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운정서애 유 선생 유액서〔水雲亭西厓柳先生遺額序〕
단양(丹陽) 운암(雲巖)의 수운정(水雲亭)은 바로 서애 선생이 지은 것이며 그 편액의 수운정(水雲亭)이란 세 글자는 곧 선생의 필적이다.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서 정자가 허물어지고 필적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지금 시랑(侍郞)오공(吳公)이 젊어서부터 이름난 산을 사랑하고 전현을 사모하여 온 집안이 운암(雲巖)에 은거하였다. 정자의 옛터에 나아가 중건하니, 정자는 옛 모습 그대로였으나 글씨는 얻을 수 없었다. 중년에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거치고 만년에 물러나 다시 정자로 돌아와 쉬었다.
무릇 오공은 산수의 빼어난 경치 가운데구곡(九曲)을 뽑아 모두 이름을 붙이고 돌에 새겼다. 자주자(子朱子)의〈무이도가(武夷櫂歌)〉시 10수에 따라 화운하여 그곳이 선령동부(仙靈洞府)임을 밝혔는데, 선생의 글씨가 이에 나타났다. 대개 이 글씨는 처음에 선생의 외손인 조씨(趙氏)의 소유였다가 얼마 후 그 집의 서적이 화재로 인해 싹 없어졌으나 글씨만 외손인 황씨(黃氏)가 얻어 보배로이 간직한 것이 오래되었다.
이조 판서해좌(海左) 정공(丁公)은 평소 고적(古蹟)을 좋아하는데, 마침내 이 글씨를 구하게 되어 책상 위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공경히 완상하며 천금으로도 남에게 넘겨주지 말게 하였다. 오공이 이 정자를 짓고 이 정자에 거한다는 것을 가상히 여기고 또 정자가 다시 주인을 만난 것을 기이하게 여겨 즉시 선생이 손수 쓴 편액을 보내 주었다. 오공이 이에 더욱 크게 감동하고 스스로 다행으로 여긴 바가 있어 그 맏아들 현(玹)에게 모사해서 정자에 걸도록 하였다. 그 본래 필첩은 장정하여 정자 가운데 영원히 보존할 기이한 보배로 삼고자 하여 나에게 그 일에 대해 서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단구(丹丘단양)가 진실로 신선굴(神仙窟)이니, 그 가운데 신령하고 기이한 자취를 다 낱낱이 셀 수 없으나 이는 말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오직 수운정은 서애 어른이 세운 것으로 더욱 뒷 사람들이 사랑하여 완상하는 바가 되었다. 비록 산수 사이에 지팡이 짚고 거닐던 남은 흔적에도 오히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감탄하거늘 하물며 수묵(手墨)과 심획(心畫)이 완연히 선생의 전체 참형상을 띠고 있음에랴. 점(點) 하나 필획 하나도광악(光岳)의 정기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으며, 당시에 드러남에옥색금성(玉色金聲)이 되고 발현함에보불문장(黼黻文章)이 되고 시행함에이정(彝鼎)에 새길 만한 공훈이 되는 까닭도 또한 용이 꿈틀거리며 범이 누워 있는 듯한 필세의 사이에서 볼 수 있는 듯하다.
설령 이 글씨가 아무 탈 없이 정자의 문미(門楣) 위에 본디 있었더라도 이미 지극히뒷 사람들이 흠모하는 것이 되었을 것인데, 하물며 이리저리 떠돌아 여러 사람을 거쳤으나 끝내 부서지거나 문드러져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되지 않고 지금 수백여 년이 되었으나 원기(元氣)가 스며 있고 신광(神光)이 밝게 빛나 어슴푸레하게 마치 선생의 손에서 막 나온 것 같음에랴. 만약 조물주가 도와줌이 있고 큰 화재와 어지러운 세상 가운데서 귀신이 호통쳐 보호한 것이 아니라면 그 어찌 이와 같이 완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그 기이함이 진실로 평범함에서 매우 벗어나 그 반드시 오늘을 기다림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해옹(海翁해좌(海左))의 현명함 때문에 그 친필을 사사로이 소유하지 않고 끝내 오공의 소유가 되게 했으니, 또 어찌 우연이겠는가.
오공이 이 글씨를 얻음으로부터 한 구역의 풍물은 문득 빛나고 구곡의 시문은 명성과 가치가 배나 더하였다. 굽어보고 우러르며 읊조리는 즈음에 거의 궤안(几案)에서 가까이 모시고 붓을 잡아 글씨를 쓸 때에 거동을 직접 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 대저 이와 같다면 그 글씨에 크게 감동하여 스스로 다행으로 여김이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오공은 선생에게 그 원하는 바가 다만 그 필적을 얻는 데만 있을 뿐이 아니었으니, 이로부터 이후 노년에 스스로 분발하여 그 덕업을 따르려고 기필한 것을 생각함이 어찌 오늘의 첫 번째 뜻이 아니겠는가. 듣자니 오공은 읊조리고 완상하는 여가에 빈번히못에 임하는 흥취를 발하여 병풍과 편액의 해서(楷書)와 초서가 아울러 그 묘함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뒷사람 가운데 오공의 글씨를 보는 사람이 보배처럼 중하게 여기기를 선생의 글씨처럼 하는 것도 공에게 달렸고, 선생의 글씨보다 못하게 하는 것도 또한 공에게 달렸으니, 공은 힘쓸지어다.
