평안도(平安道)의 변방에 사는 백성이 해랑도(海浪島)로 도망가서 그곳에 의지해 소굴이 되니 그 형세가 점차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곳이 상국(上國)과 가까운 지역임을 우려하여 도망한 자들을 수괄(搜括)하는 일은 감히 섣불리 상국에 주달(奏達)하지 못하였다. 이윽고 상국에 주달하여 칙서(勅書)를 받든 다음에야 비로소 그 장수를 골랐는데, 공이 그 부장(副將)에 선발되었다. 해랑도는 서해(西海)에 있었는데, 뱃길에 파도가 거세게 출렁거리어 배가 뒤집어지려고 하니, 함께 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얼굴빛이 변하였으나 공은 마치 재각(齋閣)에 앉아 있는 것처럼 느긋하게 있었다. 마침내 그곳으로 도망간 백성들을 체포하자 그 상(賞)으로 품계(品階)가 세 등급(等級)이나 승진하여 병조 정랑(兵曹正郞)과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에 임명되었다.
갑자년(甲子年, 1504년 연산 10년) 봄에는 이전에 있었던 사건에 연좌되어 횡성(橫城)에 유배되었다가 병인년(丙寅年, 1506년 중종 원년)에 금상(今上, 중종을 말함)이 개옥(改玉, 중종반정을 말함)하자 조정에 들어와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과 선공감 정(繕工監正)에 임명되었는데, 조정의 논의가 공이 자상(慈祥)하여 목민관(牧民官)의 재능이 있고 겸하여 무사(武事)까지 잘 안다고 여기어 경원 부사(慶源府使)에 제수하기를 청하였다. 이윽고 공이 그곳에 부임하여 다스리자 백성들과 이족(夷族)이 모두 공의 선정(善政)을 고마워하여 금속 마양1)(金粟馬羊)의 풍요(風謠)가 조정에까지 들렸다.
1년이 되자 특별히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임명되었고 곧이어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로 선발되었다. 임금께서 폐조(廢朝, 연산조를 말함)의 탐오(貪汚)한 버릇이 아직도 세상에 남아 있음을 걱정하여 청백(淸白)함이 남달리 뛰어난 자를 천거함으로써 세속을 격려(激勵)하려고 하여, 공을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올려주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승진시키라고 명하니, 조야(朝野) 사람들이 모두 공을 영예롭게 여겼다. 얼마 뒤에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이배(移拜)되었다. 부제학을 2품(品)의 관원이 지낸 것은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비록 관질(官秩)에 있어서는 강등(降等)된 셈인데도 선비들이 다들 귀(貴)하게 여겼다.
을해년(乙亥年, 1515년 중종 10년) 여름에 명(明)나라에 사행(使行)하여 성절(聖節)을 축하하고 돌아왔는데, 오직 상(賞)으로 받은 물품만 가져오고 그 밖에는 한 가지 물건도 사오지 아니하여 행리(行李)가 조촐하였다. 병자년(丙子年, 1516년 중종 11년)에는 왕명으로 대사헌(大司憲)과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제수되었고 이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갔는데, 채 1년도 되지 않아서 임금께서 공의 청직(淸直)함을 생각하시어 파격적으로 자헌 대부(資憲大夫)에 승진시키고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발탁하여 임명하였다. 이어 공조 판서(工曹判書)ㆍ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ㆍ도총부 도총관(都摠府都摠管)으로 옮겼다.
계미년(癸未年, 1523년 중종 18년)에는 명(明)나라의 태황 태후(太皇太后)가 서거(逝去)하여 공이 또 진위사(陳慰使)로 경사(京師)에 갔다 왔다. 병술년(丙戌年, 1526년 중종 21년)에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허락해주지 않아 예전과 똑같이 대직(帶職)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532년 중종 27년)에 임금께서 의정부(議政府)에 하교하기를, “조정 신하들 중에 청렴한 절개가 평소에 알려지고 노년에 이르러서도 변하지 아니하여 뭇사람들이 신복(信服)하는 자를 아뢰어라.”고 하니, 의정부가 공의 이름을 아뢰자, 임금께서 한참 동안 탄상(歎賞)하시고 공을 파격적으로 숭정 대부(崇政大夫)의 품계로 승진시키라고 명하였으며, 예전의 관직을 그대로 지니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다. 공의 세 가지 임명이 모두 청렴한 지조로써 포상을 받은 것이니, 이런 경우는 세상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공은 자성(資性)이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웠으며 절약과 검소함을 좋아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복상(服喪)할 때에는 홀로 악실(堊室, 상주가 거상하는 방)에 있으면서 아침저녁으로 매우 슬퍼하였고 여막(廬幕) 밖에 나가지 않은 기간이 삼년이었으므로, 사람들이 공더러 쉽지 않은 일을 해낸다고 하였다. 벼슬이 재보(宰輔)에까지 올랐는데도 낡은 집과 짤막한 담장이 겨우 비바람을 가릴 정도로 옹색하였고, 부엌의 찬장에 있는 것은 소금과 채소에 불과하였으니, 사람들은 그러한 생활을 견디지 못할 것으로 여겼으나 공은 즐거워하며 싫증내지 않았다. 남이 조그만 선물을 주더라도 그것이 조금이나마 의(義)에 맞지 않으면 반드시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며 마치 자기를 더럽히는 것처럼 여겼으니, 그 평소의 조리(操履)가 그러하였던 것이다.
