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사대부가와 의령남씨 선조의 인척관계
의령남씨 충경공 직제학공 목사공파 - 남척(南倜)과 광산김씨 김극뉴의 인척관계
▶ 광산 김씨(光山金氏) 대사간 김극뉴(金克忸) 1436~1496
김극뉴(金克忸) (1436~1496) 조선 전기 논산 출신의 문신으로 광산김씨 양간공파이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의백(義伯) 조부는 김철산(金鐵山)이며, 부친은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김국광(金國光)이다. 모친은 전첨(典籤) 황보신(黃保身)의 딸로서 장수황씨(長水黃氏)이며, 처는 함양박씨(咸陽朴氏)이다. 친가와 외가가 모두 명문가이다. 한국 역사상 문묘에 배향된 18명의 선현 중 한 가문에서 두 명 이상이 배출되기는 은진 송씨 내에 송시열과 송준길, 광산 김씨 내에 김장생과 김집이 유일하다. 김극뉴는 고조부로 김장생의 5대조가 된다.
김극뉴는 처음 음사로 청진전직이 되었다가 찰방이 되었고 1468년(세조14년) 춘장방 문과에 병과 23인으로 급제하여 종부시정이 되었다. 그 후 의빈부경력이 되어 광릉군 이극배의 종사관으로 승진되어 남방의 기근을 구제하는데 매우 공평하고 안정되게 하였다. 그 공로로 절충장군에 승진되어 오랫동안 판결사로 있다가 병조참의, 예조참의, 형조참의, 공조참의를 거쳤고 서추(西樞,무반)도 겸했다가 사간원대사간에 이르렀다. 덕종 추종시 대사간(大司諫)으로서 헌납 김일손 등과 함께 비례라고 역쟁하였으며, 연산군 때 김일손 등과 소릉(昭陵, 문종왕비 권씨(權氏)의 묘) 복위를 주장하였다. 재직 중 순직하자 세조가 사재(私財)와 부의(賻儀)를 내렸다.
묘소는 처가가 있는 전라북도 순창군 임계면 마흘리 선산에 있으며 김극뉴를 모신 재실인 영사재(永思齋)에서 매년 음력 10월 7일에 제사를 올린다. 또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김극뉴의 둘째 부인인 의령남씨를 제향한 영사재(永思齋)가 있다.
순창의 김극뉴 묘를 기준으로 위쪽에 장인인 함양박씨(咸陽朴氏) 박예 부부, 정부인 박씨, 아래쪽에 아들과 증손, 맨 아래에는 사위와 딸의 합장묘인 동래정씨(東來鄭氏) 정광좌(鄭光佐) 묘 등이 차례로 조성되어 있다.
김극뉴의 묘는 풍수가들에 의해 일찍부터 조선시대 8대 명당 중 하나인 '말명당(馬明堂)'으로 일컬어 졌다. 조선시대 전기의 윤회봉사(輪廻奉祀)와 균분상속(均分相續)의 일면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서 역사상, 학술상 가치가 증명된 자료로 판단된다.
■ 김극뉴의 묘소(순창 말명당) : 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 산36
■ 부인남씨 묘소(광산김씨 연산 본가) :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1길 42
■ 말명당에 얽힌 전설의 일부 발취한 대목으로
「 장인 박이는 김극뉴의 부인이 된 외동딸만을 두어 자신의 제사를 지내 줄 아들이 없었다. 말 명당이 문묘에 배향될 귀한 자손이 기약된 터임을 안 박이는 외손들이 번창하길 바라며 사위 김극뉴에게 명당을 양보하고 자신은 그 보다 자리가 못한 입수부분에 묻혔다고 전한다. 」
▶ 김극뉴(金克忸)의 둘째 부인 남씨 - 의령남씨 남척(南倜)의 딸(4녀)
김극뉴의 첫 부인 함양박씨는 2남 2녀를 두고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둘째 부인은 의령남씨 홍주목사(洪州牧使) 남척(南倜)의 딸(4녀)로 1461년에 태어나 27세에 중매로 상처(喪妻)한 52세의 김극뉴와 혼인 하였고, 슬하에 자식은 두지 못하였다. 그리고 36세 때 남편을 떠나보낸 뒤 65세까지 홀로 지내며 광산 김씨 집안의 번영을 위해 헌신하며 살다가 1525년(중종20년)에 세상을 떠났다.
8대손 진옥이 묘갈명을 지어 비를 세우고 후손들이 묘소 바로 아래 지금의 자리에 1689년(숙종15년) 영사재(永思齋)를 지어 덕을 추모하였으며 후손들은 현재까지 시제를 지내오고 있다.