[주-D001] 수운정(水雲亭):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大崗面) 직티리 소재의 정자로, 운선구곡(雲仙九曲) 중 삼곡(三曲)에 속한다. 유성룡이 은퇴하여 단양(丹陽)의 운암장(雲巖莊)에 살면서 그 정자를 ‘수운정’이라고 명명하고 편액을 직접 썼다.
[주-D002] 오공(吳公):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권14 〈발수운정첩(跋水雲亭帖)〉에 의거하면, 오대익(吳大益, 1729~1803)이다.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경삼(景參), 호는 운암(雲巖)이다. 1774년(영조50) 증광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라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작품으로 〈이요루기(二樂樓記)〉와 〈운선구곡가(雲仙九曲歌)〉가 전한다.
[주-D003] 구곡(九曲):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을 흐르는 남조천을 따라 펼쳐지는 9곳의 경승지로, 운선구곡(雲仙九曲) 또는 운암구곡(雲岩九曲)이라 한다. 제1곡에서 제9곡까지 차례대로 대은담(大隱潭), 황정동(黃庭洞), 수운정(水雲亭), 연단굴(鍊丹窟), 도광벽(道光壁), 사선대(四仙臺), 사인암(舍人巖), 도화담(桃花潭), 운선동(雲仙洞)을 말한다. 《입재집》 권3에 〈차운암오시랑기증운, 병보기구곡십절봉정(次雲巖吳侍郞寄贈韻, 並步其九曲十絶奉呈)〉에서 이 구곡을 시로 읊었다.
[주-D004] 무이도가(武夷櫂歌):
주자가 복건성(福建省) 숭안현(崇安縣) 남쪽에 있는 무이산(武夷山)에 정사(精舍)를 짓고 여기에 지내면서 학문을 강론했는데 무이산 구곡(九曲)의 경치를 따라 서곡을 포함하여 매 곡마다 시를 지어 7언 절구(絶句) 10수를 남긴 것을 말한다.
[주-D005] 해좌(海左) 정공(丁公):
정범조(丁範祖, 1723~1801)로,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법세(法世), 호는 해좌,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저서에 《해좌집》이 있다.
[주-D006] 광악(光岳):
삼광(三光) 오악(五岳)을 말한다. 광(光)은 해, 달, 별을 가리키고, 악(岳)은 태산(泰山), 숭산(嵩山), 형산(衡山), 화산(華山), 항산(恒山)을 가리키는데, 곧 천지(天地)와 같은 말이다.
[주-D007] 옥색금성(玉色金聲):
금성옥색(金聲玉色)이라고도 하며, 인품이 맑고 지조가 곧음을 형용한 말이다. 《상서대전(尙書大傳)》에 보인다. 주희(朱熹)의 〈정명도화상찬(程明道畫像贊)〉에 “양기가 만물을 기르듯 하고 산처럼 우뚝 섰으며, 옥빛처럼 아름답고 종소리처럼 쟁쟁했다.[揚休山立, 玉色金聲.]”라고 하였다.
[주-D008] 보불문장(黼黻文章):
임금이 예복으로 입는 곤룡포에 놓은 여러 가지 모양의 수이다. 보는 흰 빛깔과 검은 빛깔로 자루 없는 도끼 모양을, 불은 검은 빛깔과 푸른 빛깔로 아(亞) 자 모양을, 문은 푸른 빛깔과 붉은 빛깔로, 장은 붉은 빛깔과 흰 빛깔로 수놓은 것이다.
[주-D009] 이정(彝鼎):
종묘(宗廟) 제사에 쓰는 제기(祭器)로 이는 술잔이고 정은 솥이다. 옛날에는 큰 공을 세우면 그 일을 잔이나 솥에 새겨 길이 나타내었다. 구양수(歐陽脩)의 〈화금당기(畫錦堂記)〉에 ‘이정에 새기고 현가(絃歌)에 올렸다.’라는 말이 있다.
[주-D010] 뒷 …… 것:
원문은 ‘갱장(羹墻)’으로, 《후한서(後漢書)》 〈이고열전(李固列傳)〉에, “순(舜)이 요(堯)를 사모하여, 앉아 있을 적에는 요 임금을 담에 뵙는 듯하고, 밥 먹을 적에는 요 임금을 국에서 뵙는 듯했다.”라는 데서 유래하였다.
[주-D011] 못에 임하는 흥취:
서법(書法)을 배워 익히거나 글씨를 쓰는 것을 말한다. 《진서(晉書)》 〈장지열전(張芝列傳)〉에 “한(漢)나라가 일어난 뒤로 초서(草書)가 있게 되었다.……홍농(弘農) 장백영(張伯英)으로 말미암아 더욱 공교해졌다. 장백영은 집 안에 있는 모든 의복에 반드시 글씨를 쓴 뒤 빨았으며, 못가에서 글씨를 익혀서 못물이 모두 검어졌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김숭호 (역) | 2019