평생 동안 자기가 맡은 일에 성실하고 부지런하여 아무리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에도 일찍이 단 하루도 정고(呈告, 휴가 신청을 말함)한 적이 없었으므로, 무릇 함께 벼슬하는 동료들이 공을 보고서 스스로 면려하였다. 관추(官騶)와 백직(白直) 및 당봉(堂封)의 남는 것들을 집에 들이지 않고 반드시 먼저 살림이 궁색한 자매(姉妹)들을 도와주었고, 가문(家門)과 향당(鄕黨) 중에 늙은이와 홀어미, 고아와 어린 아이들까지 보살펴 주었으며, 비록 소원(疎遠)하여 서로 왕래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에게 보살핌을 받았는데, 정작 자기 집에서 필요한 것들은 항상 넉넉하지 못하였다.
관아에서 물러나오면 항상 자그마한 방에 들어앉아 서사(書史)를 열람하였고, 아침저녁으로 지팡이를 짚고 신을 끌면서 한 자 남짓한 크기의 연못을 굽어 바라보거나 서너 떨기의 국화를 마주한 채 시를 읊으며 느긋하게 거닐면서, 마치 조물주(造物主)와 더불어 사귀는 듯하였고 그 가슴 속이 호호(浩浩)하였으니, 공이 즐거워한 것이 어찌 간이(簡易)하지 아니한가?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임금께서 몹시 애도하시어 이틀간 조회를 중지하였고 전례에 따라 내려주는 부의(賻儀) 외에 별도로 비단과 베를 하사하여 장례와 제전(祭奠)에 필요한 것을 도와주었으니, 이 또한 근래에 없는 일이었다.
공의 부인 나씨(羅氏)는 본관이 나주(羅州)로 현감(縣監) 나성손(羅誠孫)의 딸인데, 공이 가난한 선비이던 때로부터 남편을 공경히 섬기어 어긴 적이 없었으며, 또한 능히 가난함을 편안히 받아들이고 담박(淡泊)한 생활을 좋아하였다. 자녀가 없었는데 서출(庶出) 자식들을 마치 자기가 낳은 것처럼 정성들여 보살폈으므로 종인(宗人)과 마을 사람들이 칭송하였으며, 공보다 앞서 별세하였다. 공을 모시던 자로서 아들이 있는데, 장남은 조흥조(趙興祖)이고 차남은 조헌조(趙憲祖)로서 모두 관상감(觀象監)에 속해 있다.
나는 구씨(舅氏)에게서 길러주고 가르쳐주는 은혜를 입었으므로 부사(父師)의 도리가 있으므로, 구씨가 별세한 뒤로도 슬픔을 머금고 그리워하며 외면하지 않았다. 이에 글재주가 변변찮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없어서 감히 구씨의 계차(系次)ㆍ역관(歷官)ㆍ치행(治行)의 사적을 기술하여 조흥조에게 주고 명(銘)을 잇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사람에게 주는 것이 많거니와 공이 얻은 것은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하였고 충신(忠信)으로 가꾸어 길렀네. 세상과 조화(調和)하되 흐르지 않았으니 사사(士師)의 법칙이 있었고, 지조가 청고(淸高)하되 남을 포용하였으니 유독 옛 백이(伯夷)만 청렴한 것은 아니네. 절조는 늘그막에 간혹 변하기도 하나 참으로 나는 송백(松柏)처럼 나중에 시드는 절개였고, 흰 것은 쉽게 더러워지나 나는 검게 물들지 않는 지조를 보전하였네. 그 마침을 처음과 똑같게 해내어서 외물(外物)이 빼앗지 못하였네. 노원리(盧原里)의 묘소에 산들이 우뚝우뚝 솟고 강물이 콸콸 흐르네. 언덕과 골짜기는 변천할지라도 불후(不朽)한 것은 언덕과 골짜기를 따라 변하지 않으리라. 아!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