연산(連山) ‘영사재(永思齋)’는 광산김씨 본가인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1길 42에 자리잡고 있다. 2002년 1월 10일 도지정 문화재자료 제378호로 지정되어 관리 보전되며 재실(齋室)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삼문과 동 ․ 서재는 최근에 세워졌다.
의령남씨 부인 묘소는 재실 뒤쪽 50m정도 거리의 구릉 동향 사면에 있으며 구묘비, 신묘비, 문인석, 석등, 상석 등이 배치되어 있고, 호패를 닮은 옛 묘비의 정면에는‘有明朝鮮貞夫人宜寧南氏之墓’, 좌측면을 시작으로 부친 상호군 남척(南倜), 조부 예문관직제학 간(簡) 증조부 병조의랑 경문(景文) 외조부 생원 윤경원 본 무송(茂松) 친가의 가계를 짧게 기록하였으며 연산현 우두리에 신좌을향(辛坐乙向)으로 장사지냈다고 기록 되었다.
김극뉴의 의령남씨 부인의 묘소 전경(논산시 연산면)
의령남씨 부인의 묘비(유명조선 정부인 의령남씨의묘)
의령남씨 부인의 재실 연산 (連山) 영사재(永思齋)
■ 말명당에 얽힌 전설 중 하나- 부인남씨에 관한 전설
김극뉴의 첫째 부인인 함양 박씨가 일찍이 죽자, 박씨 부인의 친정은 이웃 마을에 사는 부덕을 갖춘 의령 남씨를 홀로 된 사위에게 소개했다. 그 때에 남씨 부인은 27세였는데, 박씨 부인의 친정집을 자주 왕래했다. 남편인 김극뉴가 죽어 어느 곳에 장사를 치룬 뒤였다. 하루는 남씨 부인이 박씨네 친정집을 들렸다가 달 밝은 밤중에 뒷산으로 나갔다. 그런데 산등성에서 벙거지를 쓴 귀신들이 박이의 묘를 가리키며 조곤조곤 말했다. “이곳은 자손은 없지만 향불이 끊어지지 않을 터이고, 저기는 금관자와 옥관자가 서 말이나 나올 만대의 발복지이다.”
날이 밝은 뒤 남씨 부인이 그곳을 다시 가 봤더니 묘를 쓴 흔적이 없었다. 그래서 진산 군수로 있던 장남 김종윤을 찾아가 자기가 본 사실을 말했다. 그러자 김종윤은 지관을 불러 감평을 받았고, 지관은 그곳이 만대에 걸쳐 부귀를 누릴 명당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김종윤은 부친인 김극뉴를 그곳으로 이장해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 한편 함양 박씨들은 김극뉴가 묻힌 명당을 박이가 조카에게 주었다면 광산 김씨가 누린 발복을 자기네 후손이 누렸을 것이라며 사위에게 준 것을 서운해 한다고 한다. 그러자 인계에 모신 조상에게 시제를 지낼 때면 광산 김씨는 박 감찰에게 먼저 감사의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 의령남씨 남척 가계도
◼ 부 : 남간(南簡) 1400년 ~ 1440년 예문관직제학
◼ 모 : 운봉박씨(雲峰朴氏) 이조판서 충숙공 박신의 딸
- 차남 : 남척(南倜) 홍주목사
- 부인 : 무송윤씨(茂松尹氏) 윤경원(尹景源)의 딸
○ 장남 : 남침(南忱) 진사
○ 며느리 : 풍천임씨
○ 차남 : 남선(南渲) 무후
○ 3남 : 남순(南恂) 진사
○ 4남 : 남환(南懽) 첨지
○ 며느리 : 김해김씨(金海金氏)
○ 5남 : 남종(南悰) 무후
○ 6남 : 남완(南惋) 무후
○ 1녀 : 안동권씨 권걸에게 출가<권람의 장남>
○ 2녀 : 윤양에게 출가
○ 3녀 : 의성김씨 김익겸에게 출가
○ 4녀 : 광산 김씨(光山金氏) 대사간 김극뉴(金克忸)에게 출가
○ 5녀 : 전주이씨 계천도정 이성에게 출가<양녕대군의 서3남>
▶ 김극뉴(金克忸)의 둘째 부인 남씨 – 연산 영사재 묘소사진
영사재 뒷쪽문에서 본 묘소
의령남씨 부인 묘소
묘소 후면에서 본 마을전경
의령 남씨 남척(南倜), 광산 김씨 김극뉴(金克忸), 순창 말명당, 연산 영사재
<참고문헌>
의령남씨 족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충청남도청-사계 김장생의 뿌리
네이버 지식백과
위키백과
제이역사문화나들이-제이풍수사-일부발취